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하나님으로부터의 생생한 음성

예림의집 2012. 9. 19. 22:10

하나님으로부터의 생생한 음성

 

  기독교는 항상 성령의 종교였다. 제 4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이끌어 갈 보혜사(Paraclete), 진리의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6:13-15).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언제 어떤 경로와 이유로, 이제 씌어져야 할 책들을 다 씌어졌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보탤 것이 없다고 선포하게 되었을까? 과연 어떻게 터툴리안이 냉소적으로 표현하였듯이 "성령께서 책 속에 쫒겨 들어가 같히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2세기 후반 경 교회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 열광의 시대가 끝나면서 교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교회는 더 이상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점차로 더 많은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있는 동시에 교회와 세상의 구분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교회의 모습이 세속화되고 있었으니, 교회는 이교의 사상과 문화와 철학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십자가에서의 길은 더 이상 거칠고 험한 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의 한 가운데로, A.D. 156년에서 172년 사이에 소아시아의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로서 몬타누스(Montanus)가 나타났다. 그는 보다 고상한 기독교인들의 생활 기준과 엄격한 치리와 교회와 세상 사이의 보다 뚜렷한 구별을 요구하였다. 만약 그가 그 정도에서 멈추었다면 그는 교회를 위해 유익한 존재로서 그의 생애를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갔다. 그와 그를 따랐던 두 명의 여선지자들, 프리스카(Prisca)와 막시밀라(Maximilla)는 성령의 이름으로 각종 예언들을 발하며,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고하였다. 그 자체는 그다지 세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성경시대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마치 그들의 의식과 인격이 마치 일순간 성령에 의해 점유된 듯이, 그리하여 성령께서 그들의 몸을 빌려 말씀을 한다는 듯이, 엑스타시의 상태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는 데 있었다. 몬타누스는 그와 그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드에게 특별히 주신 계시의 도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성령께서 새로운 노래를 연주하는 현악기와 같은 존재라는 식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몬타누스의 초영성(super-spirituality)은 지나친 것이었다.

 

  교회는 이에 대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내에 야기된 무질서였다. 몬타누스가 새로운 영적 활력과 경건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발한 것까지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예언에 대한 반대는 곧 성령에 대항하는 신성모독이라고 몰아 붙였을 때, 이 문제를 놓고 많은 교회들이 분열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몬타니우스가 주장했던 성령의 새로운 시대의 교리는 곧 구약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으며, 예수님에게 그 중심을 두었던 기독교 시대가 종료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 선지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메시지를 이제 뒷배경으로 밀어낼 수 있는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성령의 새로운 음악이 이제 기독교 복음의 주요한 음표들을 압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존재가 그 중심이 아니었다. 몬타누스는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규범적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어떻게 해야 복음을 그 중심에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그의 예배와 교훈과 생활의 중심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 속에 두어야만 했다. 성령을 빙자한 예언을 그대로 방임해 둔다면 이를 이룰 수 없었으니,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사도들의 교훈을 기독교의 기본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도는 사도들의 저작을 구별하여 이것들에게 독특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곧 향후의 모든 신앙과 생활을 바로 이러한 중심적 메시지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교회가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을 신봉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차이는 성령께서 처음에는 인간들로 하여금 교회를 위한 성스런 책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고, 그 후에는 같은 성령께서 이미 기록된 글들을 인간들로 하여금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으로 믿는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신약 성경들의 목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 최초의 것들 중 하나가 A.D. 190년 경의 무라토리 정경 목록(Mratorian Canon)이다. 이 이름은 이 문건을 처음 발견하여 1740년에 출판했던 엘 에이 무라토리(L. A. Muratori)에게서 연유하였다. 이 문서는 그 초두가 훼손되어 있으며, 실제 목록은 누가복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나, 여기 드러나 책들의 명부는 다음과 같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들,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디도서, 디모데 전후서, 유다서, 요한 1, 2서,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서 등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지막 두 권은 공인된 목록에 남아있지 못했다. 그러나 A.D. 190년경 이미 교회 유대인들의 경전과 나란히 기독교 경전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구약의 약속을 신약이 성취시킨다는 확신의 모습니다.

  3세기 초에는 이미 신약 정경이 어느 정도는 성립되어 계속 문제가 되는 책들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제국의 서부에서는 히브리서에 대한 반대가 상당했으며, 동부에서는 계시록이 별로 인기가 없었다. 4세기 초,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여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요한 2서와 3서만이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은 계속하여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의 책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정경의 완전한 목록은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쓴 부활절 편지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북 아프리카의 히포(393)와 카르타고(397)에서 종교회의가 끝난 후에도 이와 같은 목록을 발표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론 기독교 신자들이 정경을 창조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책들에 관한 그들의 결정은 역사의 일부였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들은 이미 교회내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각 책들의 권위를 추인한 것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신약의 형성 모습은 초대 교회의 목표는 다름아닌 사도들의 권위와 교훈에 순종하고자 했던 것임을 보여 준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이들은 기독교의 성격을 항구적으로 결정하였다. 이 신앙은 바로 사도적이었다는 이유때문에 계속하여 보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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