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삼단논법에서

예림의집 2018. 5. 31. 18:06

삼단논법에서


또한 위 삼단논법에서 ‘사람’, ‘죽음’, 그리고 ‘모든’이라는 단어들이 보편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종은 다른 짐승들이나 식물들과 개별화된 개념이다. 이 개별화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은 우연적 발상이며 논리적 질서와 대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론적 발상으로 ‘사람’을 개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도 진화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진화가 되어야 사람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가? 유인원이 있다면 유인원도 사람이라 할 수 있는지, 현재 대부분의 사람의 종보다 좀 더 진화된 생명체도 사람인지, 산모 밖으로 나오기 직전의 생명체도 사람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10년 전 혹은 1주일 전의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며,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지도 물어야 한다. 10년 전, 1주일 전, 그리고 현재의 나를 이어줄 연속성(continuity)은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보편적 질서이다. 사람이라 할 때 그 사람은 언제 존재했던 사람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 왜냐면 진화론적 세계관에서는 사람의 정체성은 영혼에 있지 않고 생물체의 구성에 있기 때문이다. 계속 뛰는 심장으로 인해 부분적이나마 그 생물체는 계속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도 보편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논리에 주로 쓰이는 명제는 분석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사실적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분석적 사실은 그 명제 자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종합적 사실은 여러 경험적 사실들에 근거한 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논리에서 사용된 분석적 명제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그 명제가 정말 실재의 사실들과 부합되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형식적 논리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 

한편 종합적 명제들은 사실적 경험들을 근거한 판단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이 명제는 개연성에 근거한 것이지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분석적 사실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합적 사실들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험적 종합적 사실들은 주관적 특성을 피할 수 없다. 종합적 판단에는 주체의 감정, 직관 등이 개입되고 또한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게 마련이고 더욱이 주체의 세계관이나 전제에 좌우된다. 그러므로 분석적 형식 논리가 실재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인지 의심스럽고 또한 종합적 사실들로 보충된 논리가 실재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위의 명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편적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른데 어떻게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가? 물론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논리 혹은 종합적 논리가 절대적 진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냥 주관적 혹은 경험적 입장에서 열거는 할 수 있어도 절대적 진리를 정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에녹과 엘리야는 사람이었지만 죽지 않았다. 논리는 사람의 사고에 유용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합리적 구조와 질서가 주어진 한도에 유용하다. 그것을 넘어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 수 없다. 궁극적 합리적 구조와 질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합리적 구조를 가지셨기 때문에 피조 세계의 구조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반틸은 하나님은 합리적이시며 그 안에 완전한 진리 체계가 있고 우리의 합리성은 피조된 것이며 그의 합리성을 반영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모순율(the law of contradiction)은 단지 하나님 성품의 이치를 피조 된 차원에서 보여 주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에 대해 단순히 모순율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반틸은 유신론(theistic) 입장에서 논리를 논할 때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틀린 것을 하시거나 수용하시거나 명령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겨주신 믿음의 법칙과 모순되는 어떠한 것을 명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비논리적인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의 법칙과 항상 일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의 모순을 자신들이 보는식으로 복음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불신자들에게 논리적 사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불신자가 더 논리적이고 지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논리나 지식을 갖고 진리를 누르고 일부러 부인한다(롬 1:18). 믿는 자의 논리와 불신자의 논리의 차이는 논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의 출학에 있다. 

반틸은 “믿지 않는 자의 논리는 어떠한 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회전문을 끝없이 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논리란 추상적 사실들을 추상적 원리들과 무의미하게 연결시키는 작업에 불과하다. 우연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자율적으로 만들어 낸 어떤 추상적 개념 외에는 다른 논리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 자신이 그 질서를 만들었다면 원리상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임의대로 만든 질서가 정말 사실들과 관련된 것임을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고 그 사실들도 이해 가능한 것들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논리가 논리로서의 작용을 하려면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전제해야 한다.

