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경의 문제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자기들의 사용을 위해 채용하였을 때, 과연 이 구약 가운데 무슨 책들이 포함될 것인지에 관하여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날까지도 신자들은 소위 "외경(Apocrypha)"이라 불리는 일련의 책들을 수용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외경은 그 분류의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게 열둘 내지 열 다섯 권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로마 카토릭은 이들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대부분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밖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 외경을 경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보다 강했다. 70인역(Septuagint)이라 불리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팡이 특히 외경에 속한 일부 책들을 널리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팔레스타인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외경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초대 기독교인들도 외경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팔레스타인 근처의 신자들은 이 지역의 유대인들과 비슷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제국의 보다 서부, 유명한 히포(Hippo)의 감독 어거스틴(Augustine)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자들은 보통 외경을 성경 속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 중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초대 동부 기독교인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외경들을 정경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 가톨릭 교회는 외경을 받아들였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모습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구약 이상을 자기들의 시앙의 표준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지상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동안에는 육신이 되신 말씀 자체를 갖고 잇었으며, 그의 승천 후에는 살아있는 사도들의 존재가 있었다. 초대 기독교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구두로 된 것이나, 서면으로 기록된 것을 막론하고, 사도들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진정한 뜻 자체의 전달로 간주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아직 살아있었던 당시에 회중들은 이들의 편지를 낭독하였다. 이들 서신들의 일부는 아마도 구약의 특정 부분이나 설교들과 함께 공중 예배시 낭독되기 위해 씌어진 것이 분명하다.
교회들은 또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도 함께 채용하였다. 최초의 복음서들은 비록 A.D 60 혹은 70년 경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의 일부는 이미 글로써 교회들에게 나타나 통용되고 있었다. 누가(Luke)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이러한 여러 기록과 서신들 가운데 과연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27권의 책들이 신약의 성경으로 특별하게 구별되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이것들을 단지 중요하다거나, 혹은 권위있는 기록이라는 범위를 뛰어넘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받게 되었는가? 다시 말해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정경 속에 포함되었는가? 이러한 과정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몇몇은 교회 생활의 발전에 따른 내부적인 요소들이었으며, 다른 몇몇은 역사적 사건들과 이교도들의 영향으로부터 발생한 외부적인 것들이었다.
첫째로, 성경들, 즉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스스로 이를 자증하는 특질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분명하게 외부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능력을 인간들의 생애 위에 행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젊은 시절의 유스티누스 마터(Justin Martyr)는 여러 철학들을 섭렵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을 모두 연구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마도 에베소의 한 해변가에 앉아 있다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대화 중에 이 낯선 이는 유스티누스의 생각의 약점들을 지적해 내고, 유대인 선지자들의 저술들을 공부해 보도록 권유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성경들을 읽는 가운데 스스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였다. 초대 교회의 다른 남녀들 가운데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 되었다. 즉 타티안, 텔로필루스, 힐라리, 빅토리누스, 어거스틴 등이 모두 이러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이 정경화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자증성(自證性)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일부 책들은 이들이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포함되었다. 신약 자체를 보더라도 성경 낭독이 기독교인들의 공동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의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이 편지가 너희들 가운데서 읽힌 후에는 라오디게아인들의 교회에도 읽히도록 하고, 너희들은 대신 라오디게아로 보내지는 편지를 읽도록 하라(골 4:16)."
2세기 중엽, 유스티누스 마터는 기독교 예배에 관한 최초의 묘사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태양의 날(The Day of th Sun)이라 불리는 날에 도시들이나 인근 지방의 신자들은 한 장소에 모인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선지자들의 기록들을 낭독한다. 강독이 끝난 뒤에는 감독이 이처럼 휼륭한 일들을 본받도록 말로 이들을 교훈하고 훈계한다. 그후엔 모두 일어나 함께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유스티누스의 시대에는 복음서를 의미했던, "사도들의 회고록(The Memois of the Apostles)이 기독교 예배의 중심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예베에서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해서, 이 때문에 그 책이 자동적으로 정경 속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가 A.D 96년 경,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낸 일이 있다. 80년 후에도 고린도 교회는 공중예배에서 이 편지를 봉독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멘트의 서신은 종래 정경 속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공중예배에서 낭독된 서신이나 글들은 물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정경 속에 들어갈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셋째로, 그리고 아마도 어떤 기독교의 글들이 신약 성경 가운데 포함되는 여부를 결정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문제의 글이 사도들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였다. 이것이 결국은 책의 위상을 평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글이 사도들에 의해, 혹은 적어도 사도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졌던 이들의 손에 의해 씌어졌는가?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이 차지했던 위치는 다른 이들에 의해선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바가 있었다. 초대 교인들은 그들이 주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존재로서 인정하였다. 예수님 자신께서 "너희들을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자라(마 10:40)"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다음과 같은 로마의 클레멘트의 말은 바로 이러한 당시 신자들의 태도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들을 위한 전도자들로서 세움을 받은 인물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 교회는 바로 이들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졌다(클레멘트 1서 42)." 따라서 사도들에 의해 저술된 복음서나 서신들은 성경으로 인정되기에 매우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역사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으로부터의 생생한 음성 (0) | 2012.09.19 |
---|---|
기독교 서적의 목록 (0) | 2012.09.19 |
지식의 위험 (0) | 2012.09.14 |
[스크랩] 지식의 인간들 (0) | 2012.09.14 |
[스크랩] 가짜 복음들 (0) | 2012.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