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전천년설 정리(참고)

예림의집 2014. 9. 19. 19:47

 1. 전천년설이란?

 (1) 전천년설의 역사

  전천년설은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이다. 지금부터 전천년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초림하셔서 지상의 유대왕국을 건설하려 하셨다. 그 예로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막1: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 나라와 왕되신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세워질 수 없었으며 유대인들은 징계를 받고 열방 민족들 사이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재림 시까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하여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불려 내어 질 것이나 전 세계가 복음화 되지 않았을 때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교회의 들림 받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잇달아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환난기가 되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며 이 기간 안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틴 안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환난의 끝에 예수와 그분의 성도들이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이다. 이때 살아남은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인데 양과 염소로 분리되고 적그리스도가 파멸되고 사단은 천년동안 결박될 것이다. 그 환난기에 죽은 성도들은 부활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보좌를 예루살렘에 두실 것이다.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재건되고 의식법과 제단과 희생제사가 회복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땅 위의 모든 나라들 위에 주재가 되실 것이다. 이때가 천년간 이어진 메시아 시대로서 위대한 번영과 축복의 기간이 될 것이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되어 즐거워하며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할 것이고 죄의 결과가 사라져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다.(사11:6) 또한 전천년설은 유대인들이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변할 것이며 이방인들이 충만한 수가 되도록 큰 회심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러나 천년기간의 끝에 사단이 잠시 풀려나고 곡과 마곡이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멸망될 것이며 사단이 지옥에 던져지며 그 후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교회는 하늘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상에 머물러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으로서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 말하는것, 이것이  바로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돌아오기까지 회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후에 회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간에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천년왕국기간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지상이나 하늘에서 또는 두 곳 모두에서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있다.) 어째든 이 견해는 기독교 초기 3세기까지는 상당히 널리 보편적으로 알려진 견해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그 천년을 교회의 시대로 해석함으로써 그 논쟁을 침묵시켰고 전천년주의자들이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에 의해서 다시 나타났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정죄를 받았다.
이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계시록 20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들은 적어도 두 번의 부활과 두 번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여러가지 차원의 종말론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천년왕국에 대한 이론으로는 3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전천년설로 천년왕국이전에 예수의 재림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후천년설로 천년왕국이 먼저 이루어 지고 그 다음에 예수의 재림이 온다는 것이다. 세째는 무천년설로 성서에 나오는 천년왕국은 단지 상징일 뿐 실제로는 없다는 이론이다. 이 세가지 형태의 천년왕국설은 기독교의 역사에 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기원은 19세기 영국의 다비(John N. Darby)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세대주의적인 천년왕국은 천년왕국이전에 예수의 재림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천년설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역사를 여러세대로 구분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세대주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기존의 전천년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배경을 살펴보면 근대복음주의의 또 다른 특색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 세대주의의 창시자인 다비는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였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의 성직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영국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는 커년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대주의는 원래부터 기존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근대복음주의는 교회에 대한 세속정치의 개입을 반대하며,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다비의 세대주의가 미국에 들어 온 것은 19세기 후반에서이다. 19세기 후반의 미국교회는 도시화로 인한 사회의 타락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한 전통적인 복음의 혼란이 심했다. 이런 상황을 사람들은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과 재림을 강조하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널리 퍼지게 토양이 마련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들어 온 세대주의는 달비와는 달리 교회를 극단적으로 보지 않고, 비록 현재의 교회가 타락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는 이런 종말론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19세기말의 대표적인 부흥사 무디를 들 수 있다. 또한 무디를 중심으로 일어 났던 19세기 말의 선교운동도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2) 각 천년왕국주의설의 차이점




 (3) 전천년설의 특징

➀ 전천년설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미래주의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이 해석방법에 따라, 요한계시록 20:1~6절에 기록된 천년이란 기간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이 전천년설과 다른 천년설을 갈라놓는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➁ 전천년설의 핵심은 1000년간에 걸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통치의 개념이다. 천년 왕국은 이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의 기간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자 가운데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이는 그것을 정확히 문자적으로 1000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이들은 그것은 단순히 긴 기간으로 이해한다.

