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81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신앙의 모범을 찾아
지금까지 당신에게 독실한
신앙의 모범이 되었던 사람을
찾아보세요.
인품이 훌륭해서 존경했던 사람.
당신에게 시를 눈뜨게 해 주었거나
수학을 좋아하게 해 준 선생님,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처남 등
내 주변에 소소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쓰셨는가를
그 사람에게 편지로 알려 주세요.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당신 자신이 그런 믿음의
모범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성경을 잘 안다는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만나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리지 않았나요?" 그러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살렸던 경우, 그들은 그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 일이 이뤄지길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버지께 구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가 야이로의 집에 들어섰을 때 "소녀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마가복음 5:4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을 나누어 줄 권세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나인성에서 한 젊은이가 운구되고 있었을 때, 그분은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누가복음 7:14).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즉시 일어났습니다. 또한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에도 큰 음성으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자 죽은 나사로가 이를 듣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 5:25). 만일 주님에게 신성이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연구해 보면 주님의 신성을 증명할 증거는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은혜로 구원받음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자유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의미로서, 자유는 속박과 노예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낼때, 명확하게 자유의 유형 곧 그리스도의 '사역들'로 말미암아 주신 자유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을 한 것은 많은 갈라디아인들이 구원 얻는데 불필요한 자격을 덧붙이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행과 헌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죄 용서함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이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위해 그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그들을 종으로 만든 옛 율법을 순종함으로 온전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소식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수 없다면 그땐 은혜는 정말 은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롬 11:16). 만약 누군가 그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헤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이것이 거짓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는 세상의 시민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값없이 얻게 된 영생의 선물에 대한 소식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빠 아버지, 사랑하는 주님.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를 주시고 오직 은혜로서 구원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귀한 구원의 선물을 알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그들도 믿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은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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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은 소중한 예물②
둘째로,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도취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한, 두 곡의 찬송을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북을 치고 손뼉을 치면서 성도들을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어갑니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식의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고 은혜를 받은 것 같다는 이유입니다. 하루는 그런 식의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에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 못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뜨겁게 찬송 하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지 물리적으로 몸에 열을 발산해서 뜨겁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이 뜨겁다고 마음 또한 뜨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일 뿐입니다. 골방에서 조용하지만 간절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의 마음은 뜨거운 심령인가요, 아닌가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고, 땀을 흘리고, 침을 튀겨야만 뜨겁게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앰프만능주의”인데, 일부 찬양사역자나 부흥사들의 경우 장소에 전혀 맞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큰 고성능 앰프 시스템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리의 크기를 최고로 높여 지붕이 들썩들썩할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그들은 찬송의 소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고 마침내 내용과는 상관없이 해당 찬송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히려 찬양과 예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많은 찬양사역자와 부흥사들이 소리의 크기와 영성을 비례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든지, “더욱 더 크게 불러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고 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은 거짓입니다. 결코 성경에는 소리의 크기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조용히,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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