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제5장 초월적 논법(transcendental argument)

예림의집 2018. 5. 24. 12:04

제5장 초월적 논법(transcendental argument)

  

그러면 전제주의 변증학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논법이나 방법을 통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불신자의 세계관을 공격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제주의 변증학은 간접적 논법을 채택한다. 전제주의 변증학은 어떤 경험이나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느냐를 묻는다. 이것을 다른 말로 초월적 논법이라고 한다. 반틸은 전체적 추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변증적 논쟁을 함에 있어서 출발점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개념과 맥락을 같이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독교적 논쟁 방식은 오로지 전제에 입각한 추론일 수밖에 없음을 입증해 보이는 일이다. 전제에 입각하여 논쟁을 이끌어간다 함은 논쟁자의 방법론 밑에 깊숙이 숨어 있어 그의 방법론 자체를 좌우하는 인식론적 원리와 형이상학적 원리의 근본 성격을 드러내 보이는 방식을 의미한다. 반틸은 계속해서 설명한다.

전제에 입각한 추론 방식은 직접적(direct)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접적(indirect) 추론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유신론에 관한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쟁점은 논의에 가담한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그것의 성격과 의미에 동의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에 직접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종결지어질 수 없다. 

사실상 문제는 그 ‘사실’과 ‘법칙’에 직접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종결지어질 수 없다. 사실상 문제는 그 ‘사실’과 ‘법칙’이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궁극적 참조점이 무엇이냐는 데로 귀결된다. 즉 문제는 ‘시실’과 ‘법칙’이 정말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사실’과 ‘법칙’은 과연 비기독교적 방법론이 가정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기독교적 방법론이 가정하는 그런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한 답은 결국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논쟁으로 결정되어질 수 없다. 

결국에는 이 문제는 간접적으로 결정되어져야만 한다. 기독교 변증자는 비기독교인과의 논쟁에 있어서(for the sake of argument) 그들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결코 ‘사실’이 사실이 되지 않으며 ‘법칙’이 법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는 한 번 그들의 입장이 옳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한편으로 비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그가 기독교적 근거 위에 서서 생각할 때에만 ‘사실’과 ‘법칙’이 이해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것을 적극 권유해야 할 것이다.

반틸이 주장하는 바, 간접적 방법이란 기독교의 전제를 타협하거나 양보하여 어떤 중립적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각자가 양보할 수 없는 전제가 있음으로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논쟁 자체를 위해서 상대방 위치에 서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일관성이 없고 모순에 처했는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터무니없음(absurdity)’으로 귀결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 유신론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반-유신론 입장에서 봤을 때에도 모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틸은 “우리의 적을 그들의 입장에서 만난다.”라는 표현을 자주한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나 그들과 타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체계를 파헤치려는 것이다. 즉 자멸적(self-defeating)인 특성을 밝히겠다는 것이다. 자가당착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게끔 만들겠다는 것이다. 

불신자의 자가당착적 모습을 또한 반틸은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the impossibility of the contrary).”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자체 모순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인데 한 쪽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을 통하여 볼 때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결국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보다는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다. 또한 불신자들의 세계관은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볼 때도 모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논쟁에 있어서”라는 말은 “논쟁을 이하여” 혹은 “논쟁을 목적으로(for the sake of argument)”라는 뜻이다. 이 말은 반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반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은 논쟁을 위해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역시 논쟁을 위해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 

반틸의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 진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서로 논쟁한 다음에 비로소 기독교가 진리임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논쟁 자체를 좋아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하든지 논쟁을 하고 보자는 말도 아니다. 또한 그들 입장을 이해하고자 그들 입장에 서 보자는 것도 아니다. 반틸이 주장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하듯이 비기독교인의 입장은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땜누에 그 자가당착적인 것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는 그들 입장에 서서 보여줘야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자가당착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세계관 혹은 전제 안에서는 자가당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가당착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들로 우리 입장에 서게 하고 또한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 봐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로 우리 입장에 서 보게 하는 것은 기독교 전제 혹은 기독교 체계는 매우 합리적이고 모순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the impossibility of the contrary)”는 주장은 바로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입장에 서 보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즉 자가당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기독교 입장에 서 봐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원리,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다. 이 보편적인 틀은 실재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이치에 맞게 해 주는 틀이다. 심지어 비기독교의 체계의 불가능함과 자가당착적임을 보여 줄 수 있는 틀이다. 

물론 이렇게 간접적 추론 방법을 썼다고 해서 비기독교인이 자신의 체계를 포기하고 기독교 체계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설득(persuasion)과 증명(proof)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접적 추론을 통해 상대방의 모순을 들추어냈다고 해도 자신이 가진 전제 혹은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결코 설득 당하거나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명은 된 것이다.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은 세계관의 싸움이요, 신앙적 싸움이요 또한 영적 싸움이다. 성령께서 설득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때에는 논쟁으로 기독교 유신론을 변증하기보다는 단순히 복음만을 전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지식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틸은 “궁극적 질문에 있어서는 우리는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벧전 3:15-16 말씀과 같아야 한다. “너히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간접적 전제주의 추론을 초월적 논법이라고 한다. 초월적 논법이란 어떤 사실이 이해 가능하고 의미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전제해야 하느냐를 가리는 논법이다. 주어진 사실들을 연결하여 내재적 차원에서 인식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과는 달리, 그 사실들이 이치에 맞고 의미 있는 사실들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다. 

그 무엇이 없으면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존재물(beings)을 가능하게 한 그 무엇이 반드시 있다. 기독교인에게 그 무엇은 창조주 하나님이고 대부분 무신론자들에게는 우연(chance)이며 진화론자에게는 진화의 최초 단계에 원래부터 있었다고 하는 작은 입자들이 그 무엇일 것이다. 또한 우주가 원래부터 있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우주 자체가 그 무엇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