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인가 긍휼인가?
예수님의 삶을 보면 긍휼을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긍휼은 누군가를 애처롭게 여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육체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만큼 강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진정한 긍휼의 증거는 "그래서"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을 따로 메모해 둔 글입니다. "나는 아들과 자주 스키를 타러 다녔다. 주로 우리는 콜로라도 주로 가서 3-4일간 스키를 즐긴다. 로키산맥에서 스키를 타다 보면 사람들이 넘어져 심하게 나자빠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늘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코로라도 주에 갔을 때
우리는 어느 때처럼 리프트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내 실력을 추월한 10대 아들에게 너무 빨리 내려가지 말고 능력의 범위 안에서 스키를 즐기라고 장황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들이 먼저 산 아래로 내려가서 나를 기다리면 우리가 만나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기로 했다. 마침내 정상에 이르니 악마의 코스와 지옥의 협곡 같은 친숙한 이름의 슬로프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처음 탄 슬로프에서 내가 그 슬로프 명칭에 걸맞은 조심성으로 지그재그로 내려가는 사이 아들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절반쯤 내려갔을까, 내 왼쪽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스키아 폴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아이고 딱해라!' 그는 완전히 뻗어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안타깝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아들?!' 순간, 나는 아들에게 미친 듯이 달려갔다. 가서 보니 쇄골이 부러져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내 반응은 '동정'과 '긍휼'의 치이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쓰러진 사람이 낯선 사람에서 내 아들로 바뀌는 순간, 내 감정은 더 이상 단순한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내 가슴이 찢어졌다. 이런 강한 감정은
육체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줌렌즈의 순간이었다. 이제 그 아이를 돕기 위해서라면 내가 못할 일은 없었다. 그 순간, 아무도 나의 행동을 말릴 수 없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긍휼이었습니다. 신음하는 모든 사람이 그분이 아들이요 딸이었습니다. 긍휼은 우리의 무관심에 딱 맞는 해독제입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은 동정입니까 아니면 긍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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