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제 3강 네덜란드와 칼빈주의

예림의집 2014. 3. 19. 14:49

제 3강 (3월 19일 화요일)

 

<북한교회 역사>

*황해남도의 교회사 유적

-귀츨라프 선교사가 처음으로 상륙하여 한국인 만나 전도한 후, 충청도로 감(1832)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기 전 해(1865.9) 황해남도 해안에 도착해서 두 달 반 동안 선교함.

-의주 출신의 서상륜이

-한국에 온 캐나다

-은율군에 ㄱ자 “옛 예배당

-그러므로 황해남도는 한국 기독교의 고향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지 분할정책에 의해서 황해남도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지가 됨

*고린도전서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발표 과제 이야기>

-내용을 알고 발제를 하였다.

-일목요연한 정리

-역사적 과정을 잘 이해해서 설명

-발제 시간을 잘 조절하라.

 

 

네덜란드와 칼빈주의

 

1, 당시 네덜란드의 지정학적, 역사적 이해

당시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가(家) - 스페인, 오스트리아, 동유럽, 네덜란드- 와 프랑스라는 양대 세력의 힘이 경쟁하면서 격동적인 유럽 근세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2. 네덜란드 칼빈주의의 사상적 근원

①근대 경건

-공동생활 형제단이 로마 교회 내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중심인물로는 흐로떼와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있다.

②르테르담의 에라스무스

③칼빈

-십자가의 신학, 자기 비하의 신학, 공동생활 형제단의 연속성

 

3. 16세기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의 독립 의식의 고조

①칼 5세(1500~1558)

칼 5세는 당시 부르군트 공국의 수도였던 네덜란드(현재는 벨기에)의 헨트(Gent)에서 태어났다. 그는 1515년 부르군트 공이 되었고, 1516년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했으며,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재세례파가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된다. 재세례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멜키오르 호르만(1495-1543)이 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멜키오르파의 지도자 안 마티스, 얀 복켈손이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1533년). 이후에는 많은 재세례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한편, 메노 시몬즈(1496-1561)가 이끄는 재세례파 운동은 당시에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활동하였다.

②필립 2세의 치하

칼 5세의 뒤를 이은 필립 2세는 네덜란드에게 환영 받지 못하였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통해 절대 권력으로 가톨릭 신앙의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는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칼빈의 어머니 잔 프랑(1515)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칼빈과 네덜란드와는 개인적으로도 관계가 있었다. 당시 도시문화가 발달했던 상공업자들은 루터보다 칼빈에게 더 관심이 있었고, 칼빈의 사상을 따르게 되었다. 1566년, 안트베르펜에서 네덜란드 최초의 노회가 결성되었고, 이때 벨지움 신앙고백이 채택했는데 이 고백은 칼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다. 필립 2세는 네덜란드인들을 잘 통치하기 위해서는 칼빈주의자들을 예의 주시해야만 했다. 1565년, 괴제(Geuse)동맹이 결성되었고 이후 네덜란드 귀족들은 영지 내에서 칼빈주의자들을 보호하였다.

 

4. 독립전쟁(80년 전쟁: 1568-1648)의 전개

①시대 구분

A. 1568년~1609년(휴전조약)

B. 1609년~1619년(도르크레크트 회의)

C. 1619년~1648년(베스트팔렌 조약)

②아라 연맹과 우트레흐트 연합

1568년 알바공의 군대와 전투에서, 오란녀공 빌헤름은 “바다의 거지떼(Watergeuzen)라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싸웠고, 홀란드 주와 제이란트 지역 대부분이 빌헤름의 독립군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독립군의 승리에 기여했던 Watergeuzen은 주로 칼빈주의자들이었고, 그 영향으로 오란지 공 빌헤름도 1573년 칼빈주의로 개종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인들 앞에 놓인 가능한 두 가지 선택은 칼빈주의와 더불어 독립에 나서거나 또는 가톨릭 신앙을 따르고 스페인 절대주의의 지배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당시 칼빈주의의 수호는, 곧 네덜란드의 독립을 의미했다.

