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종교다원주의

예림의집 2014. 9. 19. 19:56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 교회가 가져나가야 할 신앙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종교 다원주의(宗敎 多元主義 ; religious pluralism)’가 논쟁이 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기독교 하나 뿐이 아니고 다양하며 그 수가 많은데 왜 기독교만이 종교라고 하느냐?"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종교가 과연 구원에 하나 될 수 있느냐?"라고 하는 '구원의 진리'에 관한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기독교만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종교들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진리를 계시하여 주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종교는 그 모든 종교들이 아니요 오직 기독교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는 이교화 된 거짓 기독교를 이름이 아니고 참된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릅니다. 왜 이것을 이 시점에서부터 거론하는가 하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언제 예수님께서 기독교란 종교를 창시하였는가 라고 말하면서 유대교에서 카톨릭과 기독교가 나온 것이라고 하고 또한 기독교에서도 여러 교파의 종교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기독교도 다원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이것의 한문(漢文)이 의미하듯이 하나의 '원'(元), 곧 '일원'(一元)이 아니고 많은 '원'(元), 곧 '다원'(多元)입니다. 여기서 '원'(元)은 근원적이고 본질직인 진리를 이름으로서 '다원'(多元)은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라는 사상, 그러니까 모든 종교는 각 종교가 갖는 특성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종교가 말하는 진리[교리]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 종교들이 말하는 진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결국에 있어서는 차별성이 없이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종교 다원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 규명과 그 기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이것의 이해는 역사적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중이 쉽게 접근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이나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유럽에서 발생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시기는 20C 초로 봅니다. 그런데 다원주의란 말이 있기에 앞서서 먼저 '포괄주의적인 견해'(inclusivist view)가 있었습니다. 이 견해는 1913년에 인도에 파송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ohn Farquhar에 의해서 처음 제시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힌두교의 성취이며 면류관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힌두교의 종교적 신앙과 행위는 파괴되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러한 주장을 사실상 교회의 핵심적인 견해로 가졌습니다. 이런 견해 속에서 독일의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다원주의적(pluralist) 접근이 발전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종교도 자신만의 종교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각 종교들간에는 상호 보완적이며 발전적인 작용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선교에 적용되어 세계 종교를 출현시켰기 때문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은 서구 유럽의 계명주의에 대한 반동적인 사상에서 찾습니다. 유럽에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이라는 반 기독교운동이 발생하면서 여기에 회의와 의구심을 품은 지성인들 사이에는 이성으로 진리를 보고 이성으로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이성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이성으로 모든 종교를 보고자 하여서 타종교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자연스럽게 종교들을 비교 연구하는 비교 종교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성에 기초한 비교 종교학은 모든 종교들을 상대적이나 일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서 '공통성'(共通性) 있는 종교의 개념으로 이끌어갔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의 하나로 전락하여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신앙의 상실을 초래하였습니다. 비록 이러한 경향은 소수의 지성인들에게 있었던 현상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 갖는 관계에서의 비판과 자성 그리고 종교적 논쟁 속에서 대중적인 경향으로 점차 자리잡으면서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 대두되었습니다.

 

지금은 21C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 교회는 한창 종교 다원주의 가지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우리네 교회에서 쟁점화 된 것은 이것이 서구의 유럽에서 시작된 만큼 결코 자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 일어난 견해인 종교 다원주의를 가지고 지금 우리네 교회는 진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제서야 종교 다원주의가 우리네 교회에 들어와서 비로소 겪는 것이 아니라 이미 6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말해진 것은 스위스에 유학하여 야스퍼스에게서 종교철학을 배운 윤성범에 의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국내에 돌아와 한국종교학회를 창설하고서는 단군신화와 삼위일체, 퇴계의 성사상과 성육신을 연결시키면서 한국종교와 기독교의 연결을 추구하고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알타이저(Thomas Altizer)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면서 동양의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진리인 성육신과 모든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에 일치합니다. 그 이후 80년대에 들어서서는 변선환, 김경재에 의해 주도되어 종교 다원주의가 가르쳐지고 점차 정착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가 종교 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여기에 발 맞추어서입니다. 즉 종교 다원주의에 교회의 위기와 위협을 느끼고 여기에 대응하는 것에서 였습니다.

