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계시론
1. 인식의 원리
-인식: 앎, 하나님의 대한 지식(기독교 인식론)
-원리: 원천, 수단, 방법, 길
*외적 인식의 원리: 계시(revelation) 원천(수단, 방법, 길)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심
-성경 66권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남
*내적 인식의 원리: 믿음(faith) + 거듭남, 마음의 청결, 하나님의 뜻을 행함, 성령의 기름부음
-믿음: 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세상의 인식론과의 차이점
-안센: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마음의 청결: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깨끗한, 욕심이 없는
-키에르케고르: 한가지만을 소원하는 것-하나님 한 분만을 원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행함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과 앎이 삶가 관련되어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 요일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의 조명
-칼빈은 성경+성령 충만을 강조했다.
☆믿음으로 안다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앞서 빛을 비워주시고, 내 스스로 또한 전심전력함을 의미한다.
2.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신론에서 다룸
1)불가지론자들의 답 → 알 수 없다.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은 여러 근거로 부정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부정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들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곧 기본적으로 인간의 정신이, 자연 현상들을 넘어 있는 것과 그 배후에 있는 어떤 것, 초감성적이고 신적인 대상들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불가지론과 무신론의 차이: 불가지론자들은 신의 존재 여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이런 입장의 사람들에게 헉슬리(Huxley)는 ‘불가지론자(agnostics)'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용어: 불가지론(agnosticism) cf. Gnosticism(영지주의)
*(다양한) 불가지론자들
-고대 그리이스 철학의 회의론자들
-흄(David Hume): 현대 불가지론의 아버지
-칸트(I. Kant): 순수 이성은 현상들만 알 수 있을 뿐 물 자체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이론적 지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밀턴(William Hamilton): 칸트의 지적 불가지론을 공유
-꽁트(Comte): 실증주의의 아버지
-스펜서(Herbert Spencer): 현대 과학적 무신론의 대표자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영국의 생물학자로, ‘불가지론’이라는 용어 처음 사용
2) 그러면 바른 대답은?
-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 둘 다 치우침
┎전혀 알 수 없다 (불가지론)
┖완전히 알 수 있다
- 정답:┎본질에 있어서는 알 수 없으나
┖계시된 하나님은 알 수 있다.
3) 이를 잘 표현한 문장
-오르 박사 (Dr. James Orr)
. "우리는 (절대) 존재의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시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적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의 존재의 심오함 속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세계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으신 분으로 알 수 있는가에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심 속에서, 그리고 절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 자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고 겸손하게 주장한다.”
(We may not know God in the depths of His absolute being. But we can at least know Him in so far as He reveals Himself in His relation to us. The question, therefore, is not as to the possibility of a knowledge of God in the unfathomableness of His being, but is: Can we know God as He enters into relations with the world and with ourselves? God has entered into relations with us in His revelations of Himself, and supremely in Jesus Christ; and we Christians humbly claim that through this Self-revelations we do know God to be the true God, and have real acquaintance with His character and will.)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유사한 표현 사용
.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분이 계신 그대로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쳐지는 모습으로(not as he is in himself, but as he seems to us)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1.17.13).
.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그대로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하시는 그분의 모습(not as he is in himself, but as he is toward us)”을 계시해 보여 준다(1.10.2).
. “유모가 아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혀짧은 소리로’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식의 말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함을 명확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미약한 역량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높이 계신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무한히 낮추셔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1.13.1).
4) 성경 구절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는 했지만, ‘알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토저(A. W. Tozer): ┎(신체적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 즉, 알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더 알아갈 수록 → 더 사랑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말한다 해서 잘못된 것 아니다.
. 예를 들어 바울같은 경우 ‘내가 그 분을 안다’고 담대하게 말했다.
. 딤후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물론 이 앎은 교리적(지식적) 앎 + 체험적 앎
-이러한 교리적(지식적)+체험적 앎은 →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산출
-cf. 우리는: 지식적 동의 → 삶 속에서 부딪치면 완전히 흔들려 버린다.
5) 정리(해 보자)
a) 계시된 하나님은 알 수 있다.
-본질에 있어서는 알 수 없으나, 계시된 하나님은(즉,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계시해 주신 만큼만 알 수 있다.
b) 참된 지식
- 위 Orr 박사의 표현: “진정으로”
- 즉 그 지식의 정도는 ┎상대적이고 부분적이지만,
┖그럼에도 참되고 정확한 지식이다.
c) 충분한 지식
- 나아가 이 지식은 충분한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충분하다’ 함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그분과 동행하며 생명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충분하게 우리에게 알려(=계시) 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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