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사회적 영향
초대 기독교인들의 전 우주적 비전은 지역적 확장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이 미친 사회적 영향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처음 3세기 동안 신자들의 대부분은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노예들, 여자들, 군인들, 상인들- 이었다. 아마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가 인구의 대부분이 이러한 계층에 속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노골적인 기독교 반대자였던 켈수스(Celsus)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누구든 양식이 있고, 지혜롭고, 판단력이 있는 자들은 우리에게서 멀리 물러가라고 기독교인들은 소리지른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가치없고, 멸시받아 마땅한 인간들, 천치들, 노예들, 가난한 여자들, 어린 아이들을 호리려는데 있다... 오직 이러한 인간들만이 그들에게 속아 믿음을 갖게 된다."
아마 켈수스의 관찰은 일말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돌본 것은 물론 교회의 공로였다. 그러나 2세기 말경에는 이미 이 새로운 신앙이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잇는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로 변모하고 있었다.
켈수스와 같은 비판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몇몇 기독교 저술가들이 이교도들의 비방과 헛소문에 응답하기 위해 붓을 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들을 가리켜 "변증가(Apologist)" 들이라 부른다. 이 변증이라는 단어는 원래 법정에서 변론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워드 가스크 교수에 의하면, 이들 변증가들의 저술 부분은 황제들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으나, 실제 의도된 독자들은 당시의 학식있던 일반 지식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기독교의 적수들의 공격에 응답하고, 이교 신아으이 약점들을 지적해냄으로써, 기도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여론을 변화시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켜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티데스, 유스티누스 마터, 그의 제자였던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디오크네투스 성의 무명 저자, 소 아시아 사르디스 감독이었던 멜리토 등이 모두 자기들의 재능과 영적 은사들을 바로 이 방면에 사용하였던 인물들이다.
가스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2세기 말경, 고올 지방에 자리잡은 리용의 감독 이레내우스는 그 지역의 이단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다섯권의 중요한 책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도적 설교의 증거(Proof of the Apostolic Preaching)라는 저술도 남겼다. 그의 신학은 성경과 교회의 교리들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교회를 위하여 안정감있고 긍정적인 옇야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이 가져다주는 전 우주적 의미에 관해 기술함으로써, 그 후 어거스틴 등 기독교 저술가들의 기독교적 역사 해석의 길을 닦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지적 거인들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터툴리안(Tertullian)은 AD. 150년 경, 카르타고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기도교로 귀의한 직후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붓을 들기 시작했다. 그가 헬라어로 쓴 저술들은 이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31개의 저술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터툴리안의 변증(Apology)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법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나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단자들을 비판했으며, 주기도문과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신학의 발전을 도왔다. 바로 그가 최초로 삼위일체(Trinity)라는 라틴어 단어를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지적 우수성과 문학적 소양은 그를 당대의 최고의 저술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터툴리안이 카르타고에서 활략하고 있을 때, 동부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또 하나의 기독교 신앙의 학문적 중심지로 등장하고 있었다. AD. 185년경 이곳에서는 회심한 스토아 철학자 판타이누스(Pantaenus)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인도까지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매우 유능한 사색가였다. 그의 제자 클레멘트(Clement)는 2세기 말 경,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동 학파는 그 중요성을 더해가며,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불신자들의 전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3세기 경 기독교회는 제국 내의 또 다른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서로 다른 교회들 사이의 계속적인 왕래, 감독들의 회집, 제국 전역에 걸처 사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서신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지도자드로가 서로들 사이에 보여 주었던 충성심 등은 황제들까지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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