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가정교회를 말하다

초기 성도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②​

예림의집 2021. 10. 13. 12:46

초기 성도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②

이처럼 성전 뜰이나 회당 같은 공공장소는 복음 증거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나, 교회 집회를 위해 집에서 갖는 모임과는 대척점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공공장소에서의 모임은 엄밀하게 교회 모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전이나 회당 같은 종교 건물에 대한 애착은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전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만이 공유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신성한 종교 건물의 역할은 종식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 21-24절에서 예언하신 바이며 순교자 스데반도 선포했던 내용입니다.

이제 이 특별하고도 살아있는 신앙은 더 이상 종교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인 공동체, 특별히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가정 및 공동체에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 모임의 환경적 요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들은 가정에 모였으며, 가정에 모여야만 했을까요? 주로 가정에서 모인 이러한 초기 교회의 형태는 특별한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명 수행 방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몰아쳤던 박해와 가난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어쩌면 초기의 제자들은 이 가정교회 형태가 교회의 성장 가정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질 일시적인 한 단계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와 재정이 있다면, 그들 역시 특별한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이런 것들이 가정 교회 운동을 시작하게 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쉽게 말해서 개척 초기부터 건물을 소유하기 어려우니 일시적으로 가정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다룰 만합니다. 첫째, 1세기 교회가 조직적이고도 심각한 박해를 끊임없이 받았으므로 즉,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비밀리에 가정에서 모여야 했다는 생각은 매우 그럴듯하긴 해도 정확하지 않은 추론입니다.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인정받는 역사 연구에 따르면, 그 시기에 발생한 조직적이고 심각한 박해는 대개는 산발적이고 국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네 차례 있긴 했습니다. 주후 35년 경 스데반의 순교 후 다소의 바울이 주도로 집집마다 다니며 그리스도인을 수색했던 예루살렘 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49년에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대대적으로 추방한 사건입니다. 또한, 주후 64년에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의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후 90년대 중반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박해 외에 신약성경에 기술된 대부분의 박해는 교회 전반에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흥분한 폭도들에 의해 한 지역에 국한해 발생했으며, 대부분 특정 개인(즉 베드로, 요한, 스데반, 바울 등)에게 가해진 사건입니다.

그 외 다른 시기에는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둘째, 신자들이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흔히 가난이 거론됩니다. 조직적인 박해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비슷한 가난 요인도 정확하지 않은 추론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같이 물질적 도움이 필요했던 교회와 개인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위치와 권세와 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