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문제 확인하시고 해당 부분만 참고하셔요^^
종교개혁사 필기 총정리
계시의 이해
-서구문명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계시를 이어받고 있다.
-이때 계시는 구약의 계시이다.
-시가서에서 드러나는 계시와 나머지에서 드러나는 계시
-구약을 맑은 정신으로 읽어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인물을 통해서, 한 민족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
-맑은 정신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는 것.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해
-일대기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며 계시를 받은 바.
*메수포타미아(우르) 문명에서 떠나는 아브라함(BC 2200년)
-유목생활
-이집트까지 갔다가 돌아다니다가 객사를 함.
-그 일대가 약속의 땅이 되었다.
*이집트 문명으로 내려감(요셉)
-문명에서 나오는 것이 첫 번째 아브라함의 계시이다.
-2233년 단군 시작
-민족신학은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그 시기 주변국은 큰 나라들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에서 탈출한 것이 모세이다.
-민족사는 결국 문명 탈출기이다.
-대 서사드라마에서 계시를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무엘, 사울, 다윗 사무엘
-기독교 문명의 확장기
*계시란?
-메소포타문명에서 탈출하여 민족의 출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애굽문명에서 탈출하여 민족의 역사의 독립, 해방의 지도자가 되었다.
-히브리 문명의 발흥 다윗, 하나님께 합한 자. 문명과 거리를 두는 존재.
-이후의 왕들의 행적은 다윗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예수님으로 연결.(스데반, 베드로, 다윗)
-그리스, 로마 문명과 연결
-한결같이 하나님은 그가 선택된 백성에게 주는 메시지가 문명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히 11장
-하늘본향, 나그네의 삶
-예언서의 계시.
-희브리 민족과 이방 민족이 다르지 않다. 더 나쁘다.
-하나님이 없다.
-멸방을 외침
-문명사회에서는 계시를 새롭게 해석해 나가게 된다.
중세문명의 특징과 위기
*중세문명의 특징
①하나님을 대신하는 교황 통치의 세계형성
-교화오가 황제의 충돌 야기
②문명중심축의 이동에서 교회의 고정적 역할(오늘날의 UN)
③수도회의 계시적 활동과 한계(ST. 안토니우스).
-베네딕트수도회->클루니수도회->시토수도회->은둔수도회->도미니카, 프란체스코 수도회(탁발수도회)
④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하의 스콜라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
-플라톤과 스토아주의자들은 전통으로 보고 있다.
*중세가톨릭 문명의 위기
①제도화된 교회의 지나친 참여적 행동주의
-정치, 경제, 사회, 학문
-교황청의 분리(대분열): 피사, 아비뇽, 로마로 분화됨.
-세속 제판에 사제가 제판장으로 참여함
-세속 직함을 얻으려 함
②사제와 신자들의 영적 무관심
-설교가 아애 없었다.
③공로의 신학(유명론)의 득세
-은총이 약해져 감
-내 힘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
-승리하는 복음
④수도회 퇴색과 데보티오 모데르나의 등장
-모든 명칭에 “거지”가 붙는다.
-공동생활 형제단
-예수회(로열라: 군대식 영성)의 등장
*중세 말의 “보쉬”의 그림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고흐도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사제를 대변하는 되지 형상.
*문명붕괴의 위기와 대안들
①기도교 이단들
-이단도 계시의 해설자다
-왈도파와 롤다드의 경우
-헤렐니즘을 거부하자
-보편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카타리파(교리상에 있어서 거리가 있다. 청결, 순수함)
-진자 이단은 마니교이고, 진정한 이단이다.
-역사 속에서 모두 루져가 되었다.
②이교 휴머니즘
-사탄주의와 무신론
-맘모니즘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헤브라이즘을 거부하자
-계혁신학 연구센타 교수 강의에서 확인하라.
-물진중심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본주의이다.
*두 대안은 성공할 수 없었다.
-두 가지 문명이 융합되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지금은 헤브라이즘의 계시가 소외되어 융합이 깨어지고 있다.
③기독교 인문주의
-절충주의
-피치노, 피코델라 미란돌라
-프랑스의 르페브르 데타플
-영국의 콜레트와 모어
-독일의 로이클린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전종교개혁(PreReformation)
*Devotio moderna와 기독교 인문주의
-<그리스도를 본받아(1423)>에서 <엔키리디온(1504)>까지의 개혁적 영성.
-산상설교대로 살자.
-어렵고 불가능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
-혼자 살아야하고, 직업도 없어야 하고, 빨리 죽어야 하는 예수님의 삶
-상상설교 정신으로 산다고 할 때도, 너무나도 어렵다.
-창설자의 영성으로 돌아가자.
에라스무스의 작품과 해설
-헤브라이즘의 계시와 헬레니즘의 지혜를 같이 놓고 보면서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아가자.
①엔키리디온: 1504. in<종교개혁사상선집>
-병상들이 소지하고 있는 단검 --> 지침서
-그리스도로 돌아가자.(산상수훈)
-총 13개의 지침으로 구성됨
-8번재 지침 가운데 있는 22가지 규칙인 원죄의 잔재인 소경됨, 육신, 연약함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필요한 규칙
-소경에서 벗어나려면: 성경에 의존(규칙 1)
-육신을 이기려면: 검투사의 자세로(규칙 2)
-연약함을 물리치려면: 세상 것들이 무라는 것으로 인식하고 생각하고 보상이 없다라고 여기는 것
-기도와 지식, 경건과 학문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4-6 규칙: 목적과 수단
-그리스도를 생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라
-그리스도와 수단들을 구분하라
4규칙 일반 중립적 수단들: 지식, 건강, 재능, 명성, 재산…
5규칙 종교 의식적 수단들: 성해, 성물, 철야, 금식, 순례…
6규칙 수단에 불과한 지도적 인물들: 주교, 교황, 신학자…
핵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Imitatio Christi)-산상설교
-계시(헤브라이즘)의 해설에 들어 있는 문명적(헬레니즘) 요소
②격언집: 1508. 아모르문디. 2009(발췌집)
*격언의 의미(에라스무스의 서문)
1. 문법적 정의: 격언은 널리 쓰이는 말로서 통렬하고 신선한 반저을 그 특징으로 한다.
2. 철학적 정의:
삶에 유익한, 또는 기독교적 지혜에 가까운 것으로 격언에 비할만한 것을 철학자들이 한번에라도 만들어낸 적이 있는가?
-헬라세계의 지혜와 기독교 지혜는 동일한 것을 말한다.
-헬레니즘의 지혜를 모은 책
-모든 사람들은 친구의 재산을 공유한다. “친구는 재산을 서로 공유한다.”
-헤브라임의 정신과 같은 것, 기독교 공산주의 공동체
-기독교의 지혜 이념을 찾았다고 생각함.
-빵과 포도주
-철학에 대한 신학의 대안.
③우신예찬: 1511.
-가톨릭 문명비판
-첫째,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둘째,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태가 바보다.
-기독교 유물론을 이야기하고자 함
-사람 중심의 사고
④신약성서: 1516-1535, 서문과 주석.
⑤자유의지론: 1525. 종교개혁사상선집, 35
-교회사의 교부들 대부분이 자유의지를 지지했다.
-성결, 성령, 기적의 관점에서도 자유의지 지지율이 높다.
-자유의지란 인간을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는 것에 결합시키거나 이탈시킬 수 있는 인간의지의 힘이다.
*결론
-에라스무스는 데보티오모데르나의 영성이해에서 온다.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원인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루터에게서 찾아져야할 개혁의 원인은 도덕적이거나, 사상적이거나, 경제 사회적인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데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원인은 바로 구원을 갈망하는 “종교적 인간”과 관련한다. 이점은 루터에게 분명히 보여지며, 칼뱅 역시 동일 선상에 있다. 종교개혁은 구원에 떠는 루터라는 불안한 실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가 발견한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설명한다. 이점에서 루터 없는 칼뱅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입장은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일군의 계보를 형성하면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아날학파의 창설자 가운데 하나인 뤼시앙 페브르는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도덕적인 설명과 정치적인 설명에 대해 비판했고, <고등연구원>에서 가르친 에밀 레오나르와 리샤르 스토페르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 영역에서큰 공헌을 한 인물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장 들뤼모이다. 그는 기존의 비판에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인 경제-사회적 설명에 대한 비판을 덧붙이고 일종의 종교적 설명을 제안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을 도덕적 부패라든가 사상적, 또는 경제-사회학적 발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상 핵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머무는 일이 된다. 그리고 파리 4대학의 피에르 쇼뉘는 아날학파의 대 선배의 출발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지점에 도착한다. 그는 종교사학자들—특히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도움으로 이 문제를 선사시대까지 끌고 가는데 성공했으며 종교개혁의 문명사/종교사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1986년 제네바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제네바 시의회는 1536년 5월 21일 종교개혁을 하기로 결정했다) 강좌에서 쇼뉘는 다시 한 번 이점을 강조한다. “만일 새로운 사료편찬이 하나의 종교 현상에 종교적 설명을 감히 요구한다면, 이제부터 종교개혁은 전적으로 종교적 인간의 연속성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리라.”이 말은 종교개혁을 경제적 인간이나 정치적 인간의 문제로 풀려는 모든 시도를 부수적으로 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의 “종교적/신학적 원인”은 인류의 죽음/구원 이론과 관련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도덕적, 사상적, 경제-사회적, 종교-신학적 입장을 정리해보자.
①도덕적 설명: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당시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 만연해 있던 악습들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설명으로서, 루터나 에라스무스의 글 속에서 이미 발견되어 진다. 루터는 1536년 그의 <탁상 담화>에서 1510-1511년에 방문했던 로마(그의 말에 따르면 “영원한 잘못된 도시”가 준 충격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쓴다: “지금 같으면 로마를 보고 듣기 위해 10만 플로린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면죄부 판매가 가져온 스캔들은 1517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1520년부터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다. 또한 <우신 예찬>의 성공은 무엇을 입증하고 있는가? 이 교회에 대해 가혹한 비판의 글이 당시 널리 읽혀졌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해서 구역질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되기 위해선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제도로부터 나가야 했다. 에라스무스는 다른 글에서 당시 수도사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수도사들의 행태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루터를 민중적으로 만든 것은 없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교회에 대한 불만이 건전하고 거룩한 반동을 야기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런 견해는 오랫동안 개신교 역사가들에 의해 당연시되어 오다가 금세기 중반부터 수정되기 시작했다. 뤼시앙 페브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이 악습들 때문에 발생했는가? 이 악습들을 진열하고, 사제들, 수도사들, 주교들, 심지어 교황들마저 잃은 적은 청중을 먹이며, <성직 매매 죄>라고 너무도 쉽게 명명했던 세제稅制의 악덕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 이것들이 공격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가톨릭 편에서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과 그 도덕적 설명은 훨씬 더 지배적이다. 제네바를 사이에 두고 칼뱅과 신앙의 설전을 벌였던 사돌레토는 당시의 종교적 비극의 주원인이 성직계급의 퇴폐였다고 결론지었다. 17세기에 루이 XIV세의 훈령에도 이런 설명은 명백하다. 왕은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이해하기로 지난 세기의 성직자들의 무지와 사치, 방종, 그들의 나쁜 본보기,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묵인할 수밖에 없는 사례들, 결국 교회의 규율과 공적 감정을 거슬려 특수층의 인도로 합리화시킨 악습들, 이런 것들이 무엇보다도 분리와 이단에 의해 교회가 받은 심대한 상처를 낳게 한 것이다.”금세기 초 마리탱은 종교개혁의 모든 가치를 부인하면서 말하기를 “종교개혁에는, 내가 감히 말하건대, 실망한 수도사의 고전적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다”고 했다.
②사상적 설명: 종교개혁에 대한 도덕적 설명은 16세기 종교적 현상을 이해하는데 미흡한 점이 많다. 19세기 초, 마담 드 스타엘은 그의 작품 <독일론>에서 당대 사람들보다 훨씬 넓은 시야로 종교개혁을 이해했다. 그녀는 16세기 종교위기를 “이념에 의해 수행된 혁명”으로 진단하고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교황과 루터의 존재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역사를 단지 우연으로 돌리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보잘것없는 방식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 각 나라에서 전개되는 것은 도덕적 힘(=사상)이다. 왜냐하면 이 힘은 인간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재해석을 부여하는데 앞장선 헤겔은 개신교의 폭발 속에서 <세계정신>Weltgeist의 해방을 향한 운동을 보았다. 프랑스의 대 역사가였던 미슐레도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고 루터의 반란 속에서 정신 해방의 시작을 찾았다. 범게르만주의시기에 국가지상주의 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 정신의 각성을 일치시켰고, 한편 트뢸취는 종교와 문화의 상호관계를 수립하려 애썼다. 그에 따르면 개신교란 16세기의 지적 필요에 부응한 기독교의 형태(왜냐하면 1520년대 사람들의 문화가 여전히 중세적이었기 때문에)였다. 이것이 보다 넓은의미의 후대(18세기) 해방을 싹트게 한 종교개혁이라는 배경 적이고 교리 적인 양상이다. 이 모든 해석은 역사적인 것보다는 철학적인 선입 개념에서 출발한 결과이다. 어쨌든 이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의 반란과 그들이 떠난 교회의 악습 사이에서 도덕적 대립을 추구했던 전통적 해석에게서 멀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가톨릭 측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04년 앵바르 들라 투르는 그의 대작 <종교개혁의 기원들>의 서두에서 교황청의 독재와
성직자의 악습에 대해 말하면서 기독교의 일치의 큰 위협은 중앙집권의 남용이 아니라 국가원리의 탄생임을 지적하고 악습에 대한 개혁 외침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음을 또한 지적한다. 그는 “르네상스에 의해 시작된 지적혁명 그 자체는 신학 방법의 변화를 주장한 것이지 종교의 교리를 바꾸려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결정적으로 개신교 분리를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들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종교개혁의 원인은 “종교적 상태라기보다는 사회의 상태에 기인한다.” 이때부터 본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접근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종교개혁에 대한 경제 사회적 설명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 신학적 설명이다.
③경제-사회적 설명 :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종교개혁에 대한 절대적으로 경제적 성격의 해석이 득세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종교란 “그 시대의 딸”이요, 보다 정확히 말해서 “인간사회의 보편적 어머니인, 경제의 딸”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개혁이란 “6세기에 돌출하여…빨리 도달한 세계에 자본주의적 경제를 강요한 이 새로운 경제형태의 딸”이다. 엥겔스도 그의 <농민전쟁>에서 이와 같은 정신을 드러낸다. “6세기 소위 종교전쟁들에 있어서도, 문제는 무엇보다 매우 긍정적인 계급들의 물질적 이익과 관련됐다. 이 전쟁들은 훗날 영국과프랑스에서 일어나게 되는 내란과 꼭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이었다. 비록 이 계급투쟁들이 당시 종교적 인정 표를 달고 있었고, 또한 각 계급들의 이익, 필요, 요구들이 종교적인 봉투 속에 감춰져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문제의 사실을 전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그 시대의 조건들을 통해 쉽게 설명되어진다.”
이런 일반적 도식은 여러 역사가들로 하여금 엄격히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연구하도록 이끌어 갔다. 오스카 마티는 이렇게 쓴다. “6세기 교회적 반란은 과거에 깊이 박힌 뿌리를 가졌다. 영국과 관련해서 볼 때, 반란의 근원들은 군주의 왕조적 소망 따위를 넘어선다. 종교개혁의 뿌리들은 그때 일어나고 있던 돈 문제와 근본적인 경제적 변혁들로 구성된 땅속 깊이까지 뻗고 있었다. 영국 종교개혁이 명백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들이 가져오는 새로운 조명하에서이다.”
이탈리아 역사가 바르바갈로Barbagallo 역시, 16세기에 대해 쓰면서 동일한 태도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교개혁을 유럽 일부의 종교적 회심과정으로 여긴다…나는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신학의 전문가들도 가까스로 이해하는 루터, 츠빙글리, 멜란히톤, 외콜람파디우스 같은 인물들의 미묘한 신학들에 관심을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그러므로 나는 종교개혁을 본질적인 신학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유럽 각 나라가 , 16세기 후반기를 지나가는 위기의 종교적 표현, 양상, 가장으로 여기며 또한 보편적 불안의 징후로 여긴다.”
두 역사가의 입장은 같다. 오스카 마티에 있어서 가톨릭교회는 봉건시대의 농촌 구조물에 연결되어 도시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적인 경제에 관계하여 불안했다는 것이다. 바르바갈로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경제 사회적 전진을 표현하고, <반동 종교개혁>은 개신교 보수파조차도 협력하는 반동 현상이었다는 것이다(루터주의 덴마크가 불온문서를 검열한 예 등). 그때부터 <반동 종교개혁>은 “사회에 대한 가톨릭의 재정복 작업—이탈리아 성직자들의 몇몇 소그룹들에서 나타나긴 했다—이 아니라, 위험하다고 판단한 정부와 교회, 그리고 관계된 사회 그룹들이 함께 시도한 구질서 회복의 노력으로 상징된다.”그러나 아무도 진보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역사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진보란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과거를 대표하는 경제 사회적 세력을 부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토마스 뮌처를 대표로 하는 16세기 반란의 한 흐름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눈길을 끌기에 가장 좋은 예가 된다.
1520년대에 독일에서 군주들 및 유산계급의 “온건하고 합법적이며 지적인 반발(이들은 로마와 결별하기를 바라되 사회질서를 문제시하진 않았다)”에 또 다른 반발이 일어났는바, 그것은 농민들의 무산계급과 도시의 빈민계층의 반발이었다. 교황과 황제에 대한 이 두 적대자들은 한동안 연합했는데 이는 루터의 메시지가 열렬하게 선포되어 대중들을 착각케 할 수 있었고 결국 그들을 반란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루터는 깜짝 놀라 이 민중 계급들과의 타협적 연합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부르주아적 종교개혁자인 루터”에 맞서 “하층민의 혁명가 뮌처”가 들고일어났다. 뮌처는 본래신학자로서 중세의 천년왕국 사상 서적에 정통했었다. 그러던 그가 빨리 “정치적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엥겔스는 뮌처에 대해 이렇게 쓴다. “그는 배타적이고 무오한 계시로서의 성경을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참되고 살아있는 계시란 이성이었다…이 신앙이 생기를 얻은 이성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신성화하고 자신을 성결케 한다…저편의 하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도 저주도 없다…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었다…뮌처에 의해 설교된 이 이론은 많은 시간동안 기독교의 동일한 형식들 아래서 가장假裝되었고 근대철학도 얼마동안 그렇게 가장되어야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뮌처는 헤겔의 많은 제자들보다도 성경의 가면을 덜 있는 그대로 받았음을 보게 된다.” 엥겔스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치 않는 공통점은 “군주들의 종교개혁”과 “노동자들의 종교개혁”사이의 대립으로, 농민 전쟁이야말로 유럽이 경험한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④종교 신학적 설명 : 종교는 인간의 나이를 갖는다. 이 말은 인간은 종교 없인 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는 신성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종교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은 신성한 것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신성한 것은 종교적 인간학의 산소와 질소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그의 <종교 사상사>를 시작하는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세계에 대한 자각은 신성한 것의 발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성한 것을 경험함으로써 인간 정신은 실제적이고 능력 있으며 풍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계시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곧 사물의 혼잡스럽고 위험한 흐름, 사물의 우연하고 의미 없는 출몰과 사멸 등) 사이의 차이를 파악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신성한 것’은 의식 구조에 있는 한 요소이지 이 의식 역사에 있는 한 단계가 아니다. 가장 오래된 문화 수준에 있어서도 인간존재로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종교적 행위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는 것이나 성생활 그리고 노동이 성례적인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존재를 의미한다.”
기독교가 자체의 ‘신성한 것’을 갖고 경험하는 한, 기독교는 종교이다. 물론 유대교에 있어서나 기독교에 있어서 지상의 어떤 ‘신성한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되는 어떤 부분은 신성하게 된다. 종교사적으로 이 현상을 ‘신성한 것들의 단일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신성한 것’은 지상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 이내 ‘신성한 것’이 도입된다. 본래 인간은 신성한 것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이 신성한 것의 덕택으로 세상 질서를 정의하고 세상 질서에 대해 말하고 그 한계들과 방향들을 고정시킨다. 이 신성한 것은 시간성, 공간
성, 사회성을 띠고 나타난다. 어떤 신성한 장소를 중심으로 세상질서가 선다.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성스러운 시간이 있다(모든 날이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집단 사회에서 신성한 것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통합의 형태를 띠며 때로 무시무시하게, 때론 매혹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의문에 부쳐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고 세상질서는 그것과 함께 무너진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이 신성한 것은 한번 등장하여 하나의 질서를 이루다가 곧 의심되고 비판되면서 이내 사라지고, 또한 사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신성한 것의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신성화의 시기가 있고 비신성화의 시기가 있으며 이내 재신성화의 시기가 뒤 따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덜 성숙한 인간들의 사회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과학 문명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이 엘리아데가 말한 “신성한 것은 의식구조에 있는 한 요소이지 이 의식 사에 있던 한 단계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유대 기독교가 출발 시부터 갖고 있던 비신성화 작업은 15,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에 다시 이뤄진다. 이것은 곧 신앙의 문제로서 교회가 잘못 믿고 잘못 가르치는데서 연유한다. 종교개혁자들의 행동적 동기는 “교회의 훈련적인 오류—비록 그것이 심각하긴 했어도—가 아니었다.”우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뤼시앙 페브르가 파렐에게 대해 한 말을 적용시킬 수 있다. “그(=파렐)가 사제를 비난한 것은 잘못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잘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기독교 역시 문화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종교적 사회질서를 갖는다. 즉 자체의 ‘신성한 것’위에 서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의 이데올로기는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 위에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개신교라는 제도와 문화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제도로서의 개신교는 또 다시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하나의 운동이지 새 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과
정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출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의 회귀 운동이다.
마르틴 루터
기독교 세계의 영적 필요가 교회에서 얻지 못하고 인문주의와 같은 엘리트 운동에 의해 얻지 못한 대답을 한 고독한 개인이 주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기독교 유럽의 불편함을 야기 시킨 문제인 구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한 사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 자신과 인간의, 각 지체를 위해서 해결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나라, 한 계층에서 나오는 이 인물은 이내 다른 지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무튼 마르틴 루터라는 이 인물은 하나의 운명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루터의 생애 전체가 아니라 그가 종교개혁으로 넘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유년기에서 비텐베르크 운동까지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튀링겐에 있는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구리 채광에 종사하는 광부의 둘째 아들로 비교적 유복했던 그는 1491에서 1497까지 만스펠트의 시립학교에서 초급 라틴어와 기독교 신앙의 기초들(십계명, 주기도문, 아베마리아, 사도신경)을 배웠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 학교 교육은 암기식 방법과 회초리 사용이라는 전통적인 것이었다. 루터는 훗날 “형편없는”학교라고 불렀다. 1497년 봄 루터는 공동생활 형제단(데보티오모데르나)이 운영하는 막데부르크의 라틴어 학교로 옮겨 일 년을 지내게 되는데, 이 일 년은 그에게 어쩌면 소중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는 1498에서 1501까지의 아이제나흐 시절이었다. 우리 학제로 고등학교 시절에 해당되는 이 시기에 루터는 이곳에서 3대 근본 교과목인 3과(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을 공부하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데 있다. 그 중에는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영성을 가졌던 코타Cotta와 샬베Schalbe 가정이 있었다.
1501년부터 루터는 당시 독일의 주요 대학들 가운데 하나였던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최고 학문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요망에 따라 명성을 날리던 법대에 들어가기 전에 당시의 습관에 따라 먼저 인문대에 적을 두고 전통적으로 3과 다음 단계인 4과(기하학, 수학, 음악, 천문학)를 공부했다. 이것 외에 윤리학과 형이상학도 청강해야 했다.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와 형이상학, 그리고 논리학에 친밀해진 것은 이 시기부터다. 그러나 학교의 전반적인 교육정신은 오캄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선생들이 비록 인문대학에서 가르친다 해도, 그들은 이미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가르쳤다. 루터에게 철학을 가르쳤던 아르놀디와 트루트
베터는 가브리엘 비엘(†495)의 전통에 서는 유명론자들(오캄주의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인식론과 신학에 대해서 오캄 사상의 본질적인 방향들을 확고히 하면서도, 제도적 교회에 대해서 오캄이 던진 비판들을 완화했던 인물들이었다.
루터는 1502년에 학사, 1505년 1월 7일엔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인문학 학사를 받은 학생은 초보자들에게 문법, 수사학, 논리학 등을 가르쳐야 했고, 석사 생은 2년간 더 강의를 하되 그러면서 상급 대학들(의학, 신학, 법학) 중 하나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505년 5월, 루터는 부친의 원대로 법대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해 7월 17일 같은 도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수도회 소명
루터는 1539년 7월 16일자의 <탁상 담화>에서 이 시기를 설명한다. 그는 1505년 7월 2일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에서 자신을 경악케 한 폭풍우를 상기한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에 질겁한 그는 “나를 도우소서, 성 안나여, 그러면 수도사가 되렵니다”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엉겁결에 이루어진 수도원적인 소명은 루터 자신에게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1521년에 쓴 <수도회 소명에 대해여>De Votis monasticis 서문에서 그는 그의 부친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아버님의 뜻을 거스르고 또 알리지도 않은 채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님은 많은 예들을 통해 제가 택한 이 삶의 유형이 어떤 이들에게 분명 치명적이었음을 아시고 계셨지요? 그래서 아버님은 저를 명예롭고 부유한 결혼의 끈으로 묶어 놓을 작정을 하셨습니다. 저는 언젠가 아버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는지 기억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받은 소명이 하늘에서 온 공포 때문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면’말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아버님 입에 두신 것처럼, 이 말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할 수 있는 한 아버님과 그 말에 대해서 내 마음을 강퍅케 했습니다. 그러나 내 서원은 지푸라기의 값어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서원으로 인해 저는 부친의 권위 곧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그의 뜻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서원은 불경건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친에 대한 범죄였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인간적 교훈과 위선적 미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슈토테른하임의 폭풍우와 거기서 비롯된 충격이 결정적이긴 했어도, 다시 말해 서원 동기가 의심의 여지를 남기긴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수도원적인 삶은 매우 진지했다. 그는 1534년의 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이 15년 동안 수도사였습니다. 그 전에 살았던 방식은 고려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나는 열심히 그들의 모든 책들을 읽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습니다. 내가 세례 받은 이래 어느 순간에도 나는 위로 받지 못했고, 오히려 언제나 ‘너는 언제 한번 경건해지고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해서 너에게 은총을 베푸실 하나님을 갖겠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수도원’쪽으로 밀어 넣었고 금식, 추운데서 지내기, 근엄한 생활을 통해 나를 괴롭혔습니다.”우리는 루터의 수도원 소명이 종교적 결단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들은 대부분 사제였고, 루터 역시 그 길을 갔다. 1507년 4월 3일 사제로 서품된 루터는 5월 2일 자신의 부친이 참석한 곳에서 첫 번째 미사를 드렸다. 이제 그의 학문적 세계는 법학이 아니라 신학이 되었다. 그 해 여름부터 루터는 롬바르두스(†160)의 <언설집>과 오캄(†349과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420) 등을 공부했다. 1508년 10월에서 1509년 가을까지 그는 비텐베르크에 머물면서 그곳의 문과대학에서 공부도하고 강의도 했다. 그리하여 1509년 3월 신학사가 된 루터는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롬바르두스를 강의했다. 하지만 1510년의 로마 여행을 마친 루터는 1511년 여름, 비텐베르크에 결정적으로 돌아와 박사 과정을 계속 했고 그 이듬해 10월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동 대학 신학부에서 성경을 주해했다. 루터는 일생동안 자신이 신학박사임을 말하곤 했는데, 이는 로마를 향한 교리적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볼 때, 외적 소명도 없이 말하는 열광파들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1531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박사 마르틴은 순전한 순종을 통해서 박사로 부름 받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아 들여야 했고 내가 매우 좋아하는 성경에 선서해야 했으며 그 성경을 신실하고 순전하게 설교하고 가르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내가 이렇게 가르쳤을 때, 교황권은 내 길을 막고 이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게다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교황권에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더 나쁜 현상일 것이다. 그들은 나와 대면해서 자신들을 변호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나의 소명을 통해서 나는 사자들과 독사들 위로 걸어가련다.”
1513년에서 1518년까지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가르쳤다. 새 신학이 돌출했다. 게다가 1502년에 세워진 젊은 비텐베르크 대학은 새로운 사상들에 열려 있었다. 1507년에 인문주의적 문법이 도입되었고, 1509년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새 번역본이 사용되었으며,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교육이 특별히 배려되었다. 1518년에는 루터의 오른팔이 될 멜란히톤이 들어 왔고, 암스도르프Nicolas Amsdorf와 흔히 카를슈타트로 알려진 보덴슈타인Andreas Bodenstein이 루터의 동료가 되었다. 사실 16세기 초 인문주의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학들이 새로운 것들에 익숙지 못했을 때, 루터 운동은 이 대학들을 가동시켜 개혁사상들을 퍼뜨리게 한다.
루터 신학의 발전
루터의 삶과 그의 신학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결코 충분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신학은 분명 교리이자 또한 심정의 외침이다. 루터가 강조한 것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그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세 말기에 <신 신학>으로 나타난 그의 신학은 과연 어떤 복음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일련의 그의 작품을 살펴본다.
신학명제집Sentences 주석(1509-1510) : 롬바르두스를 주석하는 루터는 전통적 신학에서 크게 멀지 않으나 어떤 진보의 방향이 나타난다. 우선 철학 비판이다. 철학자들의 토론이나 여러 학파에 의지하기보다 차라리 교회 교부들(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을 의지하는 것이 낫다. 게다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있다. 이곳엔 이신 칭의의 교리는 없으나 롬바르두스 편에 위치하여 가브리엘 비엘을 비판하는 루터를 본다. 루터는 인간의 선한 의지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결코 인간의 <본능적 힘>을 말하지 않는다. 오캄 신학에 따르면 인간의 본능적 힘은 구원 서정에 있어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루터는 또한 <내재적> 은혜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주저한다. 루터는 성령의 게속적 활동인 <현재적 은혜>를 강조한다. 루터는 스콜라 전통의 무정형의 신앙(fides informis)을 버리고 진실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구원의 지식이라고 말한다.
시편 주석(1513-1515) : 시편 주석을 보는 눈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전통적인 주석으로, 다른 이는 개혁 사상이 분명하다고 본다. 또 다른 사람은 시편 주석이야말로 개혁적 신학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전통적인 방식을 좇아 각 문장에서 4가지 의미를 찾아냈다. 시편의 문자적 의미(Historia)는 다윗과 당시의 역사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화육된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은유적 의미(Allegoria)는 교회와 관련된다. 전의법적 의미(Tropologia)는 신자와 관련되고, 신비적 의미(Anagogia)는 종말론을 겨냥했다.
로마서 주석(1515-1516) : 여기서 전통적 성경의 4가지 의미가 포기된다. 이때부터 루터는 성경 텍스트의 문자적-문법적 의미와 영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루터는 이 주석 서문에서 모든 육체적 정의(파괴하고 뿌리 뽑고 무너뜨려야 할 것)와 하나님의 정의(우리를 구원하고 외부와 연결시켜주는)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롬 1:17을 설명하면서 주석 전체를 통해 자주 등장하게 될 이 주제(하나님의 의)를 특별히 언급한다.
“인간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단지 사람의 의만 나타날 뿐이다. 즉 누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눈에 또 다른 사람들 눈에 의로우며 의롭게 되느냐 하는데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다만 하나님의 의, 즉 누가 어떻게 하나님의 눈에 의로우며 의롭게 되느냐는 문제가 나타난다. 이것은…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 구원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품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사로 이해해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원죄란 죄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위치하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우리의 일상적, 종교적 행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탐욕은 죄의 잔여부분이나 새로운 죄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미끼가 아니라 진짜 죄이다. 루터는 죄의 축소나 또는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거부하고 우리 밖의 하나님의 개입만이 인간의 깊은 상실을 넘어설 수 있다. 이점에서 루터는 가브리엘 비엘의 개념에 맞선다. 비엘의 오캄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그 총체적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길을 떠나 은총을 얻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루터에게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자 죄인”imul justus et peccator이다.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구원의 확신을 명백히 말하고 있는가? 루터에 따르면 의심과 유혹에 부딪히는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구원의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주제는 뒤에 나오는 작품들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히브리서 주석(1517-1518):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보다 신앙과 그리스도와의 연결이다.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닮으려는 사람은 우선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고난받고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와 고난으로 표현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신앙으로 실행된다. 시련을 거치지 않고는 정결케 되지 않기 때문이다.
95개 논제(1517): 1517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을 붙이므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기성교회에서 이탈하여 개혁의 길로 가게 되었다. 진정한 면죄의 의미를 묻는 이 95개 논제 전체 내용은 참 회개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삶 전체”가 참회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시작한다(1조). 그리고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40조, 94조, 92조).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교황(사제)이 죄를 사할 수 있는가이다. 루터는 교황의 사죄 선포 권한만을 인정한다(6, 38조). 이어 면죄부의 원리(71조) 및 잘못된 원리(32, 49, 52조)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것(43, 62조)을 강조한다. 신자의 믿음이 연약한 고로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죄 용서의 선포는 전통적인 개혁 교회의 예배의식에도 들어있다. 하지만 면죄부는 모든 형벌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교황이 부과한 형벌과만 관련한다(20, 21조). 따라서 면죄부 설교는 말씀의 설교가 아니라는 것(53, 54조)과 면죄부 구입은 일종의 소극적인 자비 행위이다(42, 43, 44조)라는 것이 천명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면죄부 판매는 돈을 긁어모으는 수단이 되었다(도처에 있음. 특히 67조).
하이델베르크 논제(1518): 28개의 신학적 명제와 12개의 철학적 명제로 되어 있는 이 논제를 통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제1명제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을 의의 길로 가게 할 수 없음을 말하고, 2-11 명제에서는 인간의 업적의 종교적 가치를 부인한다. 13-16 명제에서는 구원을 위한 행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부인하며, 17-18 명제에서는 율법을 통한 죄의 인식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19-24 명제에 이르러 루터의 독창적인 면이 나타난다. 곧 우리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제로 일어난 사물들 가운데서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자로 불림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
루터의 3대 논문
루터가 파문을 당한 것은 1521년 새해 벽두였다. 그를 이 상태로 몰고 간 것은 그가 1520년에 쓴 유명한 삼대 논문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순서대로 그 글들을 살펴보자.
먼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루터는 세속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귀족들을 겨냥한다. 이는 기독교 인문주의가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엘리트를 겨냥하여 개혁을 호소한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루터는 먼저 로마교도들이 쌓아놓은 세 가지 담을 지적하고 그것들을 무너뜨릴 것을 귀족들에게 호소한다. 다음으로 그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악폐들을 열거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한다. 먼저 세 가지 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담은 세속적 계급과 영적 계급 사이에 놓인 담이다. 루터는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교황, 주교, 사제, 수사들과 세속 계급으로 여겨지는 군주, 영주, 직공, 농부들을 구분하는 것이 거짓이고 위선임을 말하고 모든 신자가 사제임을 말한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이 만인 사제직에 따라서, 기독교 국가였던 그 시기에, 통치자들이 모두 주교와 동등한 사제들이며 관리의 직무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여기에서 루터의 두 왕국 개념이 나오는 바,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다. 이렇게 루터는 세속 권을 영적 신분에 흡수시키므로 첫째 담을 허문다. 그러므로 교황, 주교, 사제들도 세속적인 법률에 굴복해야 한다.
둘째 담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황과 신도 사이에 놓인 담이다. 루터는 성서 해석이나 그 확인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성서 해석의 자유가 신자들(교회)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말해 온 모든 말과 다른 많은 본문에 의하여 대담하게 되고 자유롭게 되어…자유의 영을 교황들의 날조로 인하여 위협을 당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신앙에 근거한 우리의 성서 해석에 따라 교황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을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므로 교회 안에 진실한 신앙과 정신을 가진 신자들은 신앙도 영도 없는 교황의 오류를 책망해야 한다.
셋째 담은 공의회 소집에 있어서 교황과 세속 당국 사이에 놓인 담이다. 교황의 잘못을 책망하기 위해서 공의회의 소집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공의회 소집권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주장은 성경에 근거가 없다. 루터는 초대 공의회들의 예를 들어 (니케아 회의) 공의회 소집은 세속 당국자가 적격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세속 당국자들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고 동료 사제들이며 동료 영적 존재들이고 만물에 대하여 동료 主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그리스도를 거슬러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다음으로, 논의되어야 할 악폐와 개선책에 대해서 루터는 세속적 당국자들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제거해야 할 악폐들을 열거하고 개선책을 제시한다. 그 중 몇 가지만 들어보자. 가장 영적이고 가장 거룩한 칭호를 가진 자들이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라는 것.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한 온갖 방법을 짜냈는데(첫 수입세, 사라센 세, 팔리움Pallium, 가슴속의 보류, 거래소 등), 따라서 개혁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 로마의 임명을 금지하고 개 (국가)교회의 권리를 회복하라는 것. 로마의 순례를 폐지하라는 것—루터에 따르면, “로마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이 더 나쁘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포함하여 탁발 수도회의 건립을 중지시키라는 것—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조예가 깊은 영적인 고위 성직자가 수도원을 다스릴 수 없으면 그 수도원은 없어져야 한다.”사제의 독신 서약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 루터는 독신제도— 하에서 결혼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 임금을 몰래 가져온 경우와, 사악한 주인에게서 종이 자기가 번 돈을 훔치는 경우에 비유하면서 “이와 같이 당신도 교황에게서 당신의 처자를 훔쳐라”고 말한다. 죽은 자의 미사나 모든 축제일들을 폐기하고 주일만을 보존하며 헌당일도 폐기하라는 것 등이다.
그 외에 루터는 철저한 학교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제거하라. 특히 그에 대한 주석서들을 제거하라. 필요할 경우 주석서 없이 있는 그대로 읽혀야 한다. 교회법은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완전히 말살시켜라. 오히려 세속법이 (비록 너무 많지만) 더욱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성서와 훌륭한 통치자는 충족한 법이 될 것이다.”신학은 복음(성서) 외에 다른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교황과 황제와 대학교들은 문학 박사, 의학 박사, 법학 박사, 명언집 박사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박사는 하늘에서 오신 성령 외에는 아무도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하다.”“경애하는 교부들은 자기들의 글로 우리를 성서에 인도하려고 하였으나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하여 성서에서 떠나려고 한다.” 물론 루터는 교회 개혁에 있어서 세속권의 남용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속권의 남용과 종교적 남용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마 그는 이 <귀족에의 호소>에서 이 점을 말하기가 곤란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3개월 전 그 해 5월에 쓴 <선행론> von dengutten Werken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고 훗날 해명한다. 그러나 십계명 해설인 <선행론>에서도 국가와 법의 부정적 면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면을 보기엔 루터의 눈이 교회의 악폐로 둘러싸여 있었는지도 모르며, 또한 근대가 보여줄 영권에서 속권으로의 권력 이동을 그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독일 귀족에게의 호소>가 나온 지 두 달 후, 루터는 로마 교회의 7성례를 비판하고 성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담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작성했다. 교회의 참 성례는 세례와 참회와 성찬 세 가지 뿐으로 그 동안 이것들이 로마 교황청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이 세 가지 성례를 취급한다. 첫째는 빵의 성례(성찬)요, 둘째는 세례의 성례(세례)—이 안에는 “세례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신앙” “ 물에 잠김의 성례” “ 모든 서약 폐기”가 들어있다—이며, 셋째는 참회의 성례(고해성사)이다. 루터는 로마교회가 참된 참회를 변질시켜 그곳에 있는 약속과 신앙을 제거하고 그들의 독재권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고, 참회에는 회개, 고백, 보상이라는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루터에게는 세례와 성찬 이외에 고해성사를 성례에 두고 싶어 했음이 사실이다. 성찬에 있어서 로마 교회는 세 가지 것을 포로로 삼았다.
첫 번째가 성찬에서 한 가지 요소를 빼앗아 간 것이다. 곧 포도주를 의미한다. 루터는 “이러한 사로잡힘이 공의회의 결의에 의하여 종결”되기를 원했다. 그는 두 가지 요소로 성찬식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라고 말한다. 이것이 성찬 요소의 완전성 문제이다.
두 번째는 화체설을 통해 제단 위에 있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를 빼앗아 간 것으로, 이 요소들을 바라보는 자들의 양심 문제이다. 루터가 볼 때, 성별된 빵과 포도주는 그 실체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지, 그 외양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이 요소들의 실체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가 공존한다고 말하면서, 빨갛게 달궈진 쇠의 비유를 든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가 빵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지지한다.
세 번째는 미사를 희생제사로 사용하므로 성례를 이익 사업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알아야할 것은 “제단의 미사나 성례가 그리스도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에 접근하는 것은 공적이 아니라 오직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성찬에 있어 약속과 신앙 개념은 개신교 성찬론에 있어 중요한 개념을 이룬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에서 말해온opus operatum(행해진 행위), opus operantis(행위자의 행위)의 모든 opus(행위) 개념들을 거부하고 약속에 의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다.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루터는 이 논문의 서두에서 그의 자유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두 명제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명제들은 자유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명제는 신앙인의 속사람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유인이 되기 때문에 율법을 포함하여 만물로부터 그리고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의와 구원을 위해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 속사람의 자유와 관련해서 루터가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율법, 의식, 공로 등과, 이와 맞서는 신앙의 능력이다. 신앙은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우리를 의롭게 하여 의식과 공로에서 자유롭게 하며, 신앙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롭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적인 것이다. 외적인 것은 의와 자유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의와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이다. 말씀 선포는 의와 자유를 주기 위함이다. 신앙만이 말씀을 유효케 한다. 따라서 신앙만이 의와 자유를 준다. “신앙 외에 다른 어떤 일도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 못한다.”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곧 자유 할 수 없다). 우리의 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이 약속은 필히 신앙과 연결된다. 이러한 신앙에는 세 가지 능력이 있다. 첫째, “신앙은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도록 만든다.”둘째, “신앙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에게 드림으로 진리와 의를 이룬다”복종). 셋째, 신앙은 “영혼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킨다…믿는 영혼은 그의 신앙을 담보로 하여 그의 신랑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되고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고 죽음과 지옥에 대해서 안전하게 되며, 또한…의와 생명과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내적 자유가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나 종교적, 정치적 힘에 의해 만물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원수들의 지배 앞에서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만인 제사장이다. 현재의 성직자들은 종, 청지기, 일꾼, 봉사자들이다. 이들이 권력을 행사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박탈되었다.
둘째 명제는 신앙인의 겉사람과 관련된다. 참된 자유인인 그는 이번에는 만물에게 예속되는 일에 있어서 자유를 행사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겉사람으로서 그는 즐겨 율법, 의식, 선행을 준수하되 그것 자체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에 따라 행한다. 이것은 결국 이웃을 위한 것인 바,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이웃 안에서 사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외적 자유는 사랑과 관련한다. 그는 먼저 선행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그가 자유로이 선행을 하는 것이다.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한다.”따라서 신앙이 선인을 만든다. 신앙이 없는 선행은 거짓이다. 이어서 그는 자유와 사랑과의 관계를 말한다. 참된 신앙의 행위(자유)는 사랑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리스도야말로 귀감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나에게 주신 것과 같이 나는 내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나는 이웃을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하고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내가 풍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자유와 사랑의 윤리의 모범들로는 동정녀 마리아, 바울, 그리스도 자신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자유이다. “이 자유는 영적이고 참된 자유이며, 모든 죄와 율법과 계명에서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켜 준다…하늘이 땅보다 더 뛰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자유는 외적인 다른 자유보다 더 뛰어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이해하게 하고 보존하게 하옵소서. 아멘.”하지만 그가 그의 가장 위대한 논문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끝내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자유와 사랑의 변증법을 세운다. 루터는 한편으로, 자유란 말을 오해하여 그것을 지나치게 남용하면서 모든 의식들, 전통들, 인간의 법규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을 지적 한다—“신앙의 자유에 대한 말을 듣는 즉시 그 자유를 육체에 대한 하나의 기회로 바꾸어서 이제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의식의 준수에만 의존하며 신앙의 본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지적한다. 루터는 먼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마음껏 일관되게 행사할 것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는 고기를 먹고 금식을 중단하며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그들이 가장 큰 죄로 생각하는 다른 것들을 행하는 것이 좋다.”“폭군들과 완고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불경건하고 그들의 법령들이 의를 위하여 무익하며 또한 그들이 법령들을 만들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끊임없이 일관되게 당신의 자유를 행사하라.”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신앙의 자유를 파악하지 못한 채 신앙이 약하고 고지식하며 무지한 사람들에 대해서, 루터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사랑으로 행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해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섬기라는 사랑의 명령이다.”그는 그들을 참된 자유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자유의 투쟁과 사랑의 실천은 변증법적으로 나타난다.
