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북부 아프리카

예림의집 2012. 9. 10. 16:37

북부 아프리카

 

  지중해를 남쪽으로 건너면 우리는 북 아프리카에 닿는다. 이곳에서도 교회의 성장은 현재의 튀니지아와 알제리아 지방을 석권하였던 카르타고를 주 무대로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감독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모든 도시들과 거의 모든 촌락마다 감독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 작가들, 순교자들, 감독들은 로마화된 지역 출신들이다. 실제로 북부 아프리카 기독 공동체가 역사상 최초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배출시켰다. 이는 즉 이들이 보다 상류 계급에 속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일찍이 페니키아 인들이 정착했던 바 퓨닉어 사용권, 그리고, 시골과 광야 주민들의 베르베르어 사용권 지역에서는 곧 인종 및 언어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3세기의 극심한 박해시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곧 교회 내에 여러 난제들을 일으키게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를 동쪽으로 가로 지러 가면 우리들은 이집트 바로 서쪽의 구레네(Cyrene)에 닿게 된다. 이 지역은 시냑성서에서 4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 골고다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막 15:21). 후에 그의 아들 루푸스(Rufus)를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을 보면, 시몬이 신자가 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롬 16:13). 오순절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에게 감격적인 메시지를 전했던 자리엔 구레네 인들이 다수 있엇다(행 2:10). 이들 중 이루는 후에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행 6:9).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레네 인들이 이스라엘을 초월하여 이방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결정적인 단계에 한 몫을 담당한 것을 볼 수 있다(행 11:20).

  아마 이러한 열심이라면 틀림없이 구레네 지역 자체에도 교회를 건립하였을 것이다. 5세기 경에는 이 지역에서 대 여섯 명의 감독들이 사역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지중해 연안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이다. 그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이 이도시는 BC. 32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문화와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건설되었다. 제국 제 2의 도시로서 이곳에는 상당한 숫자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바울과 동시대인이었던 저명한 철학자 필로(Philo)의 지도를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헬라 철학의 용어로서 해석해 보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이곳의 기독교인들도 같은 문제로 씨름하였다. 우리들은 이곳 소재이 유명한 교리 학교가 헬라 문화에 젖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문제를 깊이 연구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초기 신자들은 요한 마가가 이곳 교회의 설림자라고 주장하였다. 정확한교회 설립의 배경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3, 4세기에 이곳의 교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이처럼, 기독교 초기의 확장 모습을 살펴볼 때,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실은, 제국의 모든 지역 중 3세기 말까지 기독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곳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영향의 정도는 모두 달랐다. 시리아, 소아시아, 북 아프리카와 이집트 등지와 로마와 리용 시들이 특히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골까지는 아직 복음이 미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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