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이성 교제의 실패와 하나님의 인도
청년 시절, 나는 이성 교제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게 20대 때였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30대 초반을 지나는 시기까지도 그랬습니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데 나는 여전히 싱글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싱글남'이지,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성 교제에 몇 차례 실패한 뒤로, 마음 깊은 곳에 쌓인 두려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라고 확신하고 교제를 시작했는데, 결과는 헤어짐으로 끝났습니다. 이런 경험이 되풀이되자, 내가 붙좇았던 하나님의 인도가 과연 맞는 것이었는지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어렵고 힘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신앙공동체 선배들의 가르침과, 어찌 되었건 성경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나의 믿음이 성경책을 부여안고 씨름하게 했습니다.
이 씨름은 하나님의 뜻에 바탕을 둔 삶의 기준점 잡기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개인적인 적용으로 나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성 교제에 왜 실패했는지 고민하며 찾고 묵상한 성경 말씀에서 나는 하나님의 인도에는 '이별'도 포함된다는 엄청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영화 같은 만남과 로맨틱한 교제에 이은 남부럽지 않은 결혼.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인도 이전에 '내가 바라 오던' 이성 교제와 결혼에 대한 상(像)으로, 하나님의 인도라는 미명하에 감춰 놓은 나의 자기중심적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 인도해서 헤어졌다면, 그게 뭐가 문제인가?'라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편성 가득한 하나님의 뜻과 개별적인 하나님의 인도, 말씀으로 인도를 구하는 삶은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시름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인지, 아니면 저 사람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는 개별적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 두 가지가 삶에 마치는 영향력은 점점 커지지만, 내 경험으로는 개별적 인도보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오래 간절히 기도해도 구체적이고 명료한 답보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 이 여자예요, 아니면 저 여자예요?" 아무리 진지하게 구해도 결코 하나님은 "바로 저 여자"라고 답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평생 사랑할 여자를 간구하는 내게, 하나님은 도리어 "너 나 사랑하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길인가요, 저 길인가요?" 하고 물을 땐 "네 인생의 주인은 누구니?"라는 반문으로 응답하셨고, 난 그럴 때마다 툴툴거렸습니다.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고백 한두 번 했나요? 그냥 어디로 갈지만 알려 주세요." 선택의 순간마다 아무리 물어도 분명한 시그널은 없었고, '내가 네 인생의 가이드란다' 하는 응답만 되돌아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인지 겪어 본 사람은 압니다.
답답할수록, 미궁에 빠질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교제 실패 이후의 낙심되고 절박한 상황에서 특정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무모하게 적용하려는 자아도취식 묵상에 쉽사리 빠질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뒤 둘의 첫 만남,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멋진 고백을 합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세기 2:23). 이 구절에서 뼈와 살에 과도하게 깊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면서, '난 살이 별로 없는 통뼈를 가진 사람이니 살 많은 여자가 내 배우자인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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