은둔과 운동 복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설명된 이상 나머지는 그 적용들에 불과하다. 교황청에 의해 이단이 된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섰고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이 나를 설득하지 않는 한…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5월 21일 추방당했다. 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빼돌려 자신의 성인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다. 루터는 일 년이 채 못 되는 은둔 기간 동안 시편과 마리아 송가(눅 1:46-55)를 주해했고 <수도회 서약에 대한 심판>을 썼으며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기획했다. 그는 수도회 서약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4년 뒤 수녀원을 탈출한 카터린 폰 보라와 결혼한다. 한편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가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1521년 크리스마스 미사에서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예배모범을 만들었다. 혼인 문제에 있어서도 루터를 앞질러 1522년 1월에 결혼했다. 성상파괴도 과감했다. 그의 신학 역시 루터의 것과 차이를 드러냈다. 신앙공동체의 자체 통치는 무정부적인 입장으로 비쳤고 성경과 내적 말씀의 동일시는 일종의 직접 계시의 위험을 보였다. 루터는 카를슈타트에게서 “열광주의”를 보았고 서둘러 비텐베르크로 돌아갔다.
설교단에 오른 루터는 무슨 권한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새로운 율법으로 바꾸었는가”라고 외쳤다. 그는 모든 것을 원상으로 되돌려 놓은 상태에서 점진적이고 온건적인 방식으로 개혁 방향을 정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독일어 미사가 합법적으로 시행된 것은 1525년 10월이고 법제화된 것은 1526년이다. 사실 비텐베르크 운동은 세 가지 경향 속에 있었다. 카를슈타트(뒤에 뮌처로 이어짐)와 루터의 방법은 정반대이다. 전자가 재속적인 급진 개혁 그룹에 속했다면 후자는 탈속적인 온건 그룹에 속했다. 여기에 다소 중도적인 멜란히톤이 보여준 입장이 있었다. 그는 재속적인 온건 개혁 그룹에 속했다(츠빙글리와 칼뱅 등의 개혁파가 이런 그룹에 속한다). 이미 비텐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 방향은 결정되었다. 루터는 멜란히톤과는 같이 할 수 있었으나 카를슈타트와는 동행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서로 합할 수 없는 세력들과의 결별을 통해 루터 종교개혁의 특징은 분명해진다.
루터 종교개혁의 특징
루터의 개혁적 발견은 일련의 성서 연구, 특히 로마서 연구와 더불어 이뤄졌고 바로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마찰과 분리는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며 붙인 95개 논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상과 행동 윤리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문제(의지의 자유를 포함)는 루터의 출발이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가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수도회 서약의 무의미를 말했을 때 그 중심에는 그가 이미 정리한 바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추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비텐베르크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나타난 협력 가능한 세력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기사들의 반란, 농민전쟁,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에 각각 반대하면서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첫째,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민족이나 국가의 자유가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었을 독일 기사들의 반란을 지지하지 않았다. 1522년, 후텐Ulrich von Hutten을 중심으로 한 기사들은 루터에게서 쇄신된 독일의 선구자를 보았고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중에는 군주와 부르주아 사이에서 위축된 자신들의 신분 상승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결국 슈바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짧은 성공을 이뤘지만,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루터에게 가담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민족의 자유도, 국가의 자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루터는 농민전쟁의 주역들과 결별하면서 자신의 개혁적인 방향이 그들과 다름을 보여줬다. 1524년 남부 독일에서 일단의 농민들이 연맹을 결성하고 일련의 정치적, 종교적 사항들(슈바벤 농민의 12 조항)을 요구하였다. 초기의 평화적인 태도는 점차 호전적으로 바뀌었고 토머스 뮌처의 합류로 농민들은 반란세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평화를 촉구하면서 군주들에게는 착취가 반란의 원인임을 상기시켰고, 농민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결합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두 왕국 이론에 따라 루터는 사회 정의의 문제를 위정자의 몫으로 돌렸고 오히려 농민 반란 집단의 처벌이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수많은 민중에게 실망을 안겨 준 비텐베르크 운동은 결국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국가교회 형태를 띠게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 않고 노예의지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1525년 말, 루터는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의 결별을 통보했다. 사실 <엔키리디온>의 저자는 계시가 문명을 섬기기를 바랐고 그런 점에서 루터의 지나친 태도를 염려했을 것이다. 기존 문명에 대한 비판은 <우신예찬>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서 로마가 비텐베르크 운동에 대한 비판을 요구해오자, 자유의지라는 제한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루터를 공박했다. 그런데 루터에게 이 주제는 별 것 아닌 부수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루터에게 있어서 문명이야말로 부수적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게는 그가 발견한 계시가 중요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철학”보다 “십자가의 철학”이 더 중요했다. 그리하여 루터는 인간이 구속 사역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자유의지를 철저히 거부하고 sola fide와 sola gratia를 드러내는 <노예의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1522년에서 1525년까지 루터 종교개혁의 특징과 방향은 결정되고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민족적 자유, 정치적 자유, 그리고 자유의지와 혼동시키기를 거부했다.”이들과의 연합이 큰 동맹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는 “기사들의 민족주의, 농민들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와 결별했던 것이다.”
노예의지론
-1525. 서론 분석(종교개혁사상선집, 256~)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맞서 반박한다.
루터 교회의 설립
루터와 같은 탈속적인 개념에서 새 교회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루터는 교회 조직을 생각하지 않았으나 종교개혁에 가담한 독일 군주들은 1526년부터 본격적으로 새 교회조직을 구상했다. 그들은 슈파이어 의회에서 소위 “영토 통치자의 종교 선택권”cujus regio, ejus religio)을 획득하고 자신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두 왕국 이론을 갖고 있던 루터는 군주들이 교회 설립을 주도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농민전쟁 때의 경험은 루터로 하여금 결국 힘 있는 보호자들의 간청을 받아들이게 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분리와 국가 권력에 의한 교회 설립 사이에서 루터의 갈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자생적 민중 운동”이 군주들의 일거리가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는 군주나 위정자가 신학자와 법률가로 구성된 시찰 위원회를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목사들을 심사할 책임을 갖게 했다. 결국 루터는 교회와 이상국가의 일치를 꿈꾸면서 1529년 <소 요리문답>과 <대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1529년 카를 5세가 제2차 슈파이어 의회를 통해 루터주의 군주들을 압박하자, 필립 폰 헤세를 비롯한 5명의 군주와 14 도시들이 이에 항의(protest)했고 여기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힘에서 열세였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그 세력을 확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에 가담한 여러 교회들이 특별히 성찬 이론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 불화의 씨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제적인 프로테스탄트 동맹은 불가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필립 폰 헤세는 독일을 비롯한 스위스와 다른 나라들의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로 불렀다. 그러나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방식은 비록 화체설에서는 벗어났지만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기념설이 팽팽하게 맞붙었고 결국 이견의 좁히지 못한 채 동맹의 꿈을 접게 했다. 이렇게 루터는 신앙의 문제 때문에 또 다른 결별을 해야 했다. 종교적, 정치적 동맹을 거부하면서 계시(신앙, 경건)에 충실하고자 했던 루터는 결국 그를 지지한 군주들의 보호 하에 국가교회의 창설을 보고 만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지속을 의미한다. 1530년 멜란히톤에 의해 작성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 교회의 독자적인 길에 대한 선포였다. 1536년에 만들어진 루터교회의 성찬론 일치를 꾀한 <비텐베르크 협약>과 일종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의 성격을 띤 슈말칼덴 조항 은 독일 < > 루터교회의 생존과 확대를 위한 투쟁이었고 그 결과는 루터가 죽고 난 후(1546) 체결되는 아우구스부르크 화약(1555년)이다. 이것으로 독일 루터교회는 예배의 자유를 얻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자 영토 별로 공존하게 되었다. 칼뱅주의는 1560년에 가서야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하에 팔츠 지방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토머스 뮌처
뮌처의 어제와 오늘
뮌처의 행적에 대한 루터의 평가는 단호했다. “화육된 마귀” 이것이 뮌처에 대해 루터가 내린 결론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로서, 한동안 종교개혁의 후예들에게 불변의 진리였다. 뮌처의 해석에 새로운 뉘앙스를 준 첫 시도가 나온 것은 17세기 말이다.
1699년, 경건주의의 경향에 있는 루터파 사람인 고트프리트 아르놀트가 <교회와 이단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루터에 대한 존경은 초기에만 해당되고 카를슈타트와의 논쟁(1521년 5월 22일) 때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재세례파, 열광파 그리고 뮌처는 명예회복의 대상이다. 그는 뮌처의 맹렬한 행동이 부인할 수 없이 끔찍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자살하지 않을 만큼, 그리고 어떤 이익을 챙기지 않을 만큼은 하나님의 영이 없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1525년 이래 뮌처와 그의 글들이 망각에 빠진 상태에서 아르놀트의 책은 계몽주의 종교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뮌처 사상에 대한 실제적 관심이 싹트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시기이다.
1795년 바바리아 목사인 쉬트로벨은 <튀링겐 농민 반란의 주모자, 토마스 뮌처의 생애, 작품 그리고 교리>라는 책을 뉘른베르크에서 출간했다. 16세기에서 혁명시대의 동지를 발견하려는 이 책은 다소간 학문성이 결어되었기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나,
1830년 혁명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뮌처에 대한 새 작품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역사가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랑케는 뮌처를 단순히 “계시주의자”로 본 반면, 좌익 헤겔주의자인 짐머만은 뮌처를 “민주주의 운동”인 농민전쟁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 했다. 이 짐머만의 글을 충분히 활용한 이가 엥겔스이다. 뮌처는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두 명의 저자에 의해 일약 유명해졌다. 첫 번째는 엥겔스의 <독일 농민 전쟁>(1850)이고 두 번째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1921)이다. 전자는 1848/49년 혁명의 실패 뒤에 쓰여 졌고, 후자는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공과 독일 스파르타쿠스 혁명의 실패 어간에 쓰여 졌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 책들을 통해 대중화된 뮌처는 전설적 인물이 되었고 우리 시대의 민중 봉기의 신화들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세속사의 흐름은 교회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두 명의 교회사가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되었다. 베인톤의 <종교개혁의 좌익>이란 표현과 조지 헌스턴 윌리엄스의 <급진 종교개혁>이란 표현은 한동안 종교개혁을 보는 새 시각을 던져 주었다.
새 역사비평
인물과 작품 해석을 위한 주요 관점 가운데 하나는 뮌처에게 있어서 그의 마지막 시기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 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 가이다. 다시 말해서 에른스트 블로흐에 의해 붙여진 <혁명의 신학자>란 칭호가 텍스트들의 실재들과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모든 질문은 이론(신학)과 실천(혁명적 정치 활동)과의 관계로 귀결한다. 뮌처가 어떻게, 분명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신학에서 출발하여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사회 참여에 도달했는가를 아는데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학이란 겉에 두르는 외투나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수한 정치적 핵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선 교리를 떼어내면 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뮌처의 신학적 개념들은 조사할 필요가 없어진다. 실제로 엥겔스는 뮌처의 작품들을 매우 드물게 참고한다. 이것은 그가 16세기에 신학이 외적 요소가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언어였음을 잊고 있다는 뜻이다.
블로흐의 마르크스주의는 엥겔스의 그것보다 부드럽다. 그는 뮌처를 합리주의자로 삼는 일을 피하면서 비합리적 요소들인 미신, 묵시적 환상, 종말론적 도식 등, 한마디로, 그가 “모든 혁명의 정치 철학적, 그리고 종교 철학적 원리”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한다. 천년왕국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성분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는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입문>에서 말한 종교(또는 이데올로기) 기능의 변증법적 정의에 보다 근접하고 있다. 블로흐가 엥겔스의 엄하고 단순한 마르크시즘을 통해 <수정주의>로 나아간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블로흐의 책을 보다 정확히 마르크스주의의 틀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루카스와의 대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루카스는 <역사와 계급 의식>(1923)에서 1525년에 농민들의 실패의 깊은 원인들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경제 조건들이 농민으로 하여금 유일한 혁명 계급이 되게 했고 이런 관점에서 농민의 승리는 완전히 가능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패배한 것은 그들의 계급의식의 부족이 어쩌면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혁명적 조직을 결성치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뮌처의 경우는 종교 의식(루카스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실제와 혁명 이론 사이에 막(寞)으로 개입되었다. 달리 말하면 뮌처의 계급 의식이 그의 신학에 의해서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실천에 대한 신학의 역할은 이렇게 각각 달리 해석된다. 엥겔스에게는 단순한 가면이요, 블로흐의 경우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요소이며, 루카스가 볼 때는 하나의 칸막이요, 제어장치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뮌처에 대한 가장 두꺼운 책을 쓴 스머린Smirine은 뮌처의 신학이 모든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피오레의 요하킴과 라인강 유역의 신비주의의 영향에 대해 조사했다. 스머린의 잘못은 그가 이 신학을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인간학으로 축소시키고 뮌처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선구자요 공산주의의 조상으로 삼은 데 있다.
로만Lohmann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뮌처는 <혁명의 신학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회적 실천이 그의 신학(십자가의 신학)과 통합하지도 않고 또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로만은 이 신학의 사회적 영역을 부인한다. 뮌처에게는 정치적 계획이 없는 신학자와 신학의 영역을 떠나는 정치가가 병존한다. 간단히 말해서 뮌처는 외적 상황과 역사의 우연이 혁명가로 변형시킨 신학자인 셈이다. 콘Norman Cohn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뮌처는 그 관심사가 본질적으로 신비적 성격이고 가난한 자의 복지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무관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입장도 뮌처의 일면만을 보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면 뮌처의 진정한 위치는 어디인가? 혁명의 신학적 기초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신학은 혁명을 배제하는가 아니면 강요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와 텍스트 앞에 다시 서야할 것이다.
뮌처의 생애와 작품
1490년 하르츠 산간 지방의 슈톨베르크에서 태어난 토마스 뮌처는 종교개혁 초기에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년 봄에 1520 , 그가 츠비카우Zwickau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을 때, 루터의 많은 지지자들 속에서 불쑥 솟아났다. 일년뒤 시 임원 단들과의 마찰로 자신의 직무를 상실하면서 뮌처는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프라하로 가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론을 글로 표현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프라하 선언이다. 1521년 이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일 년 반의 방황 끝에 튀링겐에 있는 알쉬테트의 목사로 임명되어 갔다(1523년 부활 주일). 뮌처가 자기 작품의 진수를 펴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또다시 일련의 분쟁을 일으키고는 같은 고장의 뮐하우젠으로 가서 도시 제도의 개혁에 참여했다. 1524년 10월에 그는 아마도 뉘른베르크에 있었고, 그 뒤엔 독일 서남 지방으로 다니면서 농민 봉기를 전개했다.
1525년 2월 튀링겐으로 다시 돌아와 이 지역의 반역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뮌처는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15일 뒤 처형되었다. 뮌처의 작품은 그의 생애만큼이나 간략하고 밀도가 높다. 1521년 가을에서 1524년 가을까지 쓰여진 6편의 이론 및 논쟁서들과, 예배 의식 개혁을 다룬 세편의 글(1523/1524년)과, 설교 단편들과 초안, 그리고 수십 통의 편지들(대부분이 1524/1525년에 쓰인 것)이 있다. 이것이 매우 간단히 요약된 뮌처의 생애와 작품이다. 이제 주요 시기의 활동과 작품을 살펴보자.
츠비카우에서의 뮌처
뮌처가 루터의 천거에 의해 목사로 임명된(1520년 5월) 도시 츠비카우는 그 도시의 위치 상(라이프치히와 프라하,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덴을 잇는 십자로)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그리고 직물업에 있어서 중요한 도시였다. 이 직물공들의 주인들은 인근 쉬네베르크와 아나베르크의 광산의 소유주를 겸하면서 도시의 귀족계층을 형성했다. 한편 직물공들과 광부들은 대량 유동인구를 이루면서 실로 “프롤레타리아”계층을 형성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종교 생활에서도 일종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했다. 츠비카우에는 두개의 큰 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귀족과 조합원들의 교회인 성 마리아 교회요, 다른 하나는 하층민들의 교회인 성 카터린 교회이다. 츠비카우와 인근 지역의 하층민들은 2세기 전부터 이단들에 호의적이었다. 왈도파와 후스파의 영향은 도시의 하층 구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이것은 뮌처의 사상을 형성하는 양식이 되었다. 뮌처는 공식 설교자인 에그라누스가 자리를 비운 수개월간 성 마리아 교회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에그라누스가 돌아온 1520년 10월부터 성 카터린 교회로 옮겼다. 뮌처의 설교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도시는 일련의 소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시 당국이 그를 소환하자 그는 그냥 도시를 떠나고 말았다(1521년 4월 16일). 츠비카우 시절 뮌처가 남긴 것으로는 시 서기가 기록한 두 편의 설교 노트와 뮌처가 소장한 도서 목록(로렌초 발라, 아그리콜라, 에라스무스, 로이클린, 후텐, 등), 그리고 뮌처가 만든 에그라누스의 논제들 및 몇 통의 편지들(그 중 하나가 1520년 7월 13일자의 루터에게 쓴 편지)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결정적인 사건은 뮌처에 “츠비카우의 예언자들”과의 만남이다. 이들의 명단은 슈토르흐, 슈튀브너, 드레흐셀이다. 이 중 당시 사람들이 이 그룹의 우두머리로 여겼던 슈토르흐는 직물업계의 경쟁으로 망한 츠비카우의 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신학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슈튀브너는 셋 중 유일하게 대학 공부를 한 사람으로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녔는데 이때 그는 뮌처를 만났었다. 드레흐셀에 대해서는 이름밖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기록된 작품을 남기질 않았다. 뮌처와 이 세 사람과의 관계는 뮌처가 슈튀브너에게 보낸 편지(1521년 6월 15일)에서 어느 정도 나타난다. 뮌처는 이 그룹의 지배자는 아니었다. 뮌처가 이 그룹에게서 받은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재)세례에 대한 개념일 것이다. 세례에 대한 뮌처의 생각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524년의 작품에서이다.
프라하 선언
츠비카우를 떠난 뮌처는 프라하로 가서 얼마 후 그의 초기 사상을 알리는 중요한 글을 남긴다. 이것이 유명한 프라하 . 선언서이다. 먼저 전문에 가까운 인용문을 읽어보자.
“나, 슈톨베르크 출생의 토마스 뮌처는 온 교회와 온 세상 앞에서, 이 편지가 발견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거룩하고 불굴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나은 가르침을 추구함에 있어서,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모든 열심을 다 보였음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고 청년시절부터 나를 알아온 모든 선민들과 함께 증거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내 생애의 어떤 시기에도(하나님께서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아시거니와), 나는 어느 수도사나 사제로부터도 신앙의 참된 실천에 대해서나, 선민이 성령의 7가지 열매를 가질 필요를 보이면서 하나님 경외의 정신으로 신앙을 분명히 하는 시련의 교화적 시기에 대해서도 전혀 배운바 없다. 나는 어느 학자로부터도 만물 가운데 심겨진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 단 한마디 말도 배운바 없다. 한편 전체를 모든 부분의 통일체로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점에 대해 눈곱만큼도 파악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저주받을 사제들이 가장 그랬다. 나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살인자와 도적처럼 성경(Bible)에서 도적질해 빼돌린 오직 경mere Scripture만을 들었을 뿐이다. 예레미야는 23장에서 이러한 도적질은 그들 자신이 말씀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이웃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훔치는 것으로 묘사한다. 내 생각에 이들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마귀가 성별한 실로 교활한 설교꾼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 참을 수 없고 해악스러운 해독이 나로 하여금 열심히 초대 교부들의 역사를 읽도록 이끌어 갔다. 나는 사도들의 제자들이 죽은 뒤, 순결한 처녀 교회가 성직자의
간음으로 창녀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헤게시푸스가 쓰고 있고, 뒤에 에오세비오스(4권 22장)가 쓰고 있듯이, 언제나 꼭대기에 앉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오류였다. 나는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을 믿는 신앙에 대해서 온전히 살아있는 명령의 어투로 확신케 하는 설명을 한 어떤 종교회의도 발견치 못한다. 어린애들의 장난밖엔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느슨한 고삐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으로, 그래야 그들의 모든 행한 일들이 드러나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가 설교꾼들과 원숭이들로 이뤄지는 일이 결코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택함 받은 친구들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예언을 또한 배워서 하나님이 모든 그의 선민들과 대화하시는 우애롭고 친밀한 길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내 생명을 기꺼이 바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과 더불어 특히 이 고장에서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회가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고, 이 백성은 전 세계를 위한 거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도록 각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엘리야의 정신으로 바알 우상에게 제사하도록 그대들을 가르쳐온 자들이 누구인지 지적하게 해달라. 만일 그대들이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내년에 터키인들을 시켜 그대들을 진멸하시리라.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실로 그대로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예레미야가 당해야 했던 고통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보헤미아인 들이여 명심하라. 베드로의 가르치심대로, 그대들을 신앙의 계산을 하도록 명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나도 그대들에게 내 신앙의 셈을 치를 것이다. 만일 내가 그토록 담대히 자랑하는 이 지식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면 나는 일시적이며 또한 영원한 죽음의 자식이 되리라. 내게는 이 이상의 담보가 없다. 이 담보로 나는 그대들을 그리스도께 부탁한다.
1521년 만성절에, 프라하에서.
이 선언서는 3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신학적 체계의 서식화, 역사 개념에 근거한 현실 비판, 마지막 예언. 좀 더 깊게 보면, 새로운 선민의 사도적인인 교회를 세움으로서 전 교회를 갱신하려는 이상, 기존 교회제도와 공허한 신학 이론에 대한 비판, 객관적 권위보다 내적 권위 강조,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대한 부채질, 예언적 신앙이 발견된다(그리취E. W. Gritsch). 신학적으로는 종교개혁에 가까운 표현들이 들어 있다. 믿음 있는 선민,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성경, 성령의 역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Imitatio Christi) 등이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루터의 개혁적 발견과 비교할 때 의미상 거리가 있다. 다음으로 현실 비판적 표현들을 보면, 도적과 도적질, 교활한 설교꾼, 원숭이 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로마교회뿐만이 아니라 루터교회를 포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말 사상이다. 묵시론적인 역사 관점에서 선민과 악인의 구별. 역사에 대한 개념 차이가 뚜렷한데 (특히 루터와 관련해서), 그러나 이때만 해도 비폭력을 견지한 듯하다.
알쉬테트의 목사
뮌처가 프라하에서 쫓겨나 알쉬테트에 온 것은 1523년 봄이다. 이 시기야 말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나온 시기이다. 그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거짓신앙에 대하여>라는 작품에서 뮌처는 주로 <프라하 선언서>의 내용을 반복 확인한다. 다음으로 <주장 또는 논증>에서 뮌처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참 세례에 대해서 말하기를 “물은 하나님의 영으로 향한 우리 영의 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뮌처는 여기서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의 대립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문제는 외적 세례와 내적 세례와의 대립이었다. 내적 세례의 원인인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는 고통에 기초한 길고 험한 성장의 열매이다. 뒤에 콘라드그레벨이 이 영향을 받아 1524년 취리히에서 이 이론을 실천으로 옮김으로 “재세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 시기에 뮌처는 예배의식을 개혁하는 작품들을 남기는데, 독일어 예배의 식서와 독일어 복음주의 미사 등 주로 실제적 작품들이다. 또한 뮌처는 군주들에게 주는 설교를 작성한다. 그의 예배의식의 개혁이 만스펠트Ernst Mansfeld 백작을 자극하여 반발케 했고, 결국 권력의 위협 앞에 서자 뮌처는 1523년 9월 로마서 13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 군주와 세속 권력의 진정한 의미를 말했다. 1524년 3월 24일 말러바흐Mallerbach 예배당의 성모상이 불 탄 데 대해 뮌처가 책임이 있다고 고소되자, 이 사건이 자신의 영향 때문임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뮌처는 일련의 위협 앞에서 “선택된 자들의 동맹”의 형성으로 맞섰다. 그는 1524년 7월 13일 작센의 요하네스 공작 앞에서 (이 사람에게 루터도 <세속 권력에 대해>라는 책을 헌정한 바 있음) 다니엘서 2장을 주해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여기서 “급진적이고 불굴의 개혁!”을 외쳤다.
군주에게 행한 토마스 뮌처의 설교(다니엘 2장 주석)
첫째로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 중 앞에서 언급한 장을 자세히 설명하고 해석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전체의 설교를 본문과 조화시켜서 말하고자 합니다.
만일 근면하고 동요함이 없는 하나님의 종들이 매일 성경을 가지고, 찬송하고, 읽고, 설교하지 않는다면, 빈약하고 병들어 붕괴하고 있는 기독교 세계는 조언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매일 성경을 갖고 읽고 설교한다면, 욕심을 한껏 채워 왔던 많은 우두머리 사제들은 계속하여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그들의 소행들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포도원에 대해 이사야서(5:1-23)와 시편 80편(9-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기독교 세계가 굶주린 늑대들에 의해 이처럼 비참하게 황폐화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다루어야 할까요? 성 바울은 우리가 신령한 찬송을 부르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엡 5:19).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의 시대와 똑같이, 하나님의 선민들로 이루어진 회중은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도우실 수 없을 정도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와 같이(사 29:17-24, 렘 15:11, 겔 36:8-12, 시 89:31-38),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 한 번 인정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이교도들의 포로가 되는 처벌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부들의 시대와 우리 자신들의 시대에도 기독교 세계는 훨씬 더 완악하여 마귀와 마귀의 종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이름으로 자신들을 꾸미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눅 21:5, 딤후 3:5, 고후 11:13-15). 이 때문에, 마태가 분명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마 24:24) 하나님의 참된 종들까지도 오도되어, 가장 강한 열심과 근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간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경한 대적들의 거짓된 거룩함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면죄가 이루는 길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류를 막기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정되어 오류를 떠나야 합니다. 진실로 참된 교회는 무지로 말미암는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레 4:13 이하; 호 4:6; 말 2:1-7; 사 1:10-17).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도들, 그리고 그리스도 이전의 거룩한 선지자들은 깨끗한 밀알을 밭에 뿌리면서 참으로 깨끗한 기독교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즉 마태(12:24-30), 마가(4:26-29), 누가(8:5-15), 그리고 에스겔(36:29)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들은 선택된 사람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교회에 속한 게으르고 태만한 목회자들은 이 일을 완성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부지런히 돌봄으로 이 일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구했습니다(빌 2:4, 21). 이런 이유로 그들은 유해한 불경건, 즉 잡초가 왕성하게 자라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시 80:9-14). 왜냐하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모퉁이 돌(단 2:34 이하와 44절 이하)은 아직 작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도 이 모퉁이 돌에 대해 말했습니다(28:16). 분명히 아직 그 돌은 온 세계에 가득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그 돌은 온 세계에 가득해질 것이고 온 세계를 충만하게, 매우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될 때, 그 모퉁이 돌은 건축자들, 즉 관원들에 의해 버림을 받았습니다(시 118:22 이하, 눅 20:17b).
그러므로 나는 교회가 그 시초부터 현재 “분열된” 세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부서짐을 당해 왔다고 말합니다(눅 21:10; 단 2:35; 에스드라1서 4:45). 헤게시푸스, 그리고 에오세비오스는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IV, 22에서 초대 기독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사도들의 제자들에 사망했을 때 기독교 회중은 이미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이 되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사도들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벧후 2:12-15). 그리고 사도행전(20:28-31)에서 성 바울은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명백한 말로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같은 내용이 사도 유다의 서신에서도 발견됩니다(4-19). 요한계시록도 같은 사실을 지적합니다(16:13). 그러므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마 7:15). 나는 하나님 앞에서 슬픔을 가지고 말합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성령이 악하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기록된 바와 같이(롬 8:9, 눅 12:8, 요 6:63, 17:2 이하) 바로 그 성령께서 구원을 확인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의 위대한 인간들의 명성들과는 대조적으로 새들을 놀라게 하는 허수아비나 색칠한 인형처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불경한 세력을 존속시키면서 우리가, 더러운 벌레와 같은 우리가 어떻게 이 구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이 돌이십니다[단 2:45]. 즉 산에서 바다로 던지어질 그 돌(시 46:2 이하), 이 세상의 호화스러운 사치로부터 떨어져 나와 던지어질 그 돌입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큰 산에서 깎이어진 바위이시니,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고전 10: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확하게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노예 제도가 가장 심했던 때(눅 1:52, 2:1-3), 온 세상에 무거운 세금이 과해졌던 때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에 성령 안에서 볼 때 무능한 자, 더러운 오물통과 같은 자가 온 세상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온 세계는 헛된 영광과 오만 외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는 오직 자신만이 위대한 자라고 상상했습니다.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 얼마나 작게 보였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처럼(시 22:6)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오늘날도 노상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시 118:22, 마 21:44-46, 막 12:10-12, 눅 20:17-19).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계속 재현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후 사도들의 제자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시편 69편(11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살인자들처럼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를 훔쳤습니다(요 10:1).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들에게서 진정한 음성을 도적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환상적인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수한 작품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장소에 극히 하찮은 금으로 만든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분명하게 말한 바와 같이(4:8-10) 그리고 예레미야가 애가에서 말한 바와 같이(4:5), 어리석은 자들은 그 우상 앞에서 읍소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음식을 먹었던 자들은 음식을 먹던 장소에 오물을 받아 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 즉 극악무도한 미사, 미신적인 설교와 의식들로 자신이 크게 조롱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멸망의 가증한 것에 화있을지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항상 미사에는 헛된 나무 우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신적인 목석같은 사제, 그리고 하나님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추잡하고 상스럽고 야비한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닙니까? 죄악이 아닙니까? 수치가 아닙니까? 나는 배의 짐승들과(빌 3:19) 돼지(이 돼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7:6과 베드로후서 2:2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가 보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컷 발로 짓밟아 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구두를 닦는 넝마 조각과 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터키인들, 이교도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우리를 야비하게 조롱해 왔고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여겨 왔습니다. 이는 (참되신) 성령께서 믿음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듣지 않는 지각없는 자가 믿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은 69:2의 말씀처럼, 갈보리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무뢰한의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이 더러운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하나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요 6장; 마 23장).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큰 능력이 저와 같은 말할 수 없는 악을 처벌하고 없이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그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입니다(잠 9:10).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경외로부터 솟아납니다. 그리고 기록된 바와 같이(잠 5:12, 요 2:17, 시 69:9) 바로 이 지식만이 하나님의 대적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열심을 가지고 보복할 수 있는 강한 손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또는 이성적인 수단으로 하나님의 대적들이 변명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불경의 외모는 황금색 밀 이삭들 중의 아편처럼 매우 아름답게 보이고 사람을 현혹합니다(전 8:10).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이 속임을 분별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돌을 멸시하는 가증스러운 행위를 자세히 고찰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깨닫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계시를 매일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한 계시는 이 악한 세상에 얼마나 귀하고 또 희구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흠잡기를 좋아하는 약삭빠른 자들의 교활한 책략들이 매 순간 우리를 압도하고 있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순전한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잠 4:16-19, 시 37:12-15, 32 이하).
하나님의 순전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위험을 피할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경외가 우리에게 확실하다면, 기독교 세계는 신성한 뜻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쉽게 다시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함축된 모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시 145:18 이하, 시 111:5-10, 잠 1:7).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은 어떤 인간이나 피조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순수해야 합니다(시 19:10, 사 66:2, 눅 12:4 이하). 경외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요! 왜냐하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마 6:24),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을 함께 경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모친이 말한 대로[눅 1:5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없습니다(말 1:6):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그러므로 사랑하는 영주들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태초부터 성경에 묘사한 것처럼 이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가장 큰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다(딤전 4장). 왜냐하면 이 시대가 위험하고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 엡 5:15 이하).
왜입니까? 이는 미가가 말한 대로(3:5-37) 순전히 하나님의 숭고한 능력이 능욕과 굴욕을 당함으로 가난한 평민들이 불경한 신학자들에 의해 모든 시시하고 장황한 말로 호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재 거의 예외 없이 권세를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신학자들의 특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께서 사랑하시는 벗들에게 더 이상 유효한 환상이나 들을 수 있는 말씀 등으로 자신의 신령한 비밀을 계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서투른 방법에 집착하고 (참조. 집회서 34:9), 불경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했던 것처럼 계시를 소유하고 순회하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림의 표적으로 삼습니다(20:7 이하): 아하! 하나님이 최근에 너에게 말하더냐? 아니면 최근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여 충고를 받았더냐? 네가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더냐? 그들은 이렇게 멸시와 조롱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때에 일어났던 일이 이것이 아닙니까? (경건한 롯이 사위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19:14)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눈먼 백성들에게 바빌론 포로라는 임박한 처벌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말은 매우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 경건한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러냐? 과연 하나님이 그러한 아버지 같은 방식으로 인간들을 경고하기도 하는구나! 그 후에 바빌론 유형 때에 이 조소하는 무리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실상 그들은 이교도의 왕인 느부갓네살에 의해 수치를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본문 다니엘 2:47을 상고해 봅시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에 굶주린 폭군이었으며, 하나님께 범죄한 선민들에게 있어서 회초리였습니다. 그러나 성 바울(롬 11:25)과 에스겔(23:22-35)이 말한 대로, 이 백성의 맹목과 강퍅함 중에서도 지존자의 선하심은 세상에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을 교훈하기 위해 나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이교도 왕에게 단지 미래에 있을 일들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 목이 곧은 자들을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럽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증거 없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임박한 처벌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럴 때에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하시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우리에게서 거두셔야 하십니다. 계속하여 본문을 봅시다(단 2:1-13):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꿈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의 꿈을 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참으로 희한하고, 불쾌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기록된 바와 같이(신 13:2-4, 집회서 34:7) 온 세상이 애초부터 꿈을 해석하는 자들에 의해 속임을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본 장(2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교활한 점쟁이들이나 해몽가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5절 이하): 나의 꿈을 나에게 말하고 나서 해석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나에게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왕에게 꿈을 말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땅에 있는 인간들과 교제하지 않는 신들 외에는 왕께 그 꿈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나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은 이해에 따라 제한적이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궁전에서 고급 음식 한 조각을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우리 시대의 박식한 신학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일을 말하는 불경한 위선자들이며 아첨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말씀은(5:13, 31과 8:8이하) 그들을 비난합니다. 다니엘의 본문은 하늘의 교제를 갖는 자들이 있어야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 점을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입니다(3: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현명한 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즉각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월권행위를 공공연하게 행하는 불한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58:2): 그들이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는 나라와 같다. 이와 같은 박식한 신학자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고 성령의 작품에 대해 성령을 비난하는 점쟁이들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데, 그들의 미숙한 깨달음에 따르지 않는 바는 반드시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땅히 구해야 하는(롬 8장) 자신들의 구원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재잘거리고 혼돈된 양심을 갖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술 취한 믿음을 조제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서투른 판단과 가증스러운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판단과 혐오스러운 행위는 바로 그들이 수도사들의 극히 가증스럽고 유해한 언행들을 비열하고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뮌처는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훈련의 신비주의적이고 극단적인 행태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자들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모든 목적들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선민들이 성령이나 내적인 말씀(inner Word)으로부터 오는 아무런 교훈도 없이 광적인 신앙으로 환상과 꿈을 곧바로 따를 때, 마귀는 박식한 신학자이자 점쟁이들인 자들을 통해 많은 경건한 선민들을 사악하게 속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말과 마귀의 힘을 빌린 사술은 마귀의 계시에 따라 기록됩니다. 성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여기에 대해 강력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가증스러운 수도원의 황홀경이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 행하면서 그들은 강퍅하여져서 불순한 마음이 되고 나태한 부랑자들처럼 많은 죄와 수치 외에는 온 세상을 위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무지합니다. 이 그릇된 신앙보다 그들은 호도해 온 것이 없으며, 오늘날도 그들은 호도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시는 분이신 성령의 임재에 대한 경험이 없이는 그들은 (그들의 신령한 지혜에 대한 멸시 가운데) 선의 모습으로 위장한 악을 선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외치십니다(5:2):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가지고 선한 것들을 거부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습관이 아니다. 성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살전 5:20-22).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된 자들에 대해 완전히 선한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만일 매우 작은 문제들에 있어서도 그들을 경계하실 수 있다면(신 1:42-44; 32:29; 마 23:37), 그들이 큰 불신 중에서 경계를 받아야 할 때, 분명히 경계를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본문인 다니엘서는 여기에서 고린도전서(2:7 이하)에서 하는 바울의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이사야서(64장)에서 취한 것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막연한 믿음이 아니라—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냐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냐 또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동일한 것(하나님에게서 오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선천적인 이해가 믿음의 섬김을 위해 획득되어야 한다면(고후 10:5), 로마서(1:18-22)와 바룩(3:12-37)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 그 이해는 판단력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이 판단들로 사람은 선한 양심이 무엇인가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로 천국을 갈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먼저 완전히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것입니다(사 29:13 이하; 33:18; 욥 1:8; 고전 1:18). 이럴 때에 교활하고, 육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을 위한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즉각 이어집니다(시 48:6; 요 16:21).
그러므로 다니엘(2:17 이하)과, 그리고 그와 같은 길을 가는 모든 경건한 사람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로서 오는 모든 것을 자세히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현자(전도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의미입니다(전 3:11): “하나님의 위엄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광휘에 압도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139:6이 명확하게 나타내는 바와 같이, 자연인이 (하나님을 잡으려고)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찾을수록 성령의 역사는 그에게서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연적인 이성의 빛의 어림짐작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다면, 필시 그는 한 두 조각의 성경 구절을 가지고 박식하다고 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사 28:10; 렘 8:8) 좀도둑질한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즉흥적인 도움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말씀이 자신의 심령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요 4:14).
그렇습니다. 그는 오늘날 박식하다고 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우물물을 고여 있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렘 2:13). 오늘날 박식하다고 하는 자들은 자연과 은혜를 아무 구별 없이 뒤섞고 있습니다. 저들은 말씀의 진전을 방해합니다(시 119:11b).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한 바와 같이(신 30:14—이 말씀이 너와 멀지 않으니 보라, 이 말씀이 네 마음에 있은즉…)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말씀이 어떻게 마음속으로 들어오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답변을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숭고하고 두려운 경악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하는 이 경악은 민수기 19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어린이가 6, 7세 때에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로마서 10:8과 20절에서 모세(신 30:14)와 이사야(65:1)를 인용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들려지는 내적인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거를 통하지 아니하면 사람은 이 말씀을 깨달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롬 8:9). 성령이 없는 사람은 비록 백 권의 성경을 삼킬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깊은 말을 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모든 사람은 세상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먼지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제 말씀에 대해 깨닫고 기꺼이 받아 들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에게서 육체의 정욕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활동이 그의 마음에 임하심으로 그가 육체의 모든 욕망들을 근절하기 원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역사의 유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순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서 하시는 말씀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그런 사람은 율법의 명백하고 순전한 의미를 심각하게 숙고하도록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시 19:7 이하).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목석같은 그리스도를 만들고 스스로를 오도할 것입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환상을 해석해 주는 일이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심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모든 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고후 6:17) 진리를 위한 불굴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진리의 실행을 통하여 확실한 환상과 거짓 환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다니엘은 10:1에서 (다니엘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확실한 환상들을 깨달을 수 있고 분명한 환상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선민이 환상 또는 꿈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또는 인간의 본성에서 온 것이지, 아니면 마귀에게서 온 것인지 알고자 할 때, 그는 정신과 마음, 그리고 또한 자신의 천부적 이해력을 동원하여 육체의 모든 속세적인 위안들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집트의 요셉에서와 같이(창 39장), 그리고 본 장에 나오는 다니엘과 같이 이 일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육욕적인 사람은 말씀을 받아 드리지 못합니다(눅 7:25). 왜냐하면 엉겅퀴와 가시나무가—이런 것들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쾌락들입니다(막 4:18 이하)—하나님께서 영혼 가운데에서 하시는 말씀의 모든 활동을 막기 때문입니다[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혼 가운데에서 이미 거룩한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실행을 하지 않으면 그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시49:20).
그는 돌이키지도 않고 스스로와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울과 거룩한 사도들이 가르치는 대로(갈 5:24) 악덕과 정욕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밭은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 모든 엉겅퀴와 가시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잠 24:3).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밭에 열매가 풍성히 열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하나님과 성령이 거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실로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증거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시 93편과 119:95). 처음에 그는 이 사실을 부분적으로, 비유적으로 깨닫지만, 결국 나중에는 심령 깊은 곳에서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0-12). 두 번째로, 우리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현상들을 수반하는 환상이나 꿈들의 비유적인 비교가 성경으로 검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자가 향 기름으로 죽은 파리에 대해 말한 것처럼(전 10:1), 마귀가 끼어들어 성령의 향기로운 기름을 망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선민은 그 환상의 역사가 인간의 즉흥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오로지 하나님의 확고한 뜻에서 나온 것인지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살핀 바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해야 그 환상이 건설적으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귀가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할 때, 마귀의 부패하고 더러운 기질이 드러나게 되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그의 거짓은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입니다(요 8:44). 이 점은 본 장에서 느부갓네살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나며, 제3장에 나오는 사실들에 의해 증거 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경고를 금방 망각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이유는 욕심과 짐승 같은 일들을 향한 느부갓네살의 육체의 정욕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계속하여 큰 쾌락을 얻기 원하고, 하나님의 일을 다루면서 고난에 있기를 원하지 않을 때, 반드시 언제나 이와 같이 됩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은 그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창 15:1-6; 17:1-3) 대개 사랑하시는 사림들이 가장 깊은 환난 중에 있을 때 효과적인 환상과 꿈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야곱이 큰 어려움 중에 형 에서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때, 환상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는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창 28:12). 그 후, 야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도, 형 에서를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야곱과 씨름을 하고 그의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창 32:25 이하). 또한 경건한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련 중에 그는 특별한 환상을 받았습니다(창 37:5-11). 그리고 그 후, 그는 이집트의 감옥 속에서 심한 고난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께 큰 조명을 받음으로 모든 환상과 꿈들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39:20; 40:41).