➂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며 가시적인 재림에 의해 격변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나 발전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거나, 인간의 노력 또는 사회적 개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약화된다. 따라서 천년 왕국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➃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장의 두 부활을 동일한 유형의 부활, 즉 육체적 부활로 해석한다. 그것은 천년기간에 일어날 두 다른 집단의 부활, 즉 성도와 악인의 부활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첫 부활에 참예하여 천년 왕국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반면, 악인들은 천년 왕국이 끝난 후 부활한다. 래드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모두 육체적 부활로 이해했는데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동사 ‘에제산’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모두에 똑같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➄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의 순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여러 형태로 나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그리고 세상의 종말 이전의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있으리라” 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일치하지만 교회의 대환난 통과와 휴거의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휴거나 대환난 전에 있으며 교회는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은 휴거는 대환난 끝에 있으며 교회는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자는 천년 왕국의 성서적 근거를 주로 구약성경에 두는데 비해 후자는 그것을 오직 신약성경에만 둔다.





2. 전천년설의 입장 :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을 중심으로         (2005101036 신4 박성현)

 (1) 서론

  먼저 천년왕국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인 요한 계시록 20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먼저 저는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주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광열 교수님의 교리시간에 배우기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제외한 나머지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창조도 경험하지 못했고, 앞으로의 최종 종말에 대한 것도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이기에 견해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무엇이 맞다 틀리다, 정죄보다는 학설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전천년설의 입장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이라는 것은 교회 역사의 주류적 천년왕국설으로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 다음에 천년왕국이 땅위에 있고 그 후에 영원한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고 천년왕국 이후에 영원한 상태가 온다는 것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같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다른 점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유대인 중심의 왕국으로 팔레스타인에 성전과 제사제도가 회복된다고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전천년설 입장에 의해 20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을 중심으로

  조지 래드가 전천년설을 지지하고 있는 학자인데요. 조지 래드는 성경이 이런 지상적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이 계시록 20장 1-6절이라고 인정합니다. 조지 래드 뿐만 아니라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20장과 19장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19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20장에서는 재림 후에 일어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계20장의 첫 세절은 그리스도가 재림 후 천년기 동안에 있게 될 사단의 결받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래드는 주장합니다.

➀ 계 20장 1절 :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1절에 보니 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천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계9:1)
  여기에 그 천사가 다시 나타납니다. 9장에서는 무저갱의 귀신의 무리를 풀어주는 천사였다면, 20장에서는 큰 쇠사슬로 마귀를 결박하는 것입니다. 이 쇠사슬을 문자 그대로 쇠사슬이라고 믿는 사람은 세대주의자들 이외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천년설에서는 이 쇠사슬이 마귀를 패배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무천년설은 사탄을 결박할 수 있었던 복음의 능력이나 성경의 능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전천년설의 해석이 더 잘 어울린다고 보여집니다.


➁ 계 20장 2절 :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2절에 보니 그 천사가 용을 잡았다고 표현합니다. 이 용은 상징적으로 사단을 말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박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천년설의 래드의 경우 사단 결박은 명백한 상징으로서 사단의 힘과 활동들을 과격하게 억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무천년자인 월칵은 사단 결박에 대한 복음서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면서 예수님이 성육신 하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왔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20장 2절의 사단 결박은 바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무천년자들은 계시록 12장에서 나오는 하늘로부터의 사단의 추방과 20장에서의 결박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전천년설 입장에서 그것은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비슬리 머리의 글을 인용하면, 12장 9절에서 그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던져졌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땅의 거주자들에게 화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12:12)
  따라서 용이 남자아이를 낳은 여인을 추격하여 그녀를 압도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용은 전면전을 개시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12:17)

  그 다음 장은 용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이 전쟁을 어떻게 심화시키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20:1절 이하에서는 다른 사상이 나옵니다. 20장에서 용은 그 천년이 마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도 않되지만 그 상징적 그림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도록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즉 계시록 12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강력한 효력, 즉, 사람들을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작하는 효력에 대한 묵시적 그림을 제공하지만, 계시록 19장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재림에서의 능력, 세상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승리로 이끄는 능력에 대한 그림이라는 말입니다. 즉, 무천년자들의 입장이나 후천년의 입장처럼, 만약 20장 2절-3절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단의 활동에 대한 묘사라면, 그것은 12장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비슬리 머리는 지적합니다.

