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창조 타락 구속 서평

예림의집 2014. 9. 1. 12:14

복음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요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해석하는 수단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죄에 오염된 창조세계를 현재 건강하게 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본 범주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의 정립은 복음과 하나님 백성의 선교적 소명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런 목적으로 <창조, 타락, 구속>이 쓰여 졌다.

사람의 삶은 자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사회나 개인이 가진 가치관, 인간관, 자연관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을 세계관이라 부르는데, 이 세계관은 구체적인 삶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본서는 성경적 세계관을 설명하고, 우리가 성경에 순종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한다. 성경에 기초를 둔 이 세계관은 ‘개혁적 세계관’이라 부른다.

먼저 개혁주의 세계관의 특징은 “은혜가 자연(창조된 실체)을 회복 한다”는 통찰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이란 원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구속은 재창조다. 원래의 선한 창조, 죄로 인한 창조 세계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한 창조세계의 회복을 이야기 한다.

 

 

창조의 법

창조는 이중적 이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고,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창조의 산물인 우주(cosmos:장식, ‘아름다운 배열’)이라는 뜻에서 질서를 뜻한다. 창조내의 두 법은 일반법과 특별법으로 구분하고 하나님 안에서는 두 법 사이의 긴장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법과 깊이 관련시킨다. 주권자의 말씀은 법이고, 히브리어 ‘다바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하는 경우 ‘명령’으로 번역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한다(제1의 창조). 이어지는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이미 창조되었지만 아직 형태가 주어지지 않은 그래서 공허하고 어두웠던 땅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후의 “...이 있으라”라는 주권적인 명령은 이미 창조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의 영역 안에서 여러 가지 구분을 설정하는 것이었다(제2의 창조). 그리고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무질서의 상태 즉 질서의 반대(이 해석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해석으로서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근거를 둠)를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이다. 즉 사람의 범죄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 왜곡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이다. 혼돈하다(formless)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니다. 창조의 ‘말씀’과 관련하여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등 하나님의 창조적 선언들이 ‘제2의 창조’, 즉 지상적 영역을 다듬고 여러 가지를 갖추게 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우주로 만드신 작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창조의 범위

창조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법이 성경에서 중심을 차지한다는 사실, 혹은 법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인 창조 이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조를 법과 우주의 상호 관계로 이해해야하고, 법과 복종하는 자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삶의 그 어떤 부분도 창조된 질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 전체는 전적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를 통한 계시

창조의 법을 창조된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의 총체라고 규정 했다. 이 주권적 행위는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전통적으로 일반계시라 한다. 창조의 법은 계시적이다. 지식을 나누어 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밝히 말씀하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계시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창조의 저자를 알 수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적 구조가 변화되었거나 여러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인간의 인식 능력이 부패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런 견해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을 무시하거나 우리의 분별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회복능력을 과소평가 하는 결과 이다.성경은 창조규범의 인식 가능성을 지지하는 교훈이 많다.(엡1:17~18; 롬 12:2; 히 5:14)

 

창조의 발전

창조의 발전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에서 물러 나셨지만 자기 형상을 땅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명령하셨다. 인류는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이 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계속 일한다.

종말에 있어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는다. 주님은 신실하게 창조질서를 유지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계에 임할 큰 위기조차도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가 그것을 문화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불로 정화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 창조세계의 연속일 것이다. 죄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땅의 문화적 차원들이 영광스러운 새 땅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근거가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연속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활한 우리의 육체가 영화롭게 되더라도 여전히 육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선한 창조

범죄 이전의 창조 세계는 전적으로 명백히 선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이 증명한다.

모세의 법은 실정법을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의 여러 책들은 끊임없이 율법의 선함을 노래하고 있다(시 119).

 

타락

타락의 범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범죄한 일이 단순히 하나의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창조세계전체의 대 재난을 의미한 사건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은 천상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에 영향을 미친다. 성경에는 모든 악(질병, 죽음 등)이 인간의 타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죄와 창조와의 관계

죄가 창조를 파괴한 것도 창조와 동일 시 되는 것도 아니다. 창조와 죄는 우리들의 경험 속에 뒤얽혀 있다하더라도 구분된다. 죄악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에 대한 그분의 한결같은 신실함을 무효로 돌릴만한 힘이 없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죄의 존재를 허용하는 이론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언어도단이다. 교묘하게 죄의 책임을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닌 창조주께 돌리는 행위이다.

 

구조와 방향

하나님은 모든 파괴의 위력 앞에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보존하신다. 창조는 사악한 개를 묶어두는 가죽 끈과 같다. 구조는 결코 잘못된 방향에 의해 말살되지 않는다.

 

구속

창조의 개념이 포괄적이며, 인간의 타락이 창조세계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과정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속이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준비단계였다.

회복 곧 구원이 새로운 무엇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구속이란 창조 세계의 삶에 이전에 없었던 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것에 새로운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한다. 지상의 모든 악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치유되고 극복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그의 구속은 죄의 모든 영향도 제거한다. 선한 창조의 왜곡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리스도께서 회복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계속 일하시는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그렇게 하신다.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요약

-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창조 타락 구속>의 본서는 개혁주의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간략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선하게 창조한 세계, 범죄 함으로 인간의 타락과 피조물의 탄식을 낳았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창조된 세계의 철저한 회복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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