이 뿐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경건한 요셉(마 1:20-23; 2:13 이하)은 스스로 명석하다고 생각하는 영적으로 무식하고 육욕적인 비열한 자인 헤롯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번민하는 중에 꿈들을 꾸었고 그 꿈들로 말미암아 안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은 잠을 자는 중에 천사에게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마 2:12). 또한 사도들도 사도행전에 명확하게 기록된 바와 같이 환상의 의미들을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환상들에 유념하고 고통스러운 시련 중에 환상을 받는 것은 진실로 사도와 족장들과 선지자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살찐 돼지와 나약한 생활이 환상을 부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욥 28:12).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영혼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다면, 그는 사도행전에서 성 베드로가 율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레 11장) 환상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음식의 의식적 정결과 이교도와 식탁 교제를 갖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행 10:10 이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큰 감동을 주는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환상에서 베드로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들로 가득한 보자기가 네 귀가 메어 하늘로부터 땅에 내어 드리우는 환상을 보았고 “잡아먹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경건한 고넬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행 10:1 이하). 그리고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밤에 환상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한 명이 서서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본 다음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행 16:8 이하). 왜냐하면 바울은 주님께서 마케도니아에서 자신들을 부르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를 하기를 두려워할 때(행 18:9 이하), 밤에 주님께서는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증거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 아론이 모세의 말을 듣고(출 4:15) 다윗이 나단과 갓의 말을 들었던 것처럼(대하 29:25), 설교자들과 공작들과 제후들이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살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면에 안전하고 무흠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행전의 구절(12:7-9)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동일한 이유로 사도들은 환상에 매우 익숙하였습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헤롯의 감옥에서 끌어낼 때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천사가 자신의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환상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환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 사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합니다: 즉 자신의 육신적인 판단에 따라 아무런 경험도 없이 환상과 꿈을 완전히 적대하고 부인하고 싶어 하는 자들과 (거짓 꿈 해석자들이 자신의 명성과 쾌락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큰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무조건 환상과 꿈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어느 극단주의에 속한 자들일지라도) 서투른 일을 하는 자들이며 이 말세에(욜 2:28)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서의 이 본문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론적) 변화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바르게 칭송 받기 위해 말세에 세상을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수치를 제하시고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환상과 꿈을 볼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계가 요엘서에서 예상된 식으로 사도적인(행 2:16 이하)이 될 수 없다면, 도대체 전도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선택을 받은 많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수반하는 중대하고 불가피하고 급박한 개혁을 계시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한 나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개혁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할 수 있으면 항변해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3:3) 비록 아무도 믿지 않을지라도 다니엘의 예언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서의 이 구절은 해처럼 명확하고 세상의 더러운 왕조의 몰락 과정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나라는 금 머리 기둥으로 제시됩니다. 이 나라는 바빌론이었습니다. 두 번째 나라는 은 가슴과 팔로 제시됩니다. 이 나라는 메데와 바사입니다. 세 번째 나라는 그리스입니다. 과학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스는 (소리나는) 구리 또는 놋으로 상징됩니다. 네 번째 나라는 칼과 강압 정치로 이룩된 로마 제국입니다. 그 다음의 (철과 진흙의 발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나라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나라도 철로 이루어졌고 강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분별 있는 눈으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진창으로 뒤범벅입니다. 즉 헛되고 가식적인 위선의 계략들이 온 세상을 뒤덮어 휘젓고 있습니다. 이 계략들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바보입니다. 우리는 뱀장어와 독사들이 떼를 이루어 자신들을 오염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봅니다. 사제들과 모든 악한 성직자들은 세례 요한이 칭한 바와 같이 독사들입니다(마 3:7). 그리고 세속적인 군주들은 레위기(11:10-12)에 물고기 등에 의해 비유적으로 상징되는 뱀장어들입니다.
마귀의 나라들은 스스로를 진흙으로 더럽혀 왔습니다. 사랑하는 제후들이여, 주님께서 철장으로 낡은 질그릇을 얼마나 멋있게 부술지 아십니까(시 2:9)? 그러므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영주 여러분은 여러분의 판단이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의 교구 사제들에 의해 그릇된 인도를 받지 말고, 그릇된 사고나 방종에 의해 방해받지 마십시오. 다섯 번째 나라를 깨뜨릴(단 2:34)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산에서 뜨인 돌이 커졌습니다. 여러 지방들의 평신도들과 농부들이 이 돌을 여러분들보다 더 분명하게 봅니다. 하나님이시여,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이 돌은 이미 커졌습니다. 만일 다른 이웃의 군주들이 복음으로 인해 여러분을 핍박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백성들에 의해 축출될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돌은 거대합니다! 그 돌 앞에서 멍청한 세상은 오랫동안 두려워해 왔습니다. 이 돌은 아직 조그마했을 때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돌이 이처럼 크고 강하여 졌고 이처럼 강력하게 큰 우상을 쳐서 낡은 질그릇같이 분쇄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존경받는 색소니의 영주들이여, 성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마 16:18) 담대하게 이 모퉁이 돌을 밟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달된 궁극적 구원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을 반석 위에 세우실 것입니다(시 40:2). 여러분의 길은 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당장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용기 있게 복음의 목적을 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믿지 못할 정도로 여러분과 매우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인간의 망령 앞에서 떨고자 합니까(시 118:6)? 우리의 본문을 잘 보십시오(단 2:13). 느부갓네살 왕은 술객들이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함으로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땅한 응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교활함으로 그 나라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위치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고위 성직자들이 바로 이러합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기독교계에 끼쳐지고 있는 해악을 명확하게 인지한다면 여러분은 예후 왕과 똑 같은 열심을 얻으려고 할 것이고(왕하 9, 10장),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선포되는 바와 똑 같은 선포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칼의 권세를 행사하기를 크게 자제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거룩한 기독교계의 부패는 너무 심하여 이제 어떤 혀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다니엘이 일어나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환상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는 다니엘이 가르치는 것처럼(단 20:2) 군대의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는 군주들과 격한 백성의 분노를 화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계의 부패와 그릇된 고위 성직자들과 패덕한 타락자들의 기만을 바로 경험하여 안다면, 여러분은 그들에 대해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격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장 달콤한 말로 여러분을 모든 확고한 진리에 반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생각들을 하게 큼 오도했음에도(잠 6:1 이하)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 왔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정곡을 찌를 것이고 여러분을 격노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영주들은 그들의 직분에 대해서는 이교도라고 성인들을 두고 단언합니다. 영주들은 국가의 일치단결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돌이 떨어져 이 단순한 이성의 계략들을 완전히 쳐부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0:34).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자들에게 이루어지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바울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바와 같이(롬 13:4), 만일 여러분이 마귀의 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그들을 제거하여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박해하려고 하는 모든 대적들을 산산조각으로 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말하는 대로(59:1)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과 그밖에 하나님의 이름을 수호한 사람들을 도우신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을 도우실 수 있고 또한 돕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벧후 1:4) 정의롭게 행하고자 할 때 여러분은 천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엄숙하게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이 그리스도의 국가를 황폐하게 하고, 게다가 기독교 신앙을 가장하여 자신들의 악행을 변호하며 교활한 협잡으로 온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트리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여러분은 마음대로 적당히 발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수많은 믿는 사람들을 실족케 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것이 제일 악한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을 괴롭게 하여, 참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이런 말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마 23:3 참고)고 말합니다. 믿음이 불에서 금같이 단련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벧전 1:7; 시 140:10).
그러나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식탁 아래에서 떡 조각을 얻기를 바라는 개의 믿음보다 더 못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부정한 신학자들이 눈먼 세상을 속이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배를 위해서만 설교하기 때문입니다(빌 3:19). 그들은 심령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마 12:34). 이제 여러분이 진정한 통치자들이 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근본부터 통치를 다시 시작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대적들을 선민들에게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를 위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칼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케케묵은 농담을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칼은 칼집에서 녹이 슬어 버릴지 모릅니다. 어떤 신학자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이시여, 나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한 말씀을 충분히 하셨습니다(마 7:19; 요 15:2, 6):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의 가면을 제거한다면, 여러분은 공의의 판단으로 세상을 인식할 것입니다(요 7:24). 하나님의 명령대로 공의의 판단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목적을 위한 충분한 도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지혜서 6장).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마 23:8).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장수하지 못하게 하십시오(신 13:5). 불경건한 자는 경건한 사람들의 길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22:18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 바울도 통치자들의 칼에 대해 경건한 자들의 보호로 악한 자들을 보응하기 위해 그들에게 칼이 주어졌다고 말하는 곳에서 이 의미를 나타냅니다(롬 13: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보호자이시고 여러분에게 자신의 적들과 싸우라고 가르치십니다(시 18:3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손이 싸움에 능하게 하시고 여러분을 후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여러분에게 선포되어야 함으로 여러분은 큰 십자가와 시험을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을 위해 감행하는 위험이나 대적들의 무익한 말에 못지않은 희생을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경건한 다윗은 압살롬에 의해 성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압살롬이 나무에 걸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함으로 결국 지배권을 다시 회복했습니다[삼하 18:10 이하].
그러므로 작센의 소중한 보호자들인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복음을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적으로 진노하실 때,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로서 징계하실 것입니다(참조. 신 1:31). 그 때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말하십시오(시 3: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의 박식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억지로 위선 가운데 적용시켜 설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자비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우상 숭배의 근원을 뒤집어엎으시면서 나타내신 준엄하심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요 2:15-17; 시 69:9). 바울이 골로새서 3:5-7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회중에게서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견해대로, 그리스도께서 보다 시시한 것들을 뒤집어 엎으셨다면, 의심할 바 없이 우상들을 하나도 남겨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와 같은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 7:5 이하):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들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이 말씀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마 5:17). 선지자들에 의해 해석되는 여러 비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 말씀들은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명백하고 명확한 말씀들입니다(사 40:8). 하나님께서는 오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고 내일은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불변하신 분이십니다(말 3:6; 삼상 15:10-22; 민 22장).
이방인의 사도들이 우상들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 베드로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갈 2:11-13). 만일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있다가 숨기려고 했다면 그는 모든 사도들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 대해 그가 죽음을 심히 두려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5-19). 그러므로 이 두려움을 고려할 때,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 바울은 우상 숭배를 매우 단호하게 비난합니다. 만일 바울이 아덴 사람들 중에서 한 가르침을 결론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다면(행 17:16-31),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우상을 무너뜨렸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셨던 일이고, 또한 그 후에 믿을 수 있는 역사들에서 순교자들의 행동을 통해 수없이 일어났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불경한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는 무능과 나태를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였다면 그들은 마땅히 양자택일 중에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부인하든지 아니면 우상 숭배를 폐하든지 해야 합니다(마 18:7-9). 그런데 우리의 박식한 신학자들은 불경하고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행하면서 다니엘을 인용하여(2:34) 적그리스도는 인간의 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파괴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가 기록한 대로(5:1) 선민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결정하였을 때 이미 가나안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이미 내적으로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칼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시편 44:5, 88과 역대하 14:11을 보십시오. 그곳에서 여러분은 이 길의 결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칼로 그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삶의 수단인 것처럼 칼은 그 정복의 수단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칼은 불경한 자들을 소탕하는데 필요합니다(롬 13:4). 이 일이 질서 있고 바르게 진행되기 위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소중한 보호자들인 영주들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칼을 빼앗길 것입니다(단 7:26 이하). 왜냐하면 그들은 말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행위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딛 1:16).
그들(영주들)은 적들에게도 평화를 베풀어야 합니다(신 2:26-30). 그러나 만일 적들이 신령하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거하지 않는다면(참조. 벧전 3:9, 12), 그들은 이 길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고전 5:13).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반대하지 않으면 나는 믿음이 깊은 다윗과 같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를 계속하면, 히스기야(왕하 18:22), 요시야(왕하 23:5), 고레스(참조 대하 36:22 이하), 다니엘(6:27), 엘리야(왕상 18:40)가 바알의 제사장들을 죽였던 것처럼, 그들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원점으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추수 때에 잡초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뽑혀져야 합니다. 그 때에 아름다운 붉은 밀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참하게 자랄 것입니다(마 13:24-30). 반면에 이 일을 위해 낫을 예리하게 갈은 천사들은(39절) 하나님의 지혜의 진노를 실행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중대한 종들입니다(말 3:1-6).
느부갓네살은(단 2:46) 다니엘에게서 하나님의 지혜를 감지하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진리에 압도되어 다니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3장(5절 이하)이 증거하는 것처럼 그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았습니다. 현재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와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동안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 드립니다(눅 8:13).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거나 불로 단련시키고자 하실 때(벧전 1:7), 그리스도께서 마가복음에서 예언하신 것처럼(4:17), 그들은 가장 작은 잡초를 보고도 얼마나 성을 내는지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필시 이 작은 책에 대해 성낼 것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화를 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눅 19:27; 막 18:6), 바울과 같이(고전 5:7, 13), 그리고 불경한 지도자들, 특별히 복음을 이단이라고 헐뜯고, 동시에 자신들이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되기를 바라는 사제들과 수도사들은 죽여야 한다는 신성한 율법의 교훈과 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이고 겉 치례적인 선이 평균 이상으로 몰두되고 심각하여질 때, 불경한 자들은 그 선으로 자신을 변명하며 그리스도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둥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동반하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바람에 명령을 내리지 못할 때 바울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딤후 3:5). 말세에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경건의 모양은 있으면서 경건의 능력을 비난합니다. 땅에는 거짓 선보다 더 나은 형태나 위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모퉁이에 있는 자들이 위선으로만 충만하고,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진리를 말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빛에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지도자 여러분들은—여러분이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간에—본 장의 결론(2:48 이하)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본 장의 결론이란 느부갓네살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시 58:10) 선하고 의로운 결정들을 실행하기 위해 거룩한 다니엘을 관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29-10 이하에 기록된 대로 불경건한 자들은 선민들이 그들에게 사는 것을 허락하기 원하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벗들이여, 십자가의 대적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들은 비록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진대 왜 힘없고 방비 없는 사람들 앞에서 격분합니까(민 14:8 이하; 수 11:6)? 오직 담대하십시오! 스스로 다스리시는 분에게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돌리십시오(마 28:18).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여러분을 영원토록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결말
뮌처는 1524년 8월 7일에서 8일 사이에 뮐하우젠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직접-민중 민주주의를 실행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두 편의 주요 작품인 <누가의 증거>와 <변호와논박>을 출판한다. 뮌처는 <누가의 증거>에서 “농민들이 노동, 일, 먹고사는 것에 너무 매달릴 수밖에 없고, 결국 고리대금, 세금 등이 신앙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말한다. 뮌처가 처음 언급하는 이런 유물론적 표현은 그에게 있어서 이전의 십자가의 신학과 현 관심사인 사회 참여와의 대립인가? 뮌처에게서 이런 식의 대립을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 그보다는 뮌처에게 있는 하나님 나라 구현의 3단계 해방 가운데 마지막 단계로 보는 것이 옳으리라. 뮌처는 <프라하 선언서>에서 교서들에 의해 기획된 문화적 압박의 종말을 고하고, <군주에게 주는 설교>에서 군주들에 의해 제정된 정치적 압박의 종말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이 <누가의 증거>에서 영주들이 득을 보는 경제적 착취의 종말을 언급하고 있다.
1525년 1월에 쉬바벤Schwaben 남쪽에서 농민 전쟁이 시작해서 동-서-북부로 퍼져 나갔다. 뉘른베르크에 있던 뮌처는 튀링겐지방으로 돌아와 농민들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프랑켄하우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불이 타고 있는 동안에 너희 칼 위의 피가 식지 않도록 하라”는 뮌처의 외침에도 농민들은 박살이 났고 뮌처는 체포되어 참수되고 말았다.
뮌처는 흔히 말하는 합리주의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의 선조가 아니다. 그는 묵시문학적 중세 천년왕국의 전통에 서 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소외를 종결짓고 인간 존재를 인간 너머로 구현시키려는 천년왕국론자이다. 그는 영적 혁명과 물질적 혁명의 무절제한 야망에 사로잡혔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금욕주의와 “초탈”을 그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마치 수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가 칼 들고 내려온 수도자와도 같다.
뮌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면적인 시각의 변화로 그칠 수 없다. 이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들을 물리침으로써 외면적 자유에 이르러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기독교 세계는 계시를 저버렸다. 계시를 저버린 문명은 끝을 내야 한다. 그것은 개벽을 이루는 일이될 것이다. 누가 하나? 선지자가 한다. 뮌처는 다니엘로 자처했으나 승리하지 못한 선지자였다.
츠빙글리와 스위스 재세례파
츠빙글리
츠빙글리(1484-1531)는 1523년 1월 1일부터 취리히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스위스에도 교회의 개혁으론 불충분하가도 여긴 비폭력 급진종교개혁자들(특히 재세례파)의 사상이 퍼져갔고, 츠빙글리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해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해 6월 23일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 그것을 출판했다.
이 설교는 크게 둘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에서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개념의 상호 개념을 정리했고, 제 2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처신과 관련해서 주로 로마서 13장에 기초하여 세속 권세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츠빙글리의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 이 설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의 구조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상이라면 취리히와 같은 도시 문명은 현실이다. 결과는 타협인가? 타협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이다. 츠빙글리의 출발점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가 묘사하는 이상이 이 땅에서 문자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산상설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불완전하나마 세속 권세에 따른 질서가 있어야 하며 이 질서는 인간 구원의 유일한 보증인 복음 설교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특히 “이자 붙는 대여” 같은 경우는 돈 문제에 있어서 저질러질 수 있는 폐습들을 최소화시키려는 바람으로 설명될 수 있다. 츠빙글리의 이 사상들은 제네바의 칼뱅에게로 이어진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적인 태도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8주 늦은 1484년 1월 1일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동리의 이장으로 가족은 유복했다. 울리히Ulrich(훗날 울드리히Huldrych로 바꿈)는 5살 때 삼촌에게 보내졌고 10살에는 바젤로 갔다. 1497년엔 베른에서 인문주의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그의 인문주의 수업은 이듬해 비엔나 대학에 등록하면서부터다. 3년뒤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는 바젤로 옮겨 1504년 9월 18일에 문학사, 그리고 1506년 문학 석사가 된다. 당시 바젤의 인문주의 풍토는 스위스에서 가장 뛰어났다. “스위스에서 뭐가 되고 싶은 자, 뭔가 이루고자 하는 이는 바젤로 가야한다”라는 속담이 이를 증명한다. 이 시기의 츠빙글리의
관심은 자연, 역사, 특히 민족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피라미드의 정상에 위치시키는 질서있는 우주 개념 등이었다.
1506년 츠빙글리는 삼촌 바르톨로매우스의 개입으로 글라루스의 신부가 되었으나 여전히 바젤의 인문주의자들과의 교제를 계속하면서 고전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이 한동안 그로 하여금 에라스무스적인 기독교 인문주의에 머무르게 하였다. 1513년과 1515년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두 번 교황의 용병에 참가한 뒤로, 스위스인의 “자유”를 찬양했던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스위스 연방과 도덕적 가치의 투사로 나섰다. 그가 던진 질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셨나”였다. 이때부터 그는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한쪽으로 치우고 성경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츠빙글리는 1516년 11월 1일 사역에 어려움을 느낀 글라루스를 떠나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본당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글라루스에서 시작한 헬라어로 당시 막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신약을 읽게 된 것이다. 이 시기야말로 츠빙글리가 복음으로 회심하는 최초의 단계가 아닐까? 츠빙글리의 설교 주제들이 순례 설교자들의 습관적인 주제에서 예수의 가르침(특히산상설교)에 기초한 도덕적 개혁으로 바뀌고 있었다. 츠빙글리의 근면은 널리 알려졌다. 스위스 전체에서 지적이고 학문적인 풍토를 심은 이가 그밖엔 없는 듯 했다. 그리하여 그는 1518년 12월 11일 취리히의 본당신부로 뽑혔고 1519년 그의 생일날(35세) 설교를 시작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 전환점은 1520년 7월로 잡힌다. 꼭 일년전 루터와 에크와의 논쟁(라이프치히 논쟁)이래 루터 사건은 연일 보도거리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글을 모았다(최소한 26편). 그런데 1520년 6월 15일 루터가 파문 경고를 받자(Exsurge Domine), 개혁에 신중을 보였다. 그는 루터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그는 <스위스인들에게 경고함>에서 전술상, 자신이 루터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루터가 쓴 대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복음서 또는 바울)대로 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루터를 설교하기 위해서 루터를 기다리지 않았다.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서를 계속 설교하도록 “누가 내게 가르쳤는가? 루터가 그리 했는가? 나는 루터라는 이름을 듣기도 전에 설교를 시작했고 이 목적에서 10년전(1523)에 헬라어를 배우기 시작 했는 바, 이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그 근원에서 길어내기 위함이었다. 내가 루터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루터의 이름은 내가 전적으로 성경에 매달린 지 2년 후에도 몰랐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은 악의로 그런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짓누르며 말한다. 루터가 쓴 것과 똑같이 설교하는 것으로 보아 너는 루터파임에 틀림없어. 이것에 나는 대답한다. 나는 바울이 쓴 것과 똑같이 설교하는데 어째서 같은 이유로 나를 바울파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보다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는데 어째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는가”
츠빙글리의 결정적 회심은 1520년 7월 24일 미코니우스에게 쓴 편지에 암시된다. 그때까지 그가 인문주의에 따른 근원으로의 회귀를 통해 교회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면, 이제 그는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는 생각과는 다른 회전을 하고 결과는 더 나쁜 상태다. 그는 자신을 포기한다. 이제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초기의 희망은 인간 노력의 무용성 앞에서 포기와 회의, 그리고 일종의 숙명으로 자리를 넘겨주었다. 인간은 그를 넘어서고 때로 그를 죽일 수도 있는 힘의 노리갯감임을 스스로 느낀다. 그는 자신이 선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는 희망도 버릴지 모른다. 자신의 아무것도 아님에 대한 의식과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츠빙글리의 영혼은 깊이 건드려졌다. 이런 위기는 2-3년을 지속하다가 마침내 츠빙글리가 용서의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끝을 맺는다. 1520년의 시련에서 그가 하나님의 전능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느꼈다면, 이제 그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때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결국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있는 동일한 메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내 츠빙글리는 루터의 이신 칭의 교리를 공유한다. 이 종교개혁의 원리를!
기독교 인문주의자에서 종교개혁자가 된 츠빙글리는 여러 작품들을 통해 개혁 신학을 대변했다. 그는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쏘시지를 먹은 프로샤우어를 변호하면서 <음식 선택과 그 자유로운 사용>을 설교했으며 교회의 독신 제도가 성경적으로 부당함을 확신하고 과부와 결혼하고 사제들의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취리히 사회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츠빙글이는 일종의 sola scriptura 사상이 담긴 <처음과 나중을 옹호함>을 출판하고 연이어 <67개 논제>를 작성했다. 취리히 당국은 1523년 1월 첫 신학 논쟁을 거쳐 이 논제에 의한 개혁안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를 통해 사회 문제를 다뤘고 <미사법 비판>이란 글에서 예배의 갱신(라틴어 폐지와 제사적인 성격 부인)을 꾀했다. 나아가 제 2차 취리히 논쟁(1523년 10월)을 거쳐 성상을 공개적으로 폐기했고(1524년 6월), 이 기간에 <요약 기독교 교육>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1525년 그의 주 저서인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해설>을 출판하여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그를 반대해 온 한 무리의 동료들이 본격적으로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I
-세속 당국: 하나님의 정의는 아름다우나 적용불가하다.
-재세례파: 인간의 정의(세속적 서약)는 준수 불필요하다.
-일반사람들: 하나님의 정의를 자신의 이익에 적용한다.
*하나님의 정의의 정의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단지 자신의 것을 사람들에게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본질상 정의요 경건이며 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리 자체인 것처럼 그는 또한 온전하고 총체적인 정의자체이다.
-인간의 정의는 법률적 명령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것을 세속 권세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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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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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산상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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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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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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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 (황금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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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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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 열 가지(4가지로 요약)
-용서
-탐심제거
-더 주기
-선대
*이에 대비되는 불구 같은 인간의 정의 열 가지
*본문
비록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가 수년 동안 보다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그에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듣지만 그것을 그들의 탐욕에 적응시키기를 더 좋아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것 안에서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을 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누구도, 자기를 통해서건, 하늘을 통해서건, 땅을 통해서건, 심지어 우리 자신의 머리를 두고서 맹세하길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도 이 계명을 따를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누구도 선서하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그(=하나님)를 방패로 삼아선 안 된다고 여긴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적합해질 때까지 생각하기를, 누구나 자기들이 매우 정직하고 성실하게 서약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말한 것에 따라(마 5:34), 맹세해선 안 되는 까닭에, 그들이 그것(=그들이 서약한 것)을 준수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록 매우 적은 수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스도가 말한 것, 곧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마 5:40)는 말씀을 듣는 즉시, 자기들에게는 취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는 사람들, 그리고 이 계명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과 관련된다고 생각지도 않고 또 이웃의 옷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고, 변명거리를 찾기보다는 차라리 속옷과 겉옷을 가져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성 세례 요한의 날에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해 선포했던 이 설교를 종이에 적어두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겼다. 이는, 잠시 후 보겠지만, 지금의 나보다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가련한 정의가 얼마나 서로 마주치며 처신하는지 보이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정의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그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묘사한 방식대로,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각 사람에게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만약 우리가 이런 척도로 그(=하나님)를 측량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분 없이도 어떤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유도 모두 그의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줄 의무가 없다. 요컨대, 아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가 주는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해있다.
아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의롭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인 바, 이는 그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순결과 모든 경건과 모든 정의와 모든 선의 순수한 근원이라는 방식으로 의롭다. 그는 본질 상, 정의요, 경건이며 선이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어떤 경건한 것, 의로운 것, 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진실할 뿐만 아니라 진실 자체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14:6), 그는 또한 의로울 뿐만 아니라 온전하고 총체적인 정의 자체인 바, 이것이 너무도 순수하고 맑아서 그 안에 불순함과 유혹이 스며들어 생기는 어떤 혼합물도 없을 정도이다. 이 관계 하에서 섞이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한 선일진대, 정의이신 그분은 마땅히 모든 혼합물, 모든 시험, 모든 이기적인 탐욕에서 마땅히 제외되신다.
모든 혼합물에서 제외된 이 맑고 깨끗한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는 그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바라본다. 악한 자가 그의 악한 마음에서 나쁜 보물을 끄집어내는 것(눅 6:45)과 마찬가지로, 오직 선하신 하나님은(막 10:18) 그의 마음에서 선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내지 않으시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정의와 선함의 원초적 근원을 알게 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정의는 그의 말씀으로 안다. 이는 다윗이 시편 11편에서 말한 바와 같다: “주의 말씀은 땅에서 순화되고 정화된, 아니 점토에서부터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말씀 가운데서 지상의 유혹의 맛을 보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것 이상으로 얼마나 높은지 측량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 위로 높으시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정의의 아름다움과 순전함과 순결함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그와 가까이 있기를 바랄 때, 우리로 자기처럼 되기를 요구하신다. 한 가장이 그의 종들 가운데서 아무도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을 용납치 않는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래도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순전함을 가지지 못한 자와 자신이 만든 첫 사람만큼 순결하지 못한 자를 누구나 용납하신다. 그리스도는 혼인식에 초대되었으나 혼인 잔치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로 쫓겨난 사람에 대해 말씀하면서(마 22장)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인다. 사실 주님은 혼인 잔치에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허약한 자들을 초대하도록 명했다(눅 14:21).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한 것처럼 깨끗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하나님)는 삼키는 불이시기에, 누구든지 불로 연단되지 않거나 그에게 거슬리는 것—그것이 어떤 것이건—을 가지고서는 그 곁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앞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자는, 그(=하나님) 자신이 그러하듯이, 거룩하고 경건하며 맑고 깨끗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이렇게 증거한다: “너희 중에 누가 삼키는 불 곁에 머무를 수 있으며, 너희 중에 누가 영원한 불꽃 곁에 머무를 수 있으리요?”(사 33:14).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경건히 행하는 자, 의로운 자, 진실을 말하는 자, 탈취한 이득을 멸시하는 자, 악하게 얻은 이득 앞에서 손을 흔들어 [거절]하는 자, 피 흘리는 계획을 듣지 않는 자, 악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 자.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피신처가 되리라. 그에게 빵이 공급될 것이며, 그의 물은 맑고 마실 수 있으리라. 그의 눈은 그 영광중에 계신 왕을 보며 그의 광활한 땅을 볼 것이라”(사 33:15-17). 이 말씀을 통해서 이사야는 하나님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자들이 어떠해야 할 지를 보이려 한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항상 죄 없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윗도 시 14편에서 이것을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그리고 답은 이렇다: “순전하게 행동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는 자”(시 15:2-5). 다윗은 거의 이사야처럼 말한다. 이것은, 비록 그가 이사야 보다 더 이전 사람이지만, 모든 것이 동일한 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들의 말속에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매우 적은 말로 이것을 말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거룩하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28). 정결한 마음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마음이 정결한가? 이 땅 위에는 [그런 마음이] 없다. 사실 자신 안에서 이기적이고, 교만하지 않은 자 누구며, 모든 관계에서 흠 없는 자 누구인가? 답은 이렇다: 하나님이 원하는 단순한 마음. 우리는 이것을 뒤에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복음을 언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거룩하고 깨끗하며 의롭고 죄가 없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오지 못함을 알았다. 사실 그(=하나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또는 의로우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셈이다: “나는 의롭고 깨끗하고 거룩하다. 그런즉 너희가 내게 속한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을 부부간의 성실성에 반대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순수하고 흠 없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 정의에 따라 측정될 경우 모든 사람은 수치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제로, 누가 그의 마음이 시험이나 탐욕에서 면제될 정도로 거룩한가? 이처럼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존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라는 자는 점없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무능함을 보시고, 그것을 불쌍히 여기사 그의 의가 만족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그 앞에 머무를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을 찾아 내셨다. 이를 위해 그는 그의 아들을 죄 없이 성령으로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사람이 되게 하셨는 바, 이는 모든 죄의 공격에서 면제된 이 아들의 마음이—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같이 죄 가운데서 잉태되지 않았기 때문에(시 51편)—모든 면에서 순결하시기 위함이다. 사실 그는 죄도 없었으면서 우리 불의한 죄인들을 위해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그토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정의—곧 그가 우리에게 획득해 준 정의, 달리는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의—의 대가를 치르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너그럽고 값없는 은사 덕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듣고 의심치 않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남아 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언제나 깨끗함 가운데서 흠 없이, 정의 가운데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너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합당한 정도로 순수하기란 심지어 불가능하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유일하고 의로우며 완전무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우리 죄를 영원히 갚으신 우리의 변호인이기 때문이다(요일 2:1). 복음은 여기 우리의 죄와 우리의 무능 앞에 직면해 있다. 이것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보다 상세하게 보기를 원하면, 우리가 최근에 주해와 더불어 출판한 첫 명제들을 읽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토록 큰 순결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바, 이것은 시험이나 탐욕을 거쳐 도달되지 않는 그런 순결이다. 그는, 한편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볼구하고 이 순결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 덕택이다. 이 구원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뒤—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그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 그런 구원이다. 항상 배척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연민은 언제나 보다 크고 보다 소중하다. 믿는 자여, 너는 이것을 명심하고 결코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의 담보이다. 설사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으로 인해 절망하게 된다 하더라도—왜냐하면 네가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짊어지고 그 대가를 지불하여 속죄하신 이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우되, 그것이 그의 말씀에 표현된 대로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심을 배워라.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 안에서 그가 우리에게 규정해 주는 경건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행동은 그가 우리를 향해 행하는 봉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존재 명령을 내리시는 바로 그분이다. 그는, 탁월한 법을 선포하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 폭군과 같지 않다.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눅 11:46), 너는, 점점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고 그리스도의 기준에 따라 완성된 인간이 되도록(엡 4:13), 모든 사람과 싸워야 한다. 너 자신에게 결코 만족하지 말고, 너의 신뢰를 하나님께 두되,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네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라. 그때 너는 너의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함을 깨달을 것이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이 너의 공로에서가 아니라, 그의 값없는 은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리라.
다음으로 정의의 이름에 유일하게 합당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서술해 보자. 하나님의 정의는 그 자체가 너무도 맑고 아름다워서, 그것은 우리를 그것과 같이 되도록 초대한다.
1.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용서를 너무도 풍요롭게 완성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용서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 안에는 용서의 필요가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오히려 정작 우리야말로 유일하게 그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쪽에서의 어떤 공로도 없이 넘치게 우리를 용서한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그의 정당한 처벌을 받아 마땅할 때, 그는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6-10).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실 뿐만 아니라, 결코 화내지 말라고 명하신다(마 5:22). 그도 더 이상 진노하지 않으신다. 성경에 진노하는 것과 관련되는 구절은 그의 의로운 처벌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법적 소송에 들어가지 말며 다투지 말고, 오히려 누가 우리의 속옷을 취하려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요구하신다(마 5:40; 눅 6:29). 이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를 재판정 앞으로 데려가, 법에 호소함이 없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한 말과 부합한다: “그는 어린양처럼 죽음에 끌려갔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사 53:7). 그리고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다투지도 않으리라”(사 42:2; 마 12:19).
4.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결혼한 여인도 탐하지 말라고 명하신다(마 5:28). 하나님 자신이 이 계명을 지키신다. 왜냐하면 그는 유혹 없이 계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의 공격에서 면제되어 있다. 하나님은 배우자보다는 차라리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결합한 것을 아무도 나눠서는 안 된다(창 2:24; 마 19:5).
5. 하나님은 맹세하는 것을 금하고,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에 맹세 없이 확고하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그의 행동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 중 하나가 이뤄지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천지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날마다 경험한다.
6.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기를, 우리 재산을 우리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또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다(눅 6:35). 하나님은 자기편에서 이렇게 행동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양육할 뿐만 아니라, 갚을 길 없는 하늘의 새도 양육하시기 때문이다(마 6:26).
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자들과 책망할 것 없는 자들을 선대할 뿐만 아니라, 원수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 5:44). 여기서도 그는 이처럼 행동하신다. 그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을 비취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신다. 그는 불신자와 원수들을 먹이시되 신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주신다.
8. 하나님은 훔치지 말뿐만 아니라, 타인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신다(출 20: 15-17). 이는 자신이 동일하게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손해가 될 어떤 것을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모든 것을 그에게 요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때 그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도우신다.
9.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한 말이나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뿐만 아니라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마 12:36).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은 동일하게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입에서 잘못되거나 속이거나 헛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벧전 2:22). 그의 교훈은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헛되고 무익한 말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능력으로 되어 있다. 그가 하신 말씀의 힘은 그 말씀이 듣는 이들의 가슴에 확고히 남아 있는 식의 힘이다 (마 7:29).
10.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아무런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나,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전에 대비한 뒤 이웃을 도우러 가는 것에 만족치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마 22:59). 이는 역시 그가 그렇게 행하시기 때문이다(요 15:31; 마 23:8; 갈 4: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건 그의 행동으로건, 그의 요구가 견지하는 많은 관점들을 계속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의 말씀으로 인해 죽음과 멸시를 받아야 하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각 형제에게 동일하다는 것. 하지만 다른 모든 계명들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계명들 안에 포함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들은 교황파들이 말하듯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준 충고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들로 되어 있다. 이 요구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것처럼, 죄없이 순수하고 의롭지 않고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뜻은 오직 그의 계명 안에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한 그의 계명은 그의 영원한 뜻의 계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어쨌든 너는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복음을 기억하라. 사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스스로 마땅히 절망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의 실행자로서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 바, 이 아들이 우리 대신 그의 계명들을 완성했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갚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확실한 담보로서, 그 덕택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위로가 우리로 그에 대해서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절망해야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또는 탐욕에 이끌려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간단히 말하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순수함과 죄 없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우리의 변호자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절망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온통 그의 연민에 달려있음을 본다. 더욱이 우리는 그의 말씀으로 그가 어떤 최고선을 세우며, 또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의롭고 선한지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를 따르기를 힘쓰면서, 우리의 무능력을 항상 확인해야 한다. 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완전함에 아무도 도달할 수는 없지만, 믿는 영혼의 가장 큰 바람은 그의 말씀과 그의 요구들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설사 그 영혼이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상태밖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믿는 영혼은 자신의 보배요 자신의 위로며 자신의 보장이신 이로 기뻐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가 위에 인용한 구절들과 또 그와 유사한 명령들이 충고나 견해 따위가 아님을 입증한다. 그리스도는 그것들을 “계명들”이라고 명명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마 5:19). 그는 이것을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 곧 그가 계명이라고 부르는 구절들과 관련시킨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명한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한다(마 28:20). 마찬가지로 문제가 된 모든 계명들은 다음 두 가지 원리에 포함된다: “주 너의 하나님을 네 온 마음과 네 온 목숨과, 네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우리는 우리가 어떤 헛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첫째 계명에 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면, 우리에게 어떤 허망함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낫게 말하면 이렇다: 이 유일한 계명을 준수하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셨기에 그것으로 계명이 되게 하자(마 22:37). 이런 경우,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어떤 피조물도 결코 자리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피조물에게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양보한다면, 불행히도 사실이 그렇듯이, 우리의 모든 힘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바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죄가 없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가 결코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둘째 계명에 포함된다. 만일 각자가 그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어떤 맹세도 필요 없을 것이다. 각자가 속지 않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예는 예요 아니오는 아니오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모든 계명들도 이 두 원리에 포함된다. 그것들을 준수하는 자는 스스로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속해있다”(마 22: 40). 결국, 문제가 되는 계명들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즐겁게 하기 위해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령적이요 강제적이다.
나는 이것이 명백하기를 바란다.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스스로 속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첫 계명에서 그가 그것[=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그의 정의와 상응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무능함을 도우러 올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공통된 불완전에 공격당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올바른 것과 불의한 것을 판단하고 모두에게 대가를 지불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않는 많은 불경건한 자들이 존재한다. 이 사람들은 무례하고 비인간적인 모독에 빠져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범죄적 행동에 재제를 가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그들의 가증할 죄악과 경솔함으로 백성을 온통 파괴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각 사람의 것을 그에게서 빼앗았을 것이다. 만일 각 사람이 자신을 방어했더라면, 그들은 그를 죽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율법을 주사 불경건한 자들이 억제되며 사람들로 그들에게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셨다. 설사 그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사람들을 평안하게 내버려두어야 하며, 자기의 허풍으로 누구를 겁줘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인간 정의의 비참함과 초라함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울의 다음 말처럼 악인들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법은 의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 불경한 자, 신성 모독자, 부모에게 폭행하는 자, 살인자, 추잡한 자, 남색 하는 자, 영혼을 훔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그리고 기타 올바른 교훈,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부합하는 교훈을 거스르는 사악한 자들을 위함이다”(딤전 1:9-11). 이 악당들의 문제에 있어서, 너는 이제 하나님이 가장 악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인해서 법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법이 가장 상스러운 불의를 막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해서, 자신에게 더 나쁜 악에 대한 죄가 돌려지지 않는 사람이 그만큼 더 의로운 것은 아니다. 법을 준수하는 자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점에서 책벌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이 부르는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으로 살리라”(갈 3:12). 이 말의 뜻은 이렇다: 율법을 실천하는 자, 또는 율법이 금하는 것을 피하는 자는, 그가 이 율법에 따라 정죄도 안 받고 책벌도 안 받는다는 점에서, 자기 생명을 보호할 것이다.
이처럼 두 정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법이 있다. 곧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이다. 법의 한 부분은 다만 내면적 인간과 관련한다. 곧 그 힘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도 이 법을 이루는 상태에 있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 한 분 외에, 그리고 우리의 담보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믿음의 방편으로 의롭게 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다.
법의 다른 부분은 외적 인간과 관련한다. 이 법에 따라서 각 사람은 외적으로 경건하고 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심판에 따라서는 그는 경건하지도 의롭지도 않으며, 하나님에 의해 정죄된다. 예를 들어보자.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 15)는 밖에서 보여진 경건이나 정의와 관련한다. “타인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출 20:17; 롬 7:7)는 내적 인간과 관련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계명이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동일한 것, 곧 불법적 횡령—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을 겨냥한다. 만일 누군가가 타인의 재물을 도적질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여겨질 것이다(다시 말하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정죄되는 모든 악덕에 관계해서 말이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람은 도적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재물을 향한 열정과 탐욕이 아마도 도적질한 사람보다 그에게 더 크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도적은 교수형 당할 것이며, 공개적으로 도적이 되나, 한편 하나님에 의해서만 범법자로 여겨지는, 타인의 재물에 대한 탐심이 더 큰 자는, 악한 행동이 공개적으로 저질러지지 않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의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명백히 범법자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적절하게 사용될 때, 완벽히 적합하다. 이 표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범법자라는 뜻을 암시한다. 실제로 설사 사람이 타인의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타인의 부인이나, 영광된 자리를 탐하며, 혹은 다른 유혹과 관계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나 한편 사람들 눈에는 의인으로 여겨지고 그의 마음은 사람들이 그 밑바탕을 알 수 있기에는 너무도 깊다.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며, 한편 사람들의 판단은 외면적인 것에만 도달한다. 명백히 불한당인 자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당하는 유혹들이 밝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점에서 부당하고 불경한 자들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의 법이 무엇이며 인간 정의의 법이 무엇인지를 본다. 하나님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범법자들이며, 우리의 범법을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처럼 그 만이 그것을 판단하신다. 아니면 우리가 그의 아들이 동정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사 우리의 빚을 갚으셨음을 믿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신다. 인간 정의의 기준에서, 우리는 자주 의인으로 여겨질 것이나, 한편 하나님에게 우리는 진실로 범법자들이다. 인간 정의에 맞서 행동하기를, 하나님에게도 범법자요 공개적으로도 범법자인 식으로 하는 자의 경우, 그 자는 행악자를 재판하는 소송, 곧 관청이나 재판관에게 넘겨질 것이다.
자, 나는 이 인간의 정의를 허약하고 불구와도 같은 정의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설사 각자가 사람들 앞에서 의인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못한 연고로 그 앞에선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하면, 수도사의 후두와 경건한 휘장과 특별한 예복들과 더불어 제시되는 이런 종류의 정의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는 이것이 커다란 위선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서 의롭고 순수하며 흠 없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선을 행할 자신의 무능함과, 불순함과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외면상 선한 인물로 자처한다 해도, 한편 하나님 앞에서는 커다란 범법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타당하다: “저희는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사실 사람은 그가 보는 것에 따라서 판단하며, 외양에 따라서 그의 이웃을 평가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정직하게 보일 경우, 그들의 외양만으로 인해서 그렇게 여겨질 것이며, 그들이 노력한 열매를 이미 이 땅에서 받을 것이다. 자기들의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경우,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부족한 것을 여전히 보지 못하는 까닭으로 인해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해도 아무 소용없다: “우리는 우리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수도복을 입고 다닌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만일 너희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너희는 공공연히 큰 소리로 너희의 회개를 알리지 않은 채, 회개의 영과 더불어 너희 마음 내면에서 그것을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정직하며 선하다고 자처하려는 모든 것이 위선이며, 또 그것은 인간 정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임수요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인간 정의를 하나님의 정의 앞에 두는 순간부터 그것을 정의라고 부르기에 부당하지만, 그래도 인간 정의는 하나님이 세우셨는데, 이는 특히 우리의 불순종—하나님은 이 불순종에 인간 정의가 개입하게 될 것을 잘 아신다—으로 인해 그렇게 하셨다. 예를 들어보자. 아들을 학교 선생에게 맡기는 사람은 거의 이렇게 말한다: “그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고 책벌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 아버지는 아이가 열심히 공부할 때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나,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이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가 육체적으로 교정되지 않는 한 그가 원하는 만큼 공부하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이 낯선 것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기를 요구하지만, 그는 우리가 경건하지도 의롭지도 않음을 잘 아신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규율들을 주사, 우리로 서로 행복하고 우애 있게 살도록 하셨다. 이처럼 그는 말씀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고 거짓 증거 하지 말라(출 20:13-16). 만일 우리가 다음의 다른 계명을 지킨다면, 이 계명들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마 22:39).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또한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셔야 했다. 이것으로 충분치 못했기에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계명들을 강화해야 했다. 도적은 그가 취한 것을 네다섯 배로 갚아야 하고, 간음한 자는 돌로 처 죽여야 하고, 등등. 그리고 이것들은 학교 선생의 손에, 곧 관청에 맡겨진다. 이어지는 글은 관청(=당국)이 이 주제에 어느 정도로 책벌을 적용하거나, 법규들을 제정해야 하는 지를 보일 것이다.
이제 인간의 정의와 비교하고 상호 관계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열 가지 사항을 다시 취하자.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첫째 규율들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 정의의 규율들을 정하셨음을 볼 것이다.
1 과 3.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기를 명하시며, 이것 없이는 그도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특별히 아무도 복수를 행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바, 용서가 없다면 복수는 난처함과 분리를 야기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공존 사이에 평화를 온전히 파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분쟁들을 조사하고 완화시킬 위정자들과 재판관들을 세우사, 각자에게 출 18:21에 부합되는 그의 의무를 주셨다: “진실 되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택해서(들으시오, 오 재판관들과 위정자들이여!) 그들 중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되…작은 소송들을 재판케 하라.” 이처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용서되기를 구할 때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까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로 재판하도록 명하셨음을 본다. 인간 사회의 삶이 험악한 장소 가 되지 않도록, 당국은 각 사람이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스스로 보복하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모든 분쟁이 법에 합당하게 해결되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정의를 상실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련한 인간 정의가 실패로 끝난다면, 사회생활은 들짐승의 생활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곧 가장 힘센 자가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한다. 이렇게 권위를 행사하는 재판관들과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그들은 학교의 스승들이다. 우리가 조금 뒤에 보겠지만, 그들의 정의에, 그것이 도덕적이건 물질적이건, 따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반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고서 산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래도 의롭지 못하다. [다만] 그는 죽음 또는 징벌을 면한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화내지 말 것도 요구하신다. 분노가 없다면,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치명적인 행위도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혹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위반할 경우, 하나님은 우리가 살인하지는 말라고 요구하심에 틀림없다. 우리가 계명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학교 스승은 대가 지불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곧 죽음은 죽음으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화재는 화재로, 상처는 상처로, 구타는 구타로. 이런 형식의 계명들을 위반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이 점에서 그 이상 의롭지는 않으며, 권위에서 나오는 징벌을 피할 뿐이다. 이것이 율법에 따라 사는 삶이라 불리는 것이다(갈 3:10).
