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 3.

예림의집 2008. 9. 10. 21:35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 3.

 

불을 끄는 둘째 방법은 산소를 차단하는 것이다. 경배에서는 성령의 소멸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형으로 인해 경배한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빌 3:3). 그러나 성령이 몹시 슬퍼하실 수 있다는 점도 명확하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에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성령은 근심하게 하지 않는 몇몇 방법들을 말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 버리고." 이 구절이 함축하는 것은 엄청나다. 우리가 드리는 교회 예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 경배'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이 인도하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분과 동행하고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예배 인도자로서 이것은 과제이며 심지어 두려운 생각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분명히 성령이 거하실 적당한 장소로 내 삶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억누를 수 없이 불타오르는 예배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불을 끄는 셋째 방법은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연료 공급을 중잔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에 산불 광경을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았다면, 당신은 아마 알게 되었을 텐데, 소방수가 산림 전체를 다 태워 버리거나 잘라 내어서, 불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경배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연료이다. 그리고 항상 더 많은 연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 때,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날아온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숨쉬는 모든 호흡이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나게 하며, 매 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잇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우리는 단지 이 계시를 받을 만한 곳에 우리 자신을 계속 두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께 기도하고, 서로 교제를 나누려고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경배의 마음에 연료를 공급한다. 바다, 산 혹은 그저 들판이라도 자연으로 나가 우리 창조주의 경이로움에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것과 같은 다른 방법도 있다. 로마서 1장 20절은 하나님이 자식을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해 모든 이에게 계시하셨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 부부는 지금 메이지(Maisey)라는 아름답고 어린 딸아이가 한 명 있다. 나는 사람들이 아이의 출생을 지켜보고도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지 놀랍다. 메이지가 출생하기 전 9개월은 황홀한 시간이었고,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그분이 창조를 우리에게 무척 많이 말해 준 시간이었다. 초음파 검사는 아이가 성장하고 커 가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이 작은 아이가 아내의 몸 안에서 그 작은 심장으로 살아가고 발차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초기 단계에서 조그마한 손톱까지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잘 만들어질 수 있을까? 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의 경이로움에 놀랐다. 아내의 배에 내 손을 얹어 놓아을 때 느꼈던 모든 작은 움직임과 차는 것은 나에겐 하나님의 계시였다. 이 장을 시작하면서 나는 심지어 우리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해따.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 살면서, 우리 삶에 잘못되는 일들이 있을 때에도 인정하지 않는 '빛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히 경배에는 부서지고 울어야 할 곳이 있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옿은 방식과 그릇된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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