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527번째 이야기
은혜를 기억하라!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주민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다면 그날 밤 그 집 마당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머리를 숙여 밤새 앉아있어야 합니다. 비가 와도 움직이지 않고 꼬박 비를 맞으며 은혜 베푼 사람의 고마움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을에서 집단으로 원성을 듣거나 쫓겨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풍습을 통해 내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잠시라도 생각하며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을 잊지 않고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요. 치열한 삶으로 강퍅해진 마음은 받은 도움과 감사를 잊게 합니다.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현재에 감동과 위로를 주며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그 은혜와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
그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결국 궁극적으로 정말로 중요한 것, 유일하게 중요한 것에 대하여 배운 바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천국문에 들어섰을 때, 나비 날개 위에 있는 저의 사랑스러운 안내자로부터 이미 그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3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한 번 더 말로 표현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대는 사랑받고 있으며 소중히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없습니다.” 이 3가지 메시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그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입니다. 딱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어떤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날마다의 사랑, 배우자와 자녀들을 볼 때나 애완동물을 볼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말합니다. 사랑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강력한 형태일 때, 그것은 질투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실들 중의 사실이며, 살아있는 모든 것의 본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진실들 중의 진실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삶 속에서 체화(體化)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통찰이 썩 과학적이지 않다고 하겠지만, 저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저는 그 천국에서 돌아왔기에, 그 무엇도 나로 하여금 다음의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즉, 사랑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유일하게 중요한 최고의 과학적 진실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저의 경험을 들려주고, 임사체험을 해보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난 지도 이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적잖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이븐 알렉산더) 어릴 적 시골에선 서울에 가 본 사람과 안 가 본 사람이 논쟁하면, 안 가 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소설을 뜻하는 "픽션"은 허구(거짓말)라는 말입니다. 비록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쓴 것이 소설이지만, 그러나 소설 중엔 공상(空想) 소설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쓴 것이 ‘공상소설’입니다. 지금은 공상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상소설 또는 공상영화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오늘 나눈 이븐 알렉산더의 간증은 공상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입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하니까요! ![]() |
관계에 작용하는 우상 숭배① 성경에 따르면, 모든 죄의 근원에는 우상 숭배의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첫 조항은 우상 숭배의 조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불순종과 반항은 우상 숭배와 같은 것임을 일러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모든 부도덕과 부정, 정욕, 사욕, 욕심은 우상 숭배와 다름없으므로 이에 대해서 스스로 죽은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보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을 우선시하고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여긴다면, 그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기 우상 숭배에 대한 아주 좋은 저으이가 잇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것을 사람이나 사물, 생각을 통해 채움 받고자 기대하는 것" 예를 들어, 한 남편이 그의 아내가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는 아내를 우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한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도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3장에 언급된 죄들이 우상 숭배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우상 숭배의 영이 광명과 친절로 가장하며 더욱 악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탄이 자신을 천사와 빛의 사자로 가장하는 경우가 많듯이, 사탄적인 우상숭배의 영도 세상적인 사라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실상 사람들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에 속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의 영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우상 숭배의 영은 인간 본질의 가장 첫 시작부터 인간의 관계 속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사탄의 유혹의 핵심은 우상 숭배와 방종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가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무시해 버리고 사탄의 말을 들으며 인간의 의지를 중심에 두도록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이 같은 미끼를 사용해서, 인류의 조상들이 모든 힘과 지혜와 행복의 근원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부터 사탄의 씨앗이 아담과 하와에게 뿌려져 악한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우상 숭배는 하나님과 직접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를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통상적으로 "우상 숭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선사 시대 사람이 큰 돌 덩어리에 조각을 새기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저 구약 시대에만 존재했던 죄 정도로만 여길 뿐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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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요한복음 19장 1-13절).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중 2절의 "자색 옷"의 자색은 존귀와 영광을 나타내는 색으로 왕권을 의미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할 목적으로 왕의 복장인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9절 "관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브라이도리온"으로, 로마 총독의 관저를 가리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무리에게 보이며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에 빌라도는 다시 재판석에 앉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의 갈등(1-9절). 예수님은 심문받는 과정에서 희롱과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빌라도는 에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 유대인들에게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바라는 무리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정도 했으니 그만하자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고 두 차례나 말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그 부하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니을 기필코 죽이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우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뜻에 부응해 어떻게든 예수님의 죄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빌라도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죄를 찾아내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래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흠집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헛될 뿐입니다. 빌라도처럼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예수님의 온전하심만 돋보일 것입니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어디로부터냐"라고 묻습니다. 권한을 주시는 분(10-13절). 사명의 순종하시는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줄 권한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11절, 빌라도의 권한이 "위에서", 즉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우치십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놓아주면 가이사(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왕이라고 하니, 명백한 반역의 증거라는 주장입니다. 