4.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의 배우자를 탐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이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실제로 우리에게 유혹이 없을 수 없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결혼 관계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가 우리의 탐욕으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책망 받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간음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위법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동물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학교 스승에게 맡겨 돌로 치게 하신다(레 20:10).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징벌을 폐기했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비롯한다. 곧 간음이 초기에 매우 드물어서 자주 잡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위정자들 자신이 간음자들이라. 그들이 깊이 빠져있는 이 악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간음이 퍼져있고 온갖 수치를 당하고 있는지 확인한다면, 관련된 징벌을 다시 강화해서 우리로 가련한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이 정당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규정한 것(출 22:1) 이상으로 가혹하게 도적질을 처벌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벌은 도적들이 습성에 젖어 있는 이 위법 행위를 부인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간음 징벌이 다시 세워지고 심지어 강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5.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되, “예” 와 “아니오” 외에 다른 말을 사용하지 않기를 요구하신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행하지 못하고, 서로 속일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세할 것을 명하신다(출 22:11).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학교 선생이 채찍과 더불어 거기에 있을 것이고, 수산나를 죽게 하려 했던 두 늙은 거짓 증인들처럼, 우리를 넘겨 돌에 마저 죽게 한다. 왜냐하면 거짓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부인과 다르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돌로 처 죽이는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신 17:5).
6.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재물을 필요한 자들에게 주되 돌려받을 생각 없이 하라고 명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행하지 못할 경우,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라고 명령하신다(출 22:25; 레 25:36). 우리가 그것도 못하기 때문에, 학교 선생이 있게 되고 그는 우리에게 이자를 주도록 가르친다. 비록 빌려주는 자에 대한 처벌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이 일은 그래도 재판관의 영역에 속한다. 이 재판관은 일어날 수 있는 분쟁과 악습에 질서를 주기 위해서 세워졌다(출 18:25-27). 이제 고리대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자는 이 사실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의인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국이 고리대금을 이유로 그를 체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아니다. 그가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 한 말이다(눅 12:33).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을진대,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가 자신이 죄인으로 인정함을 너로부터 기꺼이 받아들인다.
7.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의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못할 경우, 그는 우리로 원수에게 악을 행치 말라고 명하신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원수들이 모르고 있는 위험을 그들에게서 치워주기를 원하신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 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내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2:4-5). 만일 네가 이 명령을 그냥 지나친다면, 학교 선생은 가장 단순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으로 인해, 마땅히 너를 처벌할 것이다. 이 계명은 우리가 가까스로 지킬 수 있지만, 우리가 모든 것이 파멸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제 네가 이 마지막 비난거리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네가 그렇게 의롭지 못하다. 네가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신 것처럼, 네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8.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킬 경우, 도적질이나 강도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 곧 인간 사회의 유지를 위해 그만하면 괜찮은 계명을 만드신다: “도적질하지 말라”. 이 계명과 관련해서—또한 “네 이웃의 부인을 탐하지 말라” 와 “간음하지 말라”(이 두 번째 것이 역시 가장 단순하다) 도 만찬가지로—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계명들을 정하사 우리가 그것들을 지킴으로 의인은 되지 못하나 처벌만은 면하게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주심은 사회와 인간 공존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재산을 폭력으로나 은밀하게 빼앗는 자는 도적이거나 강도다. 학교 선생 또는 감시자가 마땅히 회초리로 그를 때려야 한다.
다음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과 그 열매들을 우리 쪽에서의 지불 없이 후하게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향유함도 값이 없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빚진 자요, 그에 대해서 악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 속한 것을 우리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못할 줄 아시며, 아담 이래 우리가 이기주의자임과 각자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함을 아신다. 이제 인간 사회가 우리의 인색함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 인색함을 길들이사 우리로 강탈하거나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이 일에 삼가 조심하는 자라해도, 그가 타인의 재물을 바라지 않는 한, 그는 이것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 여기서 성실한 인간에게 [이자로] 아무것도 주기를 원치 않는 자들은—이들은 그에게서 자본을 [대부]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자들이다—도적과 사기꾼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곧 하나님에게, 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에게서 재산을 빼앗으라고 명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래도 너를 처벌하여 어떤 불의도 어떤 사람에게든지 저질러지는 것을 피하라고 당국에 명하신다. 그러므로 설사 당국이 유대인이나 다른 고리대금업자들 편에서 고리대금을 용납할 때에도, 네가 누구의 자본을 고의로 [대부] 받은 뒤, 핑계나 폭력으로 빚의 이자나 고리대금을 그에게서 훔친다면, 너는 도적이나 강도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임의로 빼앗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당국은 하나님의 요구와 심지어 이 가련한 정의—하나님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세우신—의 요구에 병립할 수 없는 악습들이 존속할 수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런 일을 기도하는 자들은 이중으로 죄를 범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우리의 공통된 연약함으로 인해 타인의 재산을 탐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멸시하여 나쁜 행위와 소란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가련한 의인이지만, 최소한 한 쪽 끝으로라도, 정의의 원리— 이것 없이 우리 생활은 살인, 도적, 강도밖에 아무것도 아니다—에 언제나 확고히 버텨야 할 것이다.
9. 하나님은 우리가 헛된 말을 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모독하지 않고 나쁘게 말하지 않으며 속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의도가 헛된 사람은 의롭지 못하다. 가련한 인간 정의는 자신의 직무를 다 했다. 곧 누구든 나쁘게 말하지 않으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적으로 죄를 지며, 항상 [잘못] 말하고 모욕하고, 속이고 거짓 증거하기 때문에, 이런 비방가나 속이는 자에 맞서, 그가 속이거나 거짓 증거한 자에게 한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신 19:19).
만일 우리의 말이 예, 예나 아니오, 아니오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명을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하나님이 어떤 계명들을 정하사 우리로 그것들을 지키게 하셨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면서, 당국이 처벌하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있는 양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가련한 지를 보라. 또한 인간의 지혜란 온통 의인을 그런 식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생각하라. 이는 신앙만이 오직 경건하게 만들고 신앙만이 연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열등 정의는 실시되어야 한다.
10. 이웃과 관련된 모든 요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유일한 계명에 직면한 우리의 태만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자연법으로 그리스도가 그것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했음을 덧붙여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사랑이시기에(요일 4:16) 이 계명은 그에게 온전히 상응한다. 자연법은 다음과 같다: “너에게 일어나기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타인에게 행하라”, “사람들이 너에게 행하기를 네가 원치 않는 것을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이 계명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했는바,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이웃 사랑도 우리 안에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사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우리는 상응하는 의지를 발견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연법에 다음 말로 장식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으로 측정할 때, 잘 알다시피, 모든 사람들이 불완전하다. 이런 관계 하에서도 인간 정의는 도처에 그대로 있다. 사실 인간 정의는 인간 본성의 특성들을 너무도 명백히 자신의 것으로 삼기에 인간들로 공동체에서 살도록 이끌 수 없다. 인간의 정의는 낙원에서는 말하자면 호되게 당했다! 그러기에 이 정의는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들의 책임에 호소하지 않는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고 또 어떤 당사자들의 비준수가 처벌받게는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 정의는 총체적으로 계명과 관련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런 정의도 이사야가 말하는 더럽혀진 옷과 마찬가지임을 본다. 우리가 세상의 눈엔 의롭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역시 하나님의 눈엔 강도이다. [하지만] 당국이 행하는 감독은 필수 불가결하다. 아버지가 미혹 당한 자기 딸이 창녀가 되지 않도록 그녀를 감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국은 우리의 존재가 이성 없는 동물적 삶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대리자로 감시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정의와 어떤 점에서 구별되어져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기를 바란다. 비록 이 인간 정의가 하나님에 의해서 명령되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도로 완전에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 인간 정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혹과 탐심이 그의 뜻을 지키고 복종하지 못하게 함을 보신 뒤, 주로 우리의 죄짓고 타락한 본성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인간 정의는 하나의 처벌 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 이 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거룩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합당치도 않는다. 에스겔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선하지도 않은 법과,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들, 곧 그것들 지켜도 너희가 구원받지 못할 규례들을 주었다”(겔 20:25). 비록 이 말들이 본질적으로 의식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지만, “규칙”이란 말은 또한 이 말들이 인간 정의와 시 당국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한 말인 “우리가 이 규례들에 따라서 살지 말 것”과 갈라디아서 3:12의 “이것들을 실천하는 자들은 살리라”는 차이점이 강조된다. 그 차이는 이렇다: 인간 정의를 지키면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에스겔이 “살게 하지 못할”의 의미이고, 한편 바울의 의미는 만일 우리가 인간의 연약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을 지킨다면 당국이 우리를 죽음에 두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육적인 생명을 건진다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자, 그러면 우리가 살해되지 않을 것이다”(신 4:40).
*인간의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가르침(마 22:21, 마 17:27)
-사도들의 가르침(벧전 2:13)
-바울의 가르침(롬 13:1-7 해설)
*요약 및 결론
재세례파와의 논쟁
1522년 8월, 츠빙글리는 미코니우스에게 쓴 편지 가운데 자신의 서클에 들어있던 인물들을 나열한다. 이들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츠, 슈툼프, 카스텔부르거, 아벌리, 로이블린 등인데, 취리히 개혁이 한창일 무렵 츠빙글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1523년 1월, 1차 취리히 논쟁 때, 츠빙글리가 세속 당국의 통제 하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려는 생각에 반대했고 년 월 차 논쟁 , 1523 10 2 시에는 슈툼프와 그레벨이 참석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1523년 10월에서 1524년 9월 사이에 그레벨, 만츠, 슈툼프 등은 츠빙글리와 여러 차례 대화를 갖고 자신들의 입장을 확실히 해나갔다. 특히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연히 당국의 억압에 밀려 그들은 소수의 분리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뮌처와 카를슈타트의 글들이 다소간 영향을 준 듯하다.
1525년 1월 17일 츠빙글리와 그레벨 그룹 사이의 마지막 논쟁이 있었으나 시의회 대표들은 유아세례에 대한 츠빙글리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레벨과 만츠에게는 침묵을 강요했으며 로이블린과 카스텔베르거 등을 추방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1월 21일 만츠의 모친 집에서 모임을 갖고 그레벨이 블라우록과 그리송 집안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는 졸리콘으로 자리를옮겼다. 이리하여 최초의 세례파 자유교회가 탄생하였다. 1월 30일에는 블라우록과 만츠가 새로 세례 받은 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만츠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곧 풀려났다. 블라우록과 그레벨은 산악지대로 갔고, 로이블리는 발트슈트로 가서 복음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후브마이어를 만나 그와 그 가족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면서 성찬의 독자적인 의식을 갖춘 300명의 공동체가 발트슈트에 세워졌다. 츠빙글리는 후브마이어와 글과 말(1525년 취리히에서)로 논쟁을 벌였다. 그레벨, 만츠 등과의 대담이 결과를 얻지 못하자 시의회는 1526년 3월 7일 고집쟁이들을 가차없이 익사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펠릭스 만츠는 1527년 1월 5일 리마트Limmat 호수에서 익사형 당했다. 죄명은 “물로 범죄한 자는 물로 망할지라”였다.
그렇다면 왜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에 대해 반대했나? 첫째로, 그들에게 교회 분리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츠빙글리는 그들에게서 수도회의 연속을 보았다. 그레벨 그룹은 sola fide 정신이 있으면서도 삶을 강조했기 때문에, 순수한 교회를 지향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셈이 된다. 둘째로, 유아세례를 부인한 것이다. 이미 1524년부터 어떤 이들은 유아세례를 주지 않았다. 세례 받을 자에게 세례를 주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것은 첫째 이유와 연결되며, 완전주의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한 것이다. 츠빙글리는 이런 금욕적 개혁 열망을 거부했다. 세 번째로, 이들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의 양 사역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카리스마적 권위를 요구하며 기존 성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예언했다. 여기에 대해 츠빙글리와 취리히 당국은 공적 유아세례를 존속시켰다. 이 신정정치는 그레벨 그룹에 강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 이들이 구약을 신앙과 행위의 기초로 신약과 동등하게 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재세례파의 정착
한편 그레벨 그룹은 후브마이어와 자틀러의 합세로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할 기회를 갖게 된다. 후브마이어는 1526년 <기독교 요리문답>을 써서 재세례파 신학의 틀을 잡았고 자틀러는 1527년 2월 24일 쉴라이트하임Schleitheim에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이와 같이 스위스 형제단은 콘라드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그룹에 후브마이어와 자틀러가 가세하여 그들의 신학사상을 정제한 재세례파 유형이다. 여기서 후브마이어와 자틀러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후브마이어는 1480년 프리드베르크에서 태어나 그 도시의 대학에서 에크와 함께 신학을 공부하고 1512년 그 보다 2년 앞서 떠난 에크의 뒤를 따라 잉골슈타트 대학으로 가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516년 동 대학의 부총장직에 선출된 후브마이어는 이듬해 돌연 레겐스부르크의 성당 설교자가 되어 4년을 보냈다. 이 시기 그의 설교는 유대인을 몰아내려는 비열한 캠페인의 특징을 보였다. 1520년 그는 또다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발트슈트로 옮겼고 여기서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을 읽으면서 복음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1523년 경 그는 자신을 당당히 복음주의자로 밝히고 그 이듬해부터 발트슈트의 개혁을 구상했다. 그리하여 1524년 가
을 그는 복음주의 교회 개혁을 시도하여, 교회에서 성상과 성유물을 제거하고 미사를 독일어로 드렸다.
농민전쟁이 터지던 해인 1525년 3월 로이블린과 그레벨이 발트슈트에 왔을 때 이 도시는
이미 반역적인 흑림Black Forest 농민들과 정치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동년 부활주일에 후
브마이어는 로이블린에게 세례를 받고 그 기간 동안 300명의 시민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대
다수의 시민들가 재세례를 인정한 셈이었다. 후브마이어는 즉시 <신자들의 기독교 세례에 대
하여>라는 글을 써서 성인세례를 옹호했다. 이런 재세례 운동은 인근 도시인 할라우와 샤프하
우젠으로 확대되었다. 초기 재세례파는 세상과 유리하는 분파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들이
주장하는 사회 개혁 운동과 연루되어 있었다. 스위스 재세례파 운동은 민중 개혁이라는 대안
운동인 풀뿌리로 시작한 것이지 철저히 평화 지향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이점에서 후브마이어는 검의 사용을 거부하는 철저히 평화적인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
츠의 스위스 형제단과 분명 다른 입장을 보였다. 만츠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
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 사랑은 적을 파괴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상속자가 될 사람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워야 한다…그리스도 역시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셨다. 그의 참
된 종들도 그러했고 그들 앞에 가신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참 되게 따랐다.”
반면 후브마이어는 발트슈트가 농민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훗날 <검에 대하
여>라는 글에서 평화적 재세례파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위스 형제단 가운데 후브마
이어를 따른 사람들은 로이블린과 브뢰틀리다. 할라우에서 그들은 무장한 농민들의 보호를 받
았고 또 그것을 인정했다. 갈Gall과 그뤼닝겐 지역의 재세례파들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재세례파는 정치적 구심점을 잃었고 이 운동은 점차 세상
과의 유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당국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분파를 호
되게 다룬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취리히는 재세례를 받은 자를 익사형으로 다스렸고 재세
례를 인정하는 자는 감옥에 가두었다. 펠릭스 만츠는 이 법령을 어기고 죽었다.
미카엘 자틀러가 스위스 형제단의 지도자로 우뚝 솟은 것은 1526년 여름이다. 그는 본래
엄격한 베네딕트회 소속인 흑림의 성 베드로 수도원의 수사였는데, 프라이부르크를 점령한 농
민 군대가 수도원을 장악한 뒤 어쩌면 이들에 의해 재세례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농민들이 점령한 스위스 마을들과 스트라스부르 및 인근 마을들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었
다. 그는 부처와 카피토에게 수감된 재세례파를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나아가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리스도의 나라와 사탄의 지배의 철저한 분리, 무장 저항과 정부와의 연루 거부라는 자
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1527년 2월 24일 이 생각들을 정리하여 신앙조항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것이 쉴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다. 이것은 스위스 재세례파 운동의 헌장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 일곱 가지이다. 1) 신앙세례 2) 출교 3) 성찬의 분병 4) 세상과의 분리 5) 목사의
선택권 6) 검 7) 맹세.
총 7가지 조항 가운데 처음 3가지(신앙세례, 출교, 성찬)는 모든 재세례파들과 동일하다. 재
세례파는 자신의 신앙에 의해 세례를 받고 공동체의 치리에 복종하며 같은 성찬에 참여한다.
그러나 나머지 4조항(세상과의 유리, 목사 선택권, 검, 맹세)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
다. 세상과의 유리는 수사였던 자틀러의 영성을 반영하는 듯하다. 새로 태어나는 종교개혁의
교회들 역시 사회적 가치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세속적 가치를 거부할 수 있는 수도
회와 같은 공동체의 필요를 느꼈던가 목사 ? 선출권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검의
거부는 단호한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맹세는 어떤 형태건 거부된다. 이것은 이 시기에 지상
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포기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1527년 이후에는 쉴라이트하임의 분리
주의적, 비정치적, 평화적, 비-맹세적인 재세례파가 스위스 재세례파를 지배했다. 물론 이들이
다른 여러 지역(알자스, 모라비아, 팔츠, 네덜란드 등)으로 흩어졌지만 이런 신앙고백을 갖는
이들에게 여전히 스위스 형제단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쉴라이트하임 신앙고백에 대한 츠빙글리의 비판
츠빙글리는 1527년 8월 31일, <재세례파 논박>In catabaptistarum strophas elenchus;
Wieder die Ränke der Wiedertäufer을 써서 쉴라이트하임 고백서를 비판한다.
첫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새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만이 그들의 죄에서 구원될 수 있다
고 말하면서 재세례파는 자유의지(공로에 의한 의)를 회복시킨다(츠빙글리에 있어서 새 삶이란
구속의 조건이 아니라 세례의 조건이다). 2) “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결심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는 그렇게 하는 자들을 거짓 맹세하는 자라고 정죄한다. 3) 세례는
원하는 자와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재세례파는 어떤
성경구절에도 의지하지 않는다(여기서 츠빙글리는 막16/16과 행8/36-40을 잊고 있다). 4) 유
아세례를 거부하면서 재세례파는 할례를 망각한다.
두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출교를 실시하면서 마18/16절만 생각하고 그 다음절은 포함하
지 않는다. 2) 츠빙글리는 제2항이 마18/17과 성찬식 사이에 세워놓은 유대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관례에서 분병 전에 수찬 정지를 행하는 재세례파를 지지하는 것이라곤 아
무것도 없다. 3) 재세례파는 출교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가운데 있
는 토머스 슈거를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츠빙글리의 잘못된 파악).
세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성찬참여의 조건은 세례인데 그들이 말하는 세례는 교회의 세례
가 아니라 분파의 세례이다. 2) 재세례를 통해서 “잘못된 교회”acoecclesia에만 신자들을 가
입시킬 수 있는 재세례파의 분리정신을 고발한다. 3) 유아세례는 교황이 만든 것이 아니다. 따
라서 교황체제에서 이뤄진 유아세례도 유효하다. 네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분리는 각자의 내
부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한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2) “2검의 의”us gladii를
인정해야 한다(롬 13:4). 3) 재세례파는 세상의 도피자들이다. 다섯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개
혁파 교회 목사를 청빙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신자들의 관대함으로 사는 것이 잘못이고 십
일조와 교회재산으로 사는 것이 정상이다. 게으르고 우울한 것도 잘못이다 여섯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1그리스도의 완전”과 “검의 의”사이에 재세례파가 세운 대립을 비난한다. 그들도
완전한 상태에서 살수 없다. 2)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이 재판관이나 위정자의 기능을 담당할
권리가 없다는 견해에 반발한다. 3) 그는 재세례파가 비록 하늘의 시민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4) 재세례파가 간음죄에 대해 관대함을 지적하며 비도
덕적이라고 비난한다.
일곱 번째 조항에 대해서: 1) 츠빙글리는 재세례파가 세속권세를 파괴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맹세의 거부가 그들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여긴다. 맹세를 거부하는 것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기를 거부하는 것이요, 공중질서의 기초를 제거하는 것이며, 소요
와 봉기를 낳는다고 본다. 2) 재세례파는 인간관계에 있어 맹세의 유효성을 잘 모른다. 맹세는
단순히 결심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는 행동이다. 3) 츠빙글리는 재세례
파가 마 의 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5/33 επιορκειν 본다. 그들은 이 말을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
다로 본다(jurare, schwören). 그러나 그는 이것을 dejerare, zuschwören, 곧 경솔히 맹세
하다로 여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맹세를 금한 것이 아니라 헛맹세를 금한 것이다. 4) 아무도
맹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맹세를 삼가야 한다는 논증에 반박한다. 그는 여기서 재세례파의
모순을 발견한다. 서약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부합될 수 있겠는가? 5) 히6/16은
츠빙글리에게 좋은 무기이다. 6) 츠빙글리가 드는 예: 재세례파운동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인
블라우록이 고문이 두려워 위정자 앞에서 맹세를 했을 때 재세례파가 그를 출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츠빙글리와 스위스 재세례파의 사회학적인 입장은 어떻게 다른가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사회학
츠빙글리의 사회학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공유하고, 양쪽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는 중간 해결책을 권장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산상설교의 권위를 빌어 노예제도, 십일
조, 강제노역의 폐지 등 급진적 개혁들을 요구했던 농민들의 슬로건이었다. 츠빙글리는 여기
에 인간의 정의를 병립시킨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종속된다. 요컨대, 종교와 도덕의
구분이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지는 신자의 태도에 속하는 내면적 의가 있
고, 사람들의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公民의 정직성 곧 외면적 정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외적 질서가 <인간의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이 인간의 정의는
상대적일 뿐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계하여 수정될 수 있다. 츠빙글리는 이웃 사랑을 이
런 식으로 이해했는바, 그에게 있어 이웃 사랑은 자연 법에 일치한다. 이처럼 사랑은 부정적
인 형태(네게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인간의 정의)건 긍정적인 형태(남
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줘라-하나님의 정의)건 인간의 본성에 뿌리 박혀 있
다. 여기서 우리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결정하는 실재와 상징의 변증법을 발견한다. 동시에 이
해결책은 두 경쟁적 경향들 사이에서 중간노선으로 나타난다. 곧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외적 질서도 인정하지 않는 급진파(재세례파)의 경향과 자신들에게 좋은 통치 외에 다른 것은
알지도 못하는 군주들과 위정자들의 경향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독재”의 퇴위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저항권을 시민들에게 준다.
스위스 형제단의 사회학은 실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사회학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
스도의 삶과 메시지(특히 산상설교)를 개인적, 신학적인 차원에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집
단적, 사회학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비폭력, 절대 평화주의, 나아가 비-능력은 십자가
의 신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회학의 절정이다.
급진파들이 볼 때, 인간의 정의 실현이란,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를 둔다 하
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정의를 위반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정의를 그래도 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할 수밖에 없는) 정전(just war) 신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이들은
폭력은 언제나 악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결코 선으로 여겨질 수 없고 찬양될 수 없다. 전쟁에
의뢰해야할 때에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정전 이론의 jus ad bellum 이론으
로 전쟁이 정당한지 아닌지 알도록 도와주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전쟁을 합법적인 권위가 선
포했는가? 원인이 정당한가? 다른 모든 화해의 수단을 사용했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은 비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기 원하는 자 자신이다. 다음으로 정
전 이론은 그리스도인 편에서 윤리적 식별력을 내포한다. 정전 수행 방법을 묻는 기준(이것이
jus in bello의 이론으로 예를 들어 수단은 목적에 비례한다거나 전쟁은 질 수도 있어야 한다
거나, 무고한 생명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은 양심이 국가 권위가 선포하는 것(국가 이익에 부
합되는 것이라도 에 연결되지 않음을 ) 암시한다. 신자에게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공동
선을 구체화하는데 소용이 된다. 그러나 정전 이론은 선별적인 양심의 반대 권리에 부딪힌다.
군주나 국가의 이익이 자동적으로 폭력에 의뢰케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하나? 콘스탄타누스 이래 기독교
윤리는 정치적 현실주의와 효율성이란 기준을 채택했다. 비폭력이란 전진되지 않는다. 현실주
의자가 되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져야한다. 그가 행동하지 않으면 (필요하면 폭력으로
라도) 정의도 자유도 없다. 역사를 상식선에서 제대로 진행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이것인가? 평화주의적인 윤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세계의 역사가 어떤 의미에서 흘
러가고 있는지 말한바 있다. 악은 이미 패했다. 세상은 우리의 정치적 현실주의와 효율성의
계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치적 현실주의와 효율성(이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을 합리화했
던) 이 진정 현실주의적이었고 효과적이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책임감의 윤리가 진정 책임적
이었던가? 우리의 행동이 앞으로 있을 사건에 대해 끼칠 영향과 결과를 진정 알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기독교적인 사회 책임을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뒤에 서구 기독교의 예를 갖
고 있다. 왕과 군주들이 “매우 기독교적인”그 시대, 교회가 사회 전체의 진행에 책임을 느꼈
던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생각했던 그 시대 말이다. 이 경험은 유
산으로 무엇을 주었나? 물론 긍정적인 것도 있다. 그것을 부인하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십자
군, 종교재판소, 종교전쟁, 관용과 민주에 반대, 화학무기 원자무기를 사용한 20세기 기독교
국가들의 스펙터클, 옛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던 유럽 집단의 교회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거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위스 재세례파의 사회학은 예수의 사회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이 “진정한”급진적인 흐름은 공민권 포
기, 절대 평화주의, 세상사의 비-참여라는 세 가지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스토페르).
재세례파의 다른 유형들
츠빙글리와 대면해야 했던 재세례파는 주로 스위스 형제단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재세례파
는 실로 널리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스위스 재세례파 외에도 다른 두 가지 재세례파 유
형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는 남독과 오스트리아 재세례파이고 다른 하나는 북부 독일
과 네덜란드 재세례파이다(아놀드 슈나이더).
1) 먼저 남독과 오스트리아 재세례파이다. 스위스 재세례파가 츠빙글리와 더불어 시작했다
면 남독 재세례파는 뮌처와 더불어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신학적 뿌리는 한스 텐크와 한스
후트에게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은 모라비아에서 지도자 야콥 후터Jacob Hutter의 이름을
따서 후터파Hutterites 정착한다.
한스 덴크 : 덴크는 1500년 바바리아에서 태어나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공부한 뒤
(1517-1520) 바젤의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보면서(1522) 복음적 개혁운동에 가담했다. 이듬해
오이콜람파디우스의 추천으로 누렘베르크에 있는 한 학교의 교사로 가서 거기서 급진적 개혁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524년 이 도시를 방문한 뮌처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 뮌처 서클
에는 한스 후트가 있었다. 이런 사상적인 변화는 덴크로 하여금 이 도시에서 추방당하게 했고
그는 스위스 도시들을 돌아다니다가 1525년 9월 남독 아우구스부르크에 머물면서 세례를 받
고 재세례파 리더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신가>, <하나님의 법>, <진
정 진리를 사랑하는 자>를 출판했으며, 취리히에서 추방되어 모라비아로 가던 후브마이어를
만났으며 한스 후트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526년 11월 덴크는 스트라스부르에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자신이 자틀러, 부처 등과 다름
을 발견했다 부처는 그와 공개토론을 한 . 뒤 그를 추방시켰다. 덴크는 보름스로 가서 몇몇 루
터파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그의 유명한 책 <참 사랑>을 썼다. 하지만 1527년 중반 도시에 재
세례파 논쟁이 벌어졌고 몇몇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추방되자, 덴크 역시 도시를 떠나 아우구
스부르크에서 열린 “순교자 대회”에 참석했다가 다시 바젤로 갔다. 그는 재세례파의 분열에
환멸을 느꼈고 오이콜람파디우스의 강권으로 훗날 <철회>라고 잘못 불린 그의 변명서를 작성
했다. 그는 1527년 11월 바젤에서 전염병으로 죽었다.
한스 후트 : 후트는 1490년 중부 독일 하이나에서 태어나 비브라에서 제본업자로 일했다.
1521년부터 그는 책 판매 일로 독일 여러 도시들과 오스트리아를 방문했고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와 뮌처의 편에 서기도 했다. 뮌처가 1524년 뮐하우젠에 도피했을 때 후트의 집에
1박하면서 그의 <변호와 논박>을 맡겼다. 후트는 이 책을 누렘베르크에서 출판했고 거기서 덴
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아이의 유아세례를 거부했고 이로 인한 추방을 선택했다.
후트는 뮌처의 “영원한 언약”의 일원으로 농민전쟁에 가담했고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패하
자 비브라로 가서 돈 받고 미사를 거행하는 성직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
으며 심지어 신하들이 권세가진 자들을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후트는 거기서 쫓겨나 아
우구스부르크로 갔고 1526년 5월 덴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일 년 넘도록 비엔나와 찰
스부르크를 포함한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을 다니며 세례를 베풀다가 1527년 9월 아우구스부
르크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당국은 그의 시체를 화형에 처했다.
덴크와 후트를 이어 남독과 오스트리아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여럿 나왔는데, 아우구스틴 바
더Bader, 레온하르트 쉬머, 한스 슐라퍼, 필그림 마펙 등이 주요 인물들이다. 한편 중부 독일
에서는 멜키오르 링크Rinck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후기 남독 재세례파의 방향은 야콥 후터와 후터파들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검과 맹
세에 관한 후터파의 입장을 보면 정말 한스 후트가 이 운동의 선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1527년 후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아의 후터파는 스스로 평화주의 형제단이 되었다. 이
와 같은 분리주의적이고 무저항적인 성향은 쉴라이트하임의 입장에 가까워진 것이다. 1535년
야콥 후터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누구도 괴롭히지 않기길 원한다. 우리의 원수, 심지어 페르
디난트 왕도 해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관습과 대화는 도처에서 모두
에게 알려져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단 1페니의 손해를 주기보다는 100길더의 손실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창이나 칼은 고사하고 손으로 적을 때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목숨을 내줄 것
이다.”
피터 리데만은 후터의 입장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통치의 권세가 진노 가운데 주어졌기 때
문에 그리스도에 적합하지도 않고 그에게 속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통치자가 될 수 없으며 어떤 통치자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로마서 13장
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종”이라 해서 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진노를 수행하는 보복의 종(통치자)이요 다른 하나는 복을 베푸는
그리스도의 종(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는 통치하기를
멈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맹세 역시 철저히 금했다.
아무튼 남독 재세례파를 스위스 재세례파와 비교할 때 몇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
성서주의적인 스위스 재세례파와는 달리 뮌처와 후트와 덴크의 독일 신비주의 전통은 남독 재
세례파에게 신령주의 경향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중세 신비주의 전통에 근거한 성령의 내적
활동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이들이 내면의 말씀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에 부합하는 고통에 대한 강조이다. 셋째, 비록 다양하기는 해도 후트에
게서 뚜렷한 재산 공동체의 의지다 넷째 농민전쟁 . , 식의 사회변화 추구를 간직한다. 특히 검
의 사용과 반-성직자주의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시한부 종말론인 묵시적 대망 사상
이다. 이것은 덴크에게는 약하지만 한스 후트에게는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1528년에 재
림한다고 예언한 바 있다. 이 예언의 실패는 남독 재세례파 운동을 스위스 형제단 쪽으로 끌
고 갔다. 후터파는 이런 경향을 정착시켰다.
2) 스위스 형제단이나 남독 재세례파와 또 다른 유형으로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 재세례파가
있다. 멜키오르 호프만은 이 흐름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멜키오르 호프만 : 호프만은 1495년과 1500년 사이에 슈배비슈 할Schwäbisch Hall에서
태어났다. 원래 모피 상인이었던 그는 1523년에서 1526년까지 리보니아에서 루터파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했다. 성령 사역을 중요시 했던 그는 루터보다는 카를슈타트를 더 좋아했으며,
따라서 그의 사역은 가난한 자에게 집중되었고 반-성직자주의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 결과 도
르파트 시에 사회적 불안과 폭력을 야기했다.
호프만은 초기부터 묵시 사상으로 이끌렸다.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지고 말세의 두
증인인 엘리야와 에녹이 이미 세상에 나타났으나 검은 악행자들에게만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
는 인간의 점진적인 신격화를 믿었고 영적 전투의 승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이 아닌 중세 신비주의 전통에 속했다.
호프만이 루터파 개혁자들과 결별하게 된 계기는 그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거부했을 때였다. 그는 이 문제로 1529년 4월 그가 2년간 사역하던 슐레스비크-홀쉬타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스위스 형제단, 덴크의 신령파, 필그림 마펙의 추종자
들, 한스 후트의 열광적 제자들, 그리고 신령주의자인 카스파르 슈벵크펠트를 만났다. 호프만
은 특별히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을 섭취하고 자신의 것을 만들
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첫 번째 작품인 <하나님의 법>(1530)
은 분명 쉴라이트하임의 첫 3개 조항을 만족시킨다. 한편 검과 정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모
호하다. 불경한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제거되어야 하나 성도 개인이 검을 사용해서
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써서 불경한 자들을 멸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구인 경건한
정치 지도자가 있어서 성도의 최후의 승리를 이끌 것이다.
1530년 4월 스트라스부르 당국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호프만은 북쪽 도시인 엠덴으로 떠났
다.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고취하여 3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엠덴에서 시
작된 호프만의 재세례파는 네덜란드로 확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531년 호프만
의 제자들이 10명이나 사형에 처해지자 북독과 네덜란드 재세례파 운동은 지하로 숨었다. 호
프만은 1533년 자진해서 스트라스부르 당국에 출두했고 10년 뒤 옥사했다.
호프만의 재세례파 운동은 네덜란드에서, 특히 암스테르담, 레우워덴, 흐로닝겐에서 그 뿌리
를 굳혔다. 이어 점차 남쪽 젤란드, 플란더스, 브라반트(안트워프가 있는) 지방으로 확산되었
으며 북부 독일의 뮌스터까지 이르게 되었다.
얀 마티스 : 호프만이 스트라스부르에 감금되자 곧 얀 마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예언 활동
을 시작했다(1533). 그의 가르침은 지금은 성령이 활동하는 시기라는 것, 하나님은 곧 재림하
셔서 심판하시리라는 것, [자신에게] 세례 받는 자는 구원받으리라는 것이다. 마티스에게 세례
받고 사도로 파송된 사람 가운데 얀 반 레이덴이 있었는데 그가 훗날 소위 “뮌스터와 세상의
왕”이 된다.
호프만과는 달리 마티스는 하나님이나 경건한 위정자가 행동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성도들의
행동 쪽으로 가운다. 그는 뮌스터가 재세례파의 수중으로 들어가자 하나님이 선택된 자들에게
검을 주셨음과 자신이 말세의 에녹임을 확신했다 , . 또한 그는 스트라스부르가 아닌 뮌스터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곧 뮌스터의 개혁에 개입했다.
뮌스터 사건 : 마티스가 1534년 초에 얀 반 레이덴을 사도로 파송했을 때 뮌스터의 개혁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길드의 지지 세력인 베른하르트 로트만 그룹이 막 세례를 받았을 때였
다. 이미 1,400명이 세례를 받은 이 도시는 이 운동의 물결로 출렁였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
의 범죄행위로서 이 도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하지만 도시는 독립을 목표로 움직
였다. 2월 23일 시의회 선거는 재세례파의 정치적 승리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얀 마티스는
뮌스터로 입성했다. 그리고 2월 27일 세례 받지 않은 거주민들은 강제 추방 아니면 강제 세례
를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7천 내지, 8천 명의 인구 중 2,000명이 넘는 수가 억지로 세례를
받았다. 재세례파는 6개월 동안 도시를 장악했다. 검의 사용에 대한 초기 뮌스터 재세례파의
호프만적인 입장은 얀 마티스의 등장으로 바뀌었다.
새 예루살렘이 된 뮌스터는 사도행전의 가르침에 따라 재산 공동체와 구제하는 집사 제도를
갖추었다. 마티스는 1534년 부활절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4월 5일 시민들은 도시 벽
에 줄을 서서 하늘의 징조를 기대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절망한 시민들은 외출 나온
마티스를 잡아 토막 내고 머리를 창에 달아 전시됐다. 24살에 불과한 얀 반 레이덴은 하나님
이 꿈에 마티스의 후계자가 되라는 말씀을 주셨다고 말하고 마티스의 과부 디바라와 결혼했
다. 그는 구약에 따라 도시를 재조직하고 일부다처제를 도입했다. 그곳에 여자의 수가 4대 1
로 남자보다 많았다. 반대하는 여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반 레이덴은 16명과 동거했다.
대다수의 북부 재세례파들은 뮌스터 사람들을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뮌스터는 “지금은 주
님의 보복의 때이므로 바벨론에서 도피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1535년 3월 수천 명의 사람
들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그 도시에 있다고 믿고 네덜란드에서 이것에 응답했다.
네덜란드의 일부 재세례파는 더욱 공격적이 되어서 무장 저항했다. 300명의 재세례파는
1535년 3월 올데클로스터 수도원을 공격하고 일주일간 장악했다가 결국 군대의 반격에 절반
이 죽고 말았다. 당시 인근 비트마르숨의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1535년 4월 뮌스터 도시는 완전 봉쇄되었고 도시의 내부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은
풀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다. 이미 600에서 700명이 도시를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1535
년 6월 25일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시민이 배반했고 이틀 동안 도시는 피바다가
되었다. 반 레이덴의 시체는 외곽지대에 전시되었다.
뮌스터 참사 이후 얀 반 바텐부르크와 다비드 요리스 같은 인물들도 북부 재세례파를 이끌
었지만 누구보다도 차세대 지도자는 메노 시몬스였다.
메노 시몬스 : 1496년에 태어난 메노 시몬스는 1524년에 가톨릭 사제로 서품되었고 비트마
르숨 근처에서 교구를 돌보았다. 처음에는 성찬의 성례주의 입장으로 기울었다가 점차 호프만
의 재세례파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536년까지 가톨릭 사제직을 버리지 않았
다. 그가 접촉한 사람들은 비-뮌스터 계열의 평화주의 재세례파였다(필립스 형제). 그는 1530
년 한 재세례파의 죽음을 보고 유아세례의 성서적 근거를 조사한 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
다고 말했다. 하지만 1535년에 뮌스터 왕국에 대해서는 반대 설교를 했다. 그리고 1536년 1
월 오베 필립스에게 세례를 받고 한 여인과 결혼하여 두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낳고 죽을 때까
지(1561) 같이 살았다. 그는 1537년에 장로가 되어 흩어진 멜키오르파를 재조직하는 사명을
시작했다. 1542년에 당국은 그의 목에 100길더의 상금을 내걸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결코
배반당하거나 체포당하지 않았다. 메노 시몬스는 분명 뮌스터 계열은 아니지만 호프만의 재세
례파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죽기 까지 호프만의 . 기독론(하늘의 육체)을 수용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 권세에 대한 호프만의 전통에 서 있다.
북독과 화란 재세례파는 멜키오르 호프만의 입장에 근거하며 그 기원에 스위스 재세례파의
역할은 없다. 오히려 남독 재세례파의 역할이 호프만 자신의 접촉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정된
다.
재세례파의 정체성
이렇게 서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집단들을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서로 간의 많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가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이듯이 재세례파들 사이에 이와 유사한 핵심 요소가 발견될 수 있는가? 후브마이어의 <기독교 요리문답>(1526)은 재세례파의 조직신학 책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기원과 지역과 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톨릭도 아니요 프로테스탄트도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교회”개념을 성도의 교통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재세례파의 교회는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세례, 출교, 성찬, 물질 나눔이라는 4가지 표지를 갖는다.
재세례파는 내면(성령) 세례와 외면(물) 세례를 구분한다. 물세례는 신앙으로 회개에 이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에게의 복종, 그리스도와 형제자매를 위한 고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이동을 의미했다. 이렇게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이 “형제와 화해하기를 거부하거나 죄를 멈추는 일을 거부할”경우, 그는 출교를 당한다. 재세례파의 성찬 개념은 츠빙글리의 입장에 가까운 기념설이다. 이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 대해 빚진 사랑의 공적 징표와 증거”로서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서로를 위해 자신들의 살과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 이들은 철저히 성찬의 의미를 수평적으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새 교회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수립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서로의 물질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재세례파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sola scriptura를 공유한다. 후브마이어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권면하고 훈계하며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그의 거룩한 말씀의 빛과 광명에 의해서만 항해하는 법을 안다.”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도 인정한다. 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다. 재세례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영도 중요했다. 어쩌면 재세례파는 “성서만으로”보다는 “성서와 영이 함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과 문자와의 관계에서 이들은 자주 문자를 비약적으로 해석한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얻는 구원의 문제는 상당부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과 같으나 구원의 결과인 “보이는 열매”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로 하여금 후기 중세 전통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인간의 철저한 부패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 행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은 철저한 제자도의 삶을 추구하는 의지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믿었다. 이것은 흔히 성령시대를 예언한 중세 전통과 관련한다(일례로 피오레의 요하킴). 따라서 성서의 예언서 연구와 성령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에게서 두드러진다. 이따금 꿈과 환상을 통한 직접 계시의 거짓 논란과 부작용도 있었지만 재세례파는 성령의 계시적 능력에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위험성과 동시에 또 다른 영성을 보여주었다 사실 성서의 . 권위는 예언서를 예외로 만들 수 없다.
이와 같이 정리될 수 있는 재세례파의 신학적 정체성은 위에서 말한 세 유형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약간은, 때로는 심하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재세례파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형태로 고정되었다. 먼저 스위스 형제단은 그레벨 그룹에서 정치 신학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후브마이어를 거쳐 쉴라이트하임 신앙고백에 이르면서 분명한 흐름을 유지했다. 다음으로 남독-오스트리아 재세례파는 초반 덴크와 후트가 뮌처의 영향 하에서 운동을 이끌었으나 농민전쟁의 실패 이후 모라비아의 후터파가 스위스 형제단과 유사한 재세례파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마지막으로 북독-네덜란드 재세례파 역시 호프만의 강한 영향력에서 출발하여 끔찍한 뮌스터 사건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후 메노 시몬스와 그 후계자들인 메노파에 의해 재세례파의 정체성이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16세기에 루터파, 개혁파, 앵글리칸으로 구분되듯이, 재세례파 사회는 스위스 재세례파, 후터파, 메노파로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한계
취리히가 맨 먼저 종교개혁에 가담한 이후 연이어 베른, 바젤, 잔크트 갈렌이 종교개혁으로 돌아섰다. 1528년 1월 베른은 신학논쟁을 열어 진로를 결정하기로 하고 가톨릭 측과 종교개혁 측 사람들을 초청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처와 카피토,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석했고 파렐도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는 토론에서 승리한 종교개혁의 입장이 베른 당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뒤이어 잔크트 갈렌이 개혁 측으로 넘어왔고 이듬해 바젤, 비엘,샤프하우젠이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했다.
츠빙글리의 꿈은 컸다. 그는 전 스위스의 개혁을 이루고 합스부르크가를 몰락시키는 것이었
다. 이런 개신교 세력 간의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 때문에 그는 1529년 마르부르크로 가서 루
터와 성찬 문제를 조율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간략하고 분명한 요점>(1531)이
다시 한 번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1531년 10월 가톨릭 주
들의 선제공격에 카펠에서 취리히 군대는 패배했고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말았다. 카펠의 패배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은 서로의 경계선을 긋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불링거(1504-1575)였다. 브렘가르텐에서 태어난
그 역시 인문주의 출신으로 교회 수석 목사가 되었을 때 나이는 25세였다. 불링거의 여러 사
역 가운데 가장 탁월한 공로는 성찬 문제로 분열된 개혁파 교회들을 하나로 묶은 일이었다.