 

우리네 교회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서구의 유럽에 비해서 좀 특이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종교 다원주의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여서 이를 종교 사상으로 가져나갔습니다만 점차 이에 대한 논쟁과 여기에 따른 교회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종교 다원주의가 갖는 정당성을 피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새롭게 주장되는 견해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종교 다원주의의 역사적 관찰에서 보면, 세상은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의 종교가 자신들이 말하는 진리나 가치를 절대적인 것인양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W.C.C.의 책임자였던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는 1981년에 'The Lordship of Jesus and Religious Pluralism'에서 말하기를, "어떤 종교에 근거하여 절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절대주의만큼 그 결과가 위험하다"고 하였습니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성의 진리를 말하는 것은 서양의 전투적 사상으로서 버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철학 교수인 혹킹(Hocking)은 1932년에 개종을 의도하는 기독교 선교는 포기하고 힌두교도는 더 좋은 힌두교인으로, 유교도는 더 좋은 유교도가 되게 하는 선교를 강조한 선교 보고를 제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W.C.C.는 1981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세상으로"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규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W.C.C.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행동화하기 위하여서 이미 1975년 나이로비 총회 때 불교와 유대교와 회교와 시크교 지도자를 초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다원화 사회임을 상기하고서 신앙의 공동체는 자신의 언어를 말하게 하며 자신의 정체를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고 성명서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졌듯이 다른 나라의 민족에게는 그들의 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 그러니까 다른 이름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종교에는 각각 구원의 계시가 역사하며 따라서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존 힉은 "내가 만일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며, 이집트에서 태어났다면 모슬렘교도가 되었을 것이고, 씨일론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불교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기독교가 구원의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의 전체적인 종교 생활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세대에 태어난 것으로 모순된 것"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며 주님으로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인류의 구원과 선을 찾으신다고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대다수의 인류를 제외한 특수한 방법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모순이다. 인류의 역사 이래 대다수의 인간이 그리스도 이전에 태어났거나 기독교 국가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기독교가 구원 진리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은 배타적 구원론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폴 니터 또한 모든 종교는 다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진리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칼 바르트에서 보는 '신보편 구원론'과 알미니안 관점에서의 '만인 구원론'과 연계되기도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이 틀 안에서 하나의 견해를 이끌어 냅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는 각각 구원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각각의 종교를 통하여서 구원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길이 설사 달라서 그에 따른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래서 종교가 이런 저런 종교의 이름을 띠고 있을지라도 목표는 같기에 차별은 없으며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하면 본래 하나의 종교에서 세상 이곳 저곳에서 여러 모습으로의 종교로 존재해 오면서 각각의 종교가 지닌 진리 특성에서의 구원을 말해오는데 그 모든 구원의 통로는 결국은 하나의 구원으로 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경우 모든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진리는 종류별로는 다양하지만 구원의 본질과 그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목표에 있어서는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가 말하는 구원관은 다음과 같이 정의가 됩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의 길로 통한다."

 

이러한 견해는 얼마 전에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는 이 강의에서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라고 말하였는가 하면, 강의가 끝난 후에 가진 질의응답에서는 ""불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 중 똑같은 것이 매우 많다"며, "일부 목회자들이 우리 종교가 평등하면서도 차별성이 있다는 종교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종교에 대해서 비평하는 유아독존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질의자가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기독교외 예수님, 하나님 외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는가?"라고 하자, "저는 그 차별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는 불교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불교도 뛰어 넘을 수 없고 기독교도 뛰어 넘을 수 없으니까 그 차별성은 차별성대로 인정을 하고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말하는 구원도 우리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비평할 수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그것을 우리가 불교는 불교대로 존중을 하고, 인정을 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의 구원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을 하고 종교로서의 평등한 공통분모에 서서 차별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나가자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집안에서도 우리 집안 식구들 중에도 아직도 불교를 믿는 열렬한 식구들이 있거든요 아무런 서로의 저항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동생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확실히 믿으니까 존중하고 인정하고, 나는 기독교 목사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차별성을 인정하지 절대 진리라고 혼자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순복음 교회측에서는 조용기의 이날 특강 내용을 기존의 "종교 다원주의"와는 전혀 다르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용기가 말한 구원관은 각 종교들이 지닌 구원이 "서로 다른 종교간의 구원과 진리체계"인 점을 감안하여서 그 차이점을 인정하고 종교간에 대화에 있어서 서로 각 종교를 평등하게 대하자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용기 목사는 불교 나름대로의 구원과 진리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그것들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동의한 적은 결코 없다. 조용기 목사가 종교간 구원체계의 차이성을 언급한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소위 사마르타, 파니카, 폴 니터, 변선환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란 '신(神) 중심의 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마호멧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같은 본질의 구원(이 구원은 神이 주는 것이다)을 얻는다는 것인데 조용기 목사의 말은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의 구원을 상정하고 이 구원에 이르는 여러 길과 가르침으로서의 종교들을 말한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그 구원들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번 강연에서 질문자는 종교다원주의를 유도하는 입장에서 질문하였으나 조용기 목사는 각 종교들의 구원체계들이 지닌 차이성을 언급하였다. 이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방법과도 같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의 상황을 전제할 때에 국한해서 "내 것만의 절대 진리는 없다."고 피력한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란 무엇인가? '대'(對)를 끊는다는 것, 즉 남을 상대하지 않고 남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조용기 목사는 '나만의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아예 남과의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의 상황 안에서 언급된 "내 것만이 절대 진리라 할 수는 없다."란 말이 종교 다원주의적 구원관에서의 "절대 진리가 없다."는 주장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말이란 사상적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상황적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문장의 말이라도 이 말이 상황적 배경에서 언급되었는지 아니면 사상적 배경에서 언급되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함은 상식이다.

