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적 상황
예수님은 유대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한다. 이 시기는 유대 사회가 멸망하기 직전의 극도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혹은 다원화된 사회나 복수주의 사회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생에도 서로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사회에서 진행되었다.
영광스런 마카비의 승리와 하스몬 왕가의 탄생, 그리고 잠시 후의 비극적인 종말은 유대 사회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으며 예수님 당시까지 그 흔적을 깊이 남겨 놓고 있었다. 수시로 이 영광을 되살리려는 추종자들이 출현하였다. 열심당원과 민족주의자들은 정종일치를 통해 유대 사회의 회복을 도모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갈리리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폭력이 난무하는 그러한 사회에서 자라나셨다고 할 수 있다.
로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어도, 이방인들이 선민 위에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부터가 유대인에게는 불만이었다. 넒은 로마의 점령지를 따라 늘 새로운 문화와 접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그들의 선민임에 대한 큰 도전이었다. 로마군인, 세관원, 세리 등의 이방인들이 복작거리며 거룩한 성에 이교문화를 이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인 헤롯왕가가 그들 위에 직접적인 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헤롯왕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결과적으로 헤롯가문을 인정하려는 헤롯당과 같은 일련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헤롯 왕가는 그들의 눈에는 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유대민족의 현실적 구심점이었던 대제사장(들), 고위 제사장들, 그들의 가문은 지배자들과 유대민족 사이에 갈들을 일으키며 한편으로는 압제자들에게 민족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독툭한 지위를 인정받고 유지하기 위하여 발버둥 쳤다. 백성들 역시 헤롯 왕가와 로마제국의 비호 아래 실질적 지도권을 행사하는 그들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의 비합법성을 거론하며 거부할 수도 없었다. 사두개인과 귀족계급, 대제사장들 등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가능한 한 현황을 유지하려고 하고, 백성은 백성들대로 현실에 별 기대를 두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마는 이원론적 사고와 행활이 팽배하였다.
사독가문은 비록 실제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영향력은 있으나 비합법성으로 외면을 당하던 대제사장 가문보다 정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적 정통 대제사장 가문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나라에 비합법적 성전을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살아감으로써 이미 자격을 상실했던 것이다. 혹은 대부분의 사독 후손이 은둔생활을 통하여 이미 유대사회를 향한 미련을 버렸다. 백성들은 거룩한 성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그들을 향한 향수를 달래며 무기력하게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권력은 없었지만 새로운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 바리새파 운동은 평민, 경건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제한된 의미의 일원론적 영적,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인 삶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권력도 경제력도 없었다.
그논주의자들과 현세도피주의(Essen파, Qumran 공동체) 등의 존재는 비록 유대 사회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의 행수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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