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죽음에이르는7가지죄

정욕의 원인들: 최상 정욕과 바닥 정욕

예림의집 2021. 4. 21. 21:17

정욕의 원인들: 최상 정욕과 바닥 정욕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정욕이 탐식과 함께 육체의 죄이고 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탐식하는 자들 대부분이 즉각 정욕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정욕은 나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나태해지면 정욕으로 그 물꼬가 새 나갈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다윗이 밧세바를 불러들인 사건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마땅히 출전해야 할 전장에 나가는 일을 다른 장수에게 맡기고는 궁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되면서 정욕에 빠집니다. 이 본문을 다루는 많은 주석가들은 심신이 느슨해져 있을 때(즉 나태해질 때), 정욕의 공격을 받으면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삶에 목표가 없으며 무료할 때 정욕에 빠질 위험은 높아집니다. 

에바그리우스 역시, 수도사가 나태해질 때 정욕의 유혹을 받기가 더 쉽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마귀는 수도 생활에 싫증이 나고 해이해져서 그저 시간만 때우는 수도사에게 음란한 상상을 부추기고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생활에 권태가 찾아오고 만족이 없을 때, 또 여가나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지 못할 때 정욕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내적 공허를 채우는 수단이자, 밋밋하고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인 것입니다. 사람이 중년기에 정욕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권태로운 삶을 벗어나게 해 줄 흥분되는 모험과 일탈을 바라는 상태에서 정욕이 일종의 도피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이어즈는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와 바닥으로 내려갈 때 모두 정욕에 취약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우선 사람이 성취를 통해 정점에 이를 때 정욕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교만과 방자함으로 쉽게 유혹받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칩니다. 인생을 파도로 본다면 파도의 고점에 있는 것처럼 삶이 잘 풀릴 때 사람이 정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유혹에 넘어가기도 쉽지만 극복하기도 비교적 용이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때에 비해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에너지가 왕성하게 생성되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지적인 활동이나 노동과 같은 다양한 방면으로 에너지 방향을 돌릴 수 있고, 육체의 욕구를 이성으로 통제하는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어 정욕을 벗어나기도 상대적으로 덜 어렵습니다. 그래서 늙고 영민한 삼촌 악마는 젊은 조카 악마에게 사람을 정욕에 빠뜨리기에는 이때가 최적의 때는 아님을 명심하라고 말합니다.

세이어즈는 이와 반대로 뚜렷한 삶의 목표와 활력이 없을 때, 곧 삶이 파도의 바닥에 있는 상태에 있을 때가 정욕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고 빠져나오기도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마귀는 이런 때를 넘어뜨리기 가장 좋은 기회로 보고 맹렬하게 달려드는데,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철학이 희미해지고 무료한 삶이 지속될 때 자극적인 것을 접하면 쉽게 동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정욕에 한번 이끌리면 그야말로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져 버릴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도 인간이 내적 세계가 황량하고 삶이 냉랭하고 허전할 때 성의 유혹을 훨씬 더 쉽게 받고, 이때가 정상기에 비해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감정은 줄어들지만 정욕과 같은 짜릿한 감정에 빠지기 훨씬 쉬운 때라고 말합니다.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아 술을 마실 때보다, 무료하고 낙이 없어 술을 마실 때 훨씬 깊이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이 경우는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운이 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