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로의 진출
그러나 초대 기독교 선교의 주류는 안디옥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움직였다. 바울 사도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기독교 선교의 미래 역시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안디옥의 서쪽으로 나아가, 다음으로 주요한 도시는 아마도 에베소일 것이다. 이 항구와 주위의 소 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을 잘 받아 들였다. 이미 바울의 시대 때부터 이 지여의 도시들에 거주하던 헬라어 사용 시민들은 복음의 전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또한 상당히 외직 곳이라 볼 수 있는 소 아시아 북서쪽으 비두니아 지방에서도, 2세기 초 한때 복음이 급속히 성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지역의 총독이 112년 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엇다. 그는 이 가운데서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에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는 "남녀노소,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 지역 전체에 걸쳐 도시와 촌락을 막론하고 ..."기독교인들이 증가하고 잇음을 보고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플리니 총독은 얼마 안가서 이교도 신들의 신전이 완전히 황폐화하지는 않늘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대중 운동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고대 세계의 한적한 지방의 사건으로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반적인 경우는, 자기들 고유의 야만족 언어를 계속 고수하기를 고집하던 주민들이 살고 있던 변두리 지방에서는 복음에 대한 반발이 더욱 강하였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6세기까지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 아시아 내륙 지방의 이교도 세력을 몰아 내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보다 서쪽의 로마 시, 제국의 중심 도시에는 모든 지역들로부터 인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일세기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된 후 성장을 거듭하였다. 독일 신학자 아돌프 하르낙에 의하면 AD. 250년 겨엔 무려 30,000명의 신자들이 로마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빈민 계층 출신이었다.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는 이유는 일세기 이상의 로마의 신자들은 노예들과 빈민들의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상류 계급의 원래 로마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수도에 자리잡은 이 교회는 처음부터, 바울과 베드로가 이곳에서 사역했다는 주장을 등에 업고, 제국 저네에 자리잡은 신지들로부터 존경과 순종을 받게 되었다. 이는 물론 후에 천주교회에서 주장했듯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다른 모든 교회들을 인도할 권리를 주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 수도에 교회가 서자 이는 곧 자연스레 교회 문제의 지도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 대도시의 교회들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 모습이나 같다고 하겠다.
로마 너머의 서쪽과 북쪽에서는 복음의 전파가 보다 더 늦은 속도로 진행되었던 듯하다. 현재 우리가 프랑스(당시 이름은 고올 Caul)라 부르는 남부 지방의 리용에는 2세기 중반에 교회가 존재했던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의 감독 이레내우스가 몇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3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에도 교회와 감독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확실히 남아 있는 증거들은 서부가 동부보다는 교회의 성장이 늦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리튼 지역에 어떤 모습으로 교회가 처음 들어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일부 병사들이나 상인들을 통해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AD. 314년 남부 프랑스의 아를(Arles)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브리튼 지방에서 온 세 감독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외에는 오직 추측과 가설만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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