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11번째 이야기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세상에 한 발을 디디고 있는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명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죄를 경계하시면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판단 받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판단하는 사람을 그 판단의 흉악한 결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판단이 가져다주는 크나큰 영적 해악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판단이라도, 판단하는 순간 마음속에 상처가 생기고 마음이 단단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
살아남기 위하여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오늘은 103세 현역 일본 의사의 건강습관을 소개합니다. "하나, 마음 건강이 곧 몸 건강이다. 둘, 지나치게 몸을 아끼지 않는다. 셋, 여전히 젊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넷, 잘 웃는다. 다섯, 스트레스도 도움이 된다. 여섯, 식사를 적당히 한다. 일곱, 젊은이들처럼 스마트폰 메신저를 즐긴다." "설마..!"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고도, 저는 제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웬만큼 무리를 해도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거뜬해지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불도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몸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심장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간, 저는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넘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남들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호흡이, 저에게는 값비싼 대가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후에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하여 말씀을 붙들게 되었고, 주님은 그 말씀 속에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권이 오직 주님 손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다음, 세상 명예와 성공을 따라가는 삶에서 돌이켰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영혼을 섬기는 인생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후, 저는 잠언 31장 31절의 말씀,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를 기초로 어려운 이웃과 영혼들을 섬기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회사는 미국 동부의 건축설계회사들 중에서 그 능력과 수준을 인정받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기업이 되었습니다. 모두 은혜입니다.(하형록)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자신의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가 밝혔듯이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뿐"일 겁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항상 "인생(人生)"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거듭 물어보고,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 답입니다! ![]() |
기독교의 핵심 진리② 역설, 신비, 모순 "기독교는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합리성은 정시적 혼돈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혼동"에 기반을 주며 모든 질서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는 상충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성경 속에 있는 많은 역설과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합리주의 공격에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역설은 자기모순적이고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을 말합니다. 또한 신비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비밀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해받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설과 신비와 모순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셋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알기 위해 애쓸 때에는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계시합니다. 이 계시를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인격이자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삼위일체), 혹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지신 분(그리스도)을 이해할 만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분명하고 틀림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꿰뚫어 보기에는 너무 심오한 진리인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중력의 존재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중력 자체는 이해하지 못하며 또 그것을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된 용어들로 정의 내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충분한 구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본격적으로 "역설"에 관한 설명입니다. 역설은 "두 귀 사이에서 일어나는 근육통"이라고 할 만큼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paradox)이라는 말은 "보이다" 또는 "나타나다"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즉 역설은 첫눈에 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음미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고 마태복음 10장 39절의 말씀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말씀은 자가당착인 것처럼 보입니다. 죽는데 어떻게 산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신 메시지는 누구든 어떤 의미에서 목숨을 잃으면 또 다른 의미에서는 목숨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두 가지 다른 의미에서 각각 잃고 얻기 때문에 거기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비슷한 예로 예수님은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입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각각 다른 관계 속에서 그러합니다. "역설"이라는 단어가 "모순"이라는 동의어로 너무 자주 오해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말은 무성일까요? "반(反) 하여 말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법칙에 반(反) 하는 것"이라는 뜻의 "이율배반"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모순이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순의 실체, 곧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순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율배반입니다. 진리를 지으신 분이 모순되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크나큰 모욕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모순은 거짓말하는 자, 진리를 멸시하는 거짓 아비인 사탄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비"입니다. 