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구원서정/믿음/칭의/성화

예림의집 2014. 3. 17. 19:19

제 1문. 구원서정 방법론

구원론은 조직신학에서 나오는 학문이고, 구원서정은 순서라기보다는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대한 정립이다. 구원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의 일 자체가 구원서정 영역에 해당된다. 신약 성경 자체가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4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의 일을, 사도행전부터는 그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다루고 있다. 4복음서는 구속사이고, 사도행전부터는 구원서정이다. 구원이란 단어로 두 개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말하며, 더불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 이루신 구원이 나에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기독론적 차원의 구원과 구원론적 차원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교회의 기능과 사역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가 구원서정의 사역을 어떻게 해 왔느냐 이다. 전통의 차이는 곧 구원서정의 차이이다. 구원을 소개하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서 전통이 나누어졌다.

개혁주의의 역사는 어느 다른 전통보다도 구원서정 논의에 있어서 활발했던 역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카이퍼는 칭의를 강조하였고, 후크마는 중생을 강조한 반면 머레이는 소명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정통적인 개혁신학 전통 신학자임에도 구원서정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구원서정 논의에 있어서 주의해야할 문제점을 설명하자면 먼저 성경의 지나친 확대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의 구원서정을 발견할 수는 없다. 성경의 의도는 우리에게 하나의 구원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서정 작업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공식을 주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는 아니다. 두 번째로 지나친 단순화이다. 구원서정의 논의가 단순화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입체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 하나가 구원서정의 중요하지만 너무 몰입되어 전체 그림에서 이탈되어 나올 수 있고, 결과적으로 생명력을 상실할 수 있다. 전체에서 너무 이탈되어 버릴 수 있다. 세 번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적 논리의 지배하는 경우이다. 택함이 소명을 낳고, 소명이 칭의를 낳고, 칭의가 회개를 낳는 다는 식의 원인과 결과로 보는 자체가 그리스도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논의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주관화이다. 구원서정 논의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 차원의 구원을 관찰하고 적용, 상담, 지도하는 정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좀 더 바람직한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이다. 그리스도 없는 은혜, 은혜만을 위한 은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추구하는 은혜가 실제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구원서정은 순서적 개념이 아니다. 순서보다는 적용의 의미를 갖는다. 구원서정의 논의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는 지엽적인 기교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를 지배하는 원리를 말한다. 기본적인 원리는 성경으로 들어가서 찾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서정의 방법론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연합이 언약의 핵심이다. 구약백성에게 맺었던 그 언약이 비로소 나에게 까지도 적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이는 구원서정의 모든 과정 속에도 적용된다. 구원서정의 전 과정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이루어진다.

 

제 2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구약에서의 믿음은 언약을 붙잡는 것이다. 이는 언약의 약속들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에 근거한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붙잡고, 맡기고,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믿음은 복음에로의 초대에 대한 반응을 말한다. 언약의 성취인 그리스도와 구속사의 모든 것, 즉 새 언약을 붙잡는 의미를 가진다. 믿음의 의미가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는 의미가 중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의 수동성으로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나의 동의, 결단이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전인적인 신탁의 의미를 포함하나 믿음의 근본적인 출발은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심으로 인해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능력이다.

반면, 믿음의 행사는 나의 동작이 된다. 믿음의 능동성으로 수동성과 능동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동작의 주체는 나이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듯이 행동을 동반한다. 중생의 의미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온 것임으로 그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수반된다. 믿음을 행사하는 주채는 나의 전 인격이다. 우리가 믿음을 전적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할 때, 구원은 내가 얼마만큼 믿느냐에 해당된다는 의미로 믿음을 생각하는 것으로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 덜 믿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으며, 믿음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는 경우 내가 할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매 경우, 모든 순간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내가 행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에 대한 가늠이 경건과 영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능동적인 동작에 믿음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 자체가 나의 전인격적인 동작이지만 그 동작은 아무런 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기여가 없다. 아무런 공로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아무런 값, 기여, 공로가 없다.

믿음은 그 정도를 따질 수 없다. 믿음이 거의 없다. 믿음이 많이 있다고 할 만큼의 어떤 모양이 거의 없다. 믿음은 그 대상을 붙잡는 일을 하는 것인데, 믿음이 아닌 것은 믿음이라고 해도 그 믿음이 정작 믿음으로서 일을 하지 못함은 믿음의 대상을 붙잡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성경에 믿음의 정도에 대한 표현은 나오지만, 실재적으로 믿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믿음의 요소는 첫째, 지식의 요소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성경에 계시된 지식이다. 계시를 통해서 지식이 전달된다. 지식을 갖는 기능을 이성이 한다. 믿음이라고 하는 일에 이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기관이 관여를 한다. 그러나 이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없고, 중생된 이성이어야 한다. 이성을 배제하는 믿음은 지식을 배제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는 결국 계시를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미 들어난(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탈한 또 다른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을 동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둘째, 동의의 요소이다. 이는 “믿습니다”라고 할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널리 생각되는 부분이다. “내가 그 지식에 동의합니다. 그 지식의 내용을 수용합니다.”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아멘”으로 표현한다. 우리의 동의는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 나는 나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 바로 그 구제주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하고, 구원 받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됨을 동의한다.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해서 그것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작이다.

