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학
많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중심되는 교리들에 관해 토론하기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연 종교에 관한 사상이나 지식-혹은 신학-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는 의문을 표시하곤 한다. 어느 목회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꽃들은 사랑하지만, 식물학은 싫어한다. 나는 종교를 사랑하지만 신학을 싫어한다." 이처럼 널리 퍼져 있는 태도들은 실상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신학은 매우 지루하기 십상이며, 어떤 경우에는 잔인하기가지 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저질의 신학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결코 무신학, 즉 신학 자체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 대답은 올바른 신학, 혹은 뛰어난 신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성을 허락하셨으며, 이 지성이 그의 놀라운 진리를 알고 밝히는데 제대로 사용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영국의 문인 찰스 윌리엄스가 남긴 말은 진리이다. "인간은 신과 토록하도록 창조되었다(Man was intended to argue with God)." 바로 이것이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학(Theology)이란 단어는 두개의 헬라어의 합성이다. 즉, 데오스(theos), 신이라는 단어와 로고스(logos), 말씀 혹은 지성적 사고라는 단어가 한데 어울린 것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에 관한 합리적 사고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종교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종교란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 믿음에 따라 살고자하는 노력과 생활을 의미한다. 신학이란 우리의 믿음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는 곧 종교에 관한 사고이다.
이러한 사고에 잘못이 있을 때 우리들은 이를 가리켜, 이단 혹은 잘못된 신학이라고 부른다. 이단은 반드시 잘못된 종교라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모든 잘못된 사고처럼 잘못된 종교를 창출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이단들은 본래의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교회를 위한 공헌도 하였다.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교회로 하여금 "올바른 신학"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올바른 신학이란 곧 성경의 계시를 균형잇고 체계적으로 진술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올바른 신학을 가리켜 정통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정통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람들은 매우 민감한 감정적 반응들을 보이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윌리엄 호오던이 말한 바처럼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비 정통이라는 말을 듣는 사실을 못견디게 증오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통성의 존재가, 정치, 종교, 혹은 식사법이든가,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인생의 제일 중요한 선결 조건이 된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상태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위치이다. 정통은 곧 흥미없고, 지루하며, 독창성이 결여된 상태의 대명사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정통이란 전혀 외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주로 다수의 의견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고, 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밝히는 신경들이나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기독교는 정통인 것이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 신학은 고요한 연구실에서 학자의 사색의 결과로 나타난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조들은 실제 교회 생활의 현장에서 직접 일하던 이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정통신학의 모든 기둥들은 그 하나 하나가 기독교의 본질 자체를 변질시키고 그 신앙의 중심적 부분을 파괴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이단들 때문에 놓여졌다.
이처럼 정통은 오류에 대항한 복음의 대결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그 발전이나 형성의 단계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기도교의 교리가 발전했다는 표현은 우리들에게 유일회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굳게 믿는 이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할 사실은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신학이란 계시의 인간적 이해이며, 이를 교훈과 설교를 통해 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속한 이들은 또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표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3세기의 교회는 이처럼 사고 방식이 다른 인종들에게 전파되면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장 주된 것은 유대와 헬라(그리스)의 2대 문화였다. 원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개종한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교 회당에 출석하던 이방인들이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교회 안에는 두개의 서로 대조적인 문화의 배경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두개의 서로 대조되는 세력-유대와 헬라-은 교회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들이었다.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은 한 분이셨다. 그는 오랜 동안 이미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셨다. 이들은 바로 그 분이 또한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깨달은 후에도 그를 계속하여 자기들이 오랜 동안 알았던 대로 자기들의 하나님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그의 개인적 이름인 여호와, 혹은 야웨로서 지칭하였다. 그의 통일성은 위격적인 통일성이었다.
반면 헬라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의 통일성은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그들은 철학적인 명석한 사고를 통하여 하난미에 관한 개념들에 도달하였다. 이는 거의 수학적인 사고의 과정이었다. 물런 헬라파들도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그개로 받아들였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혈솬 속에는 보다 추상적 사고를 요구하는 철학자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역사와 문화가 이 두 집단의 인간들이 사고하고 표현하는데 차이점들을 발생시켰는지 알 수 있다.
처음의 신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미리 약속되었던 구세주라는 용어와 측면에서 개진하였다. 즉, "에수님께서 곧 메시아다(Jesus is th Messich[Christ])"는 표현이 그것이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할 때는 그의 죽음보다도 그의 부활을 더욱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비록 범죄자로서 처형되기는 하였으나 바로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기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예수님 자신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좇아 예수님의 생애와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성취되었던 구약의 예언들을 지적하였다. "바로 이것이 이찍이 예언되었던 사실이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구약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유월절의 어린 양이자, 제2의 아담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이었다. 그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받은 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모퉁이 돌로 사용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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