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faith)과 이성(reason)
흔히들 기독교는 이성과 거리가 먼 믿음 위에 세워졌다고 오해들 합니다. 믿음과 이성은 조화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합니다. 더욱이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때 혹은 기독교를 이해시키려 할 때는 믿음을 내세우는 것은 효과가 없고 이성을 내세워야 그래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증, 논증, 확인, 증명, 설득 등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어떤 영적, 심적, 혹은 정신적 영역을 다룰 때만 필요하지 이해가 필요한 지적 영역에서는 필요치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생각들은 매우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믿음과 이성은 상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믿음은 이성을 가능하고 의미 있게 만듭니다. 믿음 없이는 이성은 이성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심리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절대적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즉 이치에 맞지 않고 또 의미도 상실합니다. 이성이란 순수하게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성이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있고 이성을 따라야 하는 기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성의 활동을 의미 있고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 사건에 관해 ‘이성을 활용’을 할 때 먼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그 사건이 허위로 꾸민 사건이 아님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은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게 이성만을 가지고 ‘이성 활용’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사건인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상관없는 사람에 관한 사건인가에 따라 이성이 향하는 방향이나 목적이나 기준이 다를 것이며 이에 따른 결과도 다르게 나올 것입니다.
즉 이성도 어떤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에는 어떤 합리적 순서나 질서나 가치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12시에 발생된 사건이라고 할 때의 날짜와 시간은 허공 속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질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월요일은 일요일 다음에 오는 날이요 화요일 전의 날입니다. 월요일은 일요일 다음에 오는 날이라는 정보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월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시간적 질서가 이미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질서는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 관계는 이성이 정한 것도 아니요 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질서 관계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실험 대상도 아니요 감각으로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초월적인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 범죄 사건에 관한 윤리적 가치 역시 이성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다는 것을 이성이 정하지 않습니다. 설령 사회 모든 일원들이 한 특정한 행동을 나쁜 짓으로 정했다고 해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들 모두가 그 행동을 나쁘다고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모두가 그렇게 정할 때는 이미 그들에게 도덕적 가치나 기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그러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가치나 기준은 이성으로 혹은 경험으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회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의해 주어진) 도덕적 절대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성은 이 도덕적 법의 권위에 순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성적 판단으로 법을 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에 앞서 그 판단의 기준이 먼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신뢰하는 그 신뢰 자체와 그 법의 권위에 순복하는 그 순복 자체는 이성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초월한 것입니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은 순수하게 우연히 발생된 존재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 원인이 있습니다. 설령 진화론적 원인을 주장한다고 해도 진화론적 원인을 믿는 신념은 이성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 신념은 이성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적 활동과 판단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확신 없이 이성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혹 확신이 있어서 이성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활동의 결과를 통해 확신을 가진다고 해도 이성에 대한 확신이 여전히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성적 활동의 시작과 과정에 있어서 그 이성의 유효성을 신뢰하지 않고서 진행시킬 수 있으며 또한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한 사건에 관한 ‘이성 활용(reasoning)’에 있어서 순수하게 이성만을 가지고 ‘이성 활용’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성의 활동이 가능하고 이치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틀이 이미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 이성의 활동을 위한 보편적 틀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그의 계시라고 단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가능성과 이치를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이성 활용을 합리적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틀을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그 주장이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이 잘 살용될 수 있도록 발판 혹은 틀을 제공합니다. 결코 이성을 부정하거나 적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마치 이성을 멀리하거나 적대시하는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마니아로 단정하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반틸의 글은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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