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회복하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마가복음 3:1-5).
이 시간에 “능력을 회복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 때 우리 함께 능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능력을 잃으면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과 같이 되고 맙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못 이겨 능력의 비밀을 알려줘 머리카락을 삭도 당하고 능력을 잃고 붙잡혀 눈도 빼임 당하고 매일 경기장에 불려나가 사람들 앞에 놀이거리가 되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20세기 위대한 설교가 중 한 명인 미국의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는 말하기를 “초대 교회는 단순한 조직체나 운동 단체가 아니라 영적 능력 그 자체였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했고, 성령의 권능으로 움직였다.”라고 했습니다. 현대교회가 이 역동성 있는 믿음을 물려받지 못하고 무능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능력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예수 안에서 주신 능력의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여기 한편 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 기독교 초기의 여러 문헌에는 그가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6에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손은 권능의 상징입니다. 언제부터 오른손이 말랐을까요? 그의 손이 마른 상태를 가리키는 헬라어 ‘엑세람메넨’이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그의 손 마른 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보여줍니다. 본래 그는 손이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 믿을 때 이미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막 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지체요 예수님과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은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탄이 만지지도 못할 만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거짓에 속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미 능력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 '나 구원받겠네'가 아니라 '나 구원 얻었네.' '나 성령 받았네 너 성령 받았네 우리 성령 받았네' 가 맞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성령 받는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능력은 바로 이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혹시 능력을 상실했다면 먼저 다시 이 진리로 돌아와 원점에서부터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병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다시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석공은 본래는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오른손이 힘이 빠지고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질병이 온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 병이 들면 영적 능력을 잃게 됩니다. 불신도 의심도 병입니다. 게으름과 나태도 병입니다. 염려와 근심도 병입니다. 미움과 증오도 병입니다. 교만도 욕심도 병입니다. 소리가 약해지고 열심을 잃은 것도 병입니다. 다 영적 기운을 막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떨어지면 어디에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 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약합니까? 죄 가운데 있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면 능력이 약해지게 됩니다.
율법의 송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이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흠을 찾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고소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율법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바로 행하시는 예수님을 고소하려 했습니다.
율법주의나 율법적인 양심이 우리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양심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8-19)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 관리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양심이 너무 예민하면 죄 아닌 것도 죄로 인식하여 정죄에 빠지고 양심이 너무 둔해도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해 또 죄에 빠지게 됩니다. 덧붙여 복음적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적 양심이란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속죄 공로로 사함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라는 끝없는 참소를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어떤 능력도 잃고 맙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처럼 우리 심령을 죽이려는 죽음의 재앙에서 피할 곳은 오직 예수 보혈뿐입니다. '그래도 나는 보혈을 믿는다.'라는 믿음으로 나가세요. 무엇보다 이 보혈의 기초가 잘 높여져야 합니다.
항상 예수를 시인해야 합니다.
3절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왜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회중의 한가운데 서게 하셨을까요? 지금 회당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세력들이 가득한데 공개적으로 그것도 한 가운데 서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믿음 시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 10:32-33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같으면 "일어서라 했다가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 역시 보통 사람 같으면 “이목이 두려우니 고쳐주시려거든 저 편으로 불러 아무도 모르게 고쳐주시지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회중 가운데 섰습니다. 이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적이란 사람들 앞에 하나님 살아계심과 예수님이 우리 구주 이심을 보이시기 위한 목적이 크기 때문에 공개적이어야 할 때는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김익두 목사가 회개하고 변화된 후 전도사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심방 길에 김 전도사는 앉은뱅이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앉은뱅이를 고쳐보겠다고 사람이 없는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업고 가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리고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음이 없었고 도리어 거지에게 미쳤다는 소리만 듣고 급히 도망쳤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김 전도사는 산으로 올라가 금식과 철야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김 전도사는 그 앉은뱅이를 다시 만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공개적이기를 원하십니다. 공개적으로 기도하다 장마가 비가 그치거나 가뭄에 비가 오고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얽매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당시 유대인들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 외에는 안식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들은 주님의 질문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얽매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제도 체면 습관 때문에 믿음이 억압받아서는 안 됩니다.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긴 이갈은 일생 자식이 없었습니다(삼하 6:23). 이처럼 활발한 믿음이 없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받고 능력 행하기 좋은 제도나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5절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말라비틀어진 손이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내밀었더니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교훈은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 남도 살리고 나도 풍족해집니다. 기도로 섬겨보세요. 내 영혼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봉사로 섬겨 보세요. 나에게도 건강과 기쁨이 넘칩니다. 물질로 섬겨 보세요. 주면 또 생기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은사로 섬기고 직분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쓰임 받는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대기하는 자세로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과 능력으로 충만하신 주님은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길 원하십니다. 능력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능력의 복음의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로서 신앙의 병 고치고, 보혈 공로 안에서 평안하고, 주님을 시인하며, 얽매임 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여서 하나님의 오른팔의 권능이 예수님께 나타난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충만히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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