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의 결과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주님의 터치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맹인, 곧 시각 장애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만진 자마다 눈을 떴습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떴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도 눈을 떴습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떠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떠서 본 가장 놀라운 대상은 그들을 눈뜨게 하신 예수였습니다.
예수가 보이자 그들에게는 보아야 할 다른 대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도 제자들이 영혼의 눈을 뜨게 되자 오직 예수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듣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제는 예수가 소망입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진리입니다. 예수가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경험했던 일 아니었습니까? 한순간 식탁에서 그들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순간의 경험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복음 24:31).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터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목장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우리들의 영혼을 터치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 영혼들이 터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고 예수를 보게 되는 일입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다고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모임 중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곧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며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벳새다 맹인(마가복음 8:23)에게처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아마 당신은 이렇게 대답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직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일 뿐"이라고, 그러나 한순간 당신도 마침내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오! 예수님이 보입니다. 너무 확실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회심(回心)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노예선의 노예였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를 아는 함장의 도움으로 노예의 운명을 벗고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항해하던 배가 침몰의 위기를 겪고 파선하는 와중에 그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구조된 그는 성경을 읽는 중 그가 진실로 죄의 노예였고 영원한 세상을 보지 못하던 맹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구주 되심을 깨닫고 구원을 경험한 이 존 뉴튼은 구원이 전적인 은혜였음을 깨닫고 찬송 시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입니다. 본래 이 찬송의 원제는 "놀라우신 은혜(Amazing Grace)"이고 이 찬송 시의 첫 문단 마지막 두 줄의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cone was lost but now am found(나 한때 길을 잃었으나 이제 찾은 바 되었도다) / Was blind but now I see(나 한때 맹인이었으나 나 이제 보는도다)".
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후일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영혼을 터치한 것이라고, 그 후 43년을 복음 사역에 헌신했던 그는 82세 되던 해, 생에 마지막 무렵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던 때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 가지 변함없이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저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의 영혼을 터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뉴튼 목사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아, 한 가지 더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웃들의 영혼을 터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터치가 우리에게도, 우리 목장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온 많은 병자들이 주님의 터치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맛보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에도 터치의 사역이 필요합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시면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 스스로 포함한 수많은 이웃들이 연약함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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