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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맞이한 새해

예림의집 2019. 1. 13. 21:42

아브라함이 맞이한 새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1-5).


이 시간에 “아브라함이 맞이한 새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복을 주신 것처럼 새해 첫 주를 맞이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복된 은혜가 함께 하시기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함께 하시지 않으며 너희 할 대로 해봐라 하시며 두고 보시는 하나님의 노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고 그것을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6:16에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했는데 창 17:1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셨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함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을 암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1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13년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같이 살면서 13년간 말하지 않고 살았다면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13년의 세월 참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옥같이 불행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살아도 도무지 사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와도 마음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여러 가지 일로 중압은 더욱 심해져만 갑니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잘못을 깊이 깨달으며 99세 되던 해 그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고 복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새해를 위해서 우리의 잘못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창 16:2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라함은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여종 하갈로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속히 자식을 낳지 못하자 급한 나머지 사람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삼상 15:23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사람도 말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침묵하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큰 사랑과 큰 복을 받은 자가 세상 말을 더 믿으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말씀 존중이 하나님 존중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신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2.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애착했습니다.

13년간의 아브라함의 잘못은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의 재롱을 낙 삼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도 아니고 메시아 계대도 아닌데도 아브라함을 그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습니다. 아이 사랑과 치다꺼리로 13년을 보내며 날마다 약속하신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애착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멀리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곤경에 처하고 힘이 빠집니다. 물질 명예 권세 쾌락 자식 형통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인류에 이바지할 분야라 할지라도 나의 사명이 아니거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요일 2:15-17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마 10:37-38에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붙들면 하나님도 얻고 세상의 행복도 얻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잃고 세상의 행복도 떠납니다. 바울처럼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을 가장 귀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 18:1에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는데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일종의 야단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왜 인간의 생각으로 행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은 이젠 딴마음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맹세하고 한다는데 왜 너는 나를 믿고 기다리지 못했느냐는 질책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며 생명을 거시고 약속하셨건만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빚졌다고 생명을 거시고 그런 맹약을 하셨을까요? 그건 순전히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여기 쪼갠 짐승은 장차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약속하셨습니다. 갈 4:28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혹시 그걸 모르거나 다른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율법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구원받고 새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된 하나님의 자녀로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을 날마다 들어도 자신에게 믿음으로 적용하는 진리를 모르기에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거룩해지고 신령해지려고 다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거룩해졌다는 진리에 설 때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은혜를 경험해 가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4. 믿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3-5절에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사전에 주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런 약속을 수없이 주셨으니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고 하시니 근심 걱정 다 버리고 날마다 찬송하며 능히 이루실 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13년의 생애 속에서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제까지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살았지 열국의 아버지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요,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불과 1년 만에 약속하신 이삭을 기적적으로 낳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에게만 고귀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나라 수많은 민족의 열방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 복음이 다 들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교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냥 하나님이 주신 이름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새 창조물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다.

아브라함은 개명해 주신 이름대로 불과 짧은 기간이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아브라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실패는 보지 않으시고 성공만 보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롬 4:18-22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처럼 교리 적용을 잘 모르겠다면 그 결과인 이름만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 성도,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왕 같은 제사장, 의인, 상속자 등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이름을 가지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 복음을 이해하고 그 실재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우리의 고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13년의 침묵을 깨시고 드디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간 그동안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침묵의 시간이었다면 새해 첫 주를 맞는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과 화목을 이끌어내신 예수 앞에 나아와 말씀을 존중하고 그 복음을 믿고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찬양하고 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 보시고 모든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육 간의 큰 은혜 가운데 사시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