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제 4장 믿음(faith)과 이성(reason)

예림의집 2014. 10. 3. 18:31

 제 4장 믿음(faith)과 이성(reason)


흔히들 기독교는 이성과 거리가 먼 믿음 위에 세워졌다고 오해들 한다. 믿음과 이성은 조화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더욱이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때 혹은 기독교를 이해시키려 할 때는 믿음을 내세우는 것은 효과가 없고 이성을 내세워야 그래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변증, 논증, 확인, 증명, 설득 등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어떤 영적, 심적, 혹은 정신적 영역을 다룰 때만 필요하지 이해가 필요한 지적 영역에서는 필요치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생각들은 매우 잘못된 생각들이다. 믿음과 이성은 상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믿음은 이성을 가능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믿음 없이는 이성은 이성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심리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절대적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불가능하다. 즉 이치에 맞지 않고 또 의미도 상실한다.

이성이란 순수하게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이성이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있고 이성을 따라야 하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성의 활동을 의미 있고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들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 사건에 관해 ‘이성을 활용’을 할 때 먼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그 사건이 허위로 꾸민 사건이 아님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은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이성만을 가지고 ‘이성 활용’을 수행할 수 없다. 이 사건이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사건인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상관없는 사람에 관한 사건인가에 따라 이성이 향하는 방향이나 목적이나 기준이 다를 것이며 이에 따른 결과도 다르게 나올 것이다. 즉 이성도 어떤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에는 어떤 합리적 순서나 질서나 가치가 이미 전제도어 있다. 월요일 12시에 발생된 사건이라고 할 때의 날짜와 시간은 허공 속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질서를 전제하는 것이다. 월요일은 일요일 다음에 오는 날이요 화요일 전의 날이다. 월요일은 일요일 다음에 오는 날이라는 정보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월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시간적 질서가 이미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질서는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 관계는 이성이 정한 것도 아니요 정할 수도 없다. 이 질서 관계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실험 대상도 아니요 감각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초월적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 범죄 사건에 관한 윤리적 가치 역시 이성이 정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다는 것을 이성이 정하지 않는다. 설령 사회 모든 일원들이 한 특정한 행동을 나쁜 짓으로 정했다고 해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들 모두가 그 행동을 나쁘다고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모두가 그렇게 정할 때는 이미 그들에게 도덕적 가치나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있었던 그러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가치나 기준은 이성으로 혹은 경험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절대적인 것이다. 사회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의해 주어진) 도덕적 절대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성은 이 도덕적 법의 권위에 순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성적 판단으로 법을 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에 앞서 그 판단의 기준이 먼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법을 신뢰하는 그 신뢰 자체와 그 법의 권위에 순복하는 그 순복 자체는 이성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을 초월한 것이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은 순수하게 우연히 발생된 존재가 아니다. 분명히 존재 원인이 있다. 설령 진화론적 원인을 주장한다고 해도 진화론적 원인을 믿는 신념은 이성을 초월한 것이다. 그 신념은 이성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적 활동과 판단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확신 없이 이성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혹 확신이 있어서 이성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활동의 결과를 통해 확신을 가진다고 해도 이성에 대한 확신이 여전히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성적 활동의 시작과 과정에 있어서 그 이성의 유효성을 신뢰하지 않고서 진행시킬 수 있으며 또한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이 한 사건에 관한 ‘이성 활용(reasoning)’에 있어서 순수하게 이성만을 가지고 ‘이성 활용’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성의 활동이 가능하고 이치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틀이 이미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앞서 이성의 활동을 위한 보편적 틀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그의 계시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가능성과 이치를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성 활용을 합리적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틀을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그 주장이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이 잘 살용될 수 있도록 발판 혹은 틀을 제공한다. 결코 이성을 부정하거나 적대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마치 이성을 멀리하거나 적대시하는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마니아로 단정하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 반틸의 글은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복종될 때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변론하시고(reason) 우리의 마음을 바꾸셨을 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그 계시를 재해석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지성과 이성과 의식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올바른 위치이다. 결코 이러한 이성과 믿음은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믿음은 오히려 이성으로 하여금 바르게 해석하도록 해 주는 강한 능력이다.


기독교는 이성, 지성, 논리, 의식, 경험 등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또한 믿음과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믿음을 동반하는 것뿐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을 내세우는 것이 불합리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성을 사용하는 기준이나 가치관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이성을 믿음과 같은 이성외의 다른 것에 기준을 삼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이성을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이성 자체가 이성을 위한 기준이요 근거라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맹목적이고 무모한 것이다. 이성 역시 이성의 유효성과 합리성을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성 자체라고 한다면 이성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비합리적으로 신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도 똑같이 이성을 사용하고 똑같이 이성의 효율성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이성을 순수하게 중립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이성의 근거와 기준이 이성 자체라는 무모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이 이성으로서의 가치를 얻기 위해서 확실한 근거와 기준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으로부터 이성의 가치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불신자들이 이성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이성 자체를 근거와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성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다. 오히려 이성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쪽은 이성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는 기독교이다.