1536년 불링거는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인 미코니우스가 작성한 제 1 스위스 신
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다른 도시들을 부추겼는바, 취리히, 베른, 뮬루즈, 스트라스부르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 신앙고백은 성찬의 수평적인 해석으로 치우쳤던 츠빙글리의 상징설 내지
기념설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불링거는 제네바의 칼뱅과 오랜 기간 타협한 끝
에 1549년 <취리히 협정>Consensus Tigurinus에 이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불링거는 취리
히뿐만 아니라 스위스 전체와 나아가 나라 밖에까지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바, 그의 뛰
어난 또 하나의 공헌은 1560년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일이다. 이 신앙고백은 독
일의 팔츠(1566),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1566), 헝가리의 데브레첸(1567), 폴란드의 센도미르
(1570)에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제네바의 칼뱅의 등장으로 빛이 가린다.
재세례파의 정체성
이렇게 서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집단들을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서로 간의 많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가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이듯이 재세례파들 사이에 이와 유사한 핵심 요소가 발견될 수 있는가? 후브마이어의 <기독교 요리문답>(1526)은 재세례파의 조직신학 책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기원과 지역과 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톨릭도 아니요 프로테스탄트도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교회”개념을 성도의 교통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재세례파의 교회는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세례, 출교, 성찬, 물질 나눔이라는 4가지 표지를 갖는다.
재세례파는 내면(성령) 세례와 외면(물) 세례를 구분한다. 물세례는 신앙으로 회개에 이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에게의 복종, 그리스도와 형제자매를 위한 고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이동을 의미했다. 이렇게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이 “형제와 화해하기를 거부하거나 죄를 멈추는 일을 거부할”경우, 그는 출교를 당한다. 재세례파의 성찬 개념은 츠빙글리의 입장에 가까운 기념설이다. 이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 대해 빚진 사랑의 공적 징표와 증거”로서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서로를 위해 자신들의 살과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 이들은 철저히 성찬의 의미를 수평적으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새 교회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수립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서로의 물질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재세례파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sola scriptura를 공유한다. 후브마이어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권면하고 훈계하며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그의 거룩한 말씀의 빛과 광명에 의해서만 항해하는 법을 안다.”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도 인정한다. 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다. 재세례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영도 중요했다. 어쩌면 재세례파는 “성서만으로”보다는 “성서와 영이 함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과 문자와의 관계에서 이들은 자주 문자를 비약적으로 해석한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얻는 구원의 문제는 상당부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과 같으나 구원의 결과인 “보이는 열매”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로 하여금 후기 중세 전통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인간의 철저한 부패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 행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은 철저한 제자도의 삶을 추구하는 의지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믿었다. 이것은 흔히 성령시대를 예언한 중세 전통과 관련한다(일례로 피오레의 요하킴). 따라서 성서의 예언서 연구와 성령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에게서 두드러진다. 이따금 꿈과 환상을 통한 직접 계시의 거짓 논란과 부작용도 있었지만 재세례파는 성령의 계시적 능력에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위험성과 동시에 또 다른 영성을 보여주었다 사실 성서의 . 권위는 예언서를 예외로 만들 수 없다.
이와 같이 정리될 수 있는 재세례파의 신학적 정체성은 위에서 말한 세 유형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약간은, 때로는 심하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재세례파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형태로 고정되었다. 먼저 스위스 형제단은 그레벨 그룹에서 정치 신학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후브마이어를 거쳐 쉴라이트하임 신앙고백에 이르면서 분명한 흐름을 유지했다. 다음으로 남독-오스트리아 재세례파는 초반 덴크와 후트가 뮌처의 영향 하에서 운동을 이끌었으나 농민전쟁의 실패 이후 모라비아의 후터파가 스위스 형제단과 유사한 재세례파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마지막으로 북독-네덜란드 재세례파 역시 호프만의 강한 영향력에서 출발하여 끔찍한 뮌스터 사건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후 메노 시몬스와 그 후계자들인 메노파에 의해 재세례파의 정체성이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16세기에 루터파, 개혁파, 앵글리칸으로 구분되듯이, 재세례파 사회는 스위스 재세례파, 후터파, 메노파로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①시민권 포기
②절대 평화주의
③세상사의 비참여(desengagement)
-정치와 경제
-자급자족, 교육 참여 하지 않는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쿠아드라투스)
-제 3의 인종
-복음적 급진주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반체제 인사였다.
-새로운 통치론(군주론)을 가르침
-산상설교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론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 나라의 통치와 반대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개혁파는 이중국적자(이중시민권자)이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한계
취리히가 맨 먼저 종교개혁에 가담한 이후 연이어 베른, 바젤, 잔크트 갈렌이 종교개혁으로 돌아섰다. 1528년 1월 베른은 신학논쟁을 열어 진로를 결정하기로 하고 가톨릭 측과 종교개혁 측 사람들을 초청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처와 카피토,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석했고 파렐도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는 토론에서 승리한 종교개혁의 입장이 베른 당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뒤이어 잔크트 갈렌이 개혁 측으로 넘어왔고 이듬해 바젤, 비엘,샤프하우젠이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했다.
츠빙글리의 꿈은 컸다. 그는 전 스위스의 개혁을 이루고 합스부르크가를 몰락시키는 것이었
다. 이런 개신교 세력 간의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 때문에 그는 1529년 마르부르크로 가서 루
터와 성찬 문제를 조율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간략하고 분명한 요점>(1531)이
다시 한 번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1531년 10월 가톨릭 주
들의 선제공격에 카펠에서 취리히 군대는 패배했고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말았다. 카펠의 패배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은 서로의 경계선을 긋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불링거(1504-1575)였다. 브렘가르텐에서 태어난
그 역시 인문주의 출신으로 교회 수석 목사가 되었을 때 나이는 25세였다. 불링거의 여러 사
역 가운데 가장 탁월한 공로는 성찬 문제로 분열된 개혁파 교회들을 하나로 묶은 일이었다.
1536년 불링거는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인 미코니우스가 작성한 제 1 스위스 신
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다른 도시들을 부추겼는바, 취리히, 베른, 뮬루즈, 스트라스부르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 신앙고백은 성찬의 수평적인 해석으로 치우쳤던 츠빙글리의 상징설 내지
기념설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불링거는 제네바의 칼뱅과 오랜 기간 타협한 끝
에 1549년 <취리히 협정>Consensus Tigurinus에 이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불링거는 취리
히뿐만 아니라 스위스 전체와 나아가 나라 밖에까지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바, 그의 뛰
어난 또 하나의 공헌은 1560년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일이다. 이 신앙고백은 독
일의 팔츠(1566),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1566), 헝가리의 데브레첸(1567), 폴란드의 센도미르
(1570)에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제네바의 칼뱅의 등장으로 빛이 가린다.
*개혁의 4대 흐름
①루터: 탈속 온건
-
②뮌처: 재속 급진
-불법적 개혁
③츠빙글리/칼뱅[개혁파]: 재속 온건
-근대를 장악하는 주도적 세력
④재세례파: 탈속 급진
-
VII. 장 칼뱅
*COR(Calvini Opera denuo Recognita)시리즈
-기독교강요, 주석, 교회관련 문헌, 교육과 논쟁서, 설교집, 서간집, 잡서.
*역사적 칼뱅 연구와 초기 칼뱅의 중요성
①유년기의 모친 사별:
-칼뱅은 자신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②몽테귀 콜레주의 영향:
-칼뱅은 루터와 같은 영적 위기를 경험했는가?
-신학 입문을 위한 가장 보수적인 학교
-에라스므스, 라블레, 로욜라
-아버지와 성직자와의 싸움으로 인한 아버지와 형의 개죽음
③회심 Conversio subita:
-칼뱅의 회심 내용은 무엇인가?
-시편 주석 서문(1557년): 갑작스럽게 회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칼뱅이 점진적으로 회심했다고 이해한다.
*인문주의 형성과 결실
①제네카의 관용론 주석(1532)-<칼작 I>
-에라스무스의 영향
-세나카를 선택
*신학자(독학) 칼뱅
①프시코파니키아(1534/1542)-<칼작 II>
-영혼불멸에 대한 논문
-헤브라이즘의 계시 이해
②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칼작 II>
③기독교강요(1536, 초판)
-에라스므스의 엔키리디온(그리스도의 삶)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기독교의 요점이 무엇인가?
-교리로 보았다.
-일종의 출사표.
-신민정부이론(국가론)
*절충주의의 수용
-문명과 계시의 재융합
-방텔, 쇼뉘, 바우스마, 코트레
칼뱅의 생애는 도시 이름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 도시들은 상당부분 칼뱅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곳들이 아니었다. 이미 태어난다는 것이 내 의지와 관계없으며 그것은 재능과 더불어 풍토적인 요소를 물려받는 일이다. 피카르디의 누아용. 그것은 모종의 기질을 타고 남을 의미한다. 칼뱅의 파리-오를레앙에서의 학업은 모두 부친의 신분 상승 욕구 및 자식의 미래에 대한 교육적인 포석과 관련된다. 사제로서의 생애를 위한 신학 예비과정, 고위직이 아니고서는 형편없이 가난할 수 있는 성직자의 길에서 경제적으로 득을 볼 수 있는 법학으로의 전환은 이 도시들이 칼뱅에게 주는 의미이다. 물론 칼뱅이 시민법을 공부하기 위해 택한 부르주는 교회법의 오를레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칼뱅이 부친의 죽음에 의해 해방된 감정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곳은 다시 파리다. 그의 두 번째 파리 체류는 인문주의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택한이 도시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회심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고국을 떠나게 했다. 회심—개종이 아니다—은 박해를 야기한다. 모든 종교개혁은 “회개하라”앞에 무심한 지도층과 관련한다. 칼뱅의 도피 과정에 나타난 여러 지역들—푸아티에, 앙굴렘, 네락, 등—은 무슨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네바는 칼뱅에게 영원히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제네바가 칼뱅을 확고히 붙들기 위해선 개혁자의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 체류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두 도시 모두 칼뱅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곳이 아니다. 제네바 첫 번째 체류가 파렐의 강권에 의해서라면, 스트라스부르의 부름인 “요나의 소명”은 부처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칼뱅이 본래 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을 꾸리기 위해 선택했던 스트라스부르는 진정한 목회적인 소명의 장소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제네바의 두 번째 부름은 개혁 세력들의 집요한 요청의 결과다. 이처럼 칼뱅은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된 개혁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아마 그가 처음 자유의 느낌을 받은 것은 부친의 죽음이 가져오는 학문과 직업 선택권과 관련되리라. 더 이상 사제도, 법률가도 그의 미래를 운명으로 묶어놓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목표는 에라스무스, 아니 그보다 뷔데와 같은 인문주의 학자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하지만 그가 결정한 최초의 학문적 성과물은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그의 “돌연한 회심”은 그 실패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이것은 그를 더욱 수동적인 인물로 만들었으리라. 그러나 비록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모친을 따라 가톨릭 영성에 젖었으며, 부친의 계획 속에서 학업을 했으며, 친구와 동료들의 강청에 의해 개혁자의 길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는 또한 매순간 자신의 의지의 선택 앞에 서야 했다. 그것은 신앙을 통한 자유의 새로운 이해로만 가능했다.
성장과 성직자 예비 교육
장 칼뱅Jea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 주교가 있는 도시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은 원래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사공의 아들로서 퐁-레베크 마을에서 살다가 사공의 노를 버리고 사무직의 붓을 들기 위해 누아용으로 이주하여 시청서기가 되었고 곧 주교와 교구성직자의 사업담당자가 됨으로서 시민계급에 끼어들었다(1497). 그의 어머니, 잔 르프랑은 누아용 시의회의원이 될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 중산층의 딸로서 일찍 세상을 떴다. 어린 시절 모친 상실은 칼뱅에게 생각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제라르 코뱅의 아들들은 누아용 대성당의 그늘에서 성장하고 주교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교회경력이 있어 성당신부에게 지불되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수입으로 그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장남 샤를르의 뒤를 이어 칼뱅도 11살 때부터 성직록 혜택을 받았다. 르네상스시기에 가족의 사회적 상승은, 흔히 일종의 장학금 제도의 역할을 하고 미래의 성직자들의 공부를 재정적으로 도왔던 성직록 제도를 거쳐 갔다. 장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523년 성직의 학업을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 파리의 라마르슈 콜레주에서 칼뱅은 “문법교사”이며, 불어사용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육학의 창건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마튀랭 코르디에를 만났으나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고, 곧 금욕주의와 정통신앙으로 알려진 몽테귀 콜레주에 등록하였다. 그는 1528년에 그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이는 문학 석사 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서 4~5년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아마도 루터파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파리에 오던 해(1523)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 장 발리에르는 이단의 혐의를 받고 화형을 당했다. 이듬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는 “밤의 환영의 형식을 한 대화”란 책에서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525년 메스Mets에서는 양털 소모직공이면서 평신도 설교자인 장 르클레르가 죽임을 당했다. 1526년 그레브 드 쟉크 파반느 광장에서의 사형집행은 모Meaux의 복음주의 운동에 아주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몽테귀 콜레주 시절의 칼뱅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 학교는 데보티오모데르나를 따랐으나 지나친 금욕주의와 스콜라주의에의 집착 때문에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학업 생활은 한나절의 공부와 아침 4시에 시작해서 밤 7시나 8시에야 끝나는 종교 일과와 더불어 빡빡했다. 칼뱅은 학교의 창설자였던 장 스탕동크의 꿈을 따라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나 인문주의를 접할 수는 없었다. 선생들은 “고대의 발견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위로하기는커녕 그것을 약화시킨다고 그에게 논증했다” 칼뱅은 롬바르드의 언설집에 근거한 신학 교육과 변증법을 배웠다. 선생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인 안토니오 코로넬 같이 명망 있는 선생이 있었다. 이곳에서 칼뱅은 고대 교부들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베르나르,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알았다. 아마도 그는 존 메어의 복음서 주석을 통해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유명론 학파의 논리학의 중요성을 강하게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사물의 언어 및 개념화와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예비 언어학의 형태였던 논리학 말이다.
데보티오모데르나의 <그리스도의 모방>은 칼뱅을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도피하려는 내면적 묵상으로 이끌었다. 이 시기는 육체의 경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가 “불쌍한 죄인들”에게로 향한다고 여겨지던 실증적 모습의 종교 실천의 시기다. 은총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스콜라 교리의 기초 위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의의 창조자가 될 수 있었다. 칼뱅은 매우 일찍 자신의 정체성의 와해를 겪고 혼란을 느꼈으나, 그래도 그것을 그나마 길게 끌어갔고 비교적 확신 내지는 확실성으로 일관했던 신자였다. 이런 경건은, 마치 항상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듯이, 공로에 의해 하나님을 “인자하고 인정이 많은 분”으로 만들려고 애썼던 경건이요, 훗날 그가 고백하는 “교황제의 미신”이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하나님에 대한 섬김에 매우 전념했다.”하지만 그의 자유의지는 결국 선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초기 칼뱅에게서 또 하나의 루터를 본다.
유명론의 낙관론적인 가르침은 칼뱅에게 “양심의 평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가 가르침 받은 것과 그 가르침대로 사는 방식 사이에서 모종의 골절 상태를 느꼈다. 훗날 하나님의 관용을 얻게 된 그는 인간들의 방식으로 이 관용을 매입하고자 했던 몽테귀의 교육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다. 결국, 루터와 칼뱅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정체성을 보는 이 불안에서 서로 만난다 안정 심연 사이의 정체성 비애 . / , /회심 사이에 있는 자아의 수수께끼에서 서로 만난다.
인문주의자 칼뱅
그는 철학 공부를 끝마치고 난 후, 그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 대학으로 가기위해 파리 대학을 떠났다. 칼뱅을 성직자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이제 다시 아버지에 의해 “법률”공부로 돌아섰다. 왜냐하면 “법학을 하는 자에게 법학은 부를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를레앙에서 그는 “프랑스 최고의 법학자”였던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강의를 들었다. 오를레앙 교구의 보좌 신부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루터에 반대했다. 칼뱅은 비록 그가 시민법을 공부하기 위해 부르주로 가서 알치아티의 강의를 듣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를레앙의 법학 선생의 편을 든다. 하지만 변화는 생각보다 크다.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강의에서 알치아티의 강의로 옮긴다는 것은 중세적 법 개념에서부터, 로마법을 역사의 한가운데 두고 문헌학으로 고전을 연구하면서 인문주의 방법론에 대한 위치를 설정해 주는 개념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칼뱅에게 오를레앙의 또 다른 의미는 볼마르와의 만남이다. 당시 칼뱅은 교회에 충실한 선생들에 대한 충성과 인문주의 개혁 사이에서 화해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와 우정을 교환한 인물들인 니콜라 뒤슈맹,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코낭 등은 루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칼뱅이 오를레앙에서 그리스어를 배웠던 멜키오르 볼마르는 명백히 루터 사상의 지지자였다. 그는 칼뱅이 파리에서 접촉한 바 있는 사촌 올리베탕의 생각에 가까웠다. 칼뱅이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볼마르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수년 동안 칼뱅은 새로운 개혁 입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선 침묵했다.
칼뱅은 부르주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부친의 임종(1531년 5월 26일)이 그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라르 코뱅은 이미 2년 전에 재정적인 문제로 성당 참사회에 의해 파문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죽었다. 가족은 고인이 교회 장지에 묻힐 수 있도록 성당 책임자들과 비굴한 조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칼뱅은 세속 권세와 영적인 권세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고집스런 처신을 경험해야 했다. 부친이 죽자 칼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고전문학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
론 1533년 여름에 그의 이름이 누아용 교회의 성직록 수혜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학 공부도 독학으로 계속 하고 있었다. 칼뱅은 법학, 특히 교회법 공부를 통해서 신학을 접했다. 아무튼 부친의 죽음은 자유로운 학문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칼뱅의 문학연구의 첫 번째 결실은 1532년 4월에 나타났다. 그것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작품은 “진지한 학생의 썩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 발라, 에라스무스, 뷔데 등이 사용했던 방법을 빌어 그는 그의 독특한 문체나 박식함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개성과 독창성도 나타내 보였다. 썩 좋은 작품은 아니었을지라도 <관용론 주석>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칼뱅은 에라스무스를 뷔데 다음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를 다소간 폄하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교적인 문제들을 주요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칼뱅에게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533년부터다. 그해 만성절 날 새 학년을 시작하는 개학식에서, 칼뱅의 친구인 니콜라 콥은 총장으로서의 강연 대신 팔복에 대한 일종의 설교를 대담하게 선포하였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영감을 받아 그는 종교개혁의 귀중한 몇몇 주제를 그곳에 접근시켰는바 특히 믿음에 의한 칭의를 주장했다. 그것은 참으로 그 당시의 상식을 뛰어 넘은 것이었다. 왕이 없는 틈을 이용해 의회는 이 대학 총장을 기소했다 콥은 외국으로 도망해야 했다 그리고 콥과 같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칼뱅은 그의 친구이자 클레의 주임사제 루이 뒤 티에의 집이 있는 앙굴렘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관용론 주석을 쓴 이 젊은 작가가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콥의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가담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칼뱅이 1533년 만성절의 대학연설문을 작성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주장은, 오랜 동안 확실한 사실로 여겨오다가 그 후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의심에 붙여졌었는데 한때 스트라스부르의 역사가인 장 로트의 연구 덕택으로 새로운 옹호자들을 얻게 된 이 입장은 최근 또다시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회심과 도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 출판된 뒤, 이듬해 파리 대학 총장이 취임할 때까지 칼뱅의 행적은 잠시 모호하다. 아마도 오를레앙-파리-누아용을 오가면서 회심을 경험했으리라.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을 읽고 또 읽었다. 칼뱅이 앙굴렘으로 도망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종교개혁의 대의명분에 가담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1533년 11월 그는 적어도 르페브르 데타플이 실행하고자 노력했던 개혁주의에 가담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칼뱅이 말하는 돌연한 회심subita coversio(시편주석 서문, 1557)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뱅이 르페브르적인 개혁주의에서 솔직한 개혁적 태도로 옮겨간 시기를 1533년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개연성 있는 가설이다. 왜냐하면 1534년 봄, 그는 그가 태어난 도시에 가서 그 때까지 누리고 있었던 교회의 모든 혜택을 다 포기하고 성직자의 신분에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신학 예비과정으로서의 철학, 부친의 의지변화에 따른 법학,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문학을 차례로 공부한 인문주의자 칼뱅은 회심을 경험하고 난 뒤, 교황청의 성직자 신분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연구한다. 그의 첫 번째 신학 작품은 <영혼 수면설 논박>Psychopannychia(1534)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영혼이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영혼들은 깨어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논증해 보이고자 하였다. 그가 이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미사를 반대하는 격문들이 파리와 앙보아즈에 나붙었고, 박해가 예상되자 칼뱅은 1535년 초에 바젤로 황망히 피난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바젤에서다. 그는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1년간의 노력 끝에 그의 주저서가 될 책의 초판을 출판했다(1536년 3월). 라틴어로 된 초판은 “프랑스 왕에게”보내는 변증적인 편지로 시작되고 있으며, 6장—율법(십계명), 신앙(사도신경), 기도(주기도문), 성례(세례와 성찬), 그릇된 성례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으로 된 일종의 신학개요로서 루터의 <소 요리문답>에서 착상을 얻은 구조이다.
<기독교강요>는 출판되자마자, 그 저자를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 선구자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 작품을 손질하고 또 덧붙여 나가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판은 1559년(불어 판은 1560)에 나왔는데 이것은 더 이상 처음의 개요적인 것이 아니었다. 최종판은 4권 80장으로 나뉘어져 신론(창조주시며 세상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관련됨), 성령론(성령과 관련됨,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 안에서 성령의 활동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열매와 관련됨), 그리고 교회론(교회 및 성례와 관련됨), 등의 문제들을 연속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기독교강요>의 편집을 끝마친 후, 칼뱅은 이탈리아의 페라라를 여행한 뒤 조국을 완전히 떠나기 위해 누아용으로 가서 소유하고 있었던 땅들을 처분한 후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전쟁 통에 제네바를 경유해야 했던 그는 . 레만 호의 도시에서 기욤 파렐에게 붙들렸다(1536년 7월). 그는 파렐의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무시무시한 간청”을 듣고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초기 사역들
제네바에서 칼뱅은 자신이 맡은 “성경강사”의 직무 외에도 파렐과 협력하여 4가지 조항(성찬, 찬송, 교육, 결혼 법)을 세심하게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제네바 사람들이 여기에 서명하도록 했다. 비록 제네바 시의회가 1536년 5월 21일 종교개혁의 결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련의 노력들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제네바 시는 교회가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권리들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빼앗기게 되지나 않을까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공공의 미풍양속에 대한 감독권을 확보해 두려고 고집하였다. 한편 시민 계급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 신앙고백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는바, 어떤 이들은 로마교회에 여전히 충성하고 있기도 했고, 또한 어떤 이들은 잘못 이해된 복음의 자유를 내세워서 모든 교회적 치리에 맞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네바에 도착한지 1년 후, 칼뱅은 그의 동료와 함께 위협적인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1년간 불거진 갈등은 1538년 부활절 개혁자들의 성찬 집행 거부로 극에 달했다. 칼뱅과 그의 동료들은 신앙고백서의 반대자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던 터에, 시의회는 영성체란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결정은 정치당국이 종교업무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결정은 세속적인 권력을 교회의 스승으로 삼게 만드는 베른의 개혁 방식이었다. 결국 칼뱅과 파렐은 그들의 동료 코로와 함께 면직되었고, 또 3일 만에 제네바를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파렐은 그 때 뇌샤텔로 가서 정착하여 거기서 죽을 때까지(1565) 매우 활동적인 사역을 수행
하였으며, 칼뱅은 다시 공부하기 위해 바젤로 가서 자리 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나의 소명”을 생각하게 하는 마르틴 부처의 초청으로 그는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스트라스부르로 가야 했다.
1538년 9월, 칼뱅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스트라스부르에 피신해 있었던 프랑스인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그가 체류한 3년은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도시의 종교개혁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중에서 예배 모범과 교회론 분야에서 더욱 그랬다. 특히 그는 부처에게서 훗날의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네 가지 직분에 대한 교리를 빌려왔다.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이 지지를 누리면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그의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프랑스교회의 목사로서의 직무들 이외에 그는 장 쉬튀름 학장 밑에서 개교되었던 고등교육기관에서 성경주석교수의 직책을 담당했으며 또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대표자로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가톨릭과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황제의 선동으로 종교통일을 수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칼뱅은 저술 활동분야에 있어서 남달리 풍부한 재질을 나타내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 대한 두 번째 라틴어판을 준비했고(1539) 또 프랑스어 초판을 공들여 완성하였다(1541). 그는 일련의 긴 주석 작업을 시작하면서 빼어난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로 떠난 이후 제네바 원로원과 제네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떠났던 자들을 다시 로마교회의 품안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고자 한 추기경에게 답하면서 칼뱅은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편지>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신랄한 작품을 작성하였다 종교개혁에 가담한 자들 . 사이에 성찬문제가 일으킨 분열문제, 그리고 마르부르크회의(1529)에서 극복하지 못했던 이 분열문제로 근심하던 중, 칼뱅은 <성만찬 소고>를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로마교의 교리와 정면대립하면서 또한 츠빙글리의 개념에 관한 것만큼 루터의 개념에 관해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성례(은연중에 성찬을 가리킴)를 믿음으로 받으면서…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고유한 실체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자가된다”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제네바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파란이 일고 있었다. 추방된 종교개혁자들의 지지자들로서, 기욤 파렐을 기념하고자 명명된 기욤파들은 사법 임명한 새로운 목사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미래를 위해 이러한 위험스러운 논쟁들에 대해 멀리서 매우 안타까워하던 칼뱅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제네바 사람들을 조정하였다. 그는 그들의 교회 안에 평화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복음의 대의명분을 옹호할 책임을 맡은 목사들이 베른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사실 베른 사람들은 종교개혁에 그들 스스로 가담한 제네바에 자기네
들의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기욤파들에게 유리한 선거로 정부를 새롭게 구성한 다음날, 소 의회는 이 상황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뱅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주민의 언어를 비록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라도 거기서 행복했던 프랑스 개혁자는 그의 첫 번째 교구였던 제네바의 난제들과 조금도 다시 관계를 맺고 싶지가 않았다. 제네바 사람들의 요청이 점차 간곡해지자,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임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임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슬픔과 눈물, 큰 염려와 비판과 함께”3년 동안 추방되었던 그 도시에 돌아갈 것을 승낙했다.
제네바 목회자
1541년 9월, 칼뱅은 교회 안에 약간의 질서를 세우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려는 의도를 가지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2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생을 여기서 끝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오늘날 몇몇 중상모략자들, 특히 한 예로써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는 그가 완전한 독재권을 행사하려 했다고 험구하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중상모략이기도 하다. 칼뱅은 그의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시 의회에 속해 있지 않은 이방인으로 제네바에 있었다. 시민권은 그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지 18년, 그리고 그가 죽기 5년 전인 1559년에야 비로소 그에게 주어졌다. 그의 권위는 그가 “영혼의 목자”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곧 날카로운 지성, 비상한 일처리능력, 모든 것을 입증하려는 집요함, 그리고 오늘날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찬란한 명성 등을 갖추었던 목사였다는 사실 말이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한 사역은 그가 이해한 계시를 문명 속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설교와 주석 작업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교회 조직과 신학논쟁, 공화국 수립과 도시 복지, 조국교회에 목사 파송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연합 등등으로 분주했다. 그런데 그의 모든 교회 활동과 사회 활동이 전반적으로 성경계시에 근거했다. 그의 방대한 사역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보자.
1) 첫 번째는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법(1541)을 작성하여 오늘날 개혁교회 직분의 기초가 되는 4 직분 제도를 확립시켰다. 마르틴 부처에 영감을 받고 있는 이 교회법은 교회 직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또 “성례를 집행하는”임무를 띤 목사의 직분, “건전한 교리로 신자들을 가르치는”교사의 직분, 치리를 준수하도록 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장로의 직분 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 돌볼 책무를 맡고 있는 집사의 직분으로 나누었
다. 뿐만 아니라 칼뱅은 1542년에 신앙교육을 위한 <교리문답서>, <기도서>, <찬송가>를 마
련했다. 나아가 12명의 장로와 목사회 회원들로 구성된 교회재판소인 감독회를 만들었다.
칼뱅은 자신이 수립하는 새 교회를 위협하는 여러 신앙 양태들을 살피고 그들을 때로는 권
면하고 때로는 논박한다.
첫 번째 유형은 복음에 가담하고서도 여전히 로마교회의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그는
이미 1537년에 이 우유부단한 사람들에게 두 편의 공개편지를 썼는바, 첫 번째 편지는 평신
도들에게 “교황제도의 미신과 그 의식을 어떻게 피하고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가”를 지적했고.
두 번째 것은 성직자에게 “그리스도인의 직무는 교황교회가 주는 성직록을 받아 관리해야 할
것인가 또는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이 서신들이 미사에 집착하는 듯
보이면서도 복음적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입장에서 오는 위험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
에, 다시 한 번 칼뱅은 1543년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자가 교황주의자들 틈에 끼어 있을 때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소고>를 작성했다. 그가 거기서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권고는 다음
과 같이 요약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 자신의 신
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바벨론에서 나와야 한다. 그가 피할 수만 있다면 모
든 “우상숭배”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권면으로 프랑스에서 수많은 복음의
지지자들을 동요케 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순교자로 부름 받은 것도 아니며, 억지로 추
방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였는데 칼뱅은 이들에게 <니고데
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이라는 책에서 조금도 양보함 없이 응수하였다. 그는 거기서 자신
들의 태도를 옹호하기 위해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본보기를 내세우는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복 “
음주의자들”을 꾸짖었다.
새 교회를 위협하는 두 번째 집단 유형은 재세례파이다. 칼뱅은 그의 첫 신학 작품에서부터
영혼이 잔다고 말하는 재세례파를 논박했으며, 프랑수아 1세에게 복음주의 진영을 변증할 때
는 재세례파를 로마가톨릭교회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위험적인 요소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1544년 재세례파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지적하는 <재세례파의 오류에 대해 신자들을 무장시키
기 위한 간략한 교훈>을 썼다. 비록 재세례파가 성경을 인정하고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
지만 sola gratia의 원리는 따르지 않았다. 칼뱅은 이미 츠빙글리가 해놓은 비판을 상당히 보
충해주었다. 특히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말씀과 성례의 순서 바뀜을 통해 설명했다. 본래 말씀
이 성례에 앞서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처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공동체에서
는 성례가 말씀을 앞선다는 것이다.
교회에 위협적인 세 번째 유형은 심령주의 리베르탱이다. 코팽 드 릴이라는 사람에 의해 창
설되었으며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심령주의 리베르탱”이라는 종파는 프
랑스 종교개혁에서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범신론적이고 도덕폐기주의적인 이 종파는 모
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났으며 또 모든 것이 성령의 발현이기 때문에 선과 악 사이의 구
별이란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칼뱅은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여겼다. 그는 두 소책자,
<심령주의라고 하는 리베르탱의 광신적이고도 광란적이 이 종파에 대한 반박>(1545)과 이 종
파의 앞잡이인 <코르들리에에 대한 논박>(1547)을 통해, 복음에 가담한 자기 동족들에게 그들
이 갖지 못한 교리적인 통일성을 조금씩 그들에게 부여하는데 공헌하였다.
칼뱅은 이렇게 새 교회에 위협적인 요소들을 지적하고 논박하는 한편, 이미 세워진 다른 프
로테스탄트 교회들과의 연합을 꾀하면서 동시에 조국 프랑스에 개혁교회를 조직한다.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와 함께 수년간 교섭과 대화를 벌인 끝에 그는 1549년 <취리히
협약>을 결말짓는데 성공했다. 이 문서는 26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체설과 루터교
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영적 임재설을 확고히 한다. 또한 그는 1548년부터 1553년까지 그는
일련의 편지들을 통해 영국 국교도들과도 접촉을 갖고 영국의 국교감독제를 존중하는 교회개
혁안을 제시했다. 나아가 베스트팔과 결실 없는 논쟁을 벌인 다음날인 1557년, 칼뱅은 마침내
루터의 후계자들과 담판을 시작하였다. 독일연방국가내에서 여기 저기 여행한 바 있는 데오도
르 드 베자와 기욤 파렐의 알선으로 그는 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성찬문제를 두고 토론 상대
자와 합의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불행히도 이러한 거동은 모두 다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제네바의 개혁자가 일치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을 입증하고 있다.
1555년부터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은 이전에 단순히 “심겨져”있기만 하던 그들의 교회를
“세워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칼뱅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조직하기 위해 설교자들을
파송했다. 칼뱅에게 “교사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교회들에게 그가 파견한 자들은 대부분
망명자들이었다. 이들은 생명을 내걸고 그들의 조국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명령에 완전히 헌신
하였다. 결코 적지 않은 수(1555년에서 1562년까지 제네바는 88명의 목사들을 보냈다)가 교
회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처음으로 대회제도를 도입했다. 치리에 관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57년에 푸아티에에서 목회자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은 현안의 몇 가지 문제들을 전교회
들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타결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프랑수아 드 모렐 목사의
주제하여 1559년 5월 첫 번째 프랑스 개혁 교회 총회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앙리 2세에 대
해 압력을 가하고자 하였던 위그노파 귀족들의 선동으로 소집되었기 때문에 이 대회는 “세워
진”모든 교회들의 대표자들을 다 규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전 교회 중에서 72개의 교회가
참가하였다.
칼뱅은 파리총회의 소집을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신앙고백 초안을 보냈다. 이 초안은 35개 항목으로 작성되었는데
총회의 마지막 날에 겨우 파리에 도착하였고 프랑스 개혁교회의 대표자들이 다소간(사실은 중
요한) 수정을 가한 후 그들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신앙이 오직 성경계시의 토대위에 있
음을 매우 강력히 확언했던 본래의 첫째 조항이, 성경보다도 하나님의 속성과 창조 계시 등을
담은 5개 조항으로 대치되고 만 것이다. 1559년 신앙고백서는 약간의 수정을 감수한 후, 프랑
스 개혁교회 7차 총회(1571)에서 결정적인 형태—0개 조항이 들어있음—로 인정되고 이 총회
가 열린 도시를 기념하여 라 로셀 신앙고백이라고 명명되었다.
2) 칼뱅 사역의 두 번째 종류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이다. 칼뱅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두
왕국 이론을 받아들였다. 비록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구분이 되지만, 칼뱅은 법학자의
자격으로 제네바 공화국의 헌법을 만들어주는 한편, 교회의 치리권을 국가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그는 신앙의 원칙들에 일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성찬이 주어져야 한
다고 확신하고 또 하나님의 계명들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성찬식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많은 반발을 야기했다. 이 반발 세력 가운데는 교회와 국가의 도덕적
통제에 불만을 가졌던 정치세력인 “리베르탱 당”이 있었다. 이들은 아미 페랭과 프랑수아 파
브르라고 하는 자들로서 한 때 칼뱅을 제네바로 되돌아오게 하는데 대단히 큰 공헌을 한 적도
있었다. 감독회로부터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여러 번 징계를 받은 것에 격분하여
이들은 개혁을 포기하길 원치는 않았지만 이 도시에 설립되어 있는 그 엄격한 교회제도에 항
거하고 있었던 제네바 사람들을 자신들 주위에 규합하여 칼뱅을 등지고 돌아서 버렸다. “칼뱅
당”에 의해 “리베르탱 당”이라고 규정되었던 페랭의 지지자들은 1548년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1555년까지 제네바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의회가 칼뱅의 종교적 입장을 어떻게 수용했는가의 문제는 제네바 정치질
서의 형태를 파악하게 해준다. 칼뱅은 이미 1543년에 아가서의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
의 권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제네바 콜레주의 교장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을 고소하여 추방
시킨 바 있다. 그는 또한 1546년과 1551년에 각각 예정론을 거부한 피에르 아모와 제롬 볼섹
을 추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1553년에 그는 스페인 의사인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하였고 <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란 작품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했던 그의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제네바를 복음에 순종하는 도시로 변형시키고자 칼뱅이 기울여온 그의 노력들과 참된 신앙
을 보존하려는 그의 논쟁들은 자칫 제네바를 신정국가로 칼뱅을 신정정치가로 생각하게 하기
쉽다. 물론 위의 사건들 속에는 신정정치의 위험은 들어 있으나 칼뱅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국
가에 있는 교회의 대표자일 뿐이었다.
3) 칼뱅 사역의 세 번째 종류는 새로운 경제 질서의 수립이다.
칼뱅에게 독창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경제 윤리와 관련한다.1) 이 분야에서 칼뱅이
직접 활동한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복지와 관련된 활동을 만나게 될 것이
다. 따라서 그가 세운 경제 질서는 특히 설교와 주석을 통해 찾아져야 할 것이다.
칼뱅에게 있어 돈은 사람들 사이의 섭리적인 중재이며, 그들의 공동 노동의 열매이다. 개인
의 이익만의 추구는 하나님의 질서와 모든 사회생활을 파괴한다. 새로운 경제 질서와 관련된
문제는 이자 붙인 돈의 대여문제 이다. 칼뱅은 츠빙글리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정의
와 인간의 정의>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는 구약이 신약과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
님의 말씀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점에서 개혁파는 확실히 구약적이다.
이자 문제에 대한 검토는 칼뱅 이전과 이후의 행동적 차이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칼
뱅 자신이 고리대금업을 정죄했고 가난한 자들에게 대여해 줄 땐 이자 없이 해야 한다고 여겼
기 때문에, 어떤 개신교 신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들이 대등하다고 단언했다. 확실
히 양쪽 다 타인의 비참을 이용하는 고리대금업의 도덕적 정죄는 실제로 존속한다. 그러나 칼
뱅은, 생활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닌, 돈을 빌린 자가, 돈을 빌려준 자처럼, 빌린 돈
을 이용하게 하는 생산적 대여를 합법화했다. 화폐는 그 자체로서는 별 것 아니지만, 그것으
로 밀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서 생산력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고리대금은 꼭 돈으로만 이뤄
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밀이나 포도주로도 이루어진다. 칼뱅은 크리소스토무스의 구분을
철폐한다. 이 교부는 “밭을 빌려주어 세를 받는 자나 집세를 받는 자는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자와 유사하지 않은가? 결코 아니다.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계약의 내용이 아
니라, 고리대금이 될 수 있는 양태들이다. 여기에 문화적 변이가 있다. 종교가 재부의 획득을
신성화해주는 순간이다. 이것은 돈은 돈을 결코 낳지 못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라트
란 공의회의 결정사항—누군가가, 빌려주는 자 측의 노동이나 소비나 위험 없이, 자체로는 (가
축이나 밭 같은) 생산적인 것이 아닌 것을 사용하여 이득을 획득하고자 할 때, 그것은 고리대
금이다—을 파기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몇 %의 이율을 적용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잊어서
는 안 될 것은 칼뱅 자신이 사람의 법에 속한 이 경제적 자유를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평과
1) André Biéler, La pensée é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 Genève, 1961.
사랑에 종속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 이 사실을 그의 신명기 134번째 설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타국인에게 이자를 받아도 된다는 말씀(신 23:20)을 설교하면서 칼뱅은 이자 붙
는 대여 문제를 다룬다. 설교의 일부를 들어보자.
“나아가 대여 시 모든 이윤이 금지되는지가 질문됩니다. 이것은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
신의 상품을 선의로 미리 주고 값을 받지 못한 채 미뤄진다면, 분명 늦추는 사람이 자신에게 빌려
준 사람의 몫인 이자나 이윤을 물어 마땅하다’라고 주장될 수 있습니다. 이자가 법에 의해 정해진
경우 그것을 받는데 분명 양심의 가책을 안 느껴도 됩니다.
누군가가 내가 생활해야할 내 상품을 가져갔다 합시다. 내가 오늘 그것을 판다면, 나는 내일 판
매를 위해 또 사 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상품을 가져가서 내가 내 가계의 물건을 유지할 수
없도록 방해할 때 그는 내 목을 조르는 것입니다. 내 생활 토대가 여기 있습니다. 그가 일정 기일
후에 내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기일이 지나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면, 나와 내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은 그에게 기인합니다. 법원이 개입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의무
를 그릇되게 행한다 하더라도—왜냐하면 오늘날 법원은 사기꾼을 이롭게 하는 듯 보이기 때문—말입
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처럼 사기를 당할 경우, 그는 이자와 이윤을 취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
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비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했듯
이) 단어나 명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명심해야 할 것은 정책이 우리를 모두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법은
5%에 속할 것입니다. 위정자들이 어떤 경우에도 확실한 세율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일반법
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거래에 있어서 누구도 이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5%
를 받는 것이 언제나 적법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내게 왔을
때, 만일 내가 무슨 변명거리를 내세워서라도 그에게 무슨 대가를 취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도
적과 이자행위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궁핍한 가운데 있고 나는 그를 도와야 하는데
실제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누군가가 내게 와서 100량을 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200량의 가치가 있는 땅을 저당으
로 줍니다. 계약이 체결되고 나는 내 돈의 이윤을 위해 법원이 허용하는 것만을 받거나 아니면 아
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매매와 우선순위에 따른 증여(명의이전)가 이뤄집니다. 누군가
가 이렇게 할 때 내 손은 깨끗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무슨 말입니까? 내가 내 돈을 빌려주었고
그가 갚지 못했을 경우 나는 그 땅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긴 이윤은 내게 주어진 것입
니다. 내가 가난한 자의 목을 조르고 있고 그가 내 손아귀에 있을 때,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당신에
게 팔겠소.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관이 되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하게 할 때, 이 증여(명의이전)는
선한 뜻으로 이뤄질까요
그러므로 내가 말했듯이, 말에 머무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실(chose)을 바라보아
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강탈도 행해서 안 되며 우리에게 적법한 것 이상으로 타인의 재
산을 잡아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성결만이 있을 뿐인
것 같은 칭호들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적법하게 취할 이윤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방책들(invention)이 만들어졌는지요. 이것들은 끝까지 추론할 필요가 없습니
다. 관행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점에서 이윤을 만들 줄 아는 사
람들은 모두 위대한 성직자들입니다. 이들은 때로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때로 핑계거리를 찾아내지
만 결코 원리를 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인바, 모든 이자가 적법한지를 질문할 때, 이자라는 단어만을 붙들어
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그의 율법에서 보여주는 공평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듣습니다 남이 우리에게 . “해주기를 원하는 것만을 남에게 해주어라.”이것이 율법이
요 선지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공평과 정직을 지키고 황금률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될 것입니다.
