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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예림의집 2017. 3. 14. 13:48

인구


1)인구 계산의 필요성과 적절한 도구가 결여되어 있어서 정확한 인구산출이 불가능하다. 발견되는 기록도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모든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많은 기록들이 진실보다는 그 숫자를 강조, 자랑하거나 그 수치와 관계된 사건, 인물, 장소 등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의 인구기록은 대부분 이러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즉 오늘날과 같은 순수 통계학적 의미의 인구조사가 없었다.

 

2)동양식의 과장법을 예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갈릴리의 인구가 300만 명이었다거나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객이 200-250만 명이었다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는 수치이다.

 

3)보다 설득력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인구가 약 50-60만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산법을 따를 겨우 예루살렘에는 약 2만 5000명 내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보다 Diaspora의 유대인이 더 많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면 이 모든 유대 공동체가 단일 명령권에 속하기 때문에 이 전체 유대인구를 예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E. 로제의 가록을 따르면 전 로마제국 내의 유대인은 4백 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것은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7%라고 한다. 따라서 지중해르 중심 한 로마제국의 전 인구는 6400만 명이라는 결론이 나오나 학자들은 다만 하나의 기록으로 취급할 뿐 사릴로 보는것 같지는 않다.

 

4)많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와 유대 왕국이 앗수르, 메소포타미아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그 중 극히 일부만 돌아 왔다. 남아 있던 유대인들에 관하여서는 정확한 숫자와 그 이후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또 그들이 끝까지 혈통을 지켰는지 아니면 혼혈족이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서도 알 길이 없다.

 

5)페르시아 시대에 많은 사람이 카스피해 부근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것은 미개한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6)이집트의 유대인 거주는 약 기원전 600년겨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집트에 의해 강제 징용된 사람들과 이집트와이 전쟁을 위해 바렐론, 페르시아에 의해 징용된 사람들로 추정된다. 바벨론의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 이스마엘과 십수 명의 추종자들이 이집트로 도망했다는 열왕기하 25장 25-26절이나 이집트의 유대인을 언급한 예레미야 44장 1-17절은 이집트에 이미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후에 이집트에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이주했던 것 같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후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쿠레네에 정착하였다. 프톨레미 Lagi가 유대인의 이주를 적극 권장(혹은 강요) 했다는 기록도 발견된다.서기 38년경에 기록된 필로의 글에 예수님 당시의 이집트에 약 100만 명의 유대인(대부분 Alexandria) 살고 있었다고 한다. Leontopolis에 유대인 성전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의 유대인 거주지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7)셀류커스 왕조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시리아로 이주하였다.

 

8)마카비 시대에 유대인들의 거주지는 이탈리아 반도까지 확산된다. Pompeius가 전리품으로 데려간 유대인들의 수만 해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후에 해방노예로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였다. 브루스는 그 당시 로마본토의 유대인을 약4-5만명으로 추산한다.

 

9)이상의 모든 기록과 추정은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크게 과장되어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수치를 통해서 최소한 유대인들이 이미 로마제국의 구석구석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조직한 회당을 통하여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대로 복음이 쉽게 확산되어 갔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행 2:9-11 참고).

 

10)순수 유대인들 외에 우리는 많은 개종자들을 예상해야 한다. 자발적인 개종자들고 있었으나 우대화정책에 의한 강제 개종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유대인들과 섞여 살 수는 있었으나 결국은 방관자, 혹은 참가자 이상의 노릇은 할 수 없었고 끝내 순수 유대인으로 취급받지는 못했다. 이들의 특징은 할례를 받고 율법에 순종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개종자들 중에는 특히 여인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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