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심령 1 (약 3:14-18)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 시간에 “맑은 심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거친 바다와 같이 한순간도 쉴 사이 없이 온갖 악한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국내 국제 얼마나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까? 이 세상에 혼란과 악한 일이 왜 생길까요? 배후에 사탄이 있고 이 악한 영을 가진 자들이 수없이 악한 일을 생산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과 거짓들이 난무하고 혼란스럽러운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악령을 원하지 않겠지만 마음이 악하면 그 심령에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사역을 할 때 어떻게 맑은 심령을 소유할 수있는가가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탄의 소굴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바로 모시려면 무엇보다 맑은 심령을 소유해야 합니다. 맑은 심령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하늘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럼 맑은 심령을 위해 채워야 할 하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1. 성결입니다.
17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성결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첫째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첫째 성결하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결입니다. 여기 성결은 ‘하그노테스’로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결이란 본래 구약 제사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씻고 또 씻으며 성결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자나 깨나 하나님께 거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결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요.
그래서 히12:14-15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 5장을 보면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이 나가 돼지 떼에게 들어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가 바다에 몰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개념으로 부정의 상징 돼지에게 귀신이 들어갔다는 것은 부정한 심령에 악령이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향기로운 꽅송이에 봉접오고 구렁냄새 나는 곳에 쇠파리 오는 이치죠.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고 맑은 심령을 소유하면 마음도 가볍고 몸도 그렇게 가벼워질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버릴 때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악의 영들이 우리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에 물든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씻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그 심령은 온전히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심령이 될 것입니다.
2. 화평입니다.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화평한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씻고 죄에서 멀리하는데도 심령이 맑지 않다면 두 번째로 점검해야 할 것이 화평입니다. 양심에 화평이 있느냐? 양심의 화평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보혈 없는 그 심령에 사탄이 왕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속죄의 복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율법 아래서 정죄 받은 심령으로는 마음에 사망이 왕노릇하고 마음의 지옥이 이루어지고 사탄이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화평을 알지 못하여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롬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고 절규했던 것을 아실 줄 압니다. 이것이 복음을 몰랐을 때 율법 아래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답답할 때는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지 않습니다. 내 심령이 맑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임임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믿고 그 속죄의 복음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의롭다 함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의 눌린 양심은 화평을 되찾고 우리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보혈 공로를 믿되 담대하게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과도 화평하시기 바랍니다. 사람과 화평하지 못한 틈을 타서 사탄이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향해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하21:1에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에게 원성을 살 때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관용하고” 관용하다는 말은 “너그럽고 부드럽고 사려 깊다”는 의미로 남을 이해하려는 자세, 즉 용납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용납이란 타인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롬15:7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으실 때 이 모습 이대로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받으라는 말입니다.
엡4:32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용납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혹시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이웃 끼리,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평생 상처가 되고 한이 된다면 가장 손해를 볼 사람은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 지옥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딴 여자와 눈이 맞아 아내와 삼남매를 버렸습니다. 갈 곳 없는 그 아내는 모진 고생 다해가며 삼남매 모두 대학을 마쳤지만 평생 남편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50세 중반 젊은 나이로 죽게 될 때 다행히 그의 남편은 용서하고 눈을 감았지만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목사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죄진 사람은 저토록 건강하고 형통한 데 억울하게 버림당한 성도는 고통으로 평생 살게 했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죄 지은 사람의 죄보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주지 못한 죄가 더 크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 주님 십자가 상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것이 용납하는 기도요 승리하는 기도입니다. 일만 달란트보다 더 큰 죄의 값을 탕감 받은 우리가 그보다 더 작은 인간과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하셨습니다. 우리가 후일의 교훈을 삼기 위해 역사는 잊지 않아야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써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동방의 의인 욥을 보세요. 욥이 침혹하게 병들었지만 자기를 정죄하고 책망한 친구들을 용서하고 복을 빌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욥42:10)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은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며 비로소 용서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양순하시기 바랍니다.
“양순하며” 양순이라 ‘유페이데스’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을 말합니다. 말씀에 순종이 우리 심령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벧전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왜 버렸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상15:22-23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말씀 존중이 하나님 존중이요, 말씀 거부가 곧 하나님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위만 잃었나요? 말씀을 버리자 그토록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큰 일하던 사울에게 귀신이 들어와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존중하지 않으면 맑은 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한 때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일생 말씀을 따라갔던 그가 말씀을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창 16-17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오직 사라에게서 난 자가 약속의 자손이 될 것이라 하셨지만 기다리지 못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으니 하나님과의 교제가 13년이나 끊어졌습니다.
허송세월도 그렇지만 얼마나 그 마음의 시험이 많았겠습니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 13년은 사탄에게 내준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는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막으시는데 행하다가 얼마나 고통들 당합니까?
아합왕 시절, 이스라엘에 400명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모두 거짓선지자이고 참 선지자는 미가야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탄에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이 그만큼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3:16-17)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셔야지 세상 악한 것들이 깃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더욱 회개함으로 마음을 성결케 하고, 속죄의 복음으로 양심을 화평케 하며, 서로 관용함으로 용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무장하여 악의 영은 떠나가고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실 수 있는 심령이 맑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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