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황제께서 곧 주님이시다

예림의집 2012. 9. 13. 18:06

황제께서 곧 주님이시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가장 큰 이유는 황제 예배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와 카이사르 사이의 투쟁은 물론 하룻밤 사이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황제 숭배가 제국의 생황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점진적인 과정의 결과였다.

  황제 숭배의 전통은 원래 로마의 통치가 월등하게 뛰어났다는데 기인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면, 공정한 로마의 정의가 함께 그곳에 도달하였다. 주민들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일벙한 법률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던 폭군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 로마의 행정이 시행되면, 도로상의 도둑들이나 강도들이 제거되었고, 바다의 해적들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주민들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안전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로마의 정신에 대해 깊고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로마의 정신으로부터 그 대상을 쉽사리 로마의 여신에게로 옮아갔으며, BC. 2세기 경에는 소 아시아의 곳곳에 로마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상징을 요구한다. 로마의 정신과 로마의 여신이 다시 황제의 모습으로 화하는 것은 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는 로마의 화신이었다. 그 존재 속에 로마의 정신이 거하며, 지구상의 거처를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BC. 29년 소 아시아의 퍼가멈(버가모)에는 실제로 황제의 신성에 바쳐진 신전이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황제들 자신들이 이러한 명예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다. 클라디우스(Cladius, AD. 41-59)는 자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자기의 동류인 인류에게 거침돌이 되기 두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국가의 공식적 이념에 또 다른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국가 통일성의 유지였다. 제국의 영토는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아일랜드 해의 연안들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각종 인종들과 언어들과 종교들과 전통들이 한데 섞여 존재하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들을 함께 묶어 통일시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의 제국이라는 일체감이 이처럼 다양한 주민들 속으로 주입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을 함께 하나로 묶는 데는 종교, 즉 하나의 신앙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황제의 숭배가 편리하게도 이미 가까이 놓여 있었다. 그 어떤 특정 지역의 전통 신앙도 제국 전체의 보편 종교가 될 가능성은 없었으나, 로마만은 우주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결과로 카이사르, 즉 황제의 숭배가 제국 정책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국 각 지방에서 의도적으로 조직되었다. 각 처에 황제의 신성에 헌정된 신전들이 건축되었다.

  점차로 제국민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상치되는 그 어떤 충성심도, 제국 자체에 대한 충성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곧 질서의 혼란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주를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커다란 혼란과 무질서의 제방을 무너뜨리는 행위와 동일한 것이다.

  마지각 한 단계가 남아 있었다. 데키우스(Decius, 249-251) 시대에 황제 숭배는 드디어 공식화되었다. 제국내의 유대인들만을 제외하고 모든 인종과 지역을 막론하고 강제로 황제에게 제사를 드려야만 하게 되었다. 매년 모든 로마시민들은 특정한 날에 황제의 신전에 나아가 그를 위해 한줌의 향을 피우고, "황제가 주님이시다(Caesar is Lord)"고 고백해야만 했다. 그후에 그는 제사를 완료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게 된다. 그후에 그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신에게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종교행위가 공중도덕이나 질서를 해쳐서는 안되었으나, 이는 종교의 자유 자체에 관련된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황제 숭배가 일차적으로 정치적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만약 누구든지 이러한 황제를 위한 의식을 수행하기를 거부하면 그는 자동적으로 반역자나 혁명가로 낙인찍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박에 없었다. 그들은 집회들에서 항상 황제를 위하여 기도했다. 그러나 공적, 사적 모임을 막론하고 황제에게 기도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주화들을 연구했던 학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예배하면서 그에게 드렸던 찬양과 로마 시민들이 당대의 황제들에게 바쳤던 헌사들 사이에 놀란 만한 유사점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만세, 지상의 주님, 무적, 권세, 명예, 축복을 받으신 이여, 위대하신 분, 당신은 왕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에 충분하시도다."

  3세기에 로마를 방문하는 이들은 누구나 의사당에서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데 사용되던 것과 동일한 표현들이, 카타콤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면에서 타협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숭배와 황제의 숭배는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절대로 말할 수 없는 한 가지는 "황제가 주님이시다"는 고백이었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셨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인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편협하고, 완고한 고집쟁이들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은, 스스로 비애국시민들임을 고백하는 자들이었다. 만약 신자들이 단지 한줌의 향을 태우고, "황제가 주님이시다"는 형식적인 주문을 외우기만 했다면 이들은 그 후에 얼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를 실컷 예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서 결단코 타협하지 않으려 하였다. 바로 이것이 로마 정부가 이들을 국가의 기간을 위협하는 일단의 혁명분자들로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로마 정부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 자신들이 이러한 투쟁을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2세기 말, 소 아시아 지방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황제 숭배에 대한 관념이 어떠했는가는 신약성경 중 요한 계시록에 잘 반영되고 있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의 고난의 원인을 두 가지 앞잡이들-요한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두 짐승들-을 통해 성도들을 향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사탄 자신, 거대한 붉은 용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고 있다. 첫번째 짐승은 바다, 혹은 해저이 깊은 계곡에서 출현하였으니, 이는 곧 제국의 권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 짐승은 육지에서 나타난 짐승이니, 이는 곧 황제 숭배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국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한 기독교인들의 방어는 무엇이었겠는가?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신자들은 목숨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어린 양의 보혈과 그들의 증거의 말씀으로" 용을 정복하였노라고..(계12:11)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역사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가짜 복음들  (0) 2012.09.14
신앙과 신학  (0) 2012.09.13
성(性)과 비방  (0) 2012.09.13
[스크랩] 박해의 이유들  (0) 2012.09.13
로마의 정책  (0) 201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