  알란 존슨도 12장과 20장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12장 9절에서는 사단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 속이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이후에 20장 1절-3절 말씀은 사단이 땅으로부터 만국을 속이지 못하는 장소로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12장에서 사단이 땅에서 활동하는 기간은 ‘짧은 기간’으로 되어 있으나 20장에서는 천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12장에서 사단이 땅에서 매우 활동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감옥에 있습니다.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신대원 권성수 교수님은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월칵이 20장2절의 사단 결박을 마태복음12장 28절의 귀신 축출사건과 연결시키지만 성경 해석의 원리상 20장은 19장과 20장의 근접문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전체 문맥에서 예수님이 사단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 분명하나, 우선 사단 결박을 계시록의 문맥에서 해석하는 비슬리 머리의 입장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절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년에 대하 기간의 이해입니다. 세대주의자는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 그대로 이해를 합니다. 또한 무천년설을 주장한 어거스틴의 경우도 천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세1000년이 지나도록 재림이 없는 것을 보고 천년을 상징적으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자인 래드의 경우도 계시록의 숫자가 분명히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천년은 문자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는 역사적 전천년설도 있으나 계시록이 상징적인 것을 생각했을 때에 래드는 1000은 10의 세제곱으로 이상적인 시간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래드는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분명히 실제의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상 천년은 무한정 계속되는 기간이 아니라 제한된 기간인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천년은 일정기간이고 이후에 사단이 잠간 놓이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➂ 계 20장 3절 :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앞서 말했듯이 전천년설에서는 19장과 20장을 시간적 연속성의 상에서 해석을 합니다. 래드는 19장은 바벨론의 멸장 19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 그리고 20장에서는 사단 자신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악의 삼두체제인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사단 가운데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19장에서 파멸하고 두목인 사단은 20장에서 결박된다는 것입니다.
  무천년의 경우 이러한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에스겔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본문의 문맥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천년을 주장하기 위해서 계시록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와서는 안될 것입니다. 도움은 되겠으나 본문의 흐름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무천년설의 경우 사단 결박을 사단의 미혹 활동의 제한으로 보고 이것을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초림과 재림 사이 현 시대에 사단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3절에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들어가고 고후4장3-4절에서 사단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고후 11:14에서 사단이 광명의 사자로 가장하여 활동하고 살전2:18에서 바울은 사단이 자신의 방문을 막았다고 합니다. 벧전5:8에서 사단은 현시대에 결박된 자가 아니라 우는 사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엇보다 같은 책인 계시록 12장에서 14장을 보면 초림과 재림 사이의 사단의 활동이 나타납니다.
  20장 8절에 보면 결박과 감금으로 미혹을 하지 못하던 사단이 풀린 후에 다시 민족을 미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래드는 이 때의 미혹은 적그리스도하에서 이미 나타난 반란과 같은 대 메시아 반란을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의 사단 결박은 주님의 지상사역에서의 사단 결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사단 결박은 사단의 완전한 무활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무저갱에 감금되었다는 것은 사단의 모든 활동들이 무력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단이 인류 역사를 통해서 했던 바와 같은 미혹활동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단이 천년동안에는 만민을 미혹한다거나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잠깐 놓이리라고 말씀하는 이 부분이 무천년설의 해석을 따라서 20장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부분과 연결하기가 어렵다고 래드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번의 승리이며 영속적인 효과를 가진 것이기에 사단이 다시 풀려나는 식의 승리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환란(일정기간)
그리스도의 재림
사단 결박(장기간)
미혹제한
사단석방(잠시)


