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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해의 이유들

예림의집 2012. 9. 13. 12:26

박해의 이유들

 

  로마사회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이드의 구별되는 생활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들은 다른 이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고 터툴리안은 그의 "변증(Apology)에서 기록하였다.

  신약에서 기독교인들을 묘사하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 바로 하기오스(hagios)라는 말인데 이는 흔히 성도들(saints)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그 어근을 살펴보면 이는 원래 '다르다(different)'는 의미에서 온 것을 알 수 있다. 즉 거룩한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성전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므로 거룩하다. 안식일 역시 보통날과는 달리 거룩하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일반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구별되는 이들이다.

  인간들은 항상 자기들과 다른 이들은 의심이 눈초리로 보아 왔다. 특이한 생활 태도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 말썽없이, 어려움없이 사는 길이다. 따라서 초대 교힌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받아들일 수록 다른 이들로부터 의심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신자는 단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는 것 자체가 무언 중에 이교도들의 생활 모습을 비평하는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물론 신자들이 공개적을 이교도들을 비난하거나, 저주하거나, 의식적으로 스스로가 더 의롭고 우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독교의 신봉하는 윤리 자체가 이교도들의 생활 모습에 대한 비판이 된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생활의 기본 요소요, 다른 이들로부터 끝없는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자들이 이교도의 신들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이다. 헬라인들가ㅗ 로마인들은 삶의 모든 측면들을 주관하는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씨를 뿌리고 거두며, 비와 바람과, 강과 화산들을 맡아 제어하고, 출생과 죽음을 담당하는 신들이 각각 달리 존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부정은 이들, 예수의 추종자들을 곧 "인류의 적들"이라고 규정하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적합치 못하다는 흉을 들음이 없이 단지 사회인들 대부분이 추종하는 이들의 신들을 주인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은 모든 식사를 신들을 향한 술과 기도의 제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따를 수 없었다. 이교도들의 대부분 명절들과 사회적인 교제는, 먼저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 후 이들의 신전 경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초청은 특정 신들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형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신자는 이러한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교제의 모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 신자들은 건방지고, 무례하고, 교양없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는 없었다.

  신자들 또한 그 자체로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다른 사회적 모임들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였따. 예를 들어, 검투사들의 혈투는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비인간적이었다. 제국 전체의 원형 경기장에서 로마임들은 단지 보고 즐기기 위하여 노예들과 전쟁포로들을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싸움을 시켰다. 이러한 광경은 매우 유혹적이었따. 어거스틴은 세기 초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친구였던 알리우스는 친구를 위해 함께 경기장에 동행하되 자기는 눈을 감고 그 광경을 보지 않겠따고 약속하였따. 그러나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시작되자 마자 그이 눈은 저절로 떠졌으며, 주위의 관객들보다도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신자들의 생활 태도는 이들의 생계에도 심히 불리하였다. 석공은 이교도 신전의 성벽을 만들 수 없었따. 양복공은 이교도 사제의 제복을 만들 수 없었다. 향을 만드는 자는 이교 의식에 쓸 향불을 만들기를 거부해야 했다. 터툴리안은 신자는 교사까지도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교도 신들의 신화가 담긴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며, 이교의 달력에 따른 종교적 절기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픈 자를 돌보는 것은 별로 문제가 없는 단순한 자비의 사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원들은 이교의 신 아이스쿨라피스의 수호 아래 있다고 간주되고 있었으며, 병든 친구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 흔히 이교의 사제가 신에게 주문을 외우며 통로를 지나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선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야만 할 형편이었다. 이는 또한 그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에게 인간의 생명 자체에 관하여 혁명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갖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여자, 어린이, 노예, 성생활 등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었다. 노예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주인의 명령에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약 주인을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유기되거나, 혹은 짐승처럼 죽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노예를 소유했던 일부 신자들은 이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대했으며,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다른 이들과 동일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하였다. 노예 출신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 칼리스투스가 로마 교회 감독의 위치까지 올랐던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유아들에게도 신자들은 동일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이교도 이웃들과는 달리 낳은 아기들을 어떤 이유로든 기르기 싫거나 기를 수 없다고 해서, 숲에다 버려 짐승들이나 강도들이 가져가거나, 그냥 죽도록 할 수 없었다. 만약 신자인 여자가 이교도와 결혼하여 여아를 낳았는데, 남편은 "야, 갖다가 버려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는 이를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생명에의 외경심은 자연스럽게 성과 결혼 생활에도 적용되었다. 현대인들은 흔히 성과 결혼의 성결성에 관한 교회의 의식이 고루하다고 비난하곤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말기에는 이러한 비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이교도 사회는 그 방종한 생활 양식으로 말미암아 거의 인종적 멸종의 직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들에게 또 다른 길,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육체는 성령의 전이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고대 세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정죄했으며, 결혼의 거룩성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처럼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인들을 향한 증오는 로마에서 발생했던 최초의 박해를 잘 설명해 준다. 64년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로마 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불은 무려 6주야나 계속 되었다. 도시으 반이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의 황제에 대한 증오가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더.

  자신으로부터 이러한 증오의 표적들을 돌리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였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으나 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잡혀서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야수들의 가죽에 꿰메어졌다. 그리고는 그들 위에 큰 개들을 풀어 놓았다. 희생자들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어떤 여자들은 미친 황소들에게 매어 달아 끌고 다니다 죽게 하였다. 밤이 오면 신자들을 네로의 정원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기독교인들을 미워했던 시민들은 이 모습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으며, 네로는 병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이 모습을 빠짐없이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이 때의 박해때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 시에서 순교한 것으로 봉니다. 일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스스로 원하여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그의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 1, 2세기에 있어서 이러한 유혈극이 발생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자들은 평화스럽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치 데모클레스의 칼처럼 박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그들의 머리위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악의에 찬 정보원이나, 폭도들의 흥분이나, 법을 문자 그대로 집행하기로 마음 먹은 총독의 존재만 있으면 폭풍이 일기 마련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 신앙을 가진 자체로 징벌의 대상이 된다는 법률은 엄연히 살아 있었다. 터툴리안은 기록하였다. "공중의 증오는 단지 한 가지만을 요구한다. 범죄 혐의의 수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고백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출처 : 예림의집
글쓴이 : 김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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