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84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더 나은 세상으로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가장 큰 불만을
하나만 말해 보세요.
무주택,
폭력,
요즘의 젊은 아이들,
인종차별,
환경 오염 등.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공손히 불평해 보세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여쭤 보세요.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를?
청소년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관공서에서 봉사를?
동네 파출소에서 봉사를 해 볼까요?
불평만 말고
뭐든 행동으로 해 보세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느낌에 의존하지 않는 회개
회개는 '느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회개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이 느낌이 생기기를 기다리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려 하지만 이런 느낌이 올 때까지는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갱생을 위한 모임에서 수요일 저녁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중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감생활 중 첫 한 주간 정도는 그들 중 대부분이 거의 울며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석방되고 나면, 예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사실 그들은 구속됐다는 사실로 몹시 마음이 상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시련에 처한 사람이 고통스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단지 그가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 뿐, 죄를 지었다거나 아니면 양심이 그에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해주기 때문은 아닙니다. 시련이 참된 회개로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말씀이지만 회개는 '금식이나 고행'이 아닙니다. 사람이 몇 주, 몇 달, 아니 몇 년을 금식한다 하더라도그것 만으로는 단 하나의 죄에 대한 회개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회개는 '후회'도 아닙니다. 가롯 유다는 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 정도로 크게 후회했지만, 그것이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죄를 고백했다면 그는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사람은 모든 종류의 참회 행위를 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참된 회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행위는 그만 두어야 합니다. 당신이 영혼의 죄로 인해 맺은 육신의 열매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또한 회개란 '죄에 대한 자각'이 아닙니다. 이 말이 몇몇 분들에게는 낯설게 들리지도 모릅니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고통속에 몇 달을 보냈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건강의 지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이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라"(고전 6:18~19).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이 아닌 영 속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우리의 영이 우리의 몸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육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해 있는데, 영이라고 안전할까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구별되고 거룩하라는 끝없는 외침이 들리지 않나요?
우리는 정신적, 영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건강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방종을 부정하지 말고, 해로운 습관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가능한 한 당신의 성전에 알맞게 움직일 수 있도록 먹고, 마시며,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십시오.
"아빠 아버지, 나는 나의 몸이 당신의 성전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일생을 위한 당신의 목적들이 성공 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건강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나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오나,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사오니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상황을 초월한 찬송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찬송의 수평적 의미는 육신의 한계 즉, 상황을 초월하여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를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 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 시몬드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인해 요한 웨슬리 자신 뿐 아니라 선원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함께 승선하고 있는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의 평안에 넘치는 찬송의 소리는 선교사라고 뽐냈던 요한 웨슬리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의 체험을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 중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 이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배가 거의 침몰해 가는 상황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이 뱃전에 둘러앉아 찬송했던 것은 결코 웨슬리에게 감동을 주고자 함이 아이었습니다. 반석이 되신 주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고 그의 영광을 찬송함이 목적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날 보았던 그 놀라운 현상은 한줄기 빛이 되어 웨슬리의 가슴에 남았고 결국 그 빛은 2년간의 조지아 주 사역을 쓰라린 패배로 장식하고 본국에 돌아갔던 그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 체험으로 이끈 한 줄기 서광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우리는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무고하게 매를 맞고 투옥된 ‘바울과 실라’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2000여 년 전이니까 그 감옥 안의 모습은 지금 교도소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 23절에 보니까 많이 때린 후 가뒀다고 했습니다. 발에는 차꼬를 채우기까지 했습니다.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굶주리기까지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중쯤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죄수들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십중팔구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그래도 원망과 저주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아무 죄도 없이 매를 맞고 갇히게 된 그들이야 어서 풀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울부짖는 것이 당연하겠거늘, 전혀 그런 항변 없이 오히려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있으니 어찌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미쳤다고만 생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상황에 굴하지 않고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 중 일부에게는 심한 영적 도전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하, 예수쟁이들은 역시 다르구나! 보아하니 억지로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평소에 떠들어 대기를 기쁨, 소망, 감사, 평안 그런 것들이 모두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구나…’그렇다면 그날의 사건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신들이 수없이 외쳤던 복음을 확증해 보이는 것이요, 듣는 이들에게는 단편적으로나마 들었던 복음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입니다. 저는 1990년 3월 27일 입대해서 석 달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27사단 '이기자'부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 곳은 훈련사단으로 행군으로 힘들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더구나 저는 81mm 중화기 중대에 속해서 행군할 때마다 무거운 포를 어깨에 메고 다녀야 했습니다.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문뜩 행군할 때마다 버릇이 하나 생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들릴 듯, 말듯 찬양을 하면서 행군을 하면 힘도 별로 안 드는 것 같고 행군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행군할 때마다 흥얼거렸습니다. 그러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늘 옆에서 같이 걷던 고참병이 넌지시 제가 물었습니다.
"김 일병. 너는 행군이 힘들지도 않나? 무슨 노래를 그리 흥얼거리면서 행군을 하나? 힘이 남아도나 보지?" "네, 힘이 남아서 부르는 게 아니고 이 노래를 부르면 힘이 납니다. 그래서 늘 부릅니다!" "이 사람아 그럼 혼자 부르지 말고 같이 부르자고. 좀 배우게 크게 불러봐!!", "네 알았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이렇게 해서 우리 소대는 행군할 때마다 <호산나>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것이 우리 소대가가 되었습니다. 소대원들은 처음에는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른 체 신나게 따라 불렀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도 24명의 청년들의 행군나팔로…. 이는 제가 의도했던 바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전 단지 찬양을 부르며 행군하면 힘이 나고, 즐거웠을 뿐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었던 것 같습니다. 상병 말호봉이 되었을 때 전 중대 군종이 되었고 마침내 우리 소대원 전원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소대원이 모두 교회에 나오는 날. 예배시간 특송 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저는 단연코 복음의 시작이 이등병 때 행군하면서 불렀던 찬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땅 위에 살면서 빌립보 감옥 같은 억울한 상황, 군대 행군과도 같은 힘든 지경에 가로 놓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진학, 취직, 사업, 가정, 건강 등의 문제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외쳐온 복음의 능력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나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처럼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늘 하던 것처럼 주님을 찬송하면 자신의 믿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 확증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동안 외친 모든 것이 허상임을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찬송은 크고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방편인 반면에, 그동안 수없이 외쳐왔던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밴드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을 위해 밴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https://band.us/@homeofyerim 에 오셔서
부담 없이 읽어주세요!!
'예림의집 메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림의집 1286번째 이야기 (0) | 2018.05.13 |
---|---|
예림의집 1285번째 이야기 (0) | 2018.05.12 |
예림의집 1283번째 이야기 (0) | 2018.05.10 |
예림의집 1282번째 이야기 (0) | 2018.05.08 |
예림의집 1281번째 이야기 (0) | 2018.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