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성전(聖戰)에 관하여

예림의집 2017. 1. 12. 11:50

성전(聖戰)에 관하여

    

오늘날 보면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때가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마지막 때의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의 모습들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전쟁은 지금도 하고 있는, 발생되고 있는 문제이다. 지금 중동지방에서는 IS를 처단하기 위해서 미국이 나서서 전쟁을 자행하고 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계속해서 발발하고 있음을 통해서 우리는 전쟁의 문제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 즉 성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진두지휘 하시는 전쟁들의 모습들이 많이 보여진다. 창세기에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 전쟁은 아니더라도 그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애굽기에서는 이제 모세를 통하여서 바로에게 벌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면서 부딪치는 많은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명령하시면서 물리치면서 나가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사기에 들어오면서는 사사로 불리어진 사람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구속을 이어가시고 역사서로 들어오게 된다면 이제 각 왕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어가시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다. 다윗은 전쟁마다 하나님께 물었고 그 분의 뜻을 구함으로 그것을 이루어가는데 주목하였으며 그로 인해서 전쟁의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 쯤 보면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두지휘하시고 전쟁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이 역사서를 지나고 신약에 들어오면 더 이상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언급과 명령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젠 ‘성전’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개념이 달라진 것인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이상 성전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른 방법으로 구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 같다. 이제는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고 그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으로 성전은 사라지고 그 방법이 달라진 것 같다. 구약은 구약의 특징적인 사회, 문화의 모습이 존재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에 맞게 방법을 택하신 것이고 이제 신약은 신약의 방법과 문화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군 전쟁이나 최근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은 인간의 욕심, 이익에 따른 이기적인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오늘날의 성전은 우리를 희생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 성전이라는 개념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은 어떠한 이유로든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살인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을 죽이는 낙태와 같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라크전만을 살펴보더라도 적절한 당위성이나 대의가 보장되는 성전만큼이나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요소들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성전(聖戰)은 이전부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는데 적어도 우리는 가나안 정복전쟁 그리고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것들 이외에도 기독교권 국가들 가운데서 치러졌던 거룩한 신의 이름하에 일어났던 군소 성전들 그리고 종교전쟁 및 이슬람권에서 일어나는 테러, 자하드 등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전은 어떻게 먼저 정의될 수 있을까?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가나안 전쟁의 경우는 가나안인 들의 죄악의 관영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맺었던 토지 분배의 언약을 인하여(창15:16) 일어난 전쟁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후에 나타난 사무엘을 통하여 명령하신 아말렉의 진멸전쟁 역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 하신 전쟁이기에 이는 가히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추후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사라던지 직접 명령하시지는 않지만, 므깃도 골짜기의 전쟁의 경우도 바로느고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하여 전쟁을 치루었으며, 추후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한 것처럼 선지자를 통하여 고레스 같은 이국의 왕을 세우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셨고(사45:1) 하나님의 열방의 심판 도구로 앗시리아를 사용한다고도 하였다(사10:5~6). 위와 같은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한 국가를 도구 삼아 열방의 죄악을 심판하게 되었거나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가히 가나안 전쟁과 아말렉 전투에서 핵심이 되었던 정의의 징벌,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정의해야 할까? 그렇다면 세상만사의 모든 일들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 가운데 나타났던 열국간의 상쟁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정의에 의해서 그들의 전쟁과 살육을 통하여 일어난 성전이 아니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사 일을 치루셨다는 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성전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들을 심어주게 된다. 

그러나 역시 성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전쟁이나 아말렉 전쟁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제외하여 일어난 개별 전쟁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함을 통하사 자신의 뜻을 이루신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할 지라도 우리가 악함을 추구하여 지은 전쟁들에 대한 대가는 심지어 우리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행동하였을지라도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심판의 의미로서 전재을 집행한 것이 아닌 오히려 욕구와 탐욕에 의해 일어난 전쟁들이기에 결코 이것은 성전의 의미를 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살육전쟁은 비록 하나님의 성전의 당위성을 결코 얻지 못하겠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전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또한 섬기려 오셨다는 점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세상사람들이 자신의 탐욕에 의해 적절한 대의를 명분삼아 일으키는 모든 분쟁과는 수준이 다르게, 개별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섬기고, 사랑하는 존재로서 나타나게 되며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형태의 섬김과 희생 그리고 고난의 방식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과 시도들을 전개하여야 한다.(물론 절대 사회구원이나 인간 중심의 유토피아 같은 망상을 하는 것을 결코 아니다. 온전한 하나님 나라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로는 기독교인이 아니 여서 안타깝지만, 좋은 예시가 되는 간디의 비폭력 독립 운동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 지도자층이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하라는 것은 결코아니다. 타국의 침략은 마치 노략하는 강도와도 같기에 정의 집행과 질서 유지의 이유로 이 강도들을 살해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것이라고 한 칼빈의 대답을 생각해보자면, 결론적으로 피바람이 불게 되는 살육의 의미에서 이뤄지는 전쟁의 경우는 상술한 두 가지 사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투쟁이란 의미에서의 성전은 모든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비폭력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재림 이전까지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