이자들은 때로 큰 이윤에서보다 작은 이윤에서 더 정죄된다는 것을 주목합시다. 내가 이것을 말
하는 것은 누군가가 하찮은 핑계로 농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이것이 이상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대도가 좀도둑보다 더 중하게 봐야하지 않은가’그런데 이
것은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때로는 죄악이 큰 이윤보다 적은 이윤에서 더 중대하다고 말합니
다. 어째서 그런가요
여기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결코 궁핍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돈 문제를 갖고 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증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꼭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자기에게 적합한 땅을 사고자 합니다. 이것은 항상 부를 늘리고 증식하려는
탐욕 때문입니다. 그는 일 천량을 빌립니다. 이 금액의 이자는 다른 사람이 빌리는 네 개의 금화보
다 더 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개의 금화를 빌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아이들이 있으나
그들 입에 넣어 줄 빵이 없는 가난 한 사람들입니다. 이 네 개의 금화 가운데서 하나를 빌린다 해
도, 가난한 사람은 이자 돈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안 있어 갱신해야하기 때문입
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타인의 재산을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불의로, 잔인함으
로, 빼앗아오지 못하도록 금했음을 압시다. 우리는 우리의 이자와 강탈을 변명하고자 할 때 교활함
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언제나 본질에 머물러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
무에게도 금전적인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가 취하는 이윤이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고
그들의 자양분을 뼈까지 갉아먹는 세금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새 교회, 새 정치 질서, 새 경제 질서를 수립하는 칼뱅의 사역은 그 이름을 제네
바에 영원히 고정시키게 했다. 제네바의 변화야말로 칼뱅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놀라운 작
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는 제네바로 망명한 후 그 사실
을 알고 이 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곳은 “사도시대 이후 이 지상에서 결코 없었
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학교였다.”낙스의 찬사는 어쩌면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칼뱅은 제네바에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개혁파 사람”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달리
말해서 그의 계시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하나의 문명”을 이뤄낸 것이다. 이점에서 그는 인문
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VIII. 테오도루스 베자와 프랑스 종교전쟁
인문주의자에서 개혁의 길로
베자(베자)는 1519년 6월 24일 베즐레(Vézelay)에서 태어났다. 부친 피에르 드 베자는 법대
를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소유인 광산업을 계속한 듯하며 16세기 초에는 이미 소 귀족
계급에 속해 있었고 후엔 베즐레의 법관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 부르들로 드 베자 역시
같은 광산업을 하는 지방귀족 출신이었다.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디외도네(Dieudonné,
이것의 라틴어 이름이 테오도르임)는 3살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파리의
니콜라 삼촌 댁으로 보내졌다. 허약했던 베자는 그의 어린 시절을 파리 라틴가에서 보내다가
교육을 위해 삼촌 친척의 소개로 오를레앙의 볼마르의 손에 맡겨진다. 이것은 그의 나이 10세
가 되기 전인 1528년 12월 초의 일이며 이 결정은 베자에게 있어 중요한 결정이었다. 왜냐하
면 이 독일의 인문주의자이자 이미 루터의 복음사상에 젖어있던 헬라어 선생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훗날 그가 . 1528년 12월 9일 (볼마르의 집에 들어가던 날)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날을 나의 제 2 탄생일로 축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것을 보아 짐
작할 수 있다.
그는 1530년 볼마르가 부르주 대학으로 옮겨 갔을 때 그를 따라갔고 1534년 격문 사건으로
인한 박해 때문에 볼마르가 프랑스를 떠나던 1535년 5월까지 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나이
16살 되던 해(1535) 그는 어린 시절 당했던 이별보다 더 힘든 이별을 이 영적 아버지와 치러
야 했다. 볼마르가 튀빙겐으로 간 것이다. 자기 친구 메라Mairat는 스승을 따라 독일로 갔지
만 베자는 부친의 의사에 따라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베자의
관심은 고전 시(詩)에 있었기 때문에 4년 동안의 법학공부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쟝 드 당피
에르Jean de Dampierre를 중심으로 한 라틴시문인회(sodalitas)에 가입하여 시작(詩作)에도
열을 올렸다. 4년 뒤 20살에 베자는 파리로 올라와 9년이란 세월을 문인사회에서 보내게 된
다. 그가 이 기간 동안에 추구 한 것은 부친이 원하던 법률 계통의 일이 아니라 문학의 영광
을 꿈꾸는 시인의 길이었고 그것도 라틴시를 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의 열매는
1548년 한 권의 시집으로 출간되는 바, Poemata가 바로 그것이다. 베자는 그것을 볼마르에
게 헌정하면서 세속 시에 대한 결별을 암시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시인으로서 태어났는지
도 모른다. 그는 개혁자가 된 후로도 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1569년과 1597
년에 새로운 시집(Poemata)을 출간한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을 새 시집들과 구별하기
위해 Poemata Juvenilia(젊은 시절의 시)로 불렀다.
1548년 이 해는 베자가 고국을 등지고 제네바로 떠나는 해이다. 그가 프랑스를 떠난 것은
로마 교회를 버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볼마르로부터 새로운 사상에
영향을 받은 베자는 볼마르가 떠나던 해에 그의 집에서 불링거의 논문 <하나님과 성상 숭배에
있어 무지의 기원에 대하여>을 읽고 더욱 확신을 가졌었다. 볼마르를 떠나 보낸 베자는 그 후
론 불링거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로 여기고 여러 차례 감사의 글을 보냈다. 훗날 볼링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그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은 대부분 1535년에 부르
주의 볼마르 선생님 댁에서 읽었던 당신의 책 덕택 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특히 당신이
히에로니무스의 거짓에 대해 말한 것을 읽으면서 주님은 내 눈을 여사 진리의 빛을 응시케 하
셨습니다.”
이처럼 볼마르와 불링거의 영향으로 복음사상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파리의
문인사회에서 문학적인 영예를 추구했었다. 1542년에 한 차례 법률가의 길로 돌아설 뻔한 일
이 있었으나 결국은 그가 교회로부터 받는 수입만 느는 결과만 얻게 되었다. 당시(파리 생활)
베자를 유혹했던 것은 세 가지의 것이었다. 우선 육체적 정욕이요, 다음으로 문학적 영예이며,
마지막으로 야망에 부푼 꿈이었다.
그는 훗날 볼마르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그의 자비하심으로 이런 험로에서 자신을 어떻
게 이끌어 내셨는지를 말하고 있다:
“나는 나쁜 욕망들에게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다만 은밀히 하여 나와 같은
확신을 갖는 한두 친구 외에는 비밀에 부쳤습니다. 이는 스캔들을 피하고 내 성직록에서 얻어
지는 이 더러운 돈을 상실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빨리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내 아내를 하나님의 교회로 데려가 내 결혼을 공개적으로 확인했습니
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교황주의자들의 어떤 명령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년 사이에 베자의 심경이 1535-1548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볼마르와 불링거의 영향이 이 인문주의자 마음에 여러 갈등을 안겨 주었으나 그래도 아직 어
떤 결정적인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 칼뱅의 팸플릿들
이다. 베자는 칼뱅의 호소에 응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제네바로 간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칼뱅의 제네바가 아니라 아카데미(오늘날 대학의 전신)가 있던 로잔이었다.
정통 신학의 형성
피에르 비레의 초청으로 로잔에 간 베자는 그곳 아카데미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9년을
머문다. 이 기간 동안 베자가 쓴 작품들은 수가 많은 만큼 또 다양하다. 그는 이미 1549년 제
네바에서 성유물 예배를 옹호한 코클레아우스에 대한 응답으로 칼뱅을 대신하여 <코클레아우
스 논박>을 쓴 바 있고, 3년 뒤 비슷한 논쟁적인 글인 <파사반투스에게 쓴 편지>(1553)를 크
게 성공시켜 칼뱅을 만족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잔에 오자마자 쓴 <제사하는 아브라
함>(1550)만큼 그의 성격과 삶에 맞는 것도 드물다. 사실 베자는 신학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
고 신학 공부도 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부터 시(詩)에 매력을 느꼈고 일생 동안 시
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신학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신학 작품 역시 점차 그 양과 질
을 높였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변화를 시로 읊은 <제사하는 아브라함>이 암시하는 바처럼 로
잔 시절에 있어 베자의 주된 작업은 시편을 프랑스어 운율에 맞춰 옮기는 일이었다.
베자의 최초의 신학 작품은 1554년에 쓴 <이단 처벌에 대한 위정자의 권위>이다. 세르베투
스(1553년 화형)를 위해 변호하면서 관용을 부르짖었던 카스텔리옹에 맞서 베자는 이 글에서
‘이단’과 ‘세속당국의 직무’에 대해 전통적인 정의를 내린다. 사실 이단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공통적이었다. 도시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개혁 운동에서, 복음을
달리 해석하는 종교개혁의 일부 분파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베자는 그 다음해인 1555년에 베른 당국자들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예정문제를 다른 <예
정 도식>을 작성하여 칼뱅의 예정교리를 옹호했다. 1551년부터 제롬 볼섹이 칼뱅의 예정론을
공박하자, 베자는 이 문제를 수년간 연구 검토하고서 정통 신학 교리의 초석이 될 이 도식을
만든 것이다.
이중 예정은 구원문제에 있어서 성경에 따른 논리적 결과다. 베자는 신학의 내용을 구성하
는 것은 변증법이 아니라 논리라고 여긴 듯하다. 베자의 목적은 논리에 의지하면서, 신자들을
그들의 선택의 확실성으로 위로하려는데 있었다. 사실 변증법은 확실성보다는 불안감을 주기
쉽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구원과 죄 의 긴장 사이에서 베자는 신자들에게 예정의 확실
성과 시련 가운데서의 보장을 주려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가운 데
빠져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을 그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면, 우리
는 이 선택의 빛으로 올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택한 자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
해 창조했기 때문이다.”이것이 흔히 말하는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베자의 강력한 신학적
구조물은 신자를 위한 실천적 삼단논법을 가능케 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베자의 신학은 그의 성경 번역에도 반영된다. 그는 1556년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
틴어로 주를 달아 번역하면서, 에라스무스의 역본을 칼뱅과 자신의 신학적 입장으로 수정했
다. 예를 들어 불가타 역본과 에라스무스 역본의 <hic est sanguis meus> (마 26:28)가 베
자 역본에서는 <hoc est sanguis meus>로 되었다. hic가, 문자적 번역으로,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는 본문이 잔과 관련된다고 여겼다. 또한 딤전 2:4의 <모든 사
람들>을 <quosvis homines>로 번역함으로써, 자신의 선택 신학과 조화시켰다. 한편 칼뱅의
번역을 포함한 다른 번역들은 <omnes>라고 번역했다.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에라스무스가
택한 문헌적, 문법적, 신학적 방법을 좇았지만 그 해석은 아주 달랐다. 그는 교부들, 특히 오
리겐에게 에라스무스가 준 것과 같은 그런 가치를 주지 않았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학문적 정
보의 가치는 인정했지만, 그의 신학적 모호성과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비난했다. 이처럼
베자는 오리겐적인 인문주의자에게 칼뱅의 해석을 대립시켰다. 이와 같은 주가 달린 신약성서
의 목적은, 에라스무스의 권위가 크게 남아있는 군중에게서, 에라스무스의 신약성서를 대신하
여 자리를 잡아, 그것과 동일한 박학다식에 의지하면서도 보다 칼뱅주의적인 정통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었다.
제네바 입성과 칼뱅의 계승
베자는 1559년 그가 그토록 그리던 제네바로 온다. 로잔 아카데미 교수들과 베른 당국 사
이의 갈등은 때마침 제네바 아카데미(대학)의 창설과 그 시기가 맞물려 베자가 제네바 아카데
미 학장에 선출되어 쉽게 칼뱅 곁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1595년(은퇴)까지 이곳에서 신학을
강의하게 된다. 제네바 대학의 학장으로서 그의 신앙은, 그가 학장이 되기 직전, 로마 교회에
머물러 있는 부친을 위해 출간한 <신앙고백서>에 나타나 있다. 그의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부터 언급하고 계속적으로 성부,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심판, 로마교회 성례 비판 등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1537년 제네바 신앙고백서 이래 칼뱅이 지향했던 순서(성경—계시—하나
님)와는 다르다. 하지만 베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서> 성격을 말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칼뱅이 작성한 신앙교육서만큼 확연한 작품이 고금을 통해 없슴을 말
하고, 자신의 작은 작품이 출판될 필요가 사실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유익이 없
지 않을 것임을 말한 뒤, sola scriptura에 입각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그것은 신앙고백서를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내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나의 신앙고백을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나는 또한 나보다 비할 것 없이 더 잘 제공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보다 완성된 무
언가를 주기를 바라며…그들의 판단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을 보면 그도 부
지런히 성경을 참고하기를 바라는 바, 성경이야말로 참된 교리를 입증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참된 시금석입니다.”
베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리스도 중재의 필요성을 안셀무스 식으로 증거한 뒤, 그리
스도가 성령의 활동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며,
그가 세우시는 사역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포되신다. 성령은 이 설교와 함께 활동하며 우
리로 복음을 듣게 하며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예
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만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런데 이 신앙은 말씀을 통해 자란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 이외에 성령은 성례라는 외적 표지를 더 하셨는 바, 이것을 통해 그리스
도가 모든 부와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 신앙을 통해 유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받는 자는 교회의 일원이며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베자의 신앙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작정에서부터 성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서정에 집
중한다. 칼뱅은 베자의 이러한 신앙고백에서 제네바 대학의 신앙교육의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
을 것이다.
하지만 베자는, 본격적으로 학교 일에 몰두하기에 앞서 프랑스와 독일로 여러 차례 외교 여
행을 해야 했다. 특히 그의 고국 프랑스에서의 활동은 대단했다. 이미 독일에서 외교 경력을
갖춘 베자는 1559년 6월 10일 파리 의회에 출두 하면서부터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를 여러번
왕복했다 그는 년 앙부아즈 . 1560 개신교 음모사건 이후, 네락으로 가서 나바르의 왕과 왕비
곁에서 종교적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특히 왕비인 잔 달브레Jeanne d'Albret를 개신교
도로 회심시키기도 했다. 이듬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감정이 격앙되자, 프랑스 궁정의 섭
정인 카트린 드 메디치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푸아시Poissy에서 평화 회담을 성사시켰
는바, 당시 프랑스 개신교 지도자들은 개신교의 대표로서 칼뱅이 아닌 베자를 초청하였다. 베
자는 1561년 9월 9일에 있은 유명한 연설에서 개혁파 신앙을 설명했고 주요 차이점을 말했
다: 선행, 성경과 교부와 공의회의 동등한 권위, 성례와 교회 치리. 이 중에서 결국 성찬 문제
가 회담을 결렬시켰다. 베자는 화체설과 공재설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이 땅에
서 떨어져 있는 만큼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성찬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 아
니라, 우리가 진실로 그의 몸과 피에 참여하되, 영적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참여한다는 말이
다. 회담은 결렬되었으나, 위그노들은 도시 밖에서 예배의 자유를 얻었다(1561년 1월 칙령).
하지만 이런 자유 행사도 1562년 3월의 바시Vassy 학살 사건으로 인해 무참히 깨어지고,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에 빠진다. 베자와 칼뱅이 프랑
스 종교전쟁을 부채질했다고 보는 것은 결과에 대한 지나친 의식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개신
교 세속군주들에게 비정통 정권찬탈자들 (가톨릭을 이데올로기로 하는)을 대항하도록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제나 영적 무장을 강조하고 보복행위를 금하였
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이 프랑스 개신고 지도자를 “비보복의 사도”라고 부를 수 있었다. 어
쨌든 1차 종교 전쟁은 1563년 3월 앙부아즈 평화조약으로 끝이 났다.
베자는 1563년 5월에 “모든 경건한 자들의 공통된 조국”제네바)으로 돌아와 그동안 비워
뒀던 아카데미의 최고직의 임무를 수행한다. 1564년 칼뱅이 죽자 베자는 즉시 “중재
자”odérateur로 임명되고 이때부터 그의 생애, 사역, 작품들은 전임자의 뒤를 이어 제네바
와 유럽의 역사에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프랑스 개혁파의 정치적 고문
이 레만 호 도시 안에서 그의 역할은 아카데미에서의 신학교육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강단을
통한 목회에서도 이뤄졌고 나아가 시의회에 종교적 조언으로 이어졌다. 유럽 곳곳에 그의 작
품과 서신들이 전달되었고 개신교 교리와 관련된 논쟁들엔 늘 참여하여 문제를 분명히 하였
다. 특별히 프랑스 개혁 교회를 위한 사역자들을 배출하여 보냈으며, 1566년엔 장 모렐리Jean
Morély와 교회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목사를 스스로 선출하게 하는 소위 “회중
주의”의 경향을 가졌던 모렐리는 제네바가 격찬하는 당회-대회 조직을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
그런데 베자는 이 조직만이 프랑스 개혁 교회의 분산을 막으며 그것에 공적 성격을 부여한다
고 보았다. 그리하여 모렐리는 베자가 참석했던 1571년 라 로셀 총회와 님Nîmes 총회에서
정죄되었다. 또한 이미 1567년 프랑스 종교 내란으로 인해 베즐레, 라 로셀, 님등을 방문했던
베자는, 제 3차 종교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생 제르맹 조약에 초청되어 프랑스 개혁파 신앙고
백을 결정적으로 채택케 했으며, 그곳에서 프랑스 개신교 당의 수뇌들, 특히 어머니 잔 달브
레와 함께 있던 훗날 앙리 4세가 되는 나바르의 앙리, 콜리니 제독, 자르낙 전투(1569년 3월
13일)에서 암살당한 루이 드 콩데의 아들 앙리 드 콩데 등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제네바와 프랑스 개신교 당을 잇는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고문으로의 역할을 담당했
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학살사건 이후, 베자는 제네바에 수많은 프랑스 피난민들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많은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바, 그들은 프랑스에 남아있던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기 원했다 베자는 제네바 사람들 . 몰래 1573년 4월 그들을 위해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 사실 제네바 당국은 시가 공식적으로 음모에 가담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목
사회의 중재자로서의 베자의 정치적 거취를 불안해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베자가 성 바돌
로매 학살사건을 계기로 쓴 <신하에 대한 위정자의 권리>를 출판하려 했을 때, 시장 로제
Roset는 출판을 하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자는 이 책을 1574년, 아마도 콩
데에게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게 하는 증원군을 얻기 위해 갔던 하이델베르크에서 익명으로
출판했다. 논쟁적인 작품이자 정치 철학이 담겨있는 이 책에서 그는 기존 생각을 수정하여 폭
군처럼 행동하는 권위에 맞서 봉기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한다. 그때까지 그는 칼뱅의 가르침
에 따라 백성의 저항권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여겼었다. 고등 권위에 대한 저항은 열등 권위만
이 할 수 있었다. 푸아시 회담이후 바시 학살사건 때만해도, 그는 “비보복의 사도”로 남아 있
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 바돌로매 대학살사건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은 베자로 하
여금 더 이상 칼뱅을 따르기를 포기하게 했다. 개혁파 신학에 변화가 왔다. 입헌 군주제의 군
주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폭군처럼 행사할 경우, 백성은 더 이상 왕족의 열등 권위를 찿을 필
요가 없다. 백성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여 폭군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봉기의
신학이요 혁명의 신학이다. 그러나 1598년의 낭트 칙령은 이런 저항 이론들의 존재 이유를
사라지게 했고 그때부터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보다 보수적이 되어 억압 정치에도 불구하고 왕
의 정부를 지지했다. 오히려 저항 이론의 발전은 다른 나라들에서 전개되며, 베자와 오망
Hotman의 이론은 이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통 신학의 수호자
1572년 위기 이후 베자의 제네바 생활은 매일 수많은 걱정거리들로 차 있었다. 교회와 국
가 간의 관계 문제, 목사회 내부의 긴장관계 등, 베자는 그의 중재적 위치와 역량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전념했다. 그의 나이 벌써 50세가 넘어 자신의 말대로 갱년기에 접어들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적 과업과 신학교육, 그리고 책을 펴내는 일에 있어 조금
도 축소되지 않았다. 1570년에서 1590년 사이의 기간은 신학, 성경, 역사, 문법 그리고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놀라운 작품이 쏟아져 나온 기간이다. 여기에다 그의 서간문들과 최초의 설
교 모음집들을 고려해 볼 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기적 같은 생산능력을 입증하고 있다. 위에
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1581년엔 개신교 교회등 사이의 다양한 신앙고백들을 비교하면서 개
신교 교리를 연합정신에서 설명하는 <신앙고백의 일치>에 동참했고, 또한 1588년에 나온 <제
네바 성경>을 펴내는 데 협력했으며, 1586년과 1587년에는 그의 첫 설교모음집인 <아가서
1-3장 설교집>과 <전도서>를 출판했다. 이외에도 개혁자들 및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의 초상화
를 실은 <성상집>(Icônes, 1580)에서 칼뱅의 서신 명문들과 그의 전기를 묶어 출간한 바 있
다.
이렇게 제네바 교회를 이끌어 가며 교육하고 출판하는 일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프랑스와
독일들의 외부사건들도 여전히 베자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베자가 프랑스
개신교의 종교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1571년 라 로셀의 프랑스 개혁파 총회와 1572년 5월
님 회의에의 참석 외에도, 독일 루터파들(군주건 신학자건)과의 일련의 긴 논쟁은 그로 하여금
여러 번 여행의 길에 오르게 했고 또 많은 글과 편지를 쓰게 했다. 그가 몽벨리아르
Monthéliard 회담에 참석한 것은 1585년이다. 베자는 여기에서 자신의 예정론 교리를 공격한
후버Samuel Huber를 고발하여 그를 정죄하여 추방하는데 성공했다. 1588년에는 베른에서
신학논쟁에 가담했다. 당시의 논쟁 주제들은 세례, 성찬, 예정, 칭의 등이었는데 베른 회담은
베자의 신학을 한 세기동안 스위스 안에서 정통 신학의 기초로 삼게 했다.
무엇보다도 칼뱅이 살아있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루터파와의 성찬논쟁은 베자의 주요 몫이
었다 년에서 년까지 베자가 . 1559 1593 루터파 사람들을 대상으로 논박한 작품들은 무수하다.
베자는 칼뱅의 성찬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성찬에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론을 확언
하긴 하나 루터파가 말하는 식의 인성의 실재설을 거부한다. 베자의 경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성자의 위격에서 교통하는 것이지, 루터파가 말하듯 신성이 있는 곳에 인성이 있고 인
성이 있는 곳에 신성이 있다는 식의 양성 교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찬에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Personne이지 그의 인성이 아니다. “분리될 수 없는 양성으로 구성된 전 주체
로 여겨지는 온전한 그리스도가 성례뿐만 아니라 만물에 진실로 그리고 실제로 임재한다.”루
터파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론에 맞서 베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늘 밖에는 있을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실체적으로는 불가능하나 인격적 연합 안에서는 가능하며, 이런 점
에서 신성이 있는 곳에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의 속성에 따라서
가 아니라 위격의 일치에 따라서 편재한다.”따라서 베자는 칼뱅처럼 임재 양태를 말함에 있
어 성령의 능력을 통한 영적 임재로 설명한다. 신자는 의미 부여된 것(chose signifiée)과 표
징(signes),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피와 빵/포도주를 동시에 실제로 받는다. 그러나 루터파
와 달리 믿음이 없는 자는 이것들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베자는 칼뱅의 입장에 근본적으로
충실하면서도 몇 가지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스콜라 철학의 도움을 빌어 왔다(질 레이
트). 특히 성사(또는 표징)와 그 의미 사이의 유비를 설명할 때, 실체보다는 관계를 논증함으
로써 칼뱅의 가르침을 넘어갔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예전 행위 시 빵과 포도주란 도
구를 통해 임하는 바, 이때, 성사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새로운 관계를 획득한다. 이 수단
을 통해 그리스도가 성령의 힘으로 신자에게 자신을 제공한다.
마지막 시기
1579년부터 제네바의 상황은 불안한 국면을 맞는다. 사부아에 강력한 군주인 샤를르 에마
뉘엘Charles-Emmanuel이 등장하여 레만 호 도시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목사회의 <중재자> 직을 포함하여 많은 공적인 직무를 그만두나, 강단에서 설교는 계속한다.
그 사이 부인 클로딘을 잃었고 재정적으로도 곤란을 겪었다. 불안정하던 긴 기간은 결국
1589년 3월 30일 사부아와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거의 4년에 가까운 초기 전투는 성문 앞에
서 이뤄졌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엔 너무 나이가 든 베자는 설교를 통해 동지들을 부추겼는
바, 특히 1590-1591년 사이에 전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설교에서 그리했다.
1592년 6월 24일에 출판된 이 설교의 서론에서 베자는 앙리 4세의 등극 이래 화제가 되고 있
는 로마교회와 개혁파 사이의 화해에 조심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어떤 값을 치러서라도
평화를 얻겠다는 생각에 경종을 울리면서 “빛과 어두움”의 중립지대를 찿는 “중도파들”을 비
난했다. 1593년의 앙리 4세의 개신교 포기는 베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왕이 낭트 칙령을 반포할 때까지 그의 평화적 행동에 지지했다.
비록 나이가 들었고 전쟁 중이었지만 이런 일들이 베자로 하여금 교회와 신학논쟁에서 멀어
지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칼뱅의 입장에 서서 성찬과 예정 교리의 개혁파 입장을 확고
히 했으며, 교회 훈련(권징)의 수호를 위한 글과 칭의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그의 최
후의 작품들은 시 작업으로 특히 성경의 노래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가 평생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년 베자는 76세의 나이로 은퇴한다. 그는 가르치는 일과 설교의 의무에서 벗어나지만
모든 활동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제네바 교회와 시의 . 중요한 결정은 그의 자문 없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부아의 샤를르 에마뉘엘과 전쟁이 재발되었을 때, 그는 1600년 11월 25일 프랑스
의 앙리 4세와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 왕은 사부아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
런 사실은 비록 앙리 4세가 1593년 프랑스의 종교적 평화를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음
에도 불구하고 베자가 프랑스 왕에게 끝까지 우정을 거둬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베자는
제네바가 사부아의 침공을 결정적으로 물리친 1602년 12월 12일 에스칼라드Escalade의 밤을
지켜보는 기쁨도 맛보았고, 1605년 10월 13일 86세의 일기로 교회의 종탑이 설교를 알리는
시간에 눈을 감았다.
IX. 새 문명의 종교적 기초
비록 16세기에 유럽의 남북을 갈랐던 종교개혁 사건이 문명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하더라
도, 그것은 여전히 기독교문명이라는 범주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리고 이 문명의 기원은 멀리
콘스탄티누스 황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서구문명의 종교적 기초가 태어나는 순간
이었다. 그 후 클로비스나 샤를마뉴나 오토로 이어지는 중세 국가 또는 제국들이나 종교개혁
에 의해 태어나는 프로테스탄트 도시 또는 국가들이 모두 일종의 콘스탄티누스주의 형태를 갖
는다. 물론 교황과 황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은 중세와 근대 내내 있었고 그 결합 형태
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르고,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루터파, 개혁파, 앵글리칸
이 서로 달랐다.
우선 프로테스탄트 문명은 두 왕국 개념을 통해 교황청의 지배체제를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시켰다. 그러나 이 분리는 재세례파가 말하는 식의 완전 분리가 아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 개념으로 세속적 국가에게 영적인 교회와 동등한 권한을 주었다. 국가는 교회가
제공하는 종교를 이념적 토대로 삼았지만 교회의 오류에 대한 치리권과 성직자 임명권도 가졌
다. 칼뱅은 교회 치리의 독립성을 위해 제네바 당국과 싸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복음 교리와 그 해석을 당국이 유지시키기를 원했다. 세르베투스가 죽은 것은 이것 때문이었
고 카스텔리옹은 시 당국이 종교적인 견해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베자는 칼뱅의
입장을 확인시키고 인류의 모든 국가가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졌음을 재천명했다. 그리고 바른
종교를 선택하여 법제화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종교전쟁은 이 법제화의 과정에서 발생했
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에 의해 앵글리칸이즘이 확립되었을 때 대륙의 개혁자들은 미완이나
마 만족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문명이 근대 서구를 이끌어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이 문명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들은 칼뱅주의자들이었다. 개혁파 세계는 법치국가로 특징지어지
는 정치적 자유주의 및 시장경제로 특징지어지는 경제적 자본주의와 밀접한 상호관계에 있다.
소위 복 받은 나라들은 프로테스탄트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인 나
라들이다. 그것은 1560년 이후의 지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럽 내의 지도는 16세기
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유럽 밖의 개신교 위치설정은 90%가 영국 팽창 지도의 복사판이
다. 대부분 츠빙글리-칼뱅의 개혁 전통의 구성원들로 귀착되는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가장 높은
국민 총생산과 국내 총생산을, 노벨상의 80%를, 출판물의 최고 수치를, 고등교육에 등록된 청
소년 최고 수치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발명 특허증의 90%를 기록한다. 이 경우, 프로테스
탄트주의는 강한 특성을 가진 활기찬 기독교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비신성화
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편재하는 신성함에서 해방된 . 영역인 창조의 세계는 평신도의 세계요,
세속 세계이며, 자유를 위한 영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신성모독의 위험 없이 더듬거리면서
전진한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모든 인간적 성공의 요람이다. 다시 말해서 새 문명 건설을 위한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역할에 성공한 셈이다.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모든 사회들, 모든 법치
국가들이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전통의 모든 나라들은 이 가치들을
경험했고 법치국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19-20세기의 가장 큰 변화인 산업혁명, 과학혁명,
기술혁명은 90%가 프로테스탄트 전통인 지역(영국, 스코틀랜드, 북아메리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일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이 전진은 지금 다소 축소되긴 했어도 여전히 유지된다. “기독교 전 집단 내부에서, 지상의
성공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분집합이 가장 좋은 부분을 차지한다.”물
론 예외들이 있다. 남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영향력은 약했다. 그 이유는 중앙집권
적 국가의 비중이 개혁파의 정상적인 활동을 막았던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서구 종교와 무관
하게 부자 나라다. 프로테스탄트 부분집합에서 가장 좋은 기록은 루터파에 대한 개혁파요, 앵
글리칸과 감독 교회에 대한 “비국교도들”과 감리교도들임을 주목하자.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
로테스탄트 이주자들의 생활수준은 평균 생활수준의 4-10배이다. 오순절계의 열광주의의 등장
덕택으로 경이적인 성공이 이뤄졌다. 가톨릭의 5-10%가 침례교회, 감리교회, 특히 활기차고
열렬한 오순절 교회를 채웠다. 사람들은 급격한 변동이 있다고 믿었다. 한동안 증가가 확고했
지만, 서서히 조수의 흐름이 바뀐다.
이런 식의 설명은 20세기에 미국 프로테스탄트주의가 남용했던 자기 옹호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남는다. <천로역정>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 짧
은 인생의 눈물의 골짜기에서 그들의 몫은 최상이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인 사실이 무슨 위대
한 변증적 가치나 대단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이 훌륭한 몫은 다른 세계 사람들에게
보다 무거운 청지기적인 책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동전의 다른 면이
다.
개혁주의 역사관은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진보사관이다. 자유주의-자본주의
세계는 정치와 경제의 발전 개념과 맥을 같이 한다. 동전의 이면은 이 세계의 역사적 진보과
정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칼뱅의 세계관을 수용한 나라들의 역사적 적용과정을 관찰하는 일
은 그들 세계의 위대성과 동시에 또한 그 죄성을 입증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국교가 된 기독교 전체의 문제이다. 이점에서 성공한 프로테스
탄트는 가톨릭과 마찬가지다. 정통과 이단의 문제는 각 정치권력이 어떤 종교적 이념을 수용
하느냐에 달려 있다. 츠빙글리의 취리히, 칼뱅의 제네바, 낙스의 스코틀랜드, 고마루스파의 네
덜란드, 크롬웰의 영국과 북아일랜드, 퓨리턴의 뉴잉글랜드는 말할 것도 없고, 기타 칼뱅주의
자들이 활동했던 독일의 팔츠 지역, 동부 유럽,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근대사는 이를 입증한다. 여기에 루터주의를 수용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포함된다. “비국교도들”은 설 자리가 없다.
가장 두드러진 동전의 이면 사례는 프로테스탄트 식민지 정책과 선교의 대표적인 나라들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퓨리턴들에 의해 입증된다. 서구 기독교세계의 종교적 갈등이 점점 해소되
어가는 동안(관용과 종교적 자유는 18세기 이후 크게 확대된다), 비기독교세계 또는 이교세계
는 오히려 이들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종교 및 문화의 충돌을 경험한다.
크롬웰이 점령한 북아일랜드의 경우,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생활 형편이 졸지에 바뀌
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종교전쟁은 역사상 가장 길었다.
퓨리턴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행한 행위는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다. 아메리카는 타락으
로부터 지키시려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피난처인 새 예루살렘이었고, 인디언들
은 마귀가 이 땅에서 조용히 통치하기 위해 끌고 가는 저주받은 종족의 남은 자들을 대표했
다. 이런 생각들은 식민지 사람들이 토착민들로 감수케 하는 약탈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퓨리턴 세계의 인종차별정책도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자극했다. 설령 비판의 여지가 있다하
더라도 백인 식민이주자들(미국과 남아공 등)의 인종적 편견주의 내지 우월주의는 개혁주의
세계에 없지 않다. 아무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칼뱅주의자들이 참여한 것은 사실
이다. 미국 개혁파들이 그들의 조상이 억지로 데려온 흑인 노예들에게 보여준 차별정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에 개신교 국가들은 그들이 많은 것을 전수해준 이교 국가들에게 수치를 당해야 했
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전해준 기독교 정신 때문에 간디의 인도에게, 아편을 통해 강제 개방
을 요구받은 중국에게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했다. 미국의 양키들(뉴잉글랜드 퓨리턴)은 팍스
로마나, 팍스 크리스티아나를 계승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며 식민주의에 이은 제국주의
를 전개함으로써 억지로 수치를 눈감고 안 보는 지경이다.
종교개혁사 연구의 의미
만일 이것이 종교개혁의 결과라면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는 어디
에 있을까?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타 문명권에 속한 우리가 수용해야할 내용은
무엇인가
물론 종교개혁사는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하듯이 교회사 연구의 한 부분으로 다뤄질 수
있으며 이런 연구는 기독교(이 경우는 프로테스탄트)문명의 확산의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아니
면 문명사나 세속사와의 비교를 통한 교회사 분야의 지적인 탐구가 될 것이다. 이 방면의 연
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엄청 이뤄졌고 우리 앞에는 지난 한 세게 동안의 결과물들이 산더미
처럼 부담스럽게 쌓여 있다. 누구도 이런 객관적인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폄하할 수 없을 것
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지적 충족이 이뤄지고 나면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의라는 질문이 야기 될
것이고 우리 삶에의 적용 문제가 뒤따를 것이다. 이 질문은 시대와 문명적 차이(시간과 공간
의)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공부하는 우리는 시간적으로 근대 서구문명이 반-밀
레니엄을 지난 후에 존재하며, 공간적으로는 서구문명과는 다른 문명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중국문명의 일환으로 존재하다 서구문명을 접촉한지 한 세기를 갓 지난 한
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종교개혁에서 무엇을 유산으로 간직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 고유
문명과 관련해서 어떤 방향성을 취할 수 있을까
(1) 먼저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할 내용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의 구원 신학이다. 이
것은 가톨릭은 무엇이고 개신교는 무엇인가라는 소박한 이분법을 넘어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구원 계시의 의미로까지 나아간다.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대한 질문이었고 프로
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이 질문에 명백하게 답했다. 바로 그것이 3대 원리다. 구원은 오직 성경
에서만 그 길이 발견되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어쩌면 시대에 뒤진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17세기 프
로테스탄트 정통신앙고백서들이 이것을 확인한 바 있고 18, 19세기 주류 기독교는 이것을 유
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서구문명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문명들과도 관련한다.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래 인류가 창조주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이 극단적인 표현에
도달하는 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인류의 원시 종교는 혼백 신앙에서 환생과 윤회 사상을
거쳐 고등 종교로 발전했다. 불교는 인간과 자연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의 결정체
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기독교 계시의 입장에서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신학을
설명하는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계시 자체로 오신 그리스도는 서식화 된 교리적 표현
을 남기지 않았다. 탁월한 고대교부들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정도의 종교적
급진주의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신학적 원천을 제공하지만 동시
에 토머스 아퀴나스도 지지한다. 하지만 중세 말의 기독교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이교적 모습
에 가까웠다. 예배 의식적인 면에서도 미신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 신학 자체가 인간중심
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의 구원 신학은 구원에 있어서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완
전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신학에 충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계시에 대한 이
런 동일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다. 서구문명 내부에서건, 다른 문명권에서건 구원의 헤브라
이즘적인 기원과 그리스도에 의한 완성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실존적인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공히 요구된다. 이것은 루터와 칼뱅을 우리에게 직접 끌어들일 수 있는 내용
이다.
(2) 다음으로 종교개혁과 서구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다. 쇠퇴하는 서구문명을
바라보면서 이제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이 서구문명에게 끼친 영향이 아니라 종교개혁이 발견
한 계시의 내면성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선교는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폭력을
동반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화 된 나라들은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혼동하거나 아니면 둘 다
거부한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문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이 계시의 재발견이라 하더라도 문명과 떨어져 존재한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종교
개혁은 가톨릭과 연속성이 있다. 샤를마뉴와 오토를 잇는 신성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연속이며 두 왕국 이론을 내세웠던 프로테스탄트 세계도 속권과 영권의 연합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이론의 선구자인 루터는 농민들의 무질서한 반란의 교훈 때문에 교회 설립을 국가
권력에 의뢰했고, 교회와 국가를 가장 확고히 구분하고자 했던 칼뱅도 국가가 종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세르베투스를 정치 사범으로 기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타 문명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역에서 루터나 칼뱅을 직접 끌어들인다는 것은 부당하
다.
한동안 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근대 서구문명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점에서는 루터보다 칼뱅에게 더 많은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100년 동안 칼뱅주
의와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또는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 글들이 줄을 이었
다. 어떤 이는 칼뱅이 미국을 세웠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서구문명의 쇠퇴를 논하게 되는
순간부터 과연 ‘한 문명의 창설자’라는 칭호가 칼뱅에게 영예가 될까? 사실 칼뱅이 새로운 문
명을 만들어낼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계시의 내용들을 변화되
어가는 사회에 적용시킨 것뿐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적용보다는 계시의
내용인 참 경건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칼뱅 연구가 개혁자의 내면에 맞춰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우리가 개혁자들에게서 읽어내야 할 우선적 과제는 계시의 내용인 그들의 경건이다.
기타 부수적인 신학들은 비본질적인 요소들로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의 구원 신학과 영성을 우리 문명권에 적용시키는 문제는 어렵고
신중해야할 것이지만 매우 당연한 것이다.
만일 문명과 관계없이 계시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재세례파의 모범이
있다 신학적 급진주의 로 분류되는 카스텔리옹과 신령주의 . ‘’리베르탱이 근대 세속 사회로 가
는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긴 했지만 공동체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진 못했다. 전반적으로 철
저한 세상과의 유리를 추구했던 재세례파는 비-문명적, 내지 반-문명적 입장을 드러냈다. 비
록 이들이 계시의 발견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과 동일하지는 않았지만(자유의지의
회복은 ‘은총으로만’에 걸림돌이 된다), 계시를 문명에 대립시킴으로써 보다 확실한 계시의 증
인들로 남고자 했다.
20세기 중반 서구사회에서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전면적 폐기는 재세례파의 흐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분리주의자들은 기독교 국가의 존재가 더 이상 무의미함을 역
사적으로 입증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서구문명을 기독교문명으로 여기는 기독교 지도자
들이 한국 사회를 기독교(국가)화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데 경종이 될 수 있다. 칼뱅의
제네바나 퓨리턴의 뉴잉글랜드가 결코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사회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사회와 문화에 계시를 적용시키는 일
을 요구받게 된다. 우선 서구문명에 들어 있는 헬레니즘적인 요소들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
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이교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발견해야 할 것이
다. 문명과 계시의 조화를 꾀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방식은 어떤 면에서 종교개혁 사회에
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칼뱅이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인문주의자였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
에서다. 물론 이 경우 문명은 새로 발견된 계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그랬고, 정치
체제(공화제)가 그랬으며, 경제 질서가 그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헬레니즘 전통의 자리에 유불선 전통이 들어설 수 있음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서 헤브라이즘의 계시와 동양 문명의 만남의 가능성에 대한 시사다. 이것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조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중한 작업이 될 것이다. 어느 날 한국
사회에 한국적 혼의 부활(르네상스)이 일어날 것이고 이런 변화에 헤브라이즘의 계시를 적용
하고 설명하는 작업은 필연적이 될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작업들(흔히 토착화 신학이라
고 불렸던 것을 포함하여)은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비판적 수용이 가능
할 것이다. 변해가는 한국 사회 속에 기독교의 계시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계시에 대한
올바른 파악과 더불어 한국 문명과 문화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적용이 필요하며 따라서
종교개혁 정신에 근거한 한국의 인문주의자들의 출현이 요청된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 종교개혁의 특징은 한마디로 국가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1521년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를 반박하는 「7성례전의 옹호」를 써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헨리 8세 왕이 개혁의 주체였다.
헨리 8세는 과부가 된 형수 아라곤 출신의 캐더린과 재혼하였었다(그녀는 칼 5세의 아주머니이기도 하였다). 교황도 이 결혼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가 궁정시녀인 앤 볼렌과 재혼할 속셈으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더린과의 혼인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1534년 헨리 8세는 자신의 영토에서는 자신이 교회의 유일한 수장임을 선언하고 로마교회와 결별하였다.
그는 영국의 주교를 자신이 임명하고 모든 성직자들을 국법 아래 종속시켰다. 그리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비판을 더 이상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헨리 8세의 행보를 교회법상 문제가 있다고 반대한 토머스 모어와 주교들은 처형되었다. 1535년에는 헨리 8세에 대한 교황 바울 3세의 출교서가 발부되었다.
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공동전선을 펼칠 때, 헨리 8세는 독일의 슈발칼덴 동맹과 연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도 헨리 8세의 재혼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개혁을 밀고 나갔다.
헨리 8세가 죽은 후 에드워드 6세(1547~1553)에 의해 영국의 종교개혁은 계속되었다. 에드워드는 불과 9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머셋 공작이 섭정하여 종교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549년 크랜머 대주교는 마르틴 부처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예배의식서인 『공동 기도서』를 발행하였다. 세례와 성만찬은 가장 중요한 성례전이 되었다. 성만찬에서의 희생제의적인 성격과 연옥설은 거부되었고 성직자 독신제도가 폐지되었다. 미사는 말씀예배로 대체되었다.
요절한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헨리 8세와 캐더린 사이에 태어난 메리(1553~1557)가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등장하였다. 그녀는 헨리 8세가 제정한 법과 로마와의 단절을 무효화하였다. 그녀는 대주교 크랜머를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통하여-그래서 그의 별명이 '피의 메리'이다-가톨릭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또한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탄력을 받고자 하였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녀가 죽자 헨리 8세와 앤 볼렌 사이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그녀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잠시 중단되었던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을 더욱 힘 있게 추진하여 새롭게 『공동 기도서』를 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사상을 반영하는 영국교회 「39개 조항」을 확정하였다. 이는 1552년에 발표된 크랜머의 42개 조항을 기초로 하여 영국 교회에 맞게 새롭게 교정한 것이다.
영국은 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 ·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長老主義)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가톨릭 종교개혁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17세기에 가톨릭교회가 자체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꾀한 운동. 또는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반격 운동.
종교개혁이 트렌트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은 것은 바로 개신교측이 가진 분명한 모순 때문이었다. 개혁자들이 쉴새없이 퍼부은 비난은 가톨릭교회가 기록된 말씀에 주어진 진리를 떠나 배도했다는 것이었다. "기록된 말씀", "성경, 오직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등은 그들의 표어였으며, "기록된 성경 말씀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을 것을 호소"한 것이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신앙 운동이 선언한 강령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성경을 따르되, 교부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교회가 내린 해석"에 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트렌트 공의회의 주된 이슈였고, 공의회의 주목적은 개혁자들에 의해 유럽 사회에 제기된 이 특별한 문제를 토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 문제에 관한 토의 사항들 중 이 문제가 첫 안건으로 등장했었다
공의회 대표로 참석한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전통을 포기하고 성경만을 권위의 표준으로 채택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회의장에서 이 견해가 결정적으로 제시된 까닭에 교황의 특사들은 실제로 교황에게 "전통을 완전히 배제하고 성경을 유일한 권위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강력한 경향이 있음"을 편지로 보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프로테스탄트들이 제시한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엄청난 양보를 의미했다. 이 위기로 인해 "성경에 전통을 합친 것"이 확실하고 유일한 기초란 것을 설득시키는 작업이 극우파 가톨릭 대표들에게 위임되었다. 만일 이것이 성공하면 공의회가 종교개혁을 정죄하는 칙령을 내릴 수 있었고, 실패하면 그 일이 불가능했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여러 달 계속된 후 공의회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장시일에 걸쳐 신경을 쓰며 정신력을 소모한 끝에, 드디어 로히오의 대주교가 공회장에 들어와 성경만을 주장하는 파를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변론을 제시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기록된 말씀에만 의존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만을 믿음의 표준으로 고백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기록된 말씀을 떠나 전통을 따름으로 배도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반역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이 성경만을 따른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성경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받든다는 그들의 신앙 고백은 순전히 거짓입니다.