 

종교 다원주의적 구원관에서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말은 다원주의적 사상적 배경에서 주장되는 것이지만 조용기 목사가 언급한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말은 대화가 진행 중인 상황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구원관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에 그 본질이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

 

이것에 의하면, 조용기는 마치 기독교의 구원 진리에 확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면면히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 체계에 있어서 불교가 자신들 종교의 관점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단연코 '구원의 진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즉 불교가 구원 체계를 그들 종교의 세계 속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것에 의해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을 도무지 얻을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구원 체계를 상호 인정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교간의 구원과 진리체계"인 점을 감안하여서 그 차이점을 인정하고 종교간에 대화에 있어서 서로 각 종교를 차별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거듭해서 "기독교와 불교는 똑같은 점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가령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같은 것이라는 것이죠. 그가 기독교는 유아독존식으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곧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호의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서로 "통"(通)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과는 각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교리에서의 차이점 때문에 그 말하고 가르치는 교리[진리]가 다르겠지만, 한 가정 안에서도 기독교인과 불교인이 가족으로서 서로 무리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서로 다른 구원과 진리체계에 의해서 도달하는 구원의 목표 지점은 결국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시종일관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는 입장을 강조하면서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같다는 것이다"고 말하여 참석한 스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는 것에서 중생들이 도달할 구원의 세계가 있으며, 기독교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에서 성도들이 도달할 구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어떤 구원의 세계이냐 하는 것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가 기독교의 것과는 다른 만큼 다르겠지만, 각 종교가 말하는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본질과 이 목표에 이를 심사로 신앙을 갖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목표 지점에 이르면 되는 것입니다. 굳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즉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인정하고, 서로 상호 호의적으로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 나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소위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가 이런데 과연 주님의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종교 다원주의와의 논쟁을 갖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입장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구원의 진리를 재차 확인하는 것에서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무엇이라고, 또한 어떻게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온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종교가 존재합니다. 이는 굳이 각 나라와 민족들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의 이름들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수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단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의 수(數)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속성과 정체성으로 나아간다면 단연코 종교는 여럿으로 다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비록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이 사실로서 자신들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 나라와 민족에 존재하는 종교들을 비교 종교학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어느 종교가 참되고 거짓되냐고 하는 것을 논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만 사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각 종교들이 말하는 교리에 있어서 집중될 수 밖에 없는 구원 문제를 풀 길이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들이 나름대로 구원을 말하는 것을 인정하고서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하겠다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많고 많은 종교는 과연 다들 참되며, 따라서 사람들이 저마다 믿는 신들이 구원을 주는 종교로서의 계시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저 옛날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렇게 외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갈멜산 정상으로 불러모으고서는 "여러분은 언제까지 이리저리 흔들릴 작정입니까? 만일 여호와가 참신이라면 그분만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 신만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호와의 선지자들 중에서 남은 사람은 나 한 사람 뿐입니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는 450명이나 있습니다. 우리 이제 결판을 냅시다. 황소 두 마리를 갖다 놓고 한 마리씩 제사를 지냅시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한 마리를 골라 잡아서 장작 위에 올려 놓고 제사를 드리는데 불은 붙이지 마십시오. 나도 남은 황소 한 마리를 잡아서 그들과 똑같이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신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를 부르겠습니다. 어느 편이든지 불을 보내 응답해 주는 신이 참 신이십니다."(왕상 18:20-24) 우리가 아는 대로 바알 선지자는 아무리 목청 높여 바알을 불렀어도 결코 그 신에게서 그 신이 살아있다는 아무런 능력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가 부르는 여호와께서는 응답하셔서 불을 내려 제단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불태웠습니다.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하며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불렀는지 아십니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게 하고서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시키시는대로 제가 오늘 이 모든 일을 수행한 것인 줄 이제 모든 사람이 알게 하소서. 주님,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이 백성이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그들이 오늘 알게 하소서!....."(왕상 18:36-37).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과 여호와 중에서 누가 참신이신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고 알게 하여서 그 신에게 믿음에 있게 하였습니다. 그 참신이 어느 신이었는가요? 바알이었습니까? 여호와이셨습니까?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사실에 대하여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가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을 벌였고 날마다 광장에 나가서 거기에 나온 사람들과도 토론을 하였는데 이때 바울이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말을 말하면 바울을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면서 "우리보고 다른 나라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어디 당신이 말하는 새 교훈에 대해서 들어봅시다."할 때 그들에게 바울은 "아덴 시민 여러분들이여,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매우 종교심과 신앙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곳 시내를 다니며 여러분들이 세워 놓은 많은 재단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쓴 것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신이 어떤 신인지조차 모르고 섬기고 있습니다. "하면서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하나님을 인간들의 손으로 금이나 은이나 또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낸 우상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가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무지를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설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행 17:16-31). 선지자 엘리야나 사도 바울이나 한결같이 누가 참신이신가를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우상이 참신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깎아서 만들어 낸 신은 우상(偶像)에 불과하기에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에게 참신으로 돌아설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을지라도 사신우상(死神偶像)인 한에는 참신이 아니며 여기에서는 아무런 생명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무슨 구원의 진리가 존재할 리가 만무합니다. 어떤 내용으로 구원의 지식을 말하며 이를 교리화 시킬지라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거기에 구원의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하여서 세상에 드러내셨으며 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한 속죄 사역을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만 다루어집니다. 기독교[참된 그리스도의 교회; 이하에서 기독교를 언급할 때는 이 교회의 개념에서 말하는 것임]가 종교 다원주의의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서, 그래서 다른 종교 앞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절대적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런 까닭 때문입니다.

