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의 저작권에 대하여
베드로전서의 저작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있다. 본 서신에서 언급된 고난은 주후 111-112년 플리니 치하에서 일어난 박해를 반영하고 이 논의의 근거가 약하고, 본 서신에 언급된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을 고려해 볼 때 베드로가 죽기 전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와 가까웠다는 것을 볼 때 십자가와 부활을 제외하고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언급이 아주 적고,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헬라어보다 정제된 문학양식을 사용하여 베드로가 받았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학 양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후에야 바벨론과 로마를 대응시켰으며, 이레니우스 이전에 어떤 작가도 베드로를 저자로 말한 적이 없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을 받아왔다. 먼저 베드로 저작권을 부정할만한 압도적인 증거가 없다면 저자 자신이 스스로를 베드로라고 말한 것을 심각하게 간주해야 하며, 아시아나 브루기아, 갑바도기아 등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이 있었다면 좀 더 이른시기에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예수에 가르침에 있어서는 저자가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암시하는 부분이 대단히 많고, 현대의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가르침을 많이 인용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서신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헬라어를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그의 동생이 이름이 안드레(헬라어식 이름)일 뿐만 아니라, 헬라 도시 출신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공식적인 랍비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헬라어로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다. 또한 로마에 대해서는 로마를 바벨론으로 언급하는 본문들이 대개 70년 이후에 기록된 것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 작가들이 옛 바벨론처럼 로마도 ‘사악한 제국’이라는 이유로 서로 관련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베드로후서에서 이레니우스보다 먼저 베드로의 저작을 확증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의 저작권에 대한 주장을 평가하자면, 베드로의 저작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지만 언어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실루아노(실라)의 헬라어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즉 바울과 동행하기도 한 실라에게 베드로가 자신의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내용의 책임은 베드로에게 있지만 언어구사와 문학양식은 실라가 자유롭게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 저작에 반대하는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전서를 위명서신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것이 속임수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의 그리스도인이나 ‘베드로 그룹’중 한 사람이 베드로가 죽은 후 얼마가 지난 후 베드로가 생전에 말한 것을 새로운 세대에 전하려고 했거나 전통적인 베드로의 자료를 현재 진행 중인 새로운 박해의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베드로전서의 저작권에 대해 주로 선택할 수 있는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베드로전서는 사도가 쓴 참 서신으로 60년대에 로마에서 베드로가 죽기 전에 기록되었다. 둘째, 베드로의 지도아래 혹은 그가 죽은 후 실라가 본 서신을 썼다. 셋째, ‘베드로 전승’ 안에 있는 가르침을 전하려던 ‘베드로 그룹’에 속한 로마 사람의 작품이라는 견해로 이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저작연대는 80년대이다. 이 연대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소당한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은 ‘이십년 전에’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다는 플리니의 언급에 의존한 것으로, 박해가 심했던 주후 85년 경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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