증거 : 기록된 말씀은 명쾌하게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킬 것을 명합니다. 그들은 제7일을 지키지 않고 배척합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을 표준으로 받든다면 그들은 성경이 일관성 있게 명하는 제7일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록된 말씀이 명하는 안식일 준수를 거부할 뿐 아니라, 다만 교회의 전통 외에는 아무 근거없는 일요일을 채택하여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을 표준으로 삼는다'는 주장은 부당하고, '성경과 전통'을 동시에 받드는 교리는 필수적이며, 프로테스탄트들 자신의 판단 기준에 의해 튼튼하게 확립됩니다."
이것을 논박할 길이 없었다. 이미 1530년 프로테스탄트들의 신조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주의 날의 준수"는 다만 "교회"가 정한 것임을 시인한 때문이었다.
이 변론은 오직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오직 성경파'는 승복하고, 공의회는 즉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정죄하고, 종교개혁은 완전히 가톨릭교회의 성회와 권위를 대적하는 일종의 불법 반항 운동으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1546년 4월 8일 두 가지 칙령이 선포되었다. "그 첫째는, 성경과 전통을 함께 받들어 존중할 것과 제2경전(경외서)도 정경으로 인정할 것을 명한 것이고, 둘째는 불가타(Vulgate) 성경을 유일한 라틴어 표준 성경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원어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를 부여하며, 교회가 받은 어감에 위배되는 해석, 즉 교부들의 일치한 의견에 일치하지 않는 성경 해석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는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공로)도 포함된다. 자유의지를지지
-성례에 대해서는 칠성례의 회복, 화체설, 혼례.
-주교의 일차 직무는 설교이다.
-앞으로 들어오는 신학생은 자기가 먹고 살 것을 준비해서 들어와라
-이미지에 대한 결정, 교회미술의 갱신
이렇게 프로테스탄트 측의 행위가 그들의 신앙고백에 위배된 까닭에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종교개혁 운동 전반을 단순히 교회의 권위에 항거하는 이기적 야망에 의한 반란으로 정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노심초사하며 찾던 좋은 구실이었다. 이 분쟁을 종결 짓는 데 기여한 결정적 요인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측이 성경이 명하는 제7일 안식일을 외면하고 가톨릭교회가 명한 일요일을 준수하기로 채택한 모순이었다.
이것은 이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오늘도 이 문제는 본서가 증명하는 것처럼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를 비난하는 주요 이슈이며, 이 변론에 의지하여 천주교회는 개신교 전반을 "변호불능, 자가당착, 그리고 자멸적"이란 말로 고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트렌트 종교회의
1517년 10월 종교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546년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상황들도 변했다. 첫째, 정치적 상황이 변했다. 루터가 활동했을 때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다스렸던 합스부르그(Hapsburg) 가문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저국가들에 있었던 카톨릭 권력들 간의 투쟁이 있었다.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합스부르그 출신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Charles V, 1500-58)는 유럽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루터의 영향을 받고 있는 북부 독일과 독일 지역의 많은 후원을 황제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루터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모든 것이 변했고 카톨릭 권력 간에 어느 정도의 평화가 조성되었다. 동시에 터키인들(Turks)이 동쪽으로부터 제국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골칫덩이였던 터키인들을 막기 위해서는 황제는 독일군주들의 도움이 요청되었다. 처음에는 찰스는 제국 내에 있는 종교적 문제를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1546-48년에 있었던 쉬말칼드 전쟁(Schmalkald War)이었다.1)
두 번째 종교적 상황의 변화인데 쉬말칼드 전쟁이 일어나는 전후로 하여 로마 카톨릭 내에서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인들이 부르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 종교개혁에 대한 반응이었다. 25년 동안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에 관해 직접적으로 어떠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라는 외침이 로마 카톨릭 내부에서 있기 시작했다.2)
교황, 대부분의 국가들의 카톨릭 교권들, 황제 찰스 5세, 그리고 군사적, 학문적,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수단들을 목적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사용했던 세속 군주들은 이 운동을 후원했다. 1548년 아우그스부르그에서 이루어진 잠정협정(Interim)을 통해 루터란들은 제한적이지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가장 중요한 도구들3) 가운데 하나는 트렌트 종교회의(Council of Trent, 1545-63)였다. 여러 가지 교회 악습들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초기 교리적 입장을 더욱 강화시켰다. 트렌트인들은 종교회의 법령들(decrees)을 통해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정죄했다.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을 단언적으로 정죄했던 사람들이 종교회의를 이끌었다.
로마 카톨릭 내에서의 교회개혁에 관한 부르짖음은 트렌트 종교회의가 있기 전에 있었던 5차 라테란 종교회의(1512-17)4)에서도 종교회의의 소집에 관한 언급했지만 유명무실해졌다가 1520년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의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불태웠던 루터는 교회개혁을 위한 범종교회의를 이미 1518년 11월 28일에 청원한 적이 있었다.5) 또 종교인들과 황제, 군주들까지 종교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황제 찰스 5세는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논쟁과 교회를 재 연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종교회의를 후원했다.6) 하지만 교황 아드리안 6세(Adrian VI, 1522-23)와7) 클리멘트 7세(Clement VII, 1523-34)는8) 교황보다도 종교회의가 교회의 권위를 차지하는 것이 두려워하여 회의를 소집하기를 주저했다.9) 1523년 뉘른베르그(Nuremberg)에서 개최된 의회는 독일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기독교 종교회의를 원했다. 다음 해, 1524년 같은 도시에서 열린 의회는 정기적인 독일 국가의회를 열어 이슈가 되는 것들을 논의하고 로마를 고발할 수 있는 범종교회의의 필요성을 결정했다. 이와 같은 독일 지역의 도전적인 분위기 때문에 교황은 독일 국가의회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황제 찰스 5세 역시 국가의회를 반대했지만 교황 클리멘트 7세에게 대사들을 보내어 범종교회의를 트렌트(Trent)에서 소집할 것을 고려토록 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재하는 종교회의는 프랑스와 영국에 반감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교황청의 권한에도 위험하다는 판단에 교황의 제안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있은 지 수년이 지난 후, 교황과 황제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 되었다. 1529년이 되어 황제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지배 지역에 안정을 갖게 되므로 종교회의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교황의 사절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는 2차 스파이어(Speyer) 의회10)에서 터키인들에 대항하여 독일인들을 돕기 위해 기독교 군주들이 힘을 합쳐야 할 것이고 오는 여름에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밝혔다. 그래서 찰스와 클리멘트 7세는 다음해 1530년 볼로냐(Bologna)에서 만났고 필요하다면 종교회의를 소집할 것을 교황은 약속했다. 기독교계의 총체적인 평화를 위해 종교회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는 가운데 1530년 아우그스부르그(Augsburg) 의회11)가 열렸다. 그리하여 양쪽은 화해하려고 노력했다. 이 곳에서 종교회의의 필요성을 위한 찰스의 제안이 독일 카톨릭 군주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독일 영역에서 회의가 개최되기를 바랐다. 쉽게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이후에도 서로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 황제 찰스 5세는 서한을 로마에 있는 대사에게 보내 교황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교황도 프로테스탄트들이 교회에 순종할 것이면 종교회의를 소집할 것을 약속했고 그 장소로서 이태리 지역이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황제 찰스는 클리멘트의 진심을 의심했고 설상가상으로 프로테스탄트들도 자신들의 교리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은 프랑스의 1세도 후원했다. 1532년 황제와 교황은 종교회의 건으로 볼로냐에서 다시금 만나 모든 기독교 군주들이 동의하면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로 사절단을 보내었지만 교황의 제안에 대해 반갑지 않은 대답을 했다.
교황 클리멘트 7세는 세상을 떠나고 그를 이어 폴 3세(Paul III, 1534-49)가12) 교황이 되었다. 그는 항상 종교회의에 관해 긍정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1534년 10월 17일 범종교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을 실천해 나갔다. 장소에 대해서는 쉽지마는 않았지만 이태리의 도시를 고집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영국의 헨리 8세의 지지를 받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쉬말칼드에서 다음 해 12월에 모여 제안한 종교회의를 거부했다. 1536년 찰스 5세가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과 함께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합의했다. 그래서 동년 6월 2일 폴 3세는 교서『어려움을 당한 주님의 무리에 대해』(Ad dominici gregis curam)13)를 발표하여 모든 대주교들, 감독들, 수도원장들을 1537년 5월 23일에 만투아(Mantua)로 소집했다. 종교회의를 위한 사절단들을 유럽 국가들로 보냈다. 하지만 쉬말칼드에서 모인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종교회의에 참석할 것을 반대했다. 프랑소와 1세는 1536년에 발생한 황제와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사절단을 그를 방문하지 못했다. 헨리 8세도 역시 반대했다. 더욱이 만투아의 공작까지도 개최하는 것을 반대했다.14) 동의한 군주들도 로마에서 개최되는 것에는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11월로 연기되어 1538년 비첸차(Vicenza)에 모이기로 했지만 프랑소와 1세로 인해 개최되는 것은 난관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첸차에 모였던 겨우 6명의 감독들도 개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은 프랑소와 1세를 니스(Nice)에서 만나 1539년까지 연기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찰스 5세와 프랑소와 1세간의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종교회의의 개최는 점점 희미해져가기만 했다.
1540년과 1541년에 보름스(Worms)와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에서 제국적 대화를 시도하여 화해코자 했다.15) 이 곳에서의 논의의 초점은 칭의에 관한 것이었다. 양쪽에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표현이었다. 이 곳에서의 결정된 사항들이 “Regensburg Book”과 “Worms Book”이라는 것으로 나왔지만16) 칭의에 가르침에 관해 로마 카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거부했다.17)
다시금 교황 폴 3세와 황제 찰스 5세는 1541년 9월 루카(Lucca)에 모여 앞으로 비첸차에서 개최할 것을 합의했다. 이태리 지역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어야 한다는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던 폴에 반해 찰스 5세는 루터란들이 결코 이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우열을 표했다. 그래서 두 사람 간에 장소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 후, 1542년 5월 22일 폴 3세는 동년 11월 1일에 트렌트에서 개최할 것을 발표했다.18) 이러한 발표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프랑소와 1세 역시 반대했다. 더욱이 찰스 역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교황이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보면서 반발했다. 단지 독일 카톨릭 군주들과 폴란드 왕 지기스문드 (Sigismund, 1467-1548)만 동의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이태리와 독일 감독들만 트렌트로 모였다. 하는 수 없이 폴 3세는 1543년 3월 볼로냐에 방문한 후, 6월 찰스 5세를 만나러 부세토(Busseto)로 갔다. 하지만 문제는 진전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교황과 황제간의 갈등과 찰스 5세와 프랑소와 1세간의 전쟁으로 인해 종교회의는 또 다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1544년 9월 17일 크레스피(Crespy)협정으로19) 인해 교황과 황제 간에 화목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황 폴 3세는 교황 교서 『기뻐하라 예루살렘』(Laetare Hierusalem)을20) 발표했다. 그리하여 1545년 3월 15일에 트렌트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21) 하지만 몇 명 안되는 감독들만 트렌트에 모였다. 황제 찰스 5세의 개회 연설의 청원에 힘을 입어 12월 13일에 첫 번째 회기가 비톤토(Bitonto)의 감독 무소(Fra Cornelio Musso)의 라틴어로 전파된 설교와 추기경 델 몽트(del Monte)의 성 미사의 집례로 시작되었고, 이어서 다음 해 1546년 1월 7일에 두 번째 회기가 모일 것을 공고했다.22)
첫 번째 주간은 모임의 순서들을 정하는데 주로 보냈다. 열띤 논쟁 끝에 추기경 사절단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즉 교리적 질문들과 교회적 질문들이었다. 모든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문제들을 다루기로 하고 12월 18일에 사절단들이 범종교회의 앞에 17개의 항목을 제시했다. 주요한 내용이 교의적 질문이 논의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교회적 삶이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두 문제를 동시에 다루자는 지배적인 의견을 종합하여 교회의 교의들을 먼저 다루고난 후 이어서 교회 개혁과 규율을 위한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24) 또 수도원장들에 관한 투표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기나 긴 논의를 했다. 각 수도회는 한 투표권을 가질 수 있다고 결정했다.25) 두 번째 회기에선 종교회의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 했다. 주요 요지는 “트렌트의 거룩한 회의” (Sacrosancta tridentina synodus)라는 명칭에 “우주적 교회를 대표하는” (universalem ecclesiam reproesentans) 어구를 첨가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대다수가 콘스탄스(Constance, 1414-18)와 바젤 종교회의(Basel, 1431-49)와 같이 지역의 이름을 붙이자고 결의했다. 세 번째 논의는 결석하는 자들의 위임권에 관한 것이었다. 본래는 위임을 받은 대리자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폴 3세는 독일 감독들에게만큼은 허락했다. 하지만 1562년에 교황 피우스 4세는 이러한 혜택을 철회했다. 진행방법은 6그룹으로 나누어진 신학자들은 각 그룹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작성하였다.26)
첫 번째 주기(1545-47: 1-8회기)
트렌트 종교회의의 교리적 결정들은 두 가지, 법령(decreta)와 교회법(canones)으로 나뉜다. 전자는 로마가 주장하는 교의들의 성명서이고, 후자는 “저주가 있을지어다”(anathema sit)로 결론짓는 분파적 프로테스탄트들의 견해를 정죄하는 것이다.27) 그 중에서 칭의에 대한 법령은 신학적으로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졌다.28) 또 프로테스탄트 교리들은 아주 과장되게 묘사되었고 이단설로 취급하였다.
당시의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이 모였던 트렌트 종교회의는 1545년 12월 13일의 공식적 회기를 시작한 이래 1546년 1월 7일에 시작된 2번째 회기를 가졌는데 이 두 회기에서는 단지 회의 절차에 관한 것만 다루었다. 그래서 종합된 질문들이 종교회의에 상정되고 그것을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자들로 구성된 감독 위원회에서 검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검토된 사항들을 전체 종교회의에 내어놓게 되고 심의하고 결정하여 회기에서 공식 발표한다는 절차를 정했다. 이어서 2월 4일에 3번째 회기에서 믿음이나 규율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었다. 니케아-콘스탄틴노플 신조를 재 확언한 후, 성경을 신적 계시의 근원과 정경으로 인정했다.29) 1546년 4월 8일에 시작된 4번째 회기에서 법령은 외경(Apocrypha)을 다른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였고 믿음의 규율인 성경과 교회 전통은 공조한다고 발표했다. 또 불가타역을 설교와 논쟁을 위한 권위 있는 본문으로 확언했다. 성경은 교부들의 만장일치의 증거에 따라 해석되어야하며 미신적인 목적으로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다는 것과 관련지어서는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는 성경과 교회법령 외에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했다.30)
1546년 6월 17일 5번째 회기가 시작되어 드디어 원죄에 관련되어 5개의 교회법을 만들었다.31) 개혁에 관련된 법령, 즉 주로 설교자들과 성경사용에 관한 법령들이 공포되었다. 7월 29일 6번째 회기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장 극적인 상이점을 나타내는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교리를 다루었다. 길고 긴 열띤 논쟁을32) 마무리하고 마침내 1547년 1월 13일 칭의에 관한 법령을 발표 했다. 프로테스탄트를 정죄하는 36개의 교회법에다가 서문과 16개의 법령을 첨가하였다. 칭의에 관한 것은 트렌트 종교회의 중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트렌트는 프로테스탄트의 칭의론 반대하고 믿음과 선행 위에 칭의가 기초한다고 발표하고 믿음을 점진적 행위(progressive work)로 취급했다.33)
다음 회기에서는 성례와 감독임명과 활동 영역에 관련되어 논의했다. 1547년 3월 3일에 시작된 7번째 회기에서는 성례전에 관해서 13개의 교회법, 세례에 관해서는 14개의 교회법, 견진성사에 관해서는 3개의 교회법, 개혁에 관한 법령은 15개의 장에서 다루었다.34) 하지만 독일 프로테스탄트들과 찰스 5세간의 일어난 쉬말칼드 전쟁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트렌트에서 발생한 유행병으로 인해 한 명의 감독이 죽게 되므로 볼로냐(Bologna)로 옮겨 진행하려고 했다.35) 그래서 1547년 3월 11일 8번째 회기에서 대부분의 트렌트 교부들은 볼로냐로 가기로 결의하였다.36) 이에 대해 찰스 5세는 매우 불만족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 폴 3세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쉬말칼드 전쟁에서 승리한 찰스는 더욱 기세가 당당했다. 1547년 4월 21일에 볼로냐에서 모였던 9번째 회기에서는 회기를 정회한다는 것만 결정했고37) 동년 6월 2일에 10번째 회기를 개회했으나 6명의 대감독과 36명의 감독, 한 명의 대수도원장, 그리고 2명의 수도원장 밖에 남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황과 황제간의 긴장된 분위기에서 회의 진행이 불투명해져갔다.38) 교황은 하는 수 없이 볼로냐에 거하고 있는 4명의 감독과 트렌트에 남아있는 4명의 감독들을 불렀지만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9월 17일에 종교회의를 정회하고 말았다. 더욱이 폴 3세가 1549년 세상을 떠나므로 트렌트 종교회의의 1차 주기가 끝났다.
두 번째 주기(1551-52: 9-14회기)
폴 3세를 이어 율리우스 3세(Julius III, 1550-55)가39) 교황으로 선출되어 1550년 11월 14일 “함께 일어나자”(Quum ad tollenda)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트렌트 종교회의를 지속시켰다.40) 1151년 5월 1일 11번째 회기가 속회되고 성체와 규율 법령들이 신학자들과 여러 그룹에서 논의했고 12번째 회기를 9월 1일에 모일 것을 결의했다.41) 1551년 9월 1일에 모인 12번째 회기에서 결정한 것은 독일 감독들의 참석시키기 위해 10월 11일까지 연기한다는 것이었다.42) 또 교황과 프랑스왕 헨리 2세간의 파르마(Parma) 공작령에 관해 문제가 일어났다.43) 그래서 프랑스 대사 암요(James Amyot)는 교황에게 불평하는 서신을 전달했다.44) 13번째 회기는 성체에서45)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한다는 것, 즉 화체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법령을 공고했다. 8장과 11교회법으로 구성된 이 법령은 철저히 감독과 감독 지역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종교회의에 참석코자하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안전호송을 약속했다. 11월 25일 14번째 회기는 참회에 관해 9장과 종부성사에 관해 3장을 포함하는 교의 법령을 선포했다. 참회에 관련된 장에는 다시 이단들의 가르침을 정죄하는 15개의 교회법과 종부성사에 관해서는 4개의 교회법을 첨가했다. 그러는 가운데 몇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이46) 트렌트에 참석하여 아우그스부르그의 항목과 모순 되는 법령들을 취하할 것을 요구했고 교황이 종교회의의 권위에 굴복할 것을 주장했다. 15번째 회기는 1552년 1월 25일에 10명의 대감독들과 54명의 감독들로 시작되었으나 작센의 모리츠(Moritz)가 다시금 루터란 편에 서서 찰스 5세를 공격하므로 트렌트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감독들이 하나씩 트렌트를 빠져 나갔고 몇 남지 않은 스페인 감독들로 종교회의를 지속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트렌트 종교회의는 1552년 4월 28일 향후 2년 동안 정회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동년 8월 2일 파소(Passau) 협정으로47) 페르디난드가 더 이상 종교회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세 번째 주기(1562-63: 15-25회기)
1555년 율리우스 3세도 세상을 떠나고 그를 이어 트렌트의 추기경 사절이었던 마르첼루스 2세(Marcellus II, 1555)가 선출되었으나 22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폴 4세(Paul IV, 1555-9)가48)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가능하지 못했다.49) 그래서 그를 이은 피우스 4세(Pius IV, 1559-65)는50) 1560년 11월 29일 교황 교서 “교회적 지침을 향해”(Ad ecclesiae regimen)를 발표하여 1561년 부활절에 트렌트 종교회의를 갖기로 했다. 나움부르그에서 루터란들과도 접촉하여 참석토록 권했으나 거절당했다. 감독들의 참여도가 미진했기에 1562년 1월 18일까지 지연되어 17번째 회기가 시작되었으나51) 세속권력자들과 감독들 간의 갈등으로 공식적 아무런 발표도 못하고 다음 회기 일자만 결정하였다. 18번째 회기는 1562년 2월 25일에 모여 프로테스탄트들을 위한 안정호송을 동의했고 금지목록들을 출판할 것을 결의했다. 『금지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52)『일과 기도서』(Breviary), 그리고 『미사전서』(Missal)를 위한 위원회가 교황의 권한 아래 만들어졌다. 휴회 되자마자 회의는 모든 법령과 교회법들을 교황청에게 비준할 권한을 드리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일은 1564년 피우스 4세가 모든 로마 카톨릭인들에게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교서를 내리는 글에서 교황만이 이것을 주장할 수 있고, 비권위적 해석을 금지할 수 있다고 했다. 법령을 해석할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했다. 19번째 회기는 그 해 5월 14일, 20번째 회기는 1562년 6월 4일에 모였는데 교황 사절단들과 황제 페르디난드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성찬에 대한 여러 법령들이 정해졌다. 같은 해 7월 16일에 21번째 회기가 열렸고 유아들의 성찬에 관해 4장과 4개의 교회법을 선포했다. 또 성직 임직과 교회재정, 새 교구에 관한 지침들도 정해졌다. 끝으로 미사에 관한 논의가 거론되면서 앞으로 수개월 동안 논의하여 교의로 정하게 되었다. 22번째 회기는 1562년 9월 17일에 모여 4개의 법령이 선포되었다.53) 하나는 미사의 희생제사, 둘째는 희생제사, 셋째는 성직자들의 도덕성 회복, 마지막으로 성찬의 잔을 평신도들에게 주느냐 아느냐라는 것을 다루었다. 특별히 성직자 임명에 관한 논의는 84명의 신학자들이54) 논의했다. 1563년 7월 15일 23번째 회가가 모여서 교회적 교권제도와 성직수임 성례와 개혁에 관해 법령을55) 발표했다. 특별히 교회에 7 단계의 직분을 밝혔다. 사제직(de sacerdotibus)과 집사직(de diaconis)은 성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감독직은 사도들을 계승한 것이기에 사제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사람들이나 세속 권력에 의해 사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오직 로마 교황청의 권위로 임명된 감독들만이 참된 감독들이다.56) 젊은 성직자들의 교육에 관한 지침들도 논의되었다. 1563년 11월 11일 24번째 회기에서 혼인성사를 성례로 법령으로 결혼에 관해 12개의 교회법과 개혁 법령이 10장으로 설명했다. 정했다. 독신적 상태를 재 확언했고, 축첩제도를 정죄했고, 결혼의 정당성은 사제와 두 증인 앞에서 거행될 때에만 인정된다고 했다. 간음으로 이혼한 경우 범한 상대방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재혼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25-26번째 회기는 1563년 12월 3-4일에 25-26번째 회기가 모여서 연옥설, 성자숭배와 성상에 관련된 법령과 수도사들과 수녀들에 관한 법령도 만들었다. 12월 4일 면죄부 판매, 금식과 축제일, 교리문답, 금지목록 등에 관한 최종적 법령들이 준비되었다. 폴 3세와 율리우스 3세가 있을 동안 선포된 법령들이 재 확언되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법령과 교회법들을 재 확언했다. 215명의 회원들이57) 참석하였던 트렌트 종교회의는 1564년 1월 26일 피우스 4세의 교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Benedictus Deus)이 내려졌고 카톨릭교회에 수용되었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법령들은 이태리, 포르투갈, 폴란드 등지에서 인준되었고, 독일의 로마 카톨릭 군주들은 1566년 의회에서 인준했다.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시실리 등지에는 황제 필립 2세에 의해 인준되었고, 프랑스에서도 왕에 의해 인준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인준하지 않았으며 교황 피우스 4세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에게1564년 6월 13일에 서한을 보내어 인준할 것을 청했으나 메리는 존 낙스의 종교개혁이 시행되는 가운데서 감히 시행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떤 종교회의도 다루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해결했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내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칠성례
1. 영세 (성세성사, 聖洗聖事) Baptism
불신자의 원죄와 본죄(本罪: 자범죄)를 사하는 성사. 기독 신앙의 단체에 입적하는 최초의 성사로 이를 통해 교회의 다른 성사들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서방교회에서 5세기부터 세례받는 이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이 9세기경부터 일반화되었다.
세례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의 교리
천주교에서의 세례는 구원과 직결되는 성사로서 세례를 받음으로 수세자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교리.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며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성세성사의 형식과 대부모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로 부어 세례를 준다. 수세자는 성인, 유아 모두 대부 대모를 세워 부모와 함께 그의 장래 신앙생활을 돕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도록 한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으로 대부모(代父母, god parents)제를 처음으로 말하였다.
신자의 믿음보다는 세례의 형식이 우선될 수없다. (요 3:5에 대한 잘못된 해석)
구원은 이생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받는 것인데 이러한 개인의 믿음보다는 세례의 형식을 더욱 중시하여 심지어 죽은 자, 또는 불신자에게까지도 세례를 주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고 믿고 있다.
세례 의식은 그 자체로서 죄를 씻고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닌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세례의식 자체가 죄사함의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죄사함과 구원을 동시에 얻게 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자에게 인(印)치는 외적 표현일 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롬 1:17, 엡 2:8 9, 요일 5:13).
집전자 세례의 사효성(事效性, opus operatum, work wrought)에 대하여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집전자가 세례를 주면, 세례자의 준비와 관계없이 세례 그 자체는 유효하여 죄를 씻게 된다는 주장. 집행된 성사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기 때문에 수세자(受洗者)에게 하나님의 성총은 자동 전달된다는 주장이다. 세례가 집전자를 통하여 이뤄진다고 하지만 세례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과 세례자 개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세례자가 믿을 때 비로서 그 효력은 인정되어질 수 있다. 그 효력이란 바로 구원으로 신자의 바른 믿음보다 집전자의 성사집행 행위가 인간구원에 더 큰 영향을 줄 수있다는 것은 비성경적 주장이다.
2. 견진 성사 (堅振聖事) Confirm!!ation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이론이 교리화된 것으로 세례를 재확인하는 의식.
이미 세례받은 신자가 견진 성사를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고 완전한 신자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례를 통해 받은 구원을 재확인하고 신자와 교회가 완전하게 결합하는 의식.(행 8:16~17)
주례자가 신자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이마에 성유로 십자를 긋고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하는 의식을 치룬다.
견진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하며,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교회와 세상에 더욱 봉사하며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한다. (구약의 예: 모세가 여호수아를 안수, 사무엘이 사울왕과 다윗에게 안수, 축성함으로 후계자로, 왕으로 세움) Criticism
구원의 완전성을 희미하게 한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불완전한 자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마치 성령이 부족하여 사제의 안수가 필요한 것처럼 성사를 치루고 있다. 만약 구원의 재확인이 필요할 만큼 구원의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면 그것은 이미 앞서 행한 세례 성사의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행 8:17절
사도의 안수가 성령을 받게 되는 필수적인 절차이며 의식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고넬료는 말씀을 듣는 중 성령이 임하였다(행 10:44) 사도가 손은 얹어 안수함은 성도와의 교제와 연대감의 표시이다. 당시 이방인으로 소외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을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외부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약적 교리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고전 12:3)
3, 성체 성사 (聖體聖事) Eucharist
미사는 예배가 아닌 제사 의식으로, 미사를 통해서 죄로부터 분리된다.
신자에게 영적 양식으로서 빵과 포도주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자신 스스로를 제공한 성사이다. 미사 때마다 사제가 손으로 떡조각을 떼어 입에 넣어주는 것을 「영성체를 모신다」고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고고백한다.
화체설(실체변화實體變化, transubst-antiation / 전질변화全質變化)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제의 성령청원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카톨릭의 사제는 제사장의 개념으로 신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이름으로 구원을 선포한다. 화체설로 인하여 사제의 권위는 더욱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유월절) 절기때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먹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신자들도 새 제사로서 그리스도의 실체적 살을 먹는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행함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사에 참여하고 신자들은 은총으로 충만케 되고 영생의 보증을 받게 된다. 이때 이것은 사람이 만든 빵과 포도주를 먹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 성체를 먹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Criticism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완전하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십자가사건)가 완성된 후에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히 13:15), 거룩한 산제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의미의 제사가 있을 뿐이다(롬 12:1) 천주교에서 하는 희생 제사(미사)가 되풀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의 권위에 대하여: 화체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는 명목만 남아 있을 뿐 그리스도가 아닌 그 대리자로 자처하는 사제가 행하는 의식(성례)을 통해 신자의 모든 삶을 주관한다. 특히 화체설과 관련하여 사제가 축성하므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주장은 성찬의 본래 의도보다 사제와 그가 행하는 의식을 강조하게 되므로서 사제의 권위를 신격화할 뿐만아니라 성찬의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또한 미사때 사제가 하는 기도와 축성이 마치 기적을 일으키는 위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는 점에서도 불건전 신비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미사와 성체예식의 우상숭배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사해졌고 또 다른 희생 제사가 필요 없다고 선언하였다. (히 10:17 18) 그러나 카톨릭에서 행하는 미사는 매번 그리스도를 다시 제물로 드리는 예식으로 성경에 위배된다. 또한 성체를 숭배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향해 머리 숙여 절을 하도록 하는 것은 미신적 행위로 우상숭배와도 같다.
4. 고해성사 (고백성사, 告白聖事) Penance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세성사 이후에 신자가 범한 죄를 사제의 권위있는 선언을 통해 사해 주는 성사.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제는 권세를 부여받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의 죄는 실제로 사함을 받게 된다. 죄인은 고백성사를 통해 잃은 생명과 약해진 은총을 회복하게 된다고 믿는다. (요 20:22 23)
사죄권(赦罪權)이 사도들을 거쳐 그 후계자인 주교와 사제들에게 주어졌기에 사제는 신자의 고백을 듣고 죄의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연령에 달한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번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신부는 "나는 그대를 용서하노라(ege te absolvo)"라고 공식적인 사죄선언과 함께 죄의 대소(大小) 또는 경중(輕重)에 따라 보속을 명한다. 참회자는 명령 받은 보속을 실천함으로 고백성사가 완료된다.
보속(補贖) :중세때는 성지순례, 십자군출정, 구제 또는 헌금 등이 요청되었고, 현재는 경문(經文)이나 미사참례, 선행, 고행 등이 명령됨. Criticism
사람에게 하는 고백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약 5:16)고 명령하신다. 신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면, 신부도 신자에게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마리아 성의 시몬이 범죄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에게 죄를 고백하라 하지 않고 "주께 기도하라"(행 8:22) 명하였다. 가룟 유다는 자살하기 전에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기가 "무죄한 피를 팔고 범죄"하였노라고 고백했으나(마 27:4), 용서받지 못하고 제 곳(지옥)에 갔다고 기록되었다(행 1:25). 만일 사제가 신자의 죄을 사할 수 있다하더라도 사제의 죄는 누가 사해줄 것인가?
사제들의 사죄권
천국의 열쇠(마 16:19)」를 신부의 사죄권(赦罪權)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믿어 천국에 이르도록 전도자에게 천국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더하시겠다라는 하나님의 의지로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자기의 복음전파로 이방인이 믿어 정결함에 이르게 된 것을 간증하고 있다.(행 15:7~11) 이는 복음을 통해 죄를 용서하시는 것(사죄권의 행사)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고유의 권한(은혜)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다만 신자가 사죄의 확신을 위하여 교직자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자를 위하여 교직자는 하나님의 말씀(사 1:18, 요일 1:9)으로 위로하고 권면할 수 있을 것이나 "내가 당신의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하신 말씀이 고백성사의 제정(制定)이요, 사제에게 사죄권(赦罪權)을 부여하신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사도들만 있던 것이 아니요 열한 사도 외에 그와 함께한 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아(눅 24:33)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사죄를 전할 책임이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사죄의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막 2:7,10, 시 32:5). 땅에 오신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며 사람(God man) 이신 예수께서 사죄도 하시고 정죄도 하셨다(마 9:6, 요 9:41, 요 15:22 24).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셨다는 사죄권(마 16:19)은 베드로 뿐 아니고 모든 사도들에게 주어졌고(요 20:23) 또한 일반 신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권한인 것을 알아야 한다(마 18:18).
보속의 명령에 대하여
사죄를 위한 보속(補贖)의 명령도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이를 회복시키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로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이나, 신부의 명에 따라 보속을 행해야 죄용서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代贖)을 약화시키는 인간적인 발상이다. 우리를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그 아들 예수의 피"(요일 1:7)이지 다른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다.
카톨릭의 주장에 의하면 고해성사는 세례를 통해 받은 구원이 죄로 인해 상실되기때문에 구원을 지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의식인데 죄 중에는 사제의 권한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성체 모독죄, 교황에 대한 폭행, 성범죄와 공범자에 대한 사죄, 교황의 위임장이 없는 주교 축성, 고해 비밀을 누설한 죄, 이 다섯이다. 성체 모독과 교황의 폭해과 모욕에 대하여 용서 받지 목할 죄로 규정을 한 것은 교황을 우상화한 것이고 그 외에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셨다. 성경에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오직 성령 훼방죄 하나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마 12:31) 그렇다면 교황에 대한 폭해와 모욕, 그리고 교황이 만들어낸 성체에 대한 모독은 성령훼방죄와 같다는 것인가?
고해자의 성찰 7에 의하면 결국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기위함이 아니요, 원래 인간의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즉 신앙은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5. 결혼 성사 (혼인성사, 婚姻聖事) Matrimony
혼인생활로 성스런 가정을 꾸미고 자녀의 교육적 양육에 대하여 은총을 주는 성사. 카톨릭 신자의 결혼은 반드시 사제 앞에서만 행해야 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자로서 공적 증인이 되며 사제만이 필요한 문서를 작성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혼에 축복을 해주고 혼인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 교회의 목사님이 결혼식을 집전하는 것은 축복을 서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 실제로 복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카톨릭의 사제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협력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있다. Criticism
혼인 성사성의 여부에 관하여
천주교는 혼인의 성사성(聖事性)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부부의 사랑을 축복하시고 가정생활에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혼인을 성사로 제정하셨다고 주장. 분명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이다(창 2:21-25). 예수님에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어가셨던 예화도 있으나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곳에서 혼인을 성사화시키신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천주교는 혼인을 성사로 취급하기에 주일에 혼인예식을 거행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주일에 결혼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혼인을 성례로 인정하지않을 뿐만아니라 혼인예식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더욱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6. 신품 성사(神品聖事) Ordination
교회의 사제로 성사와 미사집전, 교회에 봉사하는 직능을 수여하는 성사. 이는 거룩한 권한 즉 그리스도의 권한을 맡기는 사제에게 내리는 성사이다. 이 성사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들의 서품시, 미사를 드리는 거룩한 사람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직무자로, 종교 교수로, 윤리 선생으로, 독신자로, 세상과 분리된 사람으로, 성직자로, 명사로, 귀족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투사로, 성사의 집행자로, 중보자로 세우는 서품 예식이다. 세례받은 지 3년이 지난 미혼 남자로서 본당 주임 신부와 소속 교구장의 추천 및 인준을 받아 신학교에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자에게 주교가 서품(敍品)한다.
주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모상이다. 카톨릭에서 성직 계급의 위계질서는 철저하다. 이러한 위계 속에서 오직 명령과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신품성사의 근거
예수께서 12사도를 택하사 성직을 수행하게 하셨고(마 10:2-4),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기르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6) 하시며 백성을 지도하며 제사를 거행할 권능을 주셨다 한다(행 20:28).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그리스도께 받은 권능과 은총을 후계자에게 전하여 주었다 한다. Criticism
예수님이 사제들을 세우신 일이 없고 신약성경에도 사제 또는 제사장이란 말을 기독교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적이 없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고(벧전 5:1), 그 외에 성직을 나타내는 말로 감독(딤전 3:1) 혹은 목사(엡 4:12)라는 말 등이 사용되고 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제사장직
사제의 제사장으로서의 임무에 대하여 카톨릭에서는 "사제는 천주의 사신(使臣)으로서 홀로 천주께 제사를 드릴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히 10:10,12,18). 신약의 대제사장직은 어느 특정한 계급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벧전 2:9).
7. 병자 성사 (종부성사, 終傅聖事) anointing of the sick
카톨릭은 임종직전에 교회 이름으로 모든 죄를 사해 줄 수 있으며 죽은 자에게는 성례가 치러진다. 신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죽는 자의 영생까지 사제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말하는 사도적 계승이요 교회로서 역할이다.
종유례(終油禮) 또는 종부성사(終傅聖事, Sacrament of e.treme unction)라 불리우던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병자성사로 고쳐졌다.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있는 자 또는 중환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자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며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맡겨드리는 예식이다. 병자성사는 영적으로 사죄의 확신과 육적으로 건강의 회복을 빌기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인데 죽음에 임박한 자 뿐 아니라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자에게도 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Criticism
천주교는 성사가 그리스도의 제정으로 된 것이라 가르치는데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도 아니고 명령하신 것도 아니다. 사도들이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고"(막 6:13), 야고보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약 5:14)고 한 것을 천주교는 병자성사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제도가 예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례일 수 없다. 또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이 사실이지만 병을 고치는 그 자체는 구약의 선지자들도 행한 일이다.
성례 (聖禮 Sacrament)에 대한 소견
결론적으로 천주교에서는 세례와 성찬을 포함하여 7성례을 성사로 지정하고 있다. 이 성사(聖事)는 "상징(signum)을 통해 효율적인 은총을 낳게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제정하셨다(한국 카톨릭 대사전)"라고 밝히고 있으나 세례와 성찬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례로 남기셨고 성경적 근거가 분명한 세례와 성찬까지도 카톨릭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많이 왜곡시켜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복음과 종교의 차이를 더욱 절실히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양은 같아 보이나 복음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고 종교는 인간의 생각(자기의뜻대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모순이 많고 설명과 핑계가 많다. 그들의 의도는 이해되어질 만한 것 이라할지라도 이것이 진정 구원얻고자 하는 이들의 믿음을 빼앗고 구원의 길을 가리우는 것이라면 진정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여 제정하고 지키는 성례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장 악한 악례가 되는 것이다
예수회 (Jesuit)
예수회는 16세기 로욜라가 창립한 카톨릭 내의 결사 단체로 각 국에서 몰락해가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카톨릭 내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며, 기독교를 핍박·견제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예수회는 각 국에서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 사회, 종교, 사회조직 등에 침투하였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 암살 등을 자행해 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추방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 이 후 종교재판을 주도하며 수 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였고, 많은 나라에서 카톨릭을
유지시키기 위해 정부와 협력해 기독교인이나 그리스 정교인을 고문하거나 강제 개종시켰습니다.
예수회는 파시스트와 나치당을 지원하여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2차 세계대전은 카톨릭 신자인 히틀러와
교황청이 협력하여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전쟁입니다.
이 과정 중에 교황청은 히틀러의 대량 학살을 교사(敎唆) 내지는 방조하였고,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며,
물심양면으로 나치를 지원하였습니다.
예수회와 교황청 사이에도 권력 타툼이 있었고, 교황청의 권력을 장악한 예수회를 축출하기 위한 시도는
교황의 암살 등으로 좌절 되었습니다.
예수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리메이슨의 사상과 조직을 흡수하여 창립되었고, 프리메이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고, 많은 예수회 사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 일루미나티는 시온 의정서에서 일반 민중과 정치인은 머리 나쁜 소 같은 사람들이라며 경멸하지만,
엘리트 결사 조직인 예수회는 존중하며 경쟁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회와 프리메이슨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협력하지만 서로 다른 사상과 기반을 가진 권력집단이며,
언젠가는 제거해야할 적으로 교황청은 말세 때 프리메이슨에 의해 파멸될 것입니다.(계시록 17/16)
* 목차
1. 예수회의 실체
2. 유럽의 예수회
3. 예수회의 동양 선교
4. 예수회의 기독교 박해
5. 교황청과 예수회
6. 2차 세계대전과 예수회
1. 예수회의 실체
a)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la)
예수회의 창설자인 로욜라(본명:이니고 로페즈 드 레깔데)는 1492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 때 십자군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신앙을 갖지 않은 방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서 정부 관리와 친위병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페인이 프랑스로부터 침략 당했을 때 팜펠루나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로욜라 성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는 마취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경험합니다.
결국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의 정신 상태는 극도로 예민해지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병상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인들의 순교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영적 체험을 위한 신비주의적인 영성훈련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오랜 금식과 갖은 육체적 고행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신앙생활을 위해 무려 3일간이나 고해성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성모 마리아 등의 환상을 보고, 각종 계시를 받음으로써
선교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로욜라가 가지고 있던 성격인 경건함과 처세술, 금욕주의와 세속적 지식, 신비주의와 냉정한 계산성 등은 그대로
예수회의 특징으로 이어집니다.
b) 예수회의 창설
예수회는 1534년 'Assumption Day'(성모 몽소 승천 축일, 8월 15일)에 몽마르트의 노틀담 사원에서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44세의 로욜라는 동지들과 함께 베니스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종교 재판소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회가 로마 교황청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자 1540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얻게 됩니다.
이로써 예수회는 교황의 관리 하에 선교, 고해성사, 설교, 자선사업 등의 권한을 받게 됩니다.
1546는 예수회 사제가 교황청 신학자 자격으로 트랜트 종교회의에 참석함으로써 정치적인 색채도 띠게 됩니다.
교황청은 예수회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고, 예수회는 이에 부응하여 맡은 소임을 열성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에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점차 세력을 넓히게 됩니다.
예수회 회원인 라네즈와 모론 추기경은 트랜트 종교회의에서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여 교황청의 권위를 높혔고,
사제들의 결혼과 자국어 예배, 교황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개혁파의 주장을 교묘한 책략과 논법으로 일축시켜
바오로 3세로부터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예수회는 해외 선교에도 힘을 써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예수회는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각국의 지도자를 포섭하는 정치조직으로 발전합니다.
이를 위해 지도층에 대한 권위 있는 고해성사를 주관하고, 고위층 자녀에 대한 교육을 담당합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예수회의 세력에 당황한 교황청은 예수회 회원수를 60명으로 제한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금세 풀렸고, 1556년 로욜라가 사망할 당시에는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c) 영성훈련
로욜라는 알칼라(Alcala) 대학교에 머물면서 추종자들을 모아 혼의 치료를 하였습니다.
사람이 기절할만큼 격렬했던 종교의식(신비주의적 영적 체험)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카톨릭 종교재판소는 1527년 4월 로욜라를 구속했고, 고문을 실시했지만 그는 자신이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욜라는 일체의 종교집회를 금지 당한 채 석방되었고, 파리의 몽떼이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영적 수련(Spiritual Exercises)에 관한 소책자를 배포하였고, 라네즈(Lainez)나 살메론(Salmeron)과
같은 추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영적인 힘에 매혹된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처럼 이를 지속하기 위해 로욜라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련자들은 1달 동안 로욜라의 지도로 호흡법, 주문, 명상, 울부짖고 고함치는 행동 등을 교육 받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아의 의식을 잃게 해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지만, 최면 상태에 빠져 쉽게
마귀들림 현상을 겪게 됩니다.
신비주의 의식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귀에 속삭이는 마귀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많으며, 결국 살인이나 음란한 행동
등을 하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 살인범은 대개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 받은 경험이 있으며 극심한 고통과 현실도피
의식은 자아를 잃게 해 쉽게 마귀를 불러드립니다.
제가 어릴 때 가족이 모두 성당에 다녔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성당에서 카셋트 테이프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인드 콘트롤에 대한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은 심장박동 소리나 기관총 소리 같은 규칙적인 음이었습니다.
그걸 듣고 있으면 알파파 상태가 유도되 정신집중이 잘 된다고 하는데, 요즘 나오는 엠씨스쿼어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뇌파란 뇌의 활동에 따라 일어나는 전류로 '활동상태의 베타파', '학습상태의 알파파', '명상상태의 세타파', '수면상태의
델타파'로 나뉩니다.
세타파는 의식 상태와 무의식 상태의 중간단계로 최면, 세뇌, 빙의가 가능한 상태이고, 정신세계의 상위구조이며,
자기암시로 인한 행동조절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빛과 소리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은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이고, 잘못하면 간질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율적인 심신의 조절을 방해하고, 담배를 피듯이 감정조절을 기계에 의존하게 합니다.