 

둘째,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상호 호의적이지 않고 배타주의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을 문제삼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른 종교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가요? 대광학원의 교목인 류상태는 "한국 교회는 ‘배타적 구원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래야 할까요?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으며, 다른 종교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구원관을 갖고 있는 한,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와 세계에 끊임없는 갈등의 불씨를 퍼뜨릴 것이며, 공격적인 선교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언젠가는 이 땅, 작게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 넓게는 지구촌 전체에, 종교 전쟁이 일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타적인 구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열정과 필요에 의해 도입된 도그마(교리)로서, 현대 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되어야 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궁극적으로 계시해 주신 '사랑’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선포하셨던 참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못한 채, 수많은 갈등과 분열, 싸움을 양산해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말이죠. 기독교는 배타적 구원관의 성격을 띠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류상태 목사님의 최근 글입니다'를 올린 분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다른 종교를 구원의 통로로 인정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종교 가진 이를 멸망의 길로 간다고 말리거나 배척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그리고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을 청할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으며, 누가 주님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성경은 종교에서 분명 이교도들의 종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종교는 곧 이방종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유일신 종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종교를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관에 의해서 계시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가 이 종교에서 떠나 율법주의에 의한 유대인들만의 종교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유대교는 아무런 생명 없는 종교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유대교로서는 이방종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주로 계신 교회는 구원의 종교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화의 속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교화 될 때에 거기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생명을 볼 수가 없습니다. 카톨릭이 그러하며 또한 개신교일지라도 변질되고 타락하였으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세상 끝 날까지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셨으며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음부[죽음]의 권세를 가지시고 교회의 머리[주]로 계신 참된 교회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존재합니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교회의 생명체로 있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과 교단과 교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얼마든지 종교 단체로서의 형태에 불과한 기독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여기서는 구원의 진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가지시고 교회의 머리로 계신 종교가 아닌 여타의 모든 종교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띠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서로간에 무슨 상대적인 호의를 가질만한 관계가 아닙니다. 이는 종교의 실체를 서로 간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나름대로의 교리로서 표명하는 구원관을 서로 인정하고 거기에 상호 호의를 보일만한 생명 있는 진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진리에 이르면 당연히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 구원관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참신이신 하나님을 믿는가요?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의한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말하던가요? 또한 이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 사건을 말하던가요?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신을 부르든지 간에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다른 이름으로 혹이나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기독교는 다른 종교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 체계도 기독교의 구원 진리와 동일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구원 진리의 유일성을 대하면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다른 종교가 그들 나름대로의 교리를 내세워서 구원 체계를 갖춘 것 같을지라도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구원의 진리와 동일한 것이 아닌 한에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가령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설사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구원의 진리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존재론적으로나 계시론적으로나 사역적으로나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로 말해지는 천국과 지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종교 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여기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말하는 기독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 종교인 이교도들의 종교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가 말하는 기독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사 그리스도의 교회와 유사한 교리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동일한 기독론이 아닌 한에는 결코 구원의 동일한 진리로 다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셋째, 기독교[그리스도의 교회]는 다른 종교와 배타적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보겠습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사람들에게 특히 설득력 있게 다가가는 것은 선교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류상태가 한국 종교는 이웃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또한 