논리의 가능성을 위해 성경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논리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논리 방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머리 밖에 있는 사실들이 우리 머리에 있는 논리들과 연결되려면 반드시 그 논리 외에 다른 법칙이 있어야 한다. 그 사실들 자체가 이미 논리와 부합된다는 전제 또한 있어야 한다. 

그 다른 법칙과 그 전제는 만유에 담겨져 있는 사실들과 원리들을 창조하시고 의미를 부여하신 분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 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그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을 논리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누구나 추상적으로 그러한 근거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초월적 논법에서 설명했듯이 다른 대안은 불가능하다. 

악순환적인 추론을 멈추는 유일한 길은 오직 완전한 위격(person)이신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뿐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들의 논리를 위해서 그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 혹은 그 누군가를 전재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든지 우연이든지 뭔가를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혹은 우연이 합리적 구조와 논리적 질서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대부분 불신자들은 자신의 논리적 이성적 판단이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또한 이러한 판단이 마치 자신이 아무 도움 없이 무(無)에서 창출한 것으로 착각한다. 즉 그러한 판단은 어떤 논리적 법칙이나 질서나 합리적 질서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착각한다. 한 걸은 더 나가 이러한 논리로 기독교 진리를 반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 중 대표적인 논리는 소위 신정론(theoficy)에 관한 것으로 세상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다음과 같은 식의 논리이다.


  P1: 하나님은 선하시며 전능하시다. 

  P2: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

  C1: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악을 막지 못했기에 전능하지 않다.

  C2: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과 전혀 관계가 없거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그 자체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이고 유효한 것 같아 보인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위 논리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이 논리는 형식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P2에서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근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악이 있고 하나님은 선하고 전능하시다는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문제이지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왜냐면 그들은 처음부터 P1처럼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P1이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사실로 증명된 P2와 연결하여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더욱이 P1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기쁘신 뜻과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내용이 빠져 있다. 악의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혼란스럽기까지 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문제가 하나님의 신실하시이나 창조성이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 위의 논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진화론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으로 믿는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왜냐면 진화론적 세계는 오직 물리적(화학적 반응을 포함한)인 것만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논리의 법칙(the law of logic)은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법칙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것이 아니다. 

물리적 화학적 진화 과정에서 어떻게 정신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없다. 또한 우연히 혹은 저절로 생겼다고도 할 수 없다. 법칙은 질서를 의미하는데 우연히 혹은 저절로 질서가 정해질 수는 없다. 자신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 논리의 법칙은 인격적(personal)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불신자들은 악(evil)이 무엇인지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우연이 다스리는 세계와 물지로가 화학 반응으로만 움직여지는 세계에서는 악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악이라는 것은 인격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서만 악의 의미가 가능하다. 불심자들에게는 논리로 악을 설명할 때 ‘살인하는 것은 악하다’라는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이라는 개념은 우연이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격체로서의 사람이 아닌 단지 고급의 진화물인 호모사피엔스(home-sapiens)에게 살인의 의미는 단지 화학 작용이나 물리적 작용으로만 이해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을 악이라 정죄할 수 없다. 한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호모사피엔스의 호흡 작동을 끊었다고-인격의 세계에서는 살아있다고 함-정죄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살인 행위는 그 몸의 화학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악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화학작용으로 인한 발생을 죄악으로 정할 수도 없다. 존재하지도 않은 악의 개념을 불신자들은 어디서부터인가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악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기도교 세계관을 빌어 악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논리는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위 논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논리다. 그 논리의 흐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도용했기 때문이요 악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으로부터 도용했기 때문이다. 반슨은 비록 악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불신자들이 다루는 악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들에게는 절대적 도덕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 논리에서 심리적, 주관적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심리적 주관적 상태를 해소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이 불신자들이 논리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그 논리의 철학과 법칙을 어디선가 도용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확히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더라도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늑대가 양의 탈을 쓰듯이 교묘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의존해서 논리의 가능성을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뿐이다. 그 계시는 합리적 질서와 논리적 질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