사단결박(초림-재림) 복음의 보편전파
대환란(단기간)
그리스도의 재림


➃ 계 20장 4절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4절부터 6절까지의 해석은 전천년설의 해석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래드는 4절 말씀이 천년기 동안에 이 땅 위에서 부활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기서 살아서 란 단어를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의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4절은 신자들의 육체부활 5절은 천년기가 끝날 무렵 불신자들의 육체부활을 묘사한다고 생각합니다.
  래드는 4절에서 보좌 위에 앉은 자들은 모든 성도들로 이들에게 심판이 주어졌고 순교자 그룹은 성도들 그룹보다 더 작은 그룹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좌에 앉은 자가 성도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구절은 계2:26, 3:21이다. 5:9-10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피로 사신 자들, 곧 성도들이 땅에서 다스릴 것이라고 되어 있다. 래드는 단7:9에서도 보좌 위에 앉은 자들이 성도들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관건은 ‘살아서’라는 의미이다. 무천년설에서는 이것이 영생, 중생을 말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육체적 부활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그 문맥상 5절에 “그러나 그 죽은 자들의 나머지는 그 천년이 채워지기까지 살지 않았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천년 왕국 말기의 부활은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육체적인 부활이 명백하기 때문에 4절 끝의 살았다도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단어가 의미 변화의 표시 없이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➄ 계 20장 5절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래드는 첫째부활이 4절에 나오는 성도와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부활을 말한다고 한다. 첫째부활이 5절의 부활과 다른 것이라면 그 죽은 자들의 나머지는 첫째 부활의 경우처럼 살아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래드는 에제산이 이중적 용법 속에 두 부활이 암시되어 있다고 했다. ‘둘째 부활’은 12절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요5:29, 고전 15:24-25에서 이중부활을 암시하기는 했으나 다른 곳에서 명시적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래드는 본문에서 첫째 부활이 모든 성도들과 순교자들이었으므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지도 믿지도 않은 자들 모두를 포괄한다고 했다. 불신자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끝나기까지 일어나지 않으며 12절에 기록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기 위해서 부활한다.


➅ 계 20장 6절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래드는 첫째 사망은 재림시에 살아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만인이 체험할 육체의 죽음을 말하고 둘째 사망은 불못에서의 영원한 죽음을 말한다고 했다. 래드가 지적한 대로 본문의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이 타는 호수로 묘사되어 있고 그곳은 그곳은 또한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영원히 밤낮 고문을 당하는 곳이다.
  래드는 또한 본문의 복된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존전에 접근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메시아 왕국의 다스림에 동참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래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통치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성도들은 부활체 상태에 있을 것이고 ‘땅의 사방 백성들’은 자연인의 상태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래드는 천년왕국에 이렇게 구속받은 자들과 구속받지 못한 자들이 섞여 살 것에 대해서 난감해 하고 있으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 부활체로 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연체로 그분과 교제했다는 점을 들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3) 결론

  래드가 전천년설을 말하면서도 천년왕국의 성격에 대해서 난감해 하는 것은 그의 심경을 정직하게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전천년설자들이 본문 주석을 통해서 재림 후 지상의 천년왕국을 주장하나 그 본질을 생각할 때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주석을 할 때에 지상의 천년왕국이 적절한 것 같으나 막상 그 본질을 생각하면 미로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부활체 신자들과 자연체의 불신자들이 섞여 사는 것인지, 신자들 간에 다스림의 차등이 있는지 고민이 된다.

