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대륙②
왜 그리스도인은 내성이 생긴 사람처럼 슬픔 앞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왜 인생의 큰 비극이 닥칠 때 고통스럽지 않은 듯 대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마치 고통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뜻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고통이 만연한테도 기독교에는 이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인 틀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골치 아픈 고통이란 주제가 잘 꾸며진 쇼핑몰이나 대리석 카운터, 정돈이 잘 된 예배당 의자와 어울리지 않기 대문일 것입니다. 목사오 저술가, 교수들도 그저 피하기만 할 뿐 이 주제를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돌보시니 다 괜찮을 거예요." 등과 같은 막연한 위로를 주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깊이는 매우 깊기 때문에 이런 대답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책을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스스로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내려 보라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니은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이 어두움 속에 얼마나 더 묶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들 살고 있는데 왜 저에게만 이런 깊은 고통을 주셨습니까? "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얼마 전 우리 그로브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암으로 고통받은 적이 있는 분은 일어서 주십시오. 결손가정에서 자랐거나 현재 결손가정에 살고 있다면 일어서십시오.
실직 중이거나 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분도 일어서십시오." 1, 2, 3부 예배 모두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모두가 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겨우 두 발로 서서 힘겹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인류의 고통 언어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누구나 고통이 무엇인지 압니다. 성경은 고통의 이야기로 시작해 멸망하는 지구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게 고통이 찾아올 것인가?"라기보다는 "그것이 언제 올 것인가?"입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실수를 저지르고, 누군가와 껄끄러운 관계를 맺고, 나이를 먹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갑니다.
나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하고 명쾌한 해답이 없습니다. 도한 흔히들 하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잠잠히 침묵 속에서, 인생의 어두운 밤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실직했거나 고향을 떠났거나 병으로 고통받거나 반항하는 사춘기 자녀를 두었거나 울음을 삼켜 본 적이 있거나 사랑에 실패했거나 파산당했거나 외롭게 홀로 있어 본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아버지를 잃었거나 결혼에 실패했거나 재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거나 빚더미에 앉아 있거나 꿈과 희망에 대한 조절을 경험해 본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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