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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 다스리시는 예수님

예림의집 2023. 1. 28. 21:49

인내로 다스리시는 예수님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요한계시록  1장 9-20절).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하면서 서론으로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  지난주는 두 번째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다스리심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강해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질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다스리실까? 지금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걸까? 정말 모든 만물이 그분에게 복종하고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지금 이 모습이 바로 그분의 통치 방식이 맞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 땅에 악한 영들이 마음껏 활개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한 세상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곳이 맞는지 의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미" 오셨고 지금도 "계속" 오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문화가 발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고, 노동자의 권리가 향상되고, 여성과 아동과 소수자가 보호받고, 올바른 법으로 적폐가 청산되고, 도덕적인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에서는 선교와 전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나라 사이에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이 그치며, 세상은 좀 더 인간적이고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모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한 가지입니다. 힘주어 말하건대, 변화는 확실히 일어나고 있고, 이미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께서 이 모든 변화를 주도하실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께서 가져올 변화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부분만을 다루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작게 봐도 너무 작게 본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천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가 오게 하려면 한 걸음 한 걸음 분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걸음걸음마다 방해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도 힘에 겨워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
물론 악한 세력이 단단히 세워 놓은 방벽 틈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방벽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갈라진 틈 사이로 불어오는 공기가 그토록 상쾌하다면, 악한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단면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과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최상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알던 예수님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분이 되고 맙니다. 현재 상황은 누가 봐도 심각할 정도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문제가 없는 지역을 찾아보십시오. 어느 지역은 전쟁이 끝이지 않고, 어느 지역은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끝없는 군비 경쟁에 천문학적인 세금이 들어가고, 한쪽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의 생명이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만든 무기로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는 또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끝 모를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부패한 정치권력과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며 세계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돈과 땅과 명예를 향한 탐욕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가정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여성과 아동과 소수자의 인권이 개선되지 못한 나라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권력 경쟁으로 몸살을 않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단면이라면 그 나라는 얼마나 기괴한 왕국이겠습니까! 아마도 매일같이 왕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결과라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저는 예수님의 인내의 위대함을 말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완전히 통치하시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절은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대로 두시기 때문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 사이의 "아직"이라는 간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절부절못하며 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완전히 통치하지 않으실까? 왜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옳지 못한 것을 옳게 만들지 않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지 않으실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간절히 기다리며 이 험난한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라는 질문은 아주 당연해 보입니다. 이 절박한 질문에 대한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에게는 "인내"가 고루한 덕목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인내의 위대함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최고의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면 인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이 오르신 사랑의 단계 중에 최고의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계시지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해받을 위험까지 감내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강한 인내"를 나약함이나 무관심이나 의지박약으로 간주해 버리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분은 위대한 목적을 위해 인내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십니다. 요한계시록 안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인내를 자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내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온전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결코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지만, 그만큼 선택에 대한 책임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현재라는 상황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모두 인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손을 뻗어 그 능력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온전한 기회를 사용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결국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실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이 땅의 통치권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온전한 기회를 주고자 오늘도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십니다. 주님은 자발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해 온 마음과 의지와 열정이 담긴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강요도 없이 자유로울 때 가장 순수한 사랑이 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인내하시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향한 갈망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 거룩하신 농부는 귀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며 따뜻한 햇볕과 단비와 아침 이슬을 이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인내하시는 기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2절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고 "교회의 머리"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침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는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의 경건한 삶까지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시고, 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가 한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부 역할에 충실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 땅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발걸음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제자라면, 주의 능력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에베소서 3장 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시대의 주님과 현시대의 주님이 다른 분이 아닙니다. 필요한 능력을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2-14절에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체적인 맥락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야 말씀이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 다시 말해 그분을 "믿는" 사람은 성령님과 더불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나아가 더 큰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자녀를 통해 그분의 능력을 충분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일한 방법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주님 앞에서 낮아질수록 주가 주신 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만 달달 외운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도 한 자 한 자 그 의미를 되새기며 진심 어린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앞당길 수 있게 합니다. 나아가 "아직"이라는 글자를 없애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에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이 땅 위에 내려오실 것이고, 그전까지 우리는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미 기회는 박탈되고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내려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고, 주가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새 날이 밝아옵니다.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이 땅에 나타나시면 모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모든 원수는 무너지고, 사도행전 3장 21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하나님의 오랜 계획대로 모든 만물이 회복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님으로 이 땅을 다스리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오래 인내하시며, 마침내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인내하는 삶, 승리하는 삶,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