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복음 전파의 원인들

예림의집 2012. 9. 10. 17:34

복음 전파의 원인들

 

   과연 기독교 신앙은 왜 이처럼 놀라운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을까? 경건 한 신자들은 물론 복음의 위력을 우선 강조할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복음은 쉽게,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운동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항상 주장해 왔다. 하나님은 초대 교회의 증인들과 함께 동행하셨다. 교회의 확장에는 분명 신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하난미은 인간들의 심정과 인간들의 손을 통하여 역사하시므로, 과연 어떠한 인간적 요인들이 복음의 확장에 기여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역시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인간의 동기라는 것은 항상 순수하지만은 않은 신비스러운 거시다. 2세기 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아유로 그리스도를 찾았다. 우정을 통하여, 부도덕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신비스런 집단에 관한 호기심, 순교자들의 모습 등등이 모두 당시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요인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몇가지 이유들이 보다 뚜렷하게 드라나고 있다.

 

  첫째, 명백한 것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이 불타는 확신에 잡혀 살았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침입해 들어 오셨으며, 신자들은 이 위대한 소식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인 능려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인간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구원의 소식을 자들만이 도점해서는 안된되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순교를 포함한 각종 방해물에도 굴하지 않던, 흔들리지 않던 확신이 교회성장의 사건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둘째, 기독교의 복음은 당시 인간들이 널리 느끼고 있었던 내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예를 들어 고대 스토아 철학은, 인간들이 획득하고 보존할 수 없는 일체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 곧 행복을 이루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외부 세계의 무질서와 육체의 질병 앞에서, 자기 자신의 속으로 침잠하여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스토아적 영혼은 감정에 일체 동요됨이 없이 인생의 폭풍 속에서 자랑스럽게 우뚝 서 있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스토아 철학의 윤리가 자기들과 상당히 비슷한 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개념을 또한 소유하고 있었다. 인간 개인들의 자존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만이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복리뿐만 아니라, 눈기을 밖으로 돌려 이웃들의 필요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많은 이들은 스토아 학파가 추구한 목표를 기독교가 성취했음을 알게 되었다.

 

  셋째로는, 기독교적 사라의 구체적 표현이 아마도 기독교의 성공을 가져온 가장 강력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터튤리안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교도들 까지도 "보라,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를!"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러한 감탄은 결코 놀리는 말이 아닌 진정한 감탄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또한 감옥에 같힌 자들, 유배 당하여 광산에서 노역하는 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또한 전쟁, 기근, 지진 속에서 구제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랑의 사역이 있었으니, 이는 교회가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장례를 맡아 치러 주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라도 인간다운 장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북 아프리카 출신의 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 c. 240-320)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들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야수들에게 던져지거나, 새들에게 먹히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원래 나왔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2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로마와 가르타고의 교회는 자기들의 신자들을 위한 묘지들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로마시의 남쪽 아피안 가도에 소재한 카타쿰바(catacumbas)이다. 그리허여 죽은 자의 시신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던 기독교인들의 마음은 곧 이들을, 로마와 그 주위에서 매장지로서 사용되었던 카타콤(Caacomb)과 연결되게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자비의 사경이 주위의 이교도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에 가장 철저한 대적이었던 배교자 황제 줄리안(Julian, 332-63)이 남긴 한탄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고 있다. 줄리안은 자기가 원래 생각했던 것처럼 로마의 고대 종교들을 복원시키는 작업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파괴해 버리고, 옛신앙을 복고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사랑의 실현이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는 없었다. "무신론(기독교 신앙을 의미함)은 특히 나그네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므로서 그 세력을 확장시켜 왔다. 또한 그들은 죽은 자들까지도 정성스레 매장한다. 도대체 유대인들 가운데 거지가 된 자들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신을 모르는 갈릴리 당원들은 자기들의 빈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빈자들까지도 돌보는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속한 가난한 자들은 아무데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마지막으로 망흔 경우, 박해가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천 명의 관객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의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순교자(Martyr)"란 원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증인의 모습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로마의 군중들은 잔인한 관경에 익숙해 있었으나, 그렇다고 인간 본연이 동정심이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순교자들의 의연한 태도, 특히 남자들 이상으로 용기있게 죽어 갔던 젊은 여성들의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은 당연하다. 신자들은 고통 중에서도 기품을 지켰으며, 원수들에게도 예의를 잃지않았고, 고난이야말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으ㅗ 들어갈 수 있는 길로서 생가하여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실들을 수 많은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 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개종과 회심의 결단을 내린 이교도들이 생겼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계속 성장해 갔고, 그들의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하거나 억누룰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이를 정면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카타콤으로부터 궁정으로 옮겨가기 이전의 이 시기, 놀라운 확장의 모습을 보였던 이 시기는, 결국 기독교는 모든 인류를 예수 그리스 안의 살아있는 신앙으로 인도할 때만이 진정한 으미에서 가톨릭(보편적)이 될 수 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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