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인 미루기
나태의 특징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미루는 성향입니다. "내일 하지 뭐!" 이 말은 나태한 사람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약간 힘든 일이 생기거나 귀찮아지면 내일로 미루어 버리는 것입니다. 수도사들도 이런 유혹을 종종 받았습니다. 수도 생활은 어떤 긴급함도 없는 일상적인 일의 반복이고, 하루 이틀 기도나 노동을 하지 않고 미룬다 해도 특별한 어려움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마귀로부터 온다고 믿었던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에게 가장 위험한 죄라고 간주한 이 타내를 '정오의 마귀'라고 불렀습니다. 이 표현은 시편 91:6의 '정오에 임하는 재앙'이라는 구절에서 온 것인데, 게으름이 마치 대낮에 닥치는 재앙처럼 밝은 때에 수도사들을 넘어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오전 10시경이 되면 기도굴 안의 수도사에게 슬그머니 접근해 속사이기 시작합니다. 마귀는 "중천의 떠 있는 해가 족히 50시간은 지지 않고 계속 떠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이따금씩 창밖을 내다보라고, 골방에서 나와 태양이 중천에서 얼마나 움직였는지 바라보라고, 저녁가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고 속삭이고, 다른 수도사들도 밖으로 나와 있는지를 한번 확인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마귀가 이렇게 일과를 미루도록 유혹하는 목적은 수도하는 자리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 경우 마침내 요한복음 4:21-24을 인용하여, 수도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수도하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수도사에게 나태를 조장해 수도하는 곳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영적 싸움의 대열에서 낙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자신이 지켜야할 자리와 일상의 일을 귀중히 여기고, 때로 따분해지거나 힘이 들어도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도사가 개인 기도실과 공동 예배실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 더욱 인내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듯, 우리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직무에서 이탈하는 것을 더욱 경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