신비와 모순 사이에는 우리를 혼동에 빠지게 만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우리는 신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순은 어느 때고 이해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두 가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만 신비는 지금의 우리에게 그것을 이해할 만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들을 장래에 하늘나라의 빛으로 밝혀준다고 약속합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볼게 많은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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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만으로 판단하지 말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욥기 4장 1-11절). 오늘 본문부터 욥과 친구들 간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함께 읽은 본문 중 9절의 "콧김"은 하나님의 강한 진노를 비유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합니다. 과거에 욥은 여러 사람을 훈계하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는데, 자신이 고통을 당하니 힘들어하고 놀라서 당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고 정직한 자가 끊어짐이 없으며, 악과 독을 부리면 그대로 거둔다고 훈계합니다. 이는 결과만을 보고 욥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 때분에 지금 벌을 받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욥의 태도에 대한 비판(1-6절). 의인은 번영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법치입니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보상 법칙을 토대로 발언합니다. 엘리바스는 2장 13절, 밤낮 7일을 침묵하며 욥과 함께할 정도로 욥의 고난을 아파하며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3장에서 욥이 고통 가운데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욥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주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2절은 "곤비한 너에게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누가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느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처참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는 욥의 말을 듣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비판의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3절과 4절에서 욥의 과거를 일깨웁니다. 욥은 많은 사람을 지혜로 이끌고 고통받는 자들의 위로와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자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랑하던 "경외함"과 소망으로 삼던 "온전함"으로 돌아오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남의 일은 잘 해결해 주면서 정작 자기 일은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봅시다. 죄 없이 망하는 자는 없다(7-11절). 7절의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말은 엘리바스의 신념에 기초합니다. 즉 "죄 없이 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행위 화복 관계의 일치성"과 연결되는 교리입니다. 죄는 죄를 지은 행위자 그 자신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파종과 수확 비유를 들어 행동과 그에 따르는 결과의 법칙이 자명함을 강조합니다. 또 동물의 왕 사자를 예로 들어 아무리 강한 동물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욥이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 "행위 화복 관계의 일치성"의 렌즈로만 상황을 보면,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역발상으로 "번영을 누리는 사람은 모두 선하다"라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시험과 고난의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본문처럼 하나님의 테스트인 경우입니다. 둘째,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오는 고난과 어려움입니다. 셋째,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자 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모든 고난은 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현재 결과만 보고 그 사람의 선과 악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우리의 모든 일들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섣부른 우리의 판단과 충고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돌아봅니다. 너무 쉽게 해결책을 내놓고, 은연중에 그들을 정죄했던 우리의 악한 모습과 생각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들을 위해 마음 모아 조용히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엘리바스처럼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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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경외심..! 인생은 어릴 때부터 황혼까지 결정을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에게 있어서 결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도 심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만나는 모든 환경 속에서 분명하게 안내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정확히 주목을 받고 중요하게 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우리에게 당신을 경외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지키고 영혼을 하나님께 더욱 견고하게 붙어있게 하는 경외심은 맹목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며 정당한 존경심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 자신 대신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을 이해하고 그분의 성품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이 완전하시고, 능력이 충만하시며,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미래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됩니다. 성공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고, 경배하고, 간구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25편 12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의 빛으로 재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위대함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영이 경배하나이다! 아멘!" 하나님을 경외합시다. 