이 농성이 빌라도의 마음을 심히 흔들어 놓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정치적 약점을 노려 압박하는 모습이 참으로 간교합니다. 결국 이 말이 빌라도를 움직입니다. 당시 빌라도는 여러 가지 일로 민심을 잃어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불의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십자가 처형의 장본인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신성모독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인기와 정치적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상대방이 우리의 약점을 들어 공격해도 타협해선 안 되는 일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합시다. "죄가 없으심에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작은 비아냥에 분을 참지 못하고, 소소한 이익에 말씀을 외면했던 우리의 부족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신 주님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주님을 높이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고백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전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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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만나는 참된 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활동 무대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 자신을 만나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파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 운명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결정된 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우리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변화 이전에 정체성의 변화가 선행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대면하는 "나"는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잇는 내가 아닙니다. 죄의 노예로 평생 살아가도록 태어난 나도 아닙니다. 평생 다른 사람과 불화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나도 아닙니다. 평생 무의미와 허무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하는 나도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며,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만나는 나는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은 나,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나,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화해한 나,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해 부름 받은 나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있는 용서와 화해, 쉼으로 들어오십시오. 거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 임영수 목사) ![]() |
상처를 받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십시오! 한 학생이 기숙사에서 방을 청소하다가 한 방을 쓰는 친구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으로 일기장을 살짝 들추어 보던 학생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불과 얼마 전의 일기에서 자신에 대한 불만가 비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니, 나는 우리가 몹시 친하다고 생각했고 이 친구도 나름 아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리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도 아주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지 않았는가..!' '이 친구, 겉이 다르고 속이 다른 위선자가 아닌가? 내가 이런 친구를 계속 가깝게 사귀어야 하는가? 앞으로 이 친구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잘 관찰해 보아야 하겠구나!' 그는 오후 내내 불쾌한 기분으로 지냅니다. 저녁에 그 친구가 기숙사에 들어오고 그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지만, 그는 개운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짢은 기색에 친구가 묻습니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픈데라도 있어?" 그는 대답합니다. "아니, 괜찮아.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는 생각합니다. '위선자 같으니라고, 앞으로 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거야!' 그는 그날 이후 그와 거리를 가지고 생활합니다. 두 살마의 사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게 됩니다. 과연 이 학생의 생각과 판단은 옳았을까요? 그가 친구의 일기장을 보고, 그 내용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었을까요?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고, 또 상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 청년은 자기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그 자신은 과연 비난받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완벽한 존재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둘째, 그 친구는 자신을 절대로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는 어떤 의무라도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셋째, 자신은 그 친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생각했던 적이 과연 한 번도 없었을까요? 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을까요?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비판하는 것은 괜찮고 남이 내게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사고방식은,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비난받을 일, 비난하는 일,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계속..) ![]() |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를 거절하도록.. 우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 위에 머물러 있던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영생이 있다고 선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 주님을 따르려는 결단을 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버렸는지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그들은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버림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제자가 되고자 주님을 따를 때, 그들의 버림은 세상에서의 행복과 쾌락을 포기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간구한 우리의 기도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라도 주님을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자기를 버리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버림을 우리의 것으로 삼게 하시옵소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고 하신 주님의 자기 버리심을 우리도 따르게 하시옵소서.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버리라"라는 말씀이 복음으로 들려지게 하시옵소서. 주님과 복음 때문에 버림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에 대한 버림이 예수님을 주로 받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모두 버리게 하시옵소서. 버림을 아까워한다거나 버림에 머뭇거리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니, 버리지 않고 주님을 갖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계속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고, 부자가 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짐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런 것들에 진리이신 예수님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미 버린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버린 것이 배와 그물과 부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버린 것의 목록을 갖게 하시옵소서. 버렸다고 하면서도 뒤로 감추어둔 것은 없는지, 만일 버려야 하는 데 버리지 못한 것들이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버림의 은혜를 우리 또한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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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수업을 통하여..! 야곱이 소유한 축복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험한 광야 세월에서 훈련을 통해 이루어져 갔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거치며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음을 우리는 그의 시편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회복시키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광야 길을 걸어 당신을 대면하도록 하셨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귀로 알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난이라는 광야를 통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체험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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