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25:19-26 야곱의 탄생과 예정-⑥

예림의집 2012. 10. 2. 06:44

25:19-26 야곱의 탄생과 예정-⑥

 

  하지마 야곱과 에서간의 역전 현상과 창세기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비슷한 경우들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오직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만 출생 전에 이들의 역전현상에 대한 신탁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경우들과 달리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는 이처럼 미리 주어진 신탁의 내용, 즉 하나님의 예정을 과연 가족의 각 구성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가 이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 본문 이후에 나오는 야곱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 중요한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진행된다.

  참고로 창세기의 반복되는 이야기들의 존재가 흥미로운 점은 이 반복되는 사건들이 각 세대나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변용된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문제와 두 형제 중이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공유했다. 이 중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전자의 문제가 그의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삭도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거의 비슷한 기간동안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를 겪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는 후자의 문제, 즉 그의 두 아들 중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이 선택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창세기에서 각 사람은 서로 동일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각 사람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들를 대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풀어간다. 이런 면에서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현실의 우리도 각 사람의 성정에 따라,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동일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풀어나간다. 아마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가장 큰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낼 만큼 충분히 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5:24에서 드디어 해산하는 날이 되었을 때 리브가는 신탁의 말씀대로 쌍둥이를 낳는다. 첫째인 에서에 대해서 내레이터는 "불고 전신이 털옷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인 야곱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이 자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본문의 해석자들은 전통적으로 에서의 외모에 대한 내레이터의 묘사를 에서의 성품에 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에 대해 온갖 안 좋은 해석들을 덧붙인다. 예를 들어 그는 "위선적이고, 여자를 밝히고, 우상을 섬기는 선턴적으로 사악한 인물"이며,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화를 잘 낼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영적인 유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가 미워하고 싶은 인물로서... 교회와 주일학교에서 전형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의 모형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된다.

  물론 다음 문단인 25:27-34등을 보면 에서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등장인물의 묘사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면서 말했듯이 등장인물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반드시 등장인물의 성품에 대한 암시적인 단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서의 탄생시의 외모에 대한 내레이터의 정보는 그냥 말 그대로 에서의 객관적인 실제 모습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내레이터가 굳이 이 정보를 제공한 이유는 아마 27장의 속임수 이야기에서 에서의 털옷 같은 피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의 외모의 어떤 측면을 빌미로 그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비록 그가 다음 단락에서 장자권과 관련하여 그다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도 이 점은 바귀지 않는다. 우리가 에서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는 태도를 잠깐 내려 놓고 보면 에서에게서 좋은 모습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례 33장에서 에서와 야곱이 20년 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에서는 야곱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야곱은 에서와의 화해 이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두려움을 접지 않는 반면에 에서는 자기 동새오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편향된 시각에서 발전된 창세기 해석의 역사는 에서에게 가해진 부당한 평가를 최대한 강화시켜 왔으며, 이 평가를 지지하는 증거들을 계속적으로 보강해 왔다. 일례로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았다"는 그에 대한 묘사는 고대 근동의 유명한 문헌인 길가메쉬 서사시의 엔키두라는 야성적이고 비문명화된 인물과 연결지어졌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에서처럼 엔키두 역시 "온 몸이 털로 덮여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져 많은 주석가들은 붉은 빛이 도는 피부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고대 근동이나 서구 기독교 문화권의 부정적인 인식들을 되풀이하여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