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324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사과
혹 당신으로 인해
고통이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응답을 받을 때가지
기도를 쉬지 마세요.
그런 다음 편지나
직접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필요하다면 용서도 구하세요.
그러나 그 대가를
기대하지는 마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그 누구도..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예레미야 8:6, 7).
색각해 보십시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어느 가정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굽히시고 귀를 기울이셨지만, 그 백성들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용서 받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타락자가 있다면 예레미야 3장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12). 이제 또 다른 구절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예레미야 3:13, 14). 하나님게서 오셔서 당신과 결혼했다고 말슴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소망은 사명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 9).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소망은 바로 독립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투입된 주님 나라의 독립군입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모든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투입된 독립군들이며 동지들입니다. 우리가 "김 집사님! 박 장로님!" 하는 호치오가 함께 "김 동지! 박 동지!" 하며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이 사실은 훨씬 더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눈이 뜨이면 불평불만이 사라집니다. 때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눈이 뜨이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어려운 환경에서 주님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했던 사람들보다 더 큰 상급을 얻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함경도 나남이라는 도시에 여자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여기저기서 밥을 빌어먹고,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도 실실 웃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정신 나간 거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그 도시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그 여자가 소련군 장교의 군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녀는 소련군이 그 도시의 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간첩으로 파견한 소련군 장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정신 나간 거지 행세를 하면서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도시의 지주나 관리들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에 회부햇습니다. 소련군 여자 장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거지꼴을 하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일을 감내했던 것입니다.
소련군 장교라는 자부심 하나 때문에 거지 사명도 감당하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된 사람이 어려운 사명이라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의 보화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가 점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까 십습니다. "주님, 아무도 하지 않겠다는 일이 있다면 저에게 시켜 주세요! 주님, 아무도 가지 않겠다고 하는 곳이 있다면 저를 보내 주세요!"
제가 마흔이 되기 전, 서울의 큰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마흔도 안 된 젊은 목사가 그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감독의 말인지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저를 위하여 최고급 호텔을 숙소로 잡아 주었습니다. 그 호텔은 마치 한적한 산속에 있는 고급 별장처럼 보였습니다. 객실은 유럽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방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을 감고, 잠을 자기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그 호텔에 머물면서 '도대체 내가 뭐 길래 이런 호강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 갑자기 제 머릿속에 할아버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6.25 동란 전 평양 사동교회를 담임하셨습니다. 그러다 동란이 터지자 가족들을 모두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혼자 남아서 교회를 지키셨고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깨알아지는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돌짝밭을 일구다가 순교하셨지만 그 상급을 제가 대신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나는 돌짝바트 사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소위 말하는 옥토밭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옥토밭만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옥토밭에서 호강을 누리다가 훗날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받을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형편은 성도들마다 많이 다릅니다. 어느 살마은 3대 혹은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살핌 속에 순탄하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가족들의 온갖 핍박을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감당하는 사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일을 해도 이름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반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누구 하나 알아 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라는 사명은 형편이 좋은 사람들도 형편이 어러운 사람들도 모두 받습니다. 그런데 모두 편안하고 좋은 곳에서만 일하려고 한다면 누가 어렵고 힘든 사역지에서 일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영광과 상급이 다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명이 어려울수록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은혜 또한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 9).
사도 바울은 어떻게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을까요? 삼층천에 올라가 본 경험 때문일 것이빈다(고린도후서 12:1-4). 그는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 끝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그 사역에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에게 헌신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버립니다."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진짜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셋째 동생은 직업이 의사입니다. 실제로는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없었어도 의사 동생을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동생이 저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형님, 저 병원 그만 두고 선교사로 나갈래요." 두 달 후 동생은 미국에 있는 예수전도단 선교사 훈련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야 했습니다. 동생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제게 기도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동생의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이 동생이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그때 주님이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은 나의 나라를 보았다." 저는 그 음성을 듣고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저는 동생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에게 주님의 나라를 보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으로 인해 앞으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능히 이겨내게 해 주십시오."
다시 몇 달 후 저는 미국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동생이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는 캠프를 방문했습니다. 동생 가족은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가족과 함께 비좁은 공간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끝낸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형님, 미안해요. 이웃 숙소에서 싱크대가 고장이 낫나 봐요. 여기에서는 누구든 한 가지씩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맡은 것이 수리하는 일이에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동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몇 가지 공구를 챙겨 들고 털털거리는 고물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제 동생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제 동생 같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다음 네 가지 중 한 가지 경우에 속합니다. 첫째,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둘째,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업싱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다. 셋째, 하나님 나라 주변에서 빙빙 돌면서 살았다. 마지막 넷째,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을 바로 믿고 살았느냐 하는 것을 점검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왕노릇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예수님의 왕 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왕이 되시면 어덯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먼 미래에 만날 분이 아니라 항상 나와 함게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에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언제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빠 아버지, 나의 맘을 받으소서. 오셔서 주님의 처소로 삼으소서. 나의 전부이신 주님, 내 맘을 받아주옵소서. 나의 삶에 천국이 임하게 하옵시고, 주님의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제가 하나님 나라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와 항상 함께 사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언제든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내게 하오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 영성 훈련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 정수환 목사
남의 일에 대한 관심
샬롬! 행복한 주말이 되시길 빕니다. 저의 아파트 바로 앞엔 꽤 큰 소나무들로 가득한 ‘초당공원’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놓고 맨손체조를 합니다. 그때마다, 공원에서 여러 종류의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대학생 시절, 저는 종종 혼자 지내곤 했습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요즘은 혼자 살기에 더욱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시설이나 편의시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절반이 혼자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혼자 살기 좋은 세상’에 왜 ‘혼밥’, ‘혼술’ 같은 단어가 생겨났을까요? 당연한 사실에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만, 희귀하거나 낯선 것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름을 붙이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사는 사람은 많아도, 드러나게 혼자 밥 먹는 사람은 특이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 특유의 ‘남 일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혼자 지내는 사람에게 제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끼어들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밥’과 ‘혼술’이 방해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 시선에 주눅 들어서, 결국은 그 귀한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처럼 지적이나 간섭하는 사람들치고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남을 평가하거나 간섭할 이유도, 그리고 그런 일에 낭비할 시간도 따로 없습니다.(출처: 좋은생각, 장근영)
사실, 다른 사람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만,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상황인지 먼저 잘 판단해야 할 겁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 37).
2018년 6월 사역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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