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 고든/제자

심령이 가난한 자

예림의집 2021. 7. 13. 21:24

심령이 가난한 자

 

앞에서 말한 의지하는 영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영과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은 독립의 영입니다. 요즈음 이 독립의 영이 갈수록 강해지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필요하지만 독립성이 지나쳐서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독립적일 때가 많아서 문제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비판하고 무시하며 개인적인 일이라고 그분을 철저히 배제하는 태도가 일상화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한순간이라도 무시하시면 순식간에 모든 일이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독립의 영은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인류에게 지배적인 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영은 아침 일찍부터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루는 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당당히 들고 힘차게 걷는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왕처럼 자신만만했습니다. 아이는 짧은 4년의 인생에서 경험한 세상의 분위기를 온전히 이해한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독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타고납니다. 당당함, 자기주장, 자립심, 자신감이 넘치는 이 공격적인 태도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어리석은 무지와 함께 표출되는가 하면 진정한 교양과 지혜, 문화와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학교 교육에서는 이를 더욱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 독립의 영은 인간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여겨지는데, 인간을 지배하는 이 독립성(independence)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인 아이(i)는 곧 "나(I)"와 같습니다. 전염성처럼 퍼진 황금에 대한 열병의 중심에는 이 독립성이 꼭 들어있습니다. 돈은 힘을 주며 힘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으로 힘을 행사하는 사람을 따릅니다. 그들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말씀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7, 18).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3)라고 말씀하신 상황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변의 지배적인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생각이 담긴 이 구절을 읽고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주님이 "영"을 강조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복이 아니라 사람을 통제하는 영이 핵심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의 마지막 단계가 극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극빈자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누군가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보유하신 누군가를 의지하는 철저한 수혜자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극빈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창조주의 손에서 처음 주어져서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이어져왔으며 창조주의 손에 의해 매 순간 유지됩니다. 생명을 얻는 일도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물리적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의 삶 자체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손에 의해 제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과 선함과 성품 등 모든 면에서 지극히 가난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없습니다. 잠시 맡아서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제공해 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능력이나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든 걸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호흡으로 주어지며, 길이 참으시는 창조주의 손이 공급하고 유지시키십니다. 우리는 몸에 걸칠 천 조각 하나, 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는 거지 중에 상거지입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그저 웃음만 나옵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부자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복되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철저히 의지합니다. 그들은 의지하는 삶을 살며 은혜가 풍성하신 공급자의 복된 손길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일부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고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위치에 둡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거울로 우리의 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너무 지나친 말로 들리십니까? 그러나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는 몸에 걸칠 천 조각 하나 없고 하나님의 은행에서 빌린 돈 외에는 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고개를 든 채 거들먹거리며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양 걸어가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는 애처롭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능숙하게 조종하고 있다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태도까지 보입니다. 이런 일이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까지 일어난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교회 안과 밖의 차이가 지극히 실망스러울 정도로 작아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19세기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의 손길을 구하는 참으로 의지하는 삶, 진정한 인간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셨습니다. 당시의 도덕적 분위기에서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이 자신을 증오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온유함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바탕으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계획에 맞는 삶으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보이신 "자기 비움"을 따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예수님이 홀로 걸어가신 그 눈부신 도덕의 길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이자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새롭게 보여주셨는데 예수님의 가장 기본적인 성품은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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