이성을 이성의 기준과 근거로 삼는 것은 사실 일종의 믿음 내지는 신념일 수밖에 없다. 그 기준과 근거는 이성에 속한 문제가 아니다. 이성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판단과 결정 이전에 주어지는 전제와 같은 것이다. 이성을 초월한 믿음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성이냐 믿음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이성답게 해 주는 믿음이냐 아니면 이성을 맹목적 대상으로 삼는 믿음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 자체를 이성의 기준과 근거로 삼는 것은 맹목적 믿음이다. 이성을 이성답게 취급하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흔히들 생각하듯 마치 이성이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 이성의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 이성과 대치되는 것으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는 이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비방하기를 기독교는 마치 이성의 활용을 무시하고 단지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관적인 믿음으로 의존하는 권위는 확실성 내지는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하나님으로 증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를 그 계시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기독교 순환 논리를 전면 배격한다. 그러나 주어진 실재에서 어떻게 절대 신의 권위를 그 신의 권위 외의 것으로 그 권위를 증명할 수 있는가? 혹 절대 신을 부정한다고 해도 무엇인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기준과 근거를 삼아야 하지 않는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의 권위를 세우려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세울 수가 없다. 다른 것을 가지고 세운다고 할 때는 그 다른 것이 그 권위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에서만 아니라 인간 실재에서 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을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 주장을 위한 어떤 근거와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근거와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경험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는 확신이다. 자신이 이렇게 심리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확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진리라고 전제하며 불변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면 “경험주의는 틀림이 없다”는 전제 혹은 권위는 어떻게 진리임을 알 수 있는가? 사실 “경험주의는 틀림이 없다”는 것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이 경험을 통하여 진리임을 증명된다고 하는데 “경험주의는 틀림이 없다”는 확신은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확신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알 수는 없지만 권위로 그렇게 믿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전제 혹은 권위는 경험주의자에게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만약 경험주의 전제나 권위보다 더 궁극적인 전제나 권위가 있다면 그 경험주의 전제나 권위는 더 이상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경험주의 전제와 권위는 경험주의 전제와 권위에 입각해서 주장해야 한다. 이렇듯이 경험주의가 내세우는 기준과 근거를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경험주의도 일종의 믿음을 자신의 경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하나님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더 합리적인가? 아니면 경험주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더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결코 하나님을 궁극적 전제와 권위로 내세우는 것을 미신이고 악순환이라고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경험주의도 마찬가지다. 사실 경험주의 전제나 권위는 지식에서나 경험에서 제한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스스로가 추론한 것이기 때문에 계시로 주어진 성경의 권위와 전제가 더 합리적이고 더 권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불신자들이 기독교의 전제와 권위를 더 합리적이라고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을 맹목적이며 비합리적이고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주장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절대적 신이라고 한다면 그의 계시 외에 어떤 것도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이성을 절대적 위치에 놓는 이성 자체는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고 인간의 제한성과 인간의 숙명과 길을 같이 가는 것이다. 결국 인간 스스로가 권위를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만약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독교를 비방한다면 그 비방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이 자신의 이성 외에 다른 것에서 궁극적인 권위를 찾는다고 한다면 결국 자신들의 이성을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궁극적 권위로 삼고 그의 계시를 위지하는 것은 단지 독선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를 궁극적 권위로 삼는 것이 독선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다. 이렇듯이 어떤 믿음을 궁극적 전제와 권위로 삼느냐에 따라 이성의 역할이 달라진다. 완전하신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궁극적 전제와 권위로 삼는 믿음이 이성을 가장 가치 있고 유효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이성 자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일종의 우상 숭배와 같은 것으로 그 이성을 맹목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이성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궁극성(ultimacy)을 인정하는 한도에서 둘은 조화를 이룬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합리성을 추구하고 서로 합리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2+2=4라는 사실을 불신자나 신나자 다 알 수 있다. 이성을 통하여 기독교의 합리성을 증명할 수 있고 또한 이성을 통하여 불신자의 지식 체계나 세계관의 비합리성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이미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이성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성의 활동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인 이성이란 불가능하다. 마치 중립적인 혹은 순수한 이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이성자체에 의미를 두고 이성을 사용한다면 결코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성적 논쟁 자체도 불가능하게 된다.

사실 어느 쪽이라도 이성을 활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을 전제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믿음을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부정하는 활동조차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 부정적 이성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틀을 믿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이성은 스스로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요 믿믐을 전제하는 이성은 합리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믿음은 단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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