셋째, 신뢰(연합)의 요소이다. 내 자신을 맡기는 것으로 믿음의 완성이다. 나에게 제시된 구원에 지식에 대해서 내가 확신을 하고, 꽉 붙잡고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붙잡는 방법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이 자체가 아무런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공로나 값으로 처 주지 않는다. 믿음 속에 어떠한 공로의 개념이 들어가면 안 된다.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만 한다. 믿음 외에 그리스도를 붙잡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을 만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끌어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한다. 믿음은 나의 공로나 행위나 어떤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한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나의 인격적인 반응으로 “그리스도만을 끌어안았다. 연합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필요한 동작이다. 그리스도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믿음으로 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달라진 모습이 거룩이고, 성화이다. 칭의는 되었는데 성화가 안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복음제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과 달라 보인다. 이것이 거룩이고 성화의 모습이다.

 

제 3문. 칭의 교리에 대하여

구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의미가 칭의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의인이 되는 사건이다. 이 문제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칼뱅은 이 문제를 놓고 우리의 모든 신앙이 이 칭의의 교리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했다. 루터는 교회가 서고 넘어짐이 칭의에 있다고 말했다. 복음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이 곧 칭의교리를 지키는 사건이었었다. 이신치의 교리의 회복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칭의교리가 복음인 이유는 칭의교리는 장차 하나님이 의인과 죄인을 나누시는 심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재한다. 칭의는 나에게 이미 선언된 신판 판결과도 같은 사건이다. 장차 있을 심판대에서 주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구분하고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 이미 내려졌다는 의미 칭의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심판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미 종말론적으로 그 심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나에게 선언이 된 것이다. 이미 나는 의로운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출발점이다.

칭의의 법정적 개념이다. 이 개념이 종교개혁이 지켜낸 것이다. “칭의가 반드시 법정적인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은 오염된 것이다. 법정적 개념이 아니면 칭의가 아니다. 반드시 법정적이다. 판사가 선언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죄인 또는 의인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판사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들어난 증거에 의거하여 선언하는 것이다. 선언과 간주, 그렇게 불러준다. 그 동작 자체가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라고 선언하고 간주하는 것이다. 칭의는 절대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칭의 안에 만드는 의미가 들어가면 바로 로마 가톨릭이 된다. 로마 가톨릭은 의인화 된다는 개념을 쓴다. 칭의와 정죄 모두 법정적 개념이다.

죄인의 칭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죄인이 행함이 없이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죄인이 칭의될 때 행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칭의는 죄인 칭의 인다. 의인 칭의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의인칭의를 말한다. 우리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반발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우리에게 의의 근거, 공로가 아무것도 없었을 때 오직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했다. 칭의는 신분상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속성, 성별, 내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불려지는 것뿐이다. 의인화가 아니다. 칭의가 하지 않는 것은 칭의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일이다. 그 근거가 있을 때에 그 근거에 준해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법정적 칭의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것을 나에 것으로 누리게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간주되어서 그 전가된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된다. 죄 사함을 받고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의인이 하늘나라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를 위해서 살기까지 하셨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첫째, 부정적 요구인 죽음이라는 형벌을 대속의 죽음으로 감당해야 하셨고, 둘째, 긍정적 요구인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다. 긍정적인 요구로서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법을 충족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인성을 입고 오셔서 율법에 대하여 순종의 삶을 사셨다.

 

제 4문. 성화의 교리에 대하여

성화의 의미는 거룩을 말하고, 칭의이 의미는 의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의와 거룩이 다르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인 “카도쉬”는 따로 때어 놓다, 즉 구별하다, 분리하다의 의미이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으로. 구분된 그 자체가 거룩이다. 거룩의 초기적인 용례는 주로 제사와 관련해서 의미가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거룩을 나타내는 “하기오스”의 의미는 죄의 삶에서부터 벗어나서(분리되어서) 하나님을 위한 분리 구분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칭의 사건(구속사적)에서 온다.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사적으로 획득하신 의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받으신 것. 이것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죄로 인해서 죽으실 일이 없다. 죄로부터 그리스도가 분리되셨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근거, 모형, 패턴이 된다. 성도의 성화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적 의미에서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의미 속에 성도의 성화가 있다. 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됨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신 그리스도, 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화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거룩에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이 내주하심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거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거룩이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주하시는 것 자체가 거룩이다. 신약의 메시지는 점진적인 성화를 말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선적인 강조, 전재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단정적 성화, 결정적 성화, 확정적 성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에 대해 말하자면, 점진적 성화라는 말 자체가 오해를, 그릇된 기대감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계적으로 내가 점차 성화되어져 간다는 어떤 잘못된 기대감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성화의 삶에 대하여 오히려 안일해질 수 있는 작용을 한다. 성화는 언젠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좋지만 그 자체가 안일을 가져올 수 있다. 성화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지속적 성화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왜 지속적인 성화를 유지하라고 하는가? 우리 안에 죄성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칭의는 죄에 대하여 신분적인 측면이 해결된 법정적 칭의이지만, 성화는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다루고 있다. 우리를 실제로 지배, 장악, 실족케 하는 죄성은 존재한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성의 지배가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어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중생한 다음에 성화의 삶을 살며 남은 죄성에 대하여 나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느냐의 싸움이다. 이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지속적 성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첫째,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이룰 수 있다. 둘째, 믿음으로 이룰 수 있다.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을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말한다. 믿음은 어떠한 확신이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칭의 된 다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계속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칭의도, 성화도 믿음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믿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내가 만들 수 없고,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또한 내가 전인격적인 믿음의 동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령이 대신 믿어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늘 믿음으로 사는 것.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령이 가능하게 해서 내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나의 일과 성령의 일이 분리되어져서는 안 된다. 성화의 삶 자체가 구원의 삶, 구원 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성화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의도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들어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볼 수가 없다. 또한, 성화는 우선적으로 개인적 성화이겠지만, 교회적 차원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거룩이 교회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