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슬픔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편 38:18).
암브로시우스는 슬픔을 영혼의 쓰라림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슬픔에 잠기다"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스가랴 12:10)이라고 한 것처럼 회개는 십자가의 못이 자기들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것처럼 아프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없는 회개는 마치 산고 없이 아기 낳기를 기대하는 여인과 같습니다. 그만큼 진정한 회개는 슬픔을 동반합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참회자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죄지은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복음 7:37-38). 이것이 자신의 죄를 슬퍼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참회자는 자신의 마음을 슬피 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슬픔은 피상적이 아니라 거룩한 고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라고 했고, 또 마음을 찢는다는 뜻으로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요엘서 2:13)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볼기를 친다든가(예레미야 31:19), 가슴을 친다든가(누가복음 18:13), 굵은 베옷을 입는다든가(이사야서 22:12), 머리털을 뜯는 것(스가랴서 9:3) 등은 내면적인 슬픔을 외면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 같은 슬픔이 그리스도를 존귀케 합니다. 아아, 괴로운 영혼에서 구세주는 얼마나 소망스러운 분이십니까! 이처럼 양심의 가책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은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합당하지 못합니다. 상처 입어 피 흘리는 사람에게 의사는 얼마나 반가운 존재입니까?
또한 슬픔은 죄를 몰아냅니다. 그래서 죄는 슬픔을 낳고, 슬픔은 죄를 죽입니다. 또한 거룩한 슬픔은 나쁜 마음을 씻어 내는 세제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흘리는 진액은 나병을 고치는 데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확실히 참회자에게서 떨어지는 눈물은 죄라는 나병을 고치는 데 유효하지 않습니까? 눈물의 짝 소금물이 양심의 벌레를 죽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슬픔은 알찬 위로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 126:5)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회자는 눈물 젖은 파종기를 거쳐서 즐거운 수확기를 맞이합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의 종양을 째어버리는 것이므로 회개 후에는 영혼이 편안해집니다. 한나는 울며 기도하고 난 후 가서 다시는 슬픈 기색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 1:18).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영혼을 괴롭게 하시는 것은 마치 천사가 연못의 물을 동하게 하여(요한복음 5:4) 병 고칠 길을 열어준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이 다 참다운 회개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슬픔과 거짓 슬픔 사이에는 샘에서 나는 단물과 바다에 있는 짠물 사이처럼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고린도후서 7:9) 근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5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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