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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307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6. 4. 09:06

예림의집 1307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과 드라이브를


다음 번에 혼자서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갈 때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의 시간으로 이용해 보세요.

마치 하나님이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듣고 있는 듯

이런 저런 것들을 의논해 보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조종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토론해 보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에

가속 페달을 밟거나

브레이크를 걸도록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운전대를 하나님게 맡겨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믿음과 확신


십자가에서 강도가 "주여 나를 기억해주옵소서"(누가복음 23:42) 라고 부르짖은 것은 믿음이며, 욥이 온 몸에 욕창이 생긴 가운데 잿더미 속에서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신 것을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욥기 19:25, 26) 라고 말한 것은 확신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가라앚기 시작했을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태복음 14:30)라고 외쳐 부르짖던 것 역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베드로가 공의회 앞에서 "이분(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셧느니라.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사도행전 4:11, 12)라고 선언한 것은 확신이엇습니다.

또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가 믿지 못할 때에 도와주소서!"라고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믿음이며, "누가 무슨 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며 담대하게 도전하는 것은 확신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마스쿠스의 유다의 집에서 홀로 눈먼 상태로 슬픔에 잠겨 기도한 것은 믿음이며, 바울이 연로한 죄수로서 무덤을 조용히 주시하고 "나는 내가 믿어 온 그분을 알며 ... 이후로는 나를 이하여 의의 왕관이 예비되어 있나니"(디모데후서 1:12, 4:8) 라고 고백한 것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축복입니까? 생명과 사망 사이의 간격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국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너무나 약하고 고통스러우며 불안하고 초췌하고 기쁨도 없고 웃음도 없을지 모릅니다. 확신이란 생명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함이며, 힘이며, 능력이며, 정력이며, 활동이며, 에너지이며,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어느 작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바위에서 자라 깎아지른듯한 벽에 걸린 채 포효하는 폭포수나 길게 떨어지는 물줄기 이에 걸쳐 잇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자기 이치를 유지하면서 마치 울창한 삼림 속에 있는 것처럼 입과 가지들을 뻗쳐 내더군요."

나무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뿌리의 힘으로 바위위에 붙어있기 때문이며 그 생명이 지속되는 것은 자연의 작용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들도 종종 하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끔찍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지만, 만세반석이신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는한" 그들은 안전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자신들의 삶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 속에서 생명을 얻게 되며 생명 안에서 삶을 유지해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승리자가 되십니다. 에수님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실 뿐 아니라 길과 빛이 되십니다. 진리가 되고 안식처가 되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평화와 기쁨이 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당신은 믿음으로 사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그리스도인을 신앙인(信仰人)이라고도 부릅니다. 신앙인이란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상이나 교리의 체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스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을 믿는 것인지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 안에 염려와 두려움도 사라지셨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염려와 두려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상 17:33-37).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자신들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울은 갑옷과 투구를 찾용하고 있었고,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물맷돌 하나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사울과 다윗 앞에 있는 문제는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대하는 자세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골리앗을 두려워했고,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을 진자 믿은 사람은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남선교회 회장이 남선교회 헌신예배를 하겠다고 제게 상의를 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 헌신예배라 함은 남선교회 회원들이 사회를 맡고, 성경봉독을 하고, 특송을 하고, 헌금을 하는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이 헌신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헌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헌신예배를 드리시려고 한다면 모든 회원이 이제부터 직장생활도, 사업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서약서를 쓰고 서명을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남선교회 회장이 회원들끼리 회의를 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결국 남선교회 헌신예배는 없던 일로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서약서까지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회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왜 서약서를 쓰는 것이 부담스러울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여기는 직업을 가진 신앙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셨으니 이제 부족함이 없으시지요? 너무 행복하시지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시지요?" 그러나 이 질문에 선뜻 "아멘!"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질문했습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고,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임마누엘하고 계신데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지식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그 지식이 곧 믿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과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염려와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셔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정말 믿어지면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4). 세상살이가 아무리 거칠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어려운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나도 담대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초봄에 꽃샘추위가 닥쳐왔을 때 날시가 매섭다고 해서 다시 겨울 준비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온과 상관없이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새 학기를 준비합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원칙에 따라 봄은 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진리를 정말 믿는다면 처한 환경이 겨울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항상 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2007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 훈련 중이던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의 딸에게 위급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고국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났는데 문제는 20여 시간의 비행을 포함한 장거리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현지에 그저 둘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님만 신뢰하고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 그는 아버지로서 너무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기도하던 중 갑자기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아빠 손잡고 떠나는 여행, 위험하지만 행복한 여행, 주니모가 함께 가는 여행,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행." 너무나 위험한 여행이지만 그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부르는 순간 주님은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동행이 있음을 알게하신 것입니다. 그는 딸의 손을 잡고 이 고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고 딸의 건강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나는 환경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되고 편안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환경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습니다(로마서 5:8). 

그리고 그 완전한 사랑과 구원을 보증해 주시기 위해 우리 마음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1:22) 이 사실을 믿지 못해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아버지에게 야단맞고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라며 가출한 학생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려운 환경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깊은 은총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믿으면 어려운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 역시 어려운 환경 때문에 미듬이 흔들리고 낙심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는 언제나 믿음 충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목사에게도 낙심과 좌절이 찾아옵니다. 마귀는 목사인 저를 넘어뜨리려고 오히려 더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어려운 시련, 나쁜 생각, 거듭나지 못한 성품, 세상 유혹으로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믿음을 회복하는 법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낙심과 좌절이 찾아올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생명이시고 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염려와 두려움이 떠나가고 다시 시작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믿음으로만 걸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며 걸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가지 무엇으로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았는지 점검을 해 부세요.


"아빠 아버지, 믿음만이 오직 나로 살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죽으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믿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어던 것도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믿음 안에 푹 빠져 살아가도록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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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맺는 말


어느덧 마무리 할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다시금 찬양의 가치를 되새겨 봅니다. 황금이 그 가치를 잃지 않듯이,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씀과 찬양은 일생 함께해야할 소중한 것입니다. 그 두 가지만 제대로 지켜간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나아가 주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영정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잭 테일러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에서의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를 시작합니다.

“찬양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  대신에 그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데 그 최상의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그것을 잃은 손해는 누구라도 믿기 어려울 만큼 큰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만 하면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찬양의 가치란 원수들이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되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방해할 만큼 굉장한 것입니다. 적당히 양보하여 타협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악인데 이렇게 되면 마귀의 간계에 꼼짝없이 붙잡히게 됩니다. 찬양은 우리의 무기창고에 있는 것  중에서도 적을 대항하는 데 쓰는 주된 무기입니다. 찬양은 곧 힘이요 힘은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