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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강 교회의 본질과 의의②(3월 18일 화요일)

예림의집 2014. 3. 18. 15:03

제 3강 교회의 본질과 의의②(3월 18일 화요일)

 

3. 다 이루신 의의 전가: 구원론적 적용

 

주께서 다 이루신 의는 오직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당하신 순종),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행하신 순종).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전가해 주시는 적극적 권능을 포함한다. 빛이 들어오니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의가 전가됨이 죄 사함과 동시에 일어난다. 주님의 의는 우리의 구원 전 과정에 다 미친다. 오직 주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음으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며, 영화롭게 된다(롬 8:30).

주님께서 다 이루신 의가 우리를 위한 영생의 값이다. 영생은 언약의 자녀 됨이다. 구원은 실체적으로 자질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으로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주님의 의는 성령의 임재로 전가된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자마다(롬 8:9) 그의 의를 전가 받는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으면 그와 함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된다(롬 8;17). 그리하여 그 영은 양자의 영이라고 부른다(롬 8:15; 갈 4:6).

성경이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 성도가 받은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주가 되셔서 그 의를 다 전개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주의 영(고후 3:17-18; 고전 6:17)”이라고 부른다.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낮아지시고 높아지셨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주심에 있다. 자신을 주심이 우리를 다스림이다. 주님이 자신을 주시는 방식이 곧 성령의 임재이다. 주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행 2:33) 우리에게 오시기 위하여(요 16:7) 올라가셨다. 성령의 임재는 곧 주 내 안에 사심이다(갈 2:20). 성령 충만은(엡 5:18) 주 내 안에 맘껏 사심이다.

우이레게 임한 보혜사 성령-주의 영, 그리스도의 영-은 다음 세 가지 특성이 있다.

①첫째,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예수”라는 이름의 뜻(마 1:21)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마 1:23)을 또한 성취하였다. 언 보혜사는 주님이셨다. 이제 오신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신다(요 14:16).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제자들, 무리들과 함께 계셨지만 그들 속에 계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7). 그리하여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것이다.

②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요 14:16). 주님 자신이 진리시다(요 14:6).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요 1:14, 17). 보혜사 성령의 임재가 주 내 안에 사심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 영을 받으면 주가 가르치고 말한 모든 것이 생각나게 된다(요 14:26). 그리고 진리 안에 있다(고후 11:10). 진리의 영이 임하시므로 성도는 우리는 아들의 것으로 아버지를 알게 된다(요 16:14-15). 이렇듯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요 15:26).

③보혜사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성도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능력 즉 의지하고 기대하는 능력 밖에 없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 우리에게는 순종의 공로가 없다. 순종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타락 이후 인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상실되었다. 오직 우리의 의는 전가된 의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사함 받은 것은 그의 찔림과 상함으로 말미암는다. 주님 죄 없으시나 그 흉악한 죄인들 앞에서 심문 받으셨기 때문에 그 징계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은 조각조각 묻어나온 주님의 살 때문이다(사 53:5). 우리가 주 안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것은 그가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8:9).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것을 찾으신다. 우리 안에서 찾으시는 것은 모두 그분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친히 이루신다. 직분을 주시는 분이 은사를 주신다. 주께서 친히 계시하시고 친히 이루신다. 주께서 진리이시며 은혜가 충만하시다. 진리가 계시, 약속, 말씀, 명령이라면, 은혜의 성취, 구속, 전가, 다 이루심이다. 주 안에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능력은 그분의 뜻대로 구하여 얻는 것이다(요일 5:14).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자 능력의 영이다. 그러므로 알게 하신대로 구하면 무엇이든 얻게 된다. 주님께서 구할 때는 말씀대로 구하여야 하며, 그 말씀을 행하고자 애쓰는 가운데 구하여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은 범신론적이거나 신비주의적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의 의 가운데 성도가 그와 함께 나아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을 강조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이” 곧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곧 우리가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라고 하였다(히 2:11).