한국교회는 공격적인 선교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는 종교간에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종교 전쟁의 빌미가 될 것이기에 이웃종교를 존중하고서 그들이 자기들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그 종교 안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종교를 갖지 않은 무종교인에게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으나 강요하지는 않고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전투적인 공격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선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어떤 종교든지간에 선택하여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여기에 그 누구도 침해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전투적인 공격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종교의 자유와 이를 선택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잠잠합니다만 어느 때는 심각한 충돌의 상태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법당의 불상이나 단군상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 자르는가 하면 페인트를 칠하는 등 크게 훼손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마치 대단한 영웅적인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나친 열심을 보이는 종교 영웅주의자의 한 단면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다른 종교가 손상을 입거나 위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는 크게 잘못 알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행위를 마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로 세우는 종교개혁을 해 나가는 것으로까지 여기는데 마치 자신이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이 해 나간 종교개혁을 자신도 해 나간 듯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그렇게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자신 안에 가장 속된 것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입니다(골 3:5). 설사 불상이나 단군상을 철저하게 부숴 버려 없애는 등의 많은 일을 할지라도 그런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죄성이 있는 한에는 결코 하나님 나라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힘쓸 일은 늘 죄성이 꿈틀거리며 죄가 역사하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주로 통치하시는 그 통치에 순종하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결코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종교가 말하는 온갖 비진리 속에서 구원의 진리가 되는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기기로 할 따름입니다. 사람들마다 이런 종교 저런 종교의 온갖 교리와 좋은 점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해 나가는 고집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종교 다원주의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의 교제의 필요성을 내걸고서 이것을 선교의 중요한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원 진리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것입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방 종교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속죄에 의한 구원의 진리가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독교[그리스도의 교회]가 구원 진리의 절대성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종교 다원주의를 배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배척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이즈음에서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종교 다원주의와의 논쟁이 더 이상 필요하겠습니까?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을 자신들의 구원 진리만을 고집하는 편협한 종교인으로 몰아갑니다. 분명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기독교라고 하면 종교 다원주의 앞에서 구원 진리의 유일성과 이로 인한 절대성을 당당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기에 사실 서로 인정하고 그래서 수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논쟁을 갖는 자체도 무의미합니다. 단지 싸움을 걸고 그 싸움에 응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그 논리에 있어서는 더욱 교묘해질 것입니다. 이런 종교 다원주의 앞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른 복음의 진리 위에 자신을 두고서 믿음의 뿌리를 더욱 견고히 내려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신앙의 보수(保守)는 그렇게 해서 되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지라도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을 좇아서 복음에서 속히 떠나는 사람들이 많기에 더욱 경계심을 바짝 조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경계하라(1)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컬어 흔히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설명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모더니즘 이후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흔히 ‘탈현대주의(脫現代主義)’ 즉 현대주의 혹은 현대성을 이탈하거나 또는 비판적으로 뛰어 넘고 극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좁은 의미로 이 말이나 이 운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해체주의’ 영어로는 디컨스트럭셔니즘(Deconstructionism)이란 말을 사용하여 ‘현대’로 표방하는 모든 것, 즉 서구 지성사에서 계몽주의시대 이후에 찬양한 인간의 이성, 과학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합리성과 인간 중심주의 등에 대하여 과격하게 비판하고 ‘해체’ 하는 지적 혹은 예술적 운동으로 말하기도 한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위에 열거한 현대성의 특징들에 대한 비판,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문화전반에 대한 언로 사용된 것은 1956년 토인비의 『역사가의 종교이해』에서였다. 그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자포자기, 도피, 표류라고 보았는데 언어, 관습, 종교 등 사회문회의 전 영역에서 아무것이나 무차별적으로 초점 없는 혼합주의와 무비판적 관용의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본질을 한가지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특징이 어느 한 개념으로 정의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로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이제 종교다원주의의 토대가 되어 절대 진리의 기준을 흐리게 하며 그 범위를 넓혀하고 있다. 현대의 현저한 특징인 다양성의 수용의 한계를 넘어 진리자체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 소고는 다원주의의 오류를 들어내고 복음의 위대한 절대성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범위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요 기본 사상을 들어내어 그에 대한 위험성을 깨닫고 진리수호를 위한 경계(經界)를 삼고자 한다.