네덜란드 남부 뜨아 지방과 헨네가우 지방의 보수적 가톨릭 신도들은 후자를 선택하여 아라(Arras: 1579)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에 맛서, 칼빈주의자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네덜란드 중부, 서남부를 기반으로 1579년 우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는 네덜란드 남과 북에서 아라동맹과 우트레크트 동맹이 대결하게 된 것으로 훗날 국가의 분립을 예견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1581년 네덜란드의 독립이 선언되었으나 전쟁은 지속되었고, 1609년 휴전조약이 성립하면서 네덜란드는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남부(오늘날 벨기에) 지역의 개신교도들은 북으로 이주했고, 남부는 순수 가톨릭 주의자들만 남게 되었다. 이 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되었고, 30전쟁이 끝난 1648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스페인 또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네덜란드 남부는 1795년까지, 계속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그 후, 잠시 네덜란드에 귀속되었으나 네덜란드에서 독립해서 벨기에 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5. 네덜란드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형성

①당시 네덜란드의 종교적 상황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원친론자들과 관용론자들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A. 원칙론: 모리쯔 중심(오란녀 판 빌헤름의 아들)

-제네바와 같은 신정정치를 주장한 급진적인 칼빈주의자들로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B. 관용론: 올덴바르나벨트(빌헤름의 친구) 중심

-정교의 분리와 비 칼빈파에 대해 관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치가들이 이에 속했으며 온건 칼빈주의자들과 일반 시민들, 도시 중산층들이 중심이 되었다.

독립 후, 네덜란드가 걸어간 정치, 종교 정책은 이 두 파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이었다. 네덜란드 독립 과정에서 독일, 프랑스, 영국보다 덜 폭력적이고 내전을 거치지 않았던 이유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Jelsma)

A. 루터파가 먼저 네더란드에 들어와 있었다.

B. 1533년 뮌스터의 급진 재세례파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C. 메노 시몬즈 같은 평화주의 재세례파의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1618년 도르트레크트 회의 소집까지는 관용파가 우세한 입장이 있었다.

 

②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

칼빈주의 개혁교회 내에서 신학적,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르미니우스는 레이든 대학의 교수였다. 레이든 대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중인 1575년 설립된 국제적 대학이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로 유학하여 베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와 동일하나 오직 예정론만 칼빈주의와 달랐다.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 교육받은 후, 1599년부터 고향 암스텔담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코른헤르트(Coornhert: 1522-90)가 에라스무스를 계승하면서, 칼빈주의의 분파주의를 인문주의적 신학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협력한다고 말했다. 코론헤르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칼빈주의 진영에서 아르마니우스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아르마니우스는 코튼헤르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의 글을 읽다가 이에 부분적으로 동조하게 되었으며, 칼빈의 예정론까지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르미니우스는 1603년 레이든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상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레이든 대학의 호마루스(Gomaru 1563-1641) 교수와 논쟁을 전개하였다.

*아르미니우스의 주장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다. 그러나 이 예정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인지를 질문.

*타락 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

-칼빈, 베자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의 구속은 예지되엇고 계획되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무조건적 예정 교리를 지지한다.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타락전예정설을 반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담이 타락 이전에, 구원받을 사람을 예지하셨을 뿐 예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정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정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으며, 이는 이중예정(gemina praedestinatio), 혹은 유기의 작정(reprobatio)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호마루스는 타락전예정설을 고수하며 유기의 작정을 믿었다. 이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의 사망 시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아르미니우스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③아르미니우스 논쟁

아르미니우스 사후에, 에피스코피우스가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계승해서 호마루스와 논쟁에 나섰다. 호마루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기 위해서 운동을 벌였고, 아르미니우스파는 웨턴보게르트(1557-1644, 당시 궁정 목사)에게 이 문제를 의뢰하였다. 1610년, 웨텐보게르트는 관용파 정치인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조언대로 아르미니우스파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간쟁서(Remonstrantia)를 제출했다. 그래서 위텐보게르트, 에피스코피우스 등 아르마니우스파를 간쟁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리미니우스 주의

-예정: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셨다.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예정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을 의미한다.