그분의 말씀 앞에 겸허히 순종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 |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서로 대면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찬양과 기도를 하고 말씀을 나누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참된 찬양과 경배를 받아주시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이 방송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게 인도하여 주시고, 끝까지 이 방송을 은혜롭게 여기며 기뻐하며 즐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이 예림의집TV 방송이 주님께서 바라고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허물 많고 연약한 저희를 주님의 강하신 팔로 붙들어 주셔서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방송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며,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며,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지식과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주셔서 주님을 위한 활동의 영역도 더욱 넓힐 수 있게 하시옵소서. 특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저희의 삶을 드려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전심전력하게 하시옵소서. 이 방성을 실시간으로 함께하고, 또 나중에 녹화 방송을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무장하게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방송으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방송을 준비하는 손길 위해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어 언제나 최선과 열정으로 준비하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균형 잡힌 방송을 만들게 하시옵소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가며 수고하는 손길들 위에 우리 주님의 크신 복을 더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이 모임 가운데 늘 함께하실 것을 굳게 믿고 간구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가정교회란 무엇인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교회는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교회도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정교회란 정확히 무엇을 말할까요? 전통적인 교회의 일부분인 "가정 셀모임"과 신약성경이 말하는 가정교회 사이에는 겉으로 볼 때 몇몇 유사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넘어가야 할 차이점이 역시 존재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교회"에 대해 살펴봅시다. 여러 전통적인 교회는 "성당"이라는 건물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진행되는 가톨릭교회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로 볼 때 매우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안에서는 성경공부 모임이나 가정 기도 모임이 하나의 선택사항 정도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일 오전 대예배라고 불리는 예배입니다. 소모임들은 일반적으로 형식이 정해져 있으며 미리 짜여진 일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리더십은 중앙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소모임에는 보통 모교회 지체들이 참여하고, 복음 증거에는 경직된 면이 있습니다. 이런 소모임들은 별도의 관심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모이되, 그렇더라도 이 모임은 교회의 주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바로 소모임을 운영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셀 교회"입니다. 셀교회에서는 전통적인 주일 집회뿐만 아니라 "셀"모임을 동등하게 강조합니다. 셀모임은 일반적으로 복음 증거가 중심이 되고, 보통 1년 안에 두 개의 모임으로 분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셀모임은 사전에 계획되고 준비됩니다. 또한 셀모임은 맨 꼭대기에 담임목사 또는 당회가 있는 전통적인 피라미드 형태이기 때문에, 셀의 권한은 제한적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비해 덜 중앙집권적이고 구성원의 참여도가 높기 때문에, 셀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와 성경적인 가정교회 시스템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형태를 가리켜 소모임으로 된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셀모임과는 다음 네 가지 측면이 다릅니다. 몇몇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가정교회를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면 비교적 정확합니다. 첫째, 가정교회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초기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입니다. "가정교회"라는 단어에는 초기 교회의 삶의 방식과 능력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목격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는 단지 거실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정교회는 교회에서 행하는 실제적인 방식에 대한 거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셀교회에서는 이것을 그저 전통적인 교회 구조와는 다른, 일종의 프로그램 정도로 여기곤 합니다. 둘째, 가정교회는 그 자체로 모든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가정교회는 성찬, 세례, 결혼, 장례, 훈련 실행, 그리고 진로 결정 등에 관해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자비량 사역 리더를 따라 운영되며, 기도와 예배, 성경공부와 토론, 조언 그리고 전도, 섬김과 치유, 음식과 교제가 있는 최고 12 가정으로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셋째, 가정교회 모임은 개방적이고 자발적입니다. 가정교회는 단지 가르치는 은사에만 중점을 두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영적 은사가 발휘되도록 하기 때문에, 사람이 계획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셀모임은 사전에 계획된 일정대로 진행되며 성경공부나 신앙서적 읽기를 중심으로 모임을 이끌어 나갑니다. 하지만 가정교회는 각 가정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며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직 최고의 목표를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것을 위해 유기적으로 운영됩니다. 넷째, 가정교회는 가치적입니다. 가정교회는 유급 성직자나 중앙집권적 교회의 절차 제도를 통해 허가를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결과적으로 가정교회는 이런 자율성 때문에 박해나 성장 그리고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잘못된 신학이나 관행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따라서 가정교회는 건전한 성장을 위해 거미줄처럼 엮인 네트워크로 연결됩니다. 가정교회는 이러한 거대한 수평적 네트워크의 한 부분이면서도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자율성을 계속 유지해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정교회는 소모임 자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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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맛보는 기쁨..! 평생을 죄악 속에 살며 맛보는 모든 기쁨보다, 단 하루 동안 거룩한 삶을 살며 맛보는 기쁨이 훨씬 더 크고 귀합니다! 그 둘은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은밀하고 진지하게 숙고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가십시오. 경솔함이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죄를 향해 달려갈 때, 경건함에서 도망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돌이키기를 거부할 때, 인간이나 귀신이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악행보다 더 악한 짓을 당신 자신의 영혼에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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