 

2. 종교 다원주의의 개념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사회가 종교 전시장이 되어 사람들이 기독교만을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른 종교적 대안이 많아 이단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로 규정하고 이것을 이단적 명령(heretical imperative)으로 정의 하였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란 다양한 많은 종교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며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는 종교도 시장 경영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다원주의적 상황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들의 세부적인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든 간에 탈 독점적인 종교적 기업들이 고객 집단의 충성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 충성은 자원적인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정의상 확실한 것이 못 된다.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권위 있게 부과될 수 있었던 종교적 전통을 이제는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구매되도록 강요받지 않는 고객들에게 판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원주의적 상황은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 제도가 매매 기관이 되며, 종교적 전통은 소비자 상품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많은 종교 활동이 시장 경제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된다.”

 

필자가 사는 이곳 뉴욕의 조그마한 도시 후러싱(Flushing)만을 보더라도 피터 버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러 민족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가운데 각 종교들이 자유경쟁구도를 이루어가고 있다. 피상적인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바람직한 다양성의 조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원화 된 사회학적 관점일 뿐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달라진다. 단순한 다양성의 공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종교다원주의를 말할 때 그것은 다양한 종교들이 그저 단순하게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차원이 아니라는데 있다. 즉, 자신의 종교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구원과 신을 보장한다는 소위 종교의 가치중립을 주장하는 종교 신학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정의를 정확하게 한 학자는 존힉(John Hick)으로 그는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존재론적으로 많은 신들이 있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한 종교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반면 다른 종교는 잘못된 우상을 섬긴다는 가설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한 신으로 그가 만물을 창조하였고 만물의 주가 되고 다른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설이다. 힉은 이상의 세 가지 가설 가운데 현대는 부득이 세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유일성을 제거하므로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어놓고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보편적인 구원의 조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로마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카알 라아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다른 표현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며 암묵적인 신앙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므로 다른 종교들에게도 영원한 구원이 있다는 바티칸 공회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힉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20세기 최대 신학자로 서품된 칼 바르트(Karl Barth)의 핵심신학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에 피조물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여 교제하시기를 기뻐 하셨다. 그리고 교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작정하셨다. 이 동참은 창조 전에 영원에서 작정하셨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으로 그 분의 은혜이다. 그리고 모든 피조 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에 일부는 선택하고 일부는 유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를 말하면서 유기는 부정한다. 작정과 은혜란 유기도 포함된 것을 그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정의하고 제한한다. 당연히 유기를 믿지 못하는 그에게는 지옥교리가 성립될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에게는 상관이 없다. 또한 사람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모든 사람은 다 선택되었고 구원 되도록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선택을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힌두교도나 불교도나 유대교나 이슬람교도나 다 동일한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서 할 일은 전도가 아니라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구원, 곧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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