-죄/자유의지: 타락 후 선한 의지의 상실로, 인간 스스로는 선행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은혜: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깰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은혜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성도의 견인: 중생한 성도들도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

 

간쟁자들은 칼빈주의가 국가종교이기에, 올바른 칼빈주의의 결정권이 국가에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호마루스는 이에 반대하면서, 1611년 “반간쟁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칼빈주의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초기에는 간쟁자들이 우세하였으나 1609년 휴전 이후, 국가와 교회의 관계 문제로 격렬한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관용파는 네덜란드 귀족의 후원을 받았고, 스페인 등 강국과의 국교는 네덜란드 국가발전과 경제개발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국가지도층은 곧 친 스페인, 상위층, 가톨릭 우호적이었다. 이에 반해 원칙파는 네덜란드를 정치적으로 억압했던, 그리고 당시 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를 무력 강점했던 스페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반대하였다. 스페인과의 관계개선으로 국내 가톨릭이 증가할 것이며, 칼빈주의적인 국가 정체성에 위협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페인의 압제통치를 반대하는 다수의 네덜란드인들(중류 이하계층)은 정통칼빈주의 지지자들이었다. 따라서 간쟁자/비간쟁자간에 벌어진 아르미나우스 논쟁은, 관용파(간쟁자 후원)/원칙파(반간쟁자 후원)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원칙파는 국가교회회이를 소집해서 해결하기를 주장했고, 관용파는 지방별로 문제해결을 주장하였다. 당시 관용파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홀란드지방(암스테르담, 로텔담, 레이든 대학 등)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만일 연방정부가 국가회의를 소집하지 못하고, 지방별로 해결하게 되면 레이든 대의 아르미니우스파 교수들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면 정통칼빈주의 세력은 약화될 것이고, 원칙파도 약화될 것이었다.

이때, 원칙파의 대표인 네덜란드 국가원수였던 모리쯔가 1618년 7월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연방의회에서 관용파를 축출하고 관용파의 대표자인 올덴바르나벨트와 흐로티우스를 체포하였다. 관용파를 축출한 오란지공 모리쯔는 1618년에 국가회의를 소집해서 아르미니우스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도르트레크트 회의)

 

④도르트레크트 회의(1618-1619)와 칼빈주의 5대 교리

오렌지공 모리쯔가 소집한 회의에로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을 초청함으로 칼빈주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약 70명이 참석하고 그 외 국가에서 27명이 참석하였으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당시 루이 13세의 금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회의 결과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교리문답

-도르트레크트 회의 헌장 채택(아우구스브르그 신앙고백서는 부결-인간의 전적타락을 덜 강조해서)

도르트레크트 회의 직후, 1619년 올덴바르나벨트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100명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정죄되어 국외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1625년 오렌지공 모리쯔 사후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가 네덜란드 총독이 된 이후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종교자유가 주어지게 된다.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자유의지 무능력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예정의 절대성

Limited Atonement 제한적 구속: 구속은 예정된 자들에게만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은혜는 신인 협력이 아님

Perseverance of th Saints 성도의 견인: 선택된 자는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칼빈주의 핵심교리인 5대 교리는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6. 네덜란드의 독립과 황금의 17세기

1646년 30년 전쟁의 결과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17세기는 전쟁의 시기였지만, 네덜란드로서는 황금의 시기이기도 했다. 사상, 문학, 예술, 과학 등 큰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문화적 성과가 탁월하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뛰어난 상업 국가로 세계의 창고 역할을 하였으며 관용 있고, 자유로운 공기로 인해 전 유럽의 지성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철학자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등과 신학자 코메니우스와 같은 인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오게 된다. 자연과학과 회화도 중요하다. 렘브란트(1606-69, 레이든에 그의 생가가 보존)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렘브란트 하우스, 암스테르담). 그는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조(야경꾼)를 통해 네덜란드의 자유로움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성경에서 주제를 끌어오면서도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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