  중생의 첫째 부활을 한 초림과 재림 어간의 성도들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는 무천년설이 신약 전체의 사상인 것은 분명하나 계시록 본문의 초점인 것 같지는 않다. 본문의 첫째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기보다 육적인 부활인 것이 본문 자체 내에서와 뒤에 나오는 백 보좌 심판 전의 부활과의 비교해서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주석적인 차원에서는 육적인 부활,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설의 경우 그 본질에서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사단이 무저갱에 갇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도는 작지만 여전히 죄와 죽음이 있는 시대가 올 것인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래드는 사단 결박을 전적인 무활동으로 보지 않고 과격한 제한이 있는 것으로 보나, 이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초두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성경 해석에 관련되어 있고, 이단의 문제가 아닌 이상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3. 전천년기설이 시대에 미친 영향                              (2006101089 신4 최지원)     한국 교회의 종말론은 일제의 암흑기 및 한국전쟁을 전후한 절망의 시기에 현실 도피적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시작되었다. 그 종말론은 요한계시록의 환난과 천년 왕국이 세상 끝 날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실현될 것을 주장하는 전천년기설 특징으로 점철되어진다. 그것은 한국교회 초기의 선교사들이 근본주의(Fandamentalism)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가 혼합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교회 개척자들의 설교와 그들을 양성한 신학교육이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 전천년기설의 대두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가장 크게 대두 되었던 후천년기설과 낙관주의가 쇠퇴한 후 그리스도 재림만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믿는 역사적 전천년기설(Historical Premillennialism)이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6장 이후의 내용이 미래적 예언이라고 믿은 데서 미래적 전천년기설이라고 불렸고, 이 예언들이 교회시대가 아닌 그 후의 다른 시대에 이루어진다고 함으로 시대적 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까움을 볼수록 세계 복음화와 선교의 필요를 깊이 느끼게 되고 세계를 향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열심 있는 목회자들은 선교사 훈련원을 만들고 세계 복음화에 진력하게 되고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2) 전천년기설이 초기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19세기에 복음을 들고 한국에 상륙하여 한국교회를 개척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의 특징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였으며 청교도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보수주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기설의 견해를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부흥사들의 사경회에서의 요한계시록 강해는 19세기 미국의 교회가 가장 복음적이고 선교열이 고조되었을 때 일어났던 초교파적 부흥운동의 영향에 따른 신앙고백과 일치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세상 종말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내세적 종말 신앙이었다. 이들의 내세 지향적인 종말론적 신앙은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는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나라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상황에 살던 초기의 한국 신자들 가운데 구원의 복음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초대교회 성장은 내세적 종말신앙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전천년기설이 한국교회의 신학형성과 변천과정에 미친 영향     무디(D. L. Moody)와 같은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을 주장하는 부흥사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찾아온 초기 선교사들은 그 신앙이 청교도적이고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 이었다는 것을 앞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신학을 바탕으로 뿌리내린 한국교회도 1907년 한국교회의 오순절 운동이라고 하는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의 중요 축이 바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기설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의 종말론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긴박한 현실에 편승하여,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계시록 20:1~6에 언급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온다는 전천년기설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당시 목회자들의 설교는 시대의 고통과 압박 속에서 허탈해진 이들에게 소망을 주었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암울한 시대적 환경을 극복하고 민족과 교회에 소망과 확신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심지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자들이 감옥의 고통을 이기고 순교의 길을 택할 수 있는 믿음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6.25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몰락과 파탄과 궁핍 등의 사회적 비극과 성직자들의 이권 싸움과 교회의 분열은 전천년기설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절박한 기대를 가지게 했고 그것은 또한 교회의 기존 체계를 거부하는 현상과 신흥종교의 등장을 부르게 되었다.(통일교 등) 이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전천년기설을 변형시켜 자기를 좇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있고 내세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현실의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고 미혹하여 정조와 노동력을 값없이 제공하도록 하고 재산과 생명을 빼앗는 일까지 하는 등 종말론을 악용하였다. 그것은 또 가깝게 현대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은 많은 사이비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4). 전천년설이 시대에 미친 영향 대한 평가     세대주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준 것도 많이 있다. 그들의 문자적 해석 원리와 전천년기적 종말사상은 초기 한국교회가 보수적인 신앙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므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배척하고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일조를 했다. 또한 전천년기설은 한국 기독교를 형성한 종말 신앙의 기반이 되었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로서 놀라운 부흥 운동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천년기적 종말 사상은 현실의 삶을 부인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더 강조하여 신앙의 이원론적 사고를 잉태케 하였다. 이러한 위험적 요소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극단적인 염세주의 또는 피안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고 사회가 위기 상황을 맞을 때 마다 시한부 종말론이 대두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더 나아가 보수적 복음주의를 가장하여 배타적이며 분리적 성격을 가진 근본주의 사상을 쉽게 허용하므로 교회의 분열을 자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종말론에 관련된 사이비 이단을 양성했고, 성도 개개인을 이원적 사고 구조로 만들었으며,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초기에 들어온 신학 사상에 지나치게 얽매여 그것을 수구하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으로 여겨 스스로 그 범주 안에 갇히므로 더 많은 진리를 깨닫는 데 장애물이 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전천년기설을 바로 이해하고 장점은 발전시키고 단점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지혜로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바른 성경연구 위에 올바른 종말론적 삶을 살므로,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셔도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청지기적 자세를 소유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변형된 갖가지 사이비한 사상의 대두를 막는 길이며 한국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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