아래 말씀에서 우리는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어 사용되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강조되었는지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지금의 모습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합이 말씀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8:17)”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6:6)”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4.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 교회의 하나임과 연속성

 

주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구속의 중보를 다 이루셨다.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삼중직분을 다 행하셨다. 선지자로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전파하셨다(마 4:23). 제사장으로서 주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자기를” 드리셨다(히 7:27). 그리하여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1).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다(벧전 3:8). 자신을 우리를 위한 제물로 드리심이 왕이 되신 조건이다. 왕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는 것이다(엡 5:25; 빌 2:7-8). 주님의 통치 방식은 자신을 주심이다.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장이 아니고서야 왕이 될 수 없다(엡 5:2). 주님은 종으로서 주인이시며, 양으로서 목자이시며, 제물로서 제사장이시다.

교회는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받은 자녀들의 모임이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모두 그리스도이 공로로 세워졌다.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에게도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셨다. 다만 아직 육체로 오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신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중보 하셨다. 구약의 백성은 이러한 주님의 현존(praesentia)을 믿었다.

구약의 율법은 단지 오실 예수를 예표(repreasentatio)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현존하신 그분을 계시하셨다. 다만 구약 성도는 그 경륜에 이어서 아직 신약 성도가 받은 보혜사 성령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가 되셨다. 신구약 교회는 경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신구약 교회가 하나인 것은 중보자가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구속사적으로 다 이루신 주께서 지금도 여전히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신다. 주님의 중보는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 미친다. 주님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머리이신 그분께로 자라간다(엡 4:15). 주께서 계속 중보하심으로 성도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의를 전가 받고 그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주가 한 분이시므로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다(엡 4:5). 우리의 믿음은 오직 주님 한 분만 향한다. 세례 역시 동일하신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표를 인치는 것이다. 세례가 하나이므로 그것을 베푸는 교회도 하나이다. 그것은 머리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다.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신부이다. 그 비밀이 크다(엡 5:32).

교회가 연속적인 것은 주님의 중보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중보는 개인적, 교회적, 우주적 차원에 미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때에 찬 경륜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할 하심이라(엡 1:10)”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5. 교회의 지체로서의 삶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맡기고 자유함을 얻었다(마 11:28). 그러므로 이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갈 5:1). 주의 영으로 자유함을 얻은 성도는(고후 3:17) 이제는 더 이상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롬 6:14-15). 그리하여 이제 죄의 종,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종, 순종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간다(롬 6:12-23).

성도는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교회의 지체가 된다. 성도의 삶은 교회의 삶 가운데 자라간다. 기도, 말씀, 고백으로 머리이신 주님께 자라간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듯, 성도 각자가 그러하다. 성도의 비밀은 교회의 비밀과 함께 역사한다.

성도는 세상의 무서운 짐을 벗어버리고 이제 주님의 멍에를 멘다. 자유자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고전 7:22). 주님의 멍에는 독수리의 날개와 같아서 그것이 있어야 높이 날아 멀리 보고 신령한 것을 먹을 수 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야 마음에 쉼을 얻는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마 11:29-30).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셨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자체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으므로(마 11:27),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마 16:24).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게끔(가시적 교회), 보이지 않게끔(비가시적 교회) 드러낸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통하여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됨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요 상속자로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 8:17).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더 이상 우리가 채울 남은 고난이 없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그 공로가 우리에게 족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은 이제 “교회를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다(골 1:24). “교회의 일꾼”이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다. 그것은 복음의 비밀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의 비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복음 자체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시다(골 4:3). 둘째, 복음 전도의 비밀이 있다. 복음은 그것을 단지 관념으로 받아들일 때가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할 때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다. 우리는 비록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완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운다. 셋째, 복음 상급의 비밀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고를 다하는 것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우리의 수고 역시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삼아 주신다(골 1:25-29).

교회의 비밀은 성도의 거듭남, 삶, 영생의 비밀과 함께 역사한다. 이 비밀이 크다. 이 비밀을 “함께” 듣고, 누리고, 즐거워하는 자마다 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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