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가난한 자의 문제
부(富)라는 개념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가난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만민에게 동등한 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한 누군가는 부를 축적할 것이고 누군가는 부를 소모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상대적인 의미에서 가난이 생겨난다. 하지만 현실은 더 각박하다. 상대적 가난함이 아닌 절대적 가난함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우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성경은 가난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구약 시대나 현대에나 경제적인 가난은 곧 사회적 지위의 박탈과 동일시되어 가난한 자는 천대받고 부한 자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다. 구약 시대에는 가난한 자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경우가 있었는데 생계유지를 위해 그러는 경우도 있고 대출을 했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변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경우도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재판은 권력 있는 자에게 편향되기도 했다. 대체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키워드는 노예, 고리대금, 재판 등이 있다. 성경은 이런 이들을 보살피라 명하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자의 부과를 금지한다. 노예에 대해서도 인격적인 대우를 할 것을 명하며 편향된 재판이 있어선 안 된다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식년 제도를 통해 노예를 쉬게 하고 희년 제도를 통해 노예를 무상으로 풀어주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런 구절들은 모세오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든 가난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이자 동등한 사람으로 보고 공평하게 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노예가 되더라도 비인격적으로 대할 수 없으며 자비와 관용의 여지를 남겨두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게끔 한다. 이러한 사항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성경이 가난함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해준다.
신약에 오면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그 지평을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선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나셨고 자라셨으며 공생애 사역 중에도 가난한 자와 친구로 지내셨다. 예수님은 재물을 가지려 하지도 않으셨고 머리 둘 곳도 없는 순례자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으시고 타인으로부터 빌리셨고 후원을 받으셨다. 그분에게 물질적인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했을 때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오냐고 반문하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갖고 있는 음식으로 그들을 모두 먹이셨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어서 가난하게 사신 것이 아니라 청빈한 삶을 추구하셨던 것이다. 물질적 가난함은 둘째 치고 예수님께선 영적인 가난함을 강조하셨는데,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가 됨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물의 부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신약 시대에 오면 구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모범적인 삶은 교회로 옮겨진다. 교회 구성원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어야 하고 부를 추구하여 교만하여지지 말고 오직 그 부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을 가르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가난은 결코 사회에서 없어질 수 없는 문제다. 가난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내 이웃이 가난해질 수도 있고 내가 가난해질 수도 있다. 당장 거리에 나가보면 추위에 떨며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아 그들을 얕잡아보지 말고 사랑으로 위로하며 적은 금액이나마 그들을 위해 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