명상이나 기 수련, 참선도 비슷한데 주로 강조되는 것이 '규칙적인 호흡', '규칙적인 주문', '정해진 생각', '차분한 음악',
'규칙적인 행위', '규칙적인 걸음걸이',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불빛', '한 곳만 응시함' 등입니다.
이를 통해 세타파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고, 쉽게 접신하거나 유체이탈 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귀신이 들리거나, 악령의 소리를 듣거나, 악령의 모습을 볾으로써 더욱 더 불안하고 힘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TV에서 나오는 최면상태에서 전생을 대답하는 주체는 내 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악령입니다.
우리 육신이 태어나면서 영은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며, 죽은 혼령은 절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오순절 계열의 교회에서도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의식을 그대로 받아드려 성령체험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체험하는 현상은 '몸이 부들부들 떨림', '정신을 잃음', '울부 짖음', '황홀함', '큰 충격', '데굴데굴 구름',
'개 처럼 짖음', '계속 웃음', '머리를 흔듦', '계속 춤을 춤' 등 이상한 육체적 표현입니다.
이러한 것은 전형적인 마귀들림 현상으로 심할 경우 마귀의 집적주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신비적인 체험을 좋아하며 마귀는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끌어들여 말 잘 듣는 노예로 만듭니다.
물론 마귀가 수호령이 되어 그 사람의 앞날을 지켜주고 각종 재능과 능력을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마귀에게 의지함은 구원은 커녕 저주받을 행동이고, 영원한 불지옥행이
보장되며, 결국 마귀의 지시에 따라 사회를 타락시키고 오염시키는데 앞장 서게 됩니다.
서양의 마법사들은 정기적으로 여자를 납치해 피를 흘림으로써 사탄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고, 그 외의 길은 모두 사탄과 마귀에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요한 14/6)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능력이나 마귀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받을 것이요,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d) 예수회의 사상
예수회는 로마 카톨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활동을 전개하는 정치조직입니다.
이를 위해 카톨릭 내에서 교황의 강력한 독제체제를 추구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기독교를 교황권 아래로
편입시키려 하며, 각 국의 정치가가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포섭, 음모, 선전, 선동, 교육, 선교, 반역 등이 동원됩니다.
예수회 회원은 세뇌적 교육에 의해 상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훈련됩니다.
그들은 이성과 도덕적 양심마저도 버리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살인도 자행할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로욜라는 "총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정의로운 것이며 온당한 처사임을 모든 회원은 명심해야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회의 수련은 군대의 훈련과 비슷하며 자기의 판단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교육받습니다.
로욜라가 포르투갈의 회원에게 보낸 서신에는 "교회가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떠한 의심이나 가치관마저도 죄악시 되는 예수회 회원에게 절대적인 복종은 "자기 굴레로부터의 해방" 이라고
칭송되어집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러한 예수회의 태도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로부터 추방당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e) 예수회의 조직
카톨릭 예수회는 6계급으로 이루어지는데 novices(초신자), scholastics(수학생), coadjustors(보좌주교),
temporal(교구주교), professed of the three vows(세가지 맹세를 한 자), professed of the four vows
(네가지 맹세를 한 자)가 있습니다.
이 중에 상위 두 계급은 예수회의 운영과 간부 임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네 번째 맹세는 로마 카톨릭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특별한 충성의 표시이며 교황이 명령하는
때는 어떤 일이든지, 어느 장소든지 가야 하며 의문을 제기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명령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예수회 수장에 의해 실행됩니다.
예수회의 우두머리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수장(General)이라 불립니다.
예수회 총재인 라네즈와 살메론은 예수회 총칙을 만들었는데 '예수회 총재는 독재체제로 한번 부임하면 죽을 때까지
재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회 수장에게 주어진 권력중의 하나는 지원자를 비밀리에 받아들여 입회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예수회의 법규에 의하면 수장은 죽을 때까지 로마에 거주해야 하며, 간부들도 직접 임명합니다.
그의 임용권과 그가 제시한 의견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예수회 총재는 로마 교황청의 훈계자요 대리자며 보좌역으로 불리웠고, 이태리,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미국 등에 지회가 설치되었습니다.
지회에는 총재가 임명한 감독관이 파견되고, 예수회의 재산은 총재가 직접하며, 그 책임은 교황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모든 지부의 상관이나 수도원장은 예수회 회원에 관련된 모든 일과 회원들이 다루는 모든 사건을 자신의 상관에게
매주 정기적으로 보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지부장들은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종합하여 수장에게 매월 문서로 보고합니다.
또한 예수회의 모든 지부장들은 3개월에 한번씩 수장에게 직접 보고해야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수회의 감시와 고발체제는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서 과거 수도원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고발하던 것과는 달리 모든 회원들은 비밀리에 자신의 상관에게 동료들을 고발해야 하며, 그 상관도 지부장이나
수장에게 같은 방법으로 동료들의 잘못을 고발해야 합니다.
심지어 수장의 잘못으로 예수회의 목적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장도 조직의 감독을 받습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심의회가 수장의 행동을 감시하는데, 심의회는 네명의 보좌관과 수장의 잘못을 충고하는
충고자, 고해신부로 이루어집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항상 수장과 함께 회의에 참석해야 하며 수장은 예수회의 허락없이는 수장직을 그만두거나
다른 성직, 관직을 받아들일 수 없고, 자격정지 당하거나 면직당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회 사제는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들에게 사목권, 고해 청취권, 성례식 집행권,
미사 집례권 등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은 결혼식 주례 뿐입니다.
예수회 총재는 강력한 사면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회 회원이 가입하기 전 후에 지은 모든 죄, 이단 죄 등을
사면할 수 있고, 파문당한 자나 성무 금지조치를 받은 자도 충성을 맹세한 자는 사면할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 13세는 예수회에 교역과 은행거래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경제적 활동도 보장하였습니다.
교황들은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왕조차 파문하였습니다.
1574년 피오 5세는 칙서를 내려 훗일 교황이 칙서를 내려 예수회의 권한을 축소한다 하더라도 예수회 총재가
이를 회복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교황이 이렇게 예수회에 엄청난 특권을 부여한 것은 예수회가 자신에게 절대 충성해 교황권을 옹호할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권력이 상당 부분 예수회에 넘어감으로써 교황체제는 예수회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예수회 또한 절대적
교황 권력의 비호 아래 성장함으로써 두 세력은 상호 의존적인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황을 'White Pope'(흰 교황), 예수회 수장은 'Black Pope'(검은 교황)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회는 겉으로는 교황에게 순종하나, 자신의 이익과 뜻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회는 교황의 전위부대로서 사회 일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정치가, 장성, 판사, 의사, 교수 등 사회 저명 인사들을
포섭하였습니다.
여러 국가의 황제와 귀족 성직자등도 예수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기독교 내에도 침투하여 기독교를 사분오열
시킨 다음에 다시 통합해 교황권 아래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카톨릭을 비판하는 개신교 목사가 있다면 그 교회에 침투해 각종 음해와 공작으로 그 목사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에는 33,000명의 예수회 공식 회원이 공식 활동 중이며 이들은 교황권의 세계 지배를 위하여 불철주야 분주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f) 예수회 입단식
후보자는 길고 엄격한 금식을 통해 육체적으로 쇠약하게 되고, 환각을 증강시키기 위해 입회식 전에 환각제를
먹습니다.
그 후에 신비적인 장치가 된 장소를 지나가게 되는데 이곳에는 사악한 환영들이 나타나게 하고 죽은 자를 부르는
초혼, 지옥의 불꽃을 나타내는 화염, 해골, 움직이는 뼈, 인공천둥과 번개들이 장치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고대
신비종교의 유산이고 프리메이슨 의식입니다.
만일 세심하고 관찰당하고 있는 입후보자가 조금이라도 공포의 무서움을 나타내면 그는 영원히 하층계급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험을 잘 통과하면 그는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계급의 입회식 때에는 오랫 동안 금식을 한 이후 눈을 가리운 채 울부짖는 소리와 끔찍한 소리가 들리는
큰 동굴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때 그는 이러한 경우를 위해 준비된 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동굴의 끝에 가까이 가면 좁은 입구를 기어나와야 하는데 입후보자가 기어나오는 동안 묶인 헝겊을 누군가
풀어줍니다.
그가 동굴을 빠져나오면 자신이 사각형의 지하감옥에 있는 것을 알게되는데 그 바닥에는 매장할 때 쓰는 천이
깔려있고 세 개의 램프가 움직이도록 장치된 해골과 뼈 주위에 희미한 빛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이 동굴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의 동굴이며 '검은 방'(The Black Chamber)이라 불립니다.
입후보자는 여기서 기도문을 외우는데 그의 모든 행동은 하나하나 감시됩니다.
만일 그의 행동이 만족스러운 것이면 대천사를 나타내는 두명이 그 앞에 나타나서 피가 적셔진 흰천을 그의 이마에
묶어 줍니다.
이 천에는 비밀스러운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목에 작은 십자가 형태를 걸어주며, 순교자들의 유골이 든 가방을
그에게 줍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입후보자의 옷을 모두 벗기어 동굴 구석에 쌓인 장작더미에 던져 놓고 칼로 자기 몸에 작은
십자가를 그어 피가 나오게 합니다.
이 때에 신비의식을 도울 동료들이 들어와 입후보자 몸 주위에 붉은 천을 둘러줍니다.
이 천에 피가 베이면 자신들의 단도를 그의 머리 위에 둥근원의 형태로 빼어듭니다.
바닥에 카페트가 깔리고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약 한시간 정도 기도를 드린 후 장작더미에 불을 붙힙니다.
그러면 동굴의 안쪽 벽이 열리면서 천사와 유령으로 가장한 사람들이 판토마임처럼 줄지어 지나 갑니다.
이 광대극이 진행되는 동안 입후보자는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교황)의 이름으로 아직 나와 연관이 있었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합니다. 나는 전에 내가 충성을 맹세한 왕이나 행정장관 혹은 다른 어떤 기관과의 관계도
끊겠습니다. 이순간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는 새로운 상관이 내가 행하고, 생각하고, 읽고, 배우고, 보는
모든 일을 알기 원합니다. 나는 생명과 의지가 없는 죽은 시체임으로 모든 것을 나의 상관에게 양보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유혹을 물리칠 것을 맹세하며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이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이 맹세한 한 새로운 회원은 옆방으로 인도되고 목욕을 한 후, 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축하연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그가 겪은 오랜 금식과 공포, 피로를 보상하기 위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g) 예수회 수장의 명령과 선서
하부조직 예수회 회원이 지휘부로 승진할 때 수장은 동시에 그에게 단도를 주는데, 그는 칼날을 쥐고 그의 심장을
향하여 칼끝을 겨누고 수장은 여전히 단도의 손잡이를 잡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지원자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이제까지 위선자로 행동하라고 훈련을 받아왔다. 로마 카톨릭 내에선 로마 카톨릭 신자로,
그리고 심지어 네 자신의 형제들 사이에서도 스파이가 되어라.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개혁교도 사이에서는 개혁교도가 되어라. 위그노파 사이에서는 위그노파가 되고,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칼빈주의자가 되고,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는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가 되어라.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내어 심지어 그들의 강단에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전적으로 열정적으로 우리의
거룩한 종교와 교황을 비난하려 하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심지어 유태인 사이에서는 한명의 유태인이 되기까지
변신하라. 그리하면 너는 교황의 충실한 군사로서 너의 예수회 조직에 이로운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스파이로서의 너의 활동을 명령받았다. 네가 가진 권력 안에서 가능한 모든 정보처로부터 통계자료, 사실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고, 프로테스탄트 회원 그룹들과 모든 계급과 특정한 이교도들의 환심을 얻도록 행동하라.
뿐만아니라 상인, 은행가, 법률가, 학교들과 대학교들 사이에서, 의회와 입법부, 법원과 주법원 안에서 또한 그렇게
행동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방법들"로 행동을 같이 하라. 교황의 종으로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예수회의 회원의 최종적 선서(The Extreme Oath of the Jesuits)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현재,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처녀 마리아, 은혜로우신 대천사 미가엘, 은혜로우신 성 세례 요한,
거룩한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울 그리고 모든 성인과 하늘의 신성한 성체들, 그리고 당신, 나의 영적 아버지,
교황 바오로3세의 재임 중,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의해 조직되어 현재까지 이르는 예수회의 수장이 참석하신
곳에서, 처녀의 태, 하나님의 어머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징벌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선서하고 서약한다.
거룩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자리이며 진실한 자요 지구상에서 카톨릭 혹은 우주적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다.
그리고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의해, 거룩한 자, 교황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열쇠들로 인해 그(교항)는 이교도
왕들과 왕자들 국가들, 연방, 그리고 정부들, 모든 불법적인 것들을 그(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허락없이도
파멸시킬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완전히 멸망 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할 수있는한, 나는 이교의 모든 침입자, 혹은 프로테스탄트 당국이든 무엇이든, 특히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루터 교회와 영국, 스코틀랜드의 현재의 과장된 권위들과 교회들, 그리고 아일랜드와
미대륙과 다른 곳들에 현재 동일하게 세워진 조직들을 대적하는 로마카톨릭 교황의 교리와 그의 거룩한 권리
그리고 유전을 지켜야만 하며, 지킬 것이다.
또한 신성한 로마의 성모교회를 반대하며, 자신들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과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대항할 것이다. 나는 지금 프로테스탄트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이름을 딴 나라들, 왕들, 왕자들에대한 충성 혹은
그들의 법령들, 행정관들, 혹은 사령관들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더 나아가 선서하기를, 영국, 스코틀랜드의 교회들, 칼빈주의자들, 위그노파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혹은
자유주의자들이라는 이름의 교리들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며 그것들은 스스로 파멸된 것들이며,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 자들도 동일하게 비난받아야 한다.
나는 더 나아가 선서한다. 나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아일랜드, 혹은 미국, 혹은
내가 가게되는 어느 나라나 아무 영토 안에서, 내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거룩하신 분 모두, 혹은 그 대리인중 누구라도
협조하고, 협력하며, 조언할 것이며 이교 프로테스탄트들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교리들을 근절시키고, 모든 그들의
위선적 세력들과 왕권들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 서약하고 선서하기를, 내가 제거됨을 무릅쓰고, 어떤 종교가 이교라고 판단될 때, 어머니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교도들이 나를 신뢰하도록, 때때로 비밀을 유지하고, 어머니 교회의 대리인들의 충고들을
은밀하게 간직하며, 상황에따라, 직접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대화상으로나, 서면으로나 누설되지 않도록
비밀을 유지하면서 당신, 영적 아버지 혹은 이 신성한 수도회의 누군가가 나에게 지시하거나 명령하거나 제언하는
모든 것들을 실행한다.
나는 더 나아가 서약하고 선언한다. 나는 어떤 나 자신의 의견이나 혹은 어떤 의지도 갖지 않고 혹은 어떠한 심리적
두려움도 품지 않으며, 심지어 시체나 시신처럼,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내가 교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
상급자들로부터 받은 모든 개개의 명령들을 복종할 것이다.
나는 내가 파송되는 세계의 어느곳, 북극의 빙하 지역, 아프리카 사막의 불타오르는 모래지역, 혹은 인도의 정글,
유럽 문명지역의 심장부, 혹은 아메리카 야만스런 미개인들의 야생 소굴이라도 갈 것이다. 불평하거나 투덜거림 없이,
그리고 나에게 하달되는 모든 명령들에 복종할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 서약하고 선서하기를, 나는 기회가 되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모든 이교도들, 프로테스탄트들,
자유주의자들과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키고 싸울 것이다. 지구상에서 그들을 전멸시키고 근절시키라고 지령받은
것들을 실행함에 있어 나이, 성별 혹은 조건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악명높은 이교도들을 목메달고
불태우고, 쇠약하게하며, 끓여죽이고, 채찍으로 치고, 가죽을 벗기고, 산 채로 매장해 죽일 것이다. 그 여자들의 창자와
자궁을 끄집어 내고, 그들의 신생아들의 머리를 벽에 처박아 죽일 것이며, 영원히 혐오스런 그 종족들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공개적으로 이와 같이 할 수 없을 상황에서는 나는 비밀리에 독이 든 컵으로, 목졸라 죽이는
끈으로, 강철 단검으로 혹은 납총으로, 이교도들의 사회적 조건이 어떻든, 이교도 개인 혹은 개인들의 명예, 계급, 위엄,
혹은 권위를 고려하지 않고 공개적이나 비밀리에 교황 혹은 거룩한 교회 예수회의 상급자들의 대리인들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을 때는 어떤 때에도 즉시 암살해 버릴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혼과, 모든 나의 힘을 바칠 것을 서약하며, 그 증거로써 내가 지금 받은 이 단도를
가지고 나의 피로써 여기 내 이름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거짓이었거나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연약해질 경우 교황
군대의 내 형제들과 동료 군사들은 내 손과, 내 발과, 그리고 귀에서 귀까지 찢어지도록 내입을 찢으며, 내 목과,
내 배를 째고 그 안에 염산을 넣어 태우고, 지상에서 내릴수 있는 모든 징벌을 내린다. 그리고 내 영혼은 영원히
지옥에서 사탄에의해 고통 받으리라!
나는 은혜로우신 성삼위일체와 내가 지금 받아, 실행하고, 신성불가침으로 내 신체의 일부분으로 지켜야할 은혜로우신
성체로 맹세하며, 내가 이 서약을 지킬 것을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모든 하늘과 영광스러운 하늘의 성체를
이 자리로 초청한다.
여기 증거로 나는 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성체를 받고, 나아가 내 자신의 피로써 이 단도의 끝으로 나의 이름을 쓰며
거룩한 수도회의 표면에 봉인한다."
(그는 수장으로부터 성체용 빵을 받고 그의 이름을 단도의 끝으로 그 가슴 상처에서 흘러나온 그 피를 적셔 쓴다.)
h 예수회의 교육
예수회는 회원들에게 성경도 못 읽게 하고 주입식으로 교리와 사상을 교육합니다.
또한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예의범절이나 친절한 에티겟, 화법까지도 교육받습니다.
예를 들어 여인들에게 칭찬을 하거나, 생일 선물을 하고,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환심을 사는 방법도 교육받습니다.
예수회가 돈 많은 미망인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정신적으로 제압하거나 수녀원에 보내 재산을 빼앗기 위함입니다.
* 예수회에서 배우는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회의 새로운 지부를 세우는 방법
2. 예수회 회원들이 국왕이나 왕자 혹은 유명한 인물들과 친분관계를 갖고 유지하는 방법.
3. 정부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과 예수회를 연결시키는 방법
4. 왕이나 유명한 인물의 고해신부에 대한 정보.
5. 다른 종교 단체나 성직자들을 관찰하는 방법
6. 부유한 과부들을 회유하는 방법
7. 과부의 자녀들을 종교적으로 교육시키는 방법
8. 예수회가 운영하는 대학 수입의 증가방법
9. 예수회 회원이 지켜야할 개인 사생활에서의 기준.
10. 예수회 회원들을 계속 예수회에 남아있게 하고 회원들 사이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11. 젊은이를 예수회에 입소시키는 방법
12. 수녀들이나 종교적으로 신실한 여자들에게 대하는 행동이나 규범.
13. 예수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일반적인 방법들.
h) 예수회에 대한 명사들의 경고
"나는 죽는다...제수이트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교황 끌레망 13세-
"매우 위험한 자들! 그들은 절대로 제국에서 용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나폴레옹 1세-
"진리의 우물에 독약을 탄 자들" -토마스 칼라일-
"제수이트들은 영원히 박멸되어야 한다." -교황 끌레망 14세-
옥스퍼드 대학 토론회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서방 세계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크게 위협하는 종교"라는
동의를구하는 가부투표에서 387명중 220명이 이에 동의하였다. -The Times"1960.1.29.
"제수이트들은 피의 행동에는 명수들이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제수이트...흑암, 잔인, 배반, 전재독재제, 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만약 미국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통하여 올 것이다." -죠지 워싱턴 대통령-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카톨릭교 사제들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W.K.클리포드 교수
2) 유럽의 예수회
a) 16.17 세기의 예수회
이탈리아에서 예수회는 남부의 나폴리와 북부의 파르마에서 번성하였지만 많은 물의를 일으킨 끝에 1606년
추방당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예수회는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우하였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나잇하르트(Neidhart)라는 예수회 신부가 수상인 동시에 수석 종교 재판장으로 국가의 전권을
행사했습니다.
국권을 장악한 예수회가 국고를 탕진하자 스페인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개신교도와의 갈등이 심했던 독일에서 예수회는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정부의 권력을 쥐고 개신교도를
핍박하였습니다.
재침례교도들에게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지 않고 수천명을 쇠사슬로 묶어 익사시키거나 화형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예수회는 페르디난드 국왕을 통해 끔찍한 방법으로 개신교도를 처형하였습니다.
헝가리에서는 예수회가 레오폴드 1세를 위시해 개신교도를 핍박하였으나 헝가리인이 반기를 들어 물러 섰습니다.
예수회의 활동이 독일지역에서 초래한 것은 종교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 무력한 정치, 정신의 타락, 도덕의 부패,
인구의 대량 감소와 독일의 황폐화 뿐입니다.
스위스에서 예수회는 17세기에 무리하게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다가 18세기에는 경고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사회 고위층의 고해신부를 장악했고,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아나갔습니다.
1620년 예수회는 카톨릭 교도들을 선동하여 개신교도 600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오늘날 스위스 헌법 51조에는 스위스 연방 공화국 내에서 예수회의 어떠한 교육적 문화적 활동을 금지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폴란드의 경우가 가장 심각한데 온건한 역사가조차 폴란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예수회에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폴란드 내에는 수백만의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예수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고 카톨릭의 충성을 다 바쳐야 하는 정치의
틀 속에 국민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은 반수가 카톨릭 교도였고, 아일랜드는 완전한 카톨릭 국가였습니다.
예수회 회원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몰아내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설교를 하거나 성찬식을 베풀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하면서 전국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추방됩니다.
예수회는 여왕과 성공회에 대한 악성 팜플렛을 비밀리에 제작·배포하다가 발각되었고, 캠피온 신부가 국가 반란죄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국왕을 끌어들여 에딘버러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합니다.
스페인 무적 함대를 통하여 영국을 위협하였으나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이를 극복했습니다.
영국에서의 예수회 세력은 크롬웰(Cromwell)의 등장으로 더 큰 힘을 가지게 된 유대세력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찰스 2세를 통해 부흥을 꾀하다 민중의 분노로 오히려 5명의 신부가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회는 전에 영국에서 휘두르던 권력을 다시 장악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임스(James) 2세의 치하에서 예수회는 저메인(Germain) 신부(주2), 후계자인 콜롬비에르(Columbiere) 신부를
통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회는 제임스 2세를 통해 발판을 마련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 가고, 모든 예수회 회원은
투옥되거나 추방되었습니다.
영국 왕위는 프로테스탄트에게만 물려준다는 법률이 제정된 후에 예수회 외교관들의 행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예수회는 국민의 1/7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상류층에 파고 들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회는 귀족 가문의 힘을 빌어 1572년 성 바돌로매의 개신교도 대 학살을 주동하였습니다.
예수회는 종교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앙리 3세를 암살하였지만, 주동자인 예수회 회원 귀나르(Guignard)는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1592년 앙리 4세와 1594년 쟝 샤뗄 국왕의 암살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국왕으로부터 프랑스에서
추방되게 됩니다.
예수회는 루이 14세 때 국왕을 포섭하여 재기하여 권력을 장악했고, 개신교도를 핍박하였습니다.
예수회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개신교도를 고문하여 개종시켰고 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회가 개신교도를 핍박하자 수십만명의 고급인력이 프랑스를 빠져 나갔고, 프랑스는 쇠퇴하게 됩니다.
예수회는 18세기가 되서야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습니다.
b) 예수회의 교육
예수회는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입식 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신학대학 후버 교수에 의하면 "로욜라에게 성모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종교적 헌신의
근원이었으며, 예수회에 대대로 전수되었다. 예수회의 진정한 종교는 성모 마리아 숭배다."라고 하였습니다.
로욜라는 자신이 영성훈련에 돌입할 때 성모 마리아가 영감을 불어 넣어 준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많은 예수회 회원들이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그녀의 품에 안깁니다.
천주교 주보에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란 구호가 적혀 있는데 이는 1845년 피오 9세에 의해
교리로 채택되었으며 예수님의 신성을 성경에 근거 없이 마리아에게까지 확대한 것입니다.
예수회는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유품을 만들어 내었는데 미카엘 성당에는 마리아의 옷자락, 머리카락,
머리빗 등이 성물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자끄 뽕따뉘 신부는 성모마리아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배리(Barri)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일백가지 헌신으로 천국의 문이 열린다.' 라는 제목의 책에서
조석으로 성모 마리아를 묵상하고, 천사들로 하여금 그녀를 찬양하게 하고, 마리아의 상징인 묵주를
항상 갖고 다닐 것 등을 권장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을 보장하고, 악마로부터 영혼을 지켜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회의 주입적인 교육은 학문의 자율적인 발전을 간과시킴으로 경직되 형식화 되게 됩니다.
따라서 시대의 따른 학문적 발전에 부응하지 못함으로 점차 도퇴되게 됩니다.
16세기의 예수회의 사상은 진보적인 면이 많았으나 18세기부터는 시대에 뒤쳐지게 됩니다.
c) 예수회의 정치 참여
예수회 회원들은 고해신부로 각 국의 상류층에 접근해 정치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7세기에 신부 나잇하르트(Neidhart)는 스페인의 수상이자 종교재판소장으로 정권을 장악했고,
페르난데스(Fernandez) 신부는 평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라 셰즈(La Chaise) 신부와 그의 후계자들은 프랑스에서 각료직을 맡아 수행하였고, 페트르 신부는 영국의
장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대중의 기호에 부응하기 위해 고해소도 편법으로 운영했습니다.
원래 예수회는 명백한 위선과 범죄를 각종 변명과 억지로 넘기는 궤변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고해성사에서 죄를 고백한 여자는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간통죄를 범하여도 법정에서 당당히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부들은 중죄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모호한 용어 사용', '자기 변명', '상대적 진리' 등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수도사나 성직자가 예수회를 비방한다면 살해해도 무방하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국왕을 암살하는 일도 경미한 죄로 여깁니다.
예수회는 적대자나 탈퇴자를 거리낌 없이 제거할 정당성을 확립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궤변 중 하나를 보면 '만일 신부가 여인을 범하였고, 그 여인이 그 사실을 공개한다면 그 신부의
명예는 더럽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부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그 여인을 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회는 궤변을 통해 자신들의 악행을 선한 행실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d) 예수회의 붕괴
예수회는 유럽 여러 국가에서 번성하였으나 과학, 학문의 발전과 자유사상의 보급은 예수회의 지배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회의 활동은 국익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예수회 신부들은 환전, 섬유산업, 식민지 교역, 흑인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 경영 등 종교와 무관한 경제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해외 선교에 힘을 기울인 예수회는 피 정복민을 수탈하는 각종 경제활동에 참여하였고, 지금도 북 아프리카의
가장 부유한 지주는 예수회 신부입니다.
멕시코에서 그들은 은광과 설탕공장을 운영하였고, 파라과이에서는 차와 코코아 농장과 카페트 공장을
소유하였고, 소를 키워 매년 8만두씩 수출하였습니다.
팔라폭스(Palafox) 주교는 1647년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남 아메리카의 모든 부는 예수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들은 50%, 100%의 고리로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회의 탐욕과 부정, 음모와 권력장악은 어느 곳에서나 적의와 증오를 유발시켰습니다.
그 결과 예수회는 18세기 중반까지 30여 차례의 추방을 당했습니다.
예수회를 가장 먼저 추방한 곳은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예수회와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에서 영토 분쟁을 하였고, 1757년 폼발 수상은 예수회 고해신부를 쫓아내고,
예수회의 전도를 금지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762년 4월 6일 예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영장을 발부하였습니다.
"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 온 단체이다."
결론적으로 예수회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를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예수회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에 귀속되었으며, 예수회 회원들은 예수회 서약을 철회하고, 프랑스
목사의 일반적인 규칙을 따를 것을 맹세함으로써 겨우 추방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파라과이의 예수회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고,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마저도 식민지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 모든 예수회의 조직과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스페인에 있던 6000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교황의 판단에 맡긴다는 친서와 함께 교황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이 상륙하려 하자 대포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여러 곳을 떠돌다가 결국 코르시카 섬에 정착했습니다.
교황 클레멘트 13세는 예수회의 처벌을 요구하는 여러 국가의 탄원을 받아드려 예수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독살 당합니다.
클레멘트 14세는 결국 여러 국가의 압력에 굴복해 1773년 예수회의 해산 교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예수회 총재 리키 신부는 앙게 성에 감금되었습니다.
예수회의 재산이 몰수되자 예수회는 이에 반항하여 교황을 비난하는 홍보 책자를 발간하는 등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예수회를 탄압한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결국 1774년 9월 22일 독살 당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추방당한 예수회 회원은 호의적인 러시아로 몰려들어 군대와 귀족 사회를 선동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위협하였습니다.
급기야 짜아르가 직접 나서 1815년 12월 20일 예수회를 추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회는 1814년 교황 피오 7세에 의해 재창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서방 세계에 발을 붙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e) 예수회의 재기 (19세기)
클레멘트 14세는 예수회가 해산되고 나서 "나는 나의 오른 팔을 잘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교황은 세계를 지배하는데 있어 필요한 정치적인 조직인 예수회가 없으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피오 6세와 피오 7세는 예수회의 권한을 점차 회복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예수회를 매우 위험한 존재로 보고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정이 복구된 후 예수회는급성장 하였고, 전국 곳곳에 개신교도와 맞서 싸우자는 기념물을 세웠습니다.
예수회 회원들은 또 다시 가는 곳곳마다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19세기에 예수회는 자유주의자들과 충돌을 빚어 1834년에 포르투갈에서, 1868년에 스페인에서, 1848년에
스위스에서, 1872년에 독일에서 , 1901년에 프랑스에서 또다시 추방당했습니다.
3. 예수회의 동양 선교
인도에서 로마 카톨릭 포교는 하층민 사이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드노빌리(Robert de Nobili)가 1605년 바라문(Brahmon; 인도의 사성중 최고위의 승려계급)을
포교하기 위해 그들의 기장(記章)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고 1623년 그레고리 14세에 의해 인가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선례를 따르는 신부들은 바라문 개종자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하여 바라문들이 하층민에 대한 포교와
성례전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한 새로운 카스트 제도를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로잘리아(Rosalia)의 주교와 노베르트(Norbert)에 의해 로마 교황청에 보고된 이 시도는 1645년 이노센트
(Innocent) 10세의 교서에서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비난당했으며, 1669년에는 클레망(Clement) 9세, 1734년과
1739년에는 클레망 12세, 1745년 베네딕트(Benedict) 14에게 거부당했습니다.
똑같이 9명의 교황들에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부당한 중국식 선교방법은 1744년 베네딕트 14세의 교서에
의해 마침내 허락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회 포교사들이 새로 만든 미사의식들은 결국 카톨릭에 힌두이즘을 융합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700년 교황의 교서에 반대하던 예수회 포교사들은 중국황제로부터 예수회 포교사들이 행하는 의식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령을 얻어냈습니다.
4. 예수회의 기독교 박해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s)가 지휘한 종교재판소(Inquisition)는 원래 예수회가 만들었으며 그들이 종교재판
때 사용하던 악명높은 고문 방법도 예수회가 고안한 것들입니다.
1545~1546년 사이에 포르투갈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한 사람은 로욜라 자신이였으며, 1655년 포루투갈
종교재판소의 소장은 예수회 회원이였던 니타르드(F. Lithard) 추기경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곳곳의 종교 재판소와 개신교도의 탄압, 학살, 고문, 개종은 거의 예수회가 담당했습니다.
5. 교황청과 예수회
예수회는 교황청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보호막이 됨으로써 상호 의존적이고 공생적인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회가 각 국에서 물의를 일으켜 쫓겨나자 교황청은 이들을 탄압했고, 예수회는 교황청을 음해하고,
교황을 암살하면서 이에 맞섰습니다.
교황청과 예수회 자신의 이익을 최 우선시 하는 권력집단이고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견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세기 들어서 예수회는 '하나님의 여인들'이라는 여성단체를 만들어 많은 교사와 기숙사를 설립함으로써
세력확장에 나섰습니다.
예수회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도 심혈을 기울여 예수회의 제안으로 1854년에 성모 마리아의 '무염 잉태설'
(원죄 없이 잉태)이 교리로 발표되었고, 프랑스 등의 성모 마리아 출현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1870년 바타칸 공회를 통해 믿음과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오류성'이 선언됨으로써 교황의
위상과 권위도 높아졌습니다.
교황을지지하는 예수회는 점차 교황청을 장악했고, 마침내 지배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유행어 가운데 '교황의 펜대는 예수회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회 회원 중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점입니다.
예수회 자체가 프리메이슨의 신비주의적인 영성훈련과 사상, 조직을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회와 프레메이슨은 서로 다른 사상과 기반을 지닌 권력집단으로 때로는 협력하지만 언젠가는
굴복시켜야 할 적입니다.
한편 요한 바오로 1세의 급작스런 죽음도 프리메이슨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1984년 6월 영국에서 출간된 신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는 요한 바오로 1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 바오로1세는 즉위한 후 교회 사상 유례없는 대개혁을 결단하려고 했습니다.
1978년 9월 28일 오후 5시 30분 바티칸 교황청의 국무장관인 잔 비로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1세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바로 추기경은 교황 자신이 조목조목 쓴 인사 이동 목록을 전해받았고, 교회사상 없었던 많은 해직
대상자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명단에 실렸던 사람들은 바티칸 국무장관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 로마 부주교 우고 볼렛티 추기경,
바조 추기경, 바티칸은행 총재 폴 마칭쿠스 주교(현재 대주교), 조반니 베네리 추기경 등이었는데 이들 전원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프리메이슨의 단원이라는 것입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본 비로 추기경도 바티칸 내부의 프리메이슨 중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바티칸 내에 침투되어 세계통일을 꿈꾸는 프리메이슨을 일거에 제거하려고 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봉착, 결국 교황 즉위 3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6. 2차 세계대전과 예수회
a) 1차 세계 대전
20세기 초 유럽의 강대국들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로 연합하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정교회) 등이 연합하였고, 교황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페인
정도였습니다.
동 로마제국에서 발현한 그리스 정교는 발칸반도에서 번성하였고, 슬라브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는 교황청과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정교회는 러시아 짜르의 후원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응징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연합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프랑소아 패르디난트(Francois-Ferdinand)가
사라예보에서 마케도니아의 학생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 일은 세르비아 정부와 아무 관련이 없었으나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랑소와 조셉에게 충분한 전쟁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예수회 회원인 오스트리아 각료들과 교황청은 조셉 황제에게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을 이용하여 유럽을 정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옛 권력을 회복하려
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우선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독일 연합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수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독일이 패배했고, 이로 인해 교황청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습니다.
따라서 1919년 6월 연합국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조인할 때 1차 대전을 조장한 바티칸은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습니다.
b) 예수회의 파시즘과 나치즘 지원
1차대전의 실패로 교황청은 큰 손실을 입었는데 친 로마적 합스부르크 왕가는 무너졌고, 유고의 정교인들은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러시아는 공산화되어 무신론자가 되었고, 독일은 완전히 파멸했습니다.
예수회는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각 국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샤를 황제를
지지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를 후원하여 정권을 잡게 하였습니다.
무솔리니는 전체주의자로 1차대전 제대군인들을 모아 파시스트당을 창립하였고, 1922년 10월 로마진군이라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정치, 문화, 경제를 개혁해 독재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타키 벤추리 신부는 예수회 회원으로 당시 무솔리니의 고해신부였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7억 5천만리라를 무솔리니에게 주고 바티칸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며 나치즘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히틀러가 전체주의적 나치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회복하자 바티칸은 또 다시 독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치즘은 반 민주주의, 우생학적 인종 우월주의, 독일민족 지상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독재적 정치이념입니다.
1차 대전 이 후 예수회 총재가 된 할케 폰레도코브스키는 오스트리아, 체코,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바이에른(독일 남부) 등을 포함하는 중부와 동부 유럽의 카톨릭 국가 연맹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중앙 제국은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하는데 동부는 공산주의로 무장한 소련이고, 서부로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혁명사상으로 뭉친 공화국 프랑스입니다.
바이에른(독일 남부)은 카톨릭 국가이고 히틀러는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황청은 나치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히틀러는 중대사안에 대해 교황청과 상의하거나 인가를 받았습니다.
1924년 교황청과 바이에른은 협정을 맺었고, 베를린 주재 교황 대사인 파셀리는 1932년 7월 20일 반정부 시위를
주동하고 군의 개입을 막음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당시 독일의 중심)을 붕괴시킵니다.
예수회는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 풀다(Fulda) 회합에서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가 발표한 선언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신성한 카톨릭 교리에 의거하고, 교회의 사명과 권리를 보장)을 받아드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톨릭 정당을 이끄는 스투르조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독일에서는 카톨릭
중앙당(Zentrum)의 대표인 폰 파펜의 지원으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교황청의 외무대신 파셀리 추기경은 히틀러에게 반 카톨릭 종파를 척결하도록 건의했습니다.
히틀러는 1933년에 유대인과 자유주의자 4만명을 45개 수용소에 분산 수감하였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공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지지 발언을 하였습니다.
파시스트는 1939년 알바니아도 침공했는데 이는 카톨릭 세력을 넓히려는 교황청의 계획에 부합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스페인에는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스페인의 혁명군에게 군자금, 전쟁물자, 항공기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교황은 스페인 공화국의 수반을 파문하고, 교황청과 마드리드 간의 영적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바티칸은 내란이 끝나기 20개월 전인 1937년 8월 3일 혁명군 프랑코 정부를 인정하였습니다.
c) 2차 대전의 발발과 유럽의 카톨릭화
독일 뮌헨에서 퍼레이드 하는
오른쪽의 히틀러와 왼쪽의 무솔리니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의회에서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공표하여 지지를 받는 모습.
왼쪽부터 히틀러(A. Hitler),
괴링(R. Goering), 괴벨스
(P. Goebbels), 헤스(R. Hess).
1930년대의 경제 공황과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 블록화는 식민지가 부족한 독일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1937년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3국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소련에 대항하였습니다.
1937년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함으로써 중부 유럽의 세를 넓혔습니다.
히틀러는 산업을 발전시켜 전 후 보상금 등으로 피폐한 경제를 일으켰고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였습니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와의 영토 협상이 결렬되자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은 발발합니다.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등은 카톨릭 신자였고,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항상 교황청과 협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교황청이 힘을 모아 유럽을 정복하려 했던 전쟁입니다.
교황청은 2차 대전을 전후해서 독일의 무력을 이용해 비 카톨릭 교도를 제거하고, 세력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병합 때 비엔나의 대주교인 이니찌(Initzer) 추기경은 "히틀러 총통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으므로 신도들은 독일 제국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해 독일군을 환영했습니다.
독일과 병합된 체코 의원 중 일부는 카톨릭 사제였고, 그들은 교황청의 허가로 공직을 겸할 수 있었으며,
그들 중 한명은 국가 원수로 임명이 되었고, 최고 영예인 철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1941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란 위성국을 만들었고 루이 바소
(Louis Barthou)라는 테러리스트를 수상으로 앉혔으며, 크로아티아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 정교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이 결과 30만명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5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24만명의 정교회 신자가
고문과 협박으로 개종되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경찰총장 등 공직은 카톨릭 사제들이 차지했으며, 가장 끔찍한 수용소인 자세노바크(Jasenovac)의
소장인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tch) 또한 사제 출신입니다.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상이 된 예수회 회원 티소(Tiso) 경은 "카톨릭 정신과나치주의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세계를 개조하는데 힘을 모았다."고 선언했습니다.
1940년 6월 바티칸은 라디오로 티소의 선언문이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고 발표하였고, 티소 정권은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개신교도에 대해 탄압을 가했고, 정교회 신자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는 F.N.C.(카톨릭 국민 연합회)가 조직되어 드 카스텔노(de Castelnau) 장군이 선임되었고,
3백만명의 지지자가 참여하였습니다.
78세의 이 군 장성은 파시스트적인 교회 선전 전략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F.N.C.는 카톨릭의 행동대원으로 예수회 신부들이 창설에 일조하였습니다.
예수회는 '예수 성심회'를 통하여 F.N.C.를 결성, 조직하였습니다.
교황 피오 11세는 "카톨릭 행동대는 신념에 찬 사도들이다."라고 하며 F.N.C.를 지지하였습니다.
또한 프랑스 파리의 카톨릭회 회장 보드릴라르 추기경은 "히틀러의 전쟁은 유럽 문화를 수호하고자 착수한
숭고한 사업이다."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d) 히틀러 측근과 예수회
대주교 세자르 오르세니고(Cesare Orsenigo)
주독 교황청 대사가 1936년 1월 베를린에서 열린
공식 만찬에서 히틀러와 담소하고 있다.
1934년 새로운 성직자-파시스트 정관 선언 입회한,
작은 돌푸스(Dollfuss-오스트리아 독재자)와
오른편의 인니체르 추기경(Cardinal Innitzer)
스페인 카톨릭 성직자들이 1937년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에서 파시스트들(독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스페인 시민 전쟁동안 카톨릭 “개종작업”
(신부들이 대포와 총을 들고 시민을 사살하고 있다).
히틀러는 교황청과 반 카톨릭주의자들을 섬멸하기로 조약을 체결하고, 자유주의자와 유대인을 가둘 수용소를
건립했습니다.
그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학살당했습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조직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유도해 갈 기관을 설립할 것이며,
그 기관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선동하며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SS(독일 친위대)는 예수회의 영성훈련과 규칙을 본받아 히믈러가 조직하였습니다.
SS의 조직은 카톨릭 교회의 성직제와 거의 유사하며, 베벨스보르크(Webelsbourg)라는 SS의 본부는
'SS 수도원'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한 교황의 밀사 폰 파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제 3제국은 교황의 숭고한 정신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으로 옮긴 첫 번째 세계적 권력이다."
여기서 '실천으로 옮긴다'란 말의 의미는 반 카톨릭교인을 척결한 것을 의미하며 UN의 공식 집계로 무려
2천 5백만명이 수용소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폰 파펜은 나치와 교황청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며, 교황이 제시한 안을 나치 수뇌부가 받아드리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치 정권의 열렬한 선전장관이었던 조셉 괴벨스는 예수회 대학에서 신학을 교육을 받았고, 로욜라가 주장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자 나치 독일의 2인자인 히믈러 역시 예수회 출신입니다.
히틀러는 "나는 히믈러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로 보인다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친위대와 게슈타포와 독일 경찰의 사령관인 히믈러가 가장 성직자다운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히믈러의 부친은 카톨릭 학교 교장이있고, 형은 수도사이며, 삼촌은 예수회 회원이었습니다.
예수회의 총재 폰 레도코브스키 백작은 예수회와 독일 사이에 작전을 수행할 첩보기관을 기획합니다.
그 결과 친위대의 중앙 안전부 안에 한 기관이 창설되었는데 대부분의 요직은 검은 제복을 입은 성직자들이 차지했고,
최고 요원 중 한 사람은 예수회 신부 히믈러였습니다.
히믈러는 전쟁이 끝난 후 도망다니다가 1960년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 당했습니다.
e) 죽음의 강제수용소와 바티칸
아유슈비츠 수용소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독일 예나의 수용소
독일 바이마르의 시체소각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설치한 강제수용소를 KZ(Konzentrationslager)라고 합니다.
KZ는 A.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이 구금·강제노동·살육을 위하여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으로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防衛令)’에 의하여 그 해 수십개 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공산당원·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 등 모든 반(反) 파쇼주의자와 나치스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을 일반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켜 말살하고, 나아가서는 전국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반대파나 교도소에서 만기석방된
반 파시스트의 대부분이 아무런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SA(나치스돌격대), SS(나치스친위대) 등에 의하여 수용소로
끌려가 기한도 없이 구금되었습니다.
1934년부터 히틀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SS가 수용소의 관리를 맡아, 정치적 반대자에 이어 인종적·종교적 이유에서
유대인과 불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을 구금하고, 나중에는 일반범죄자·변절자 등도 수용하였습니다.
개전(開戰) 후, 파시스트와 그 배후의 융커들은 폴란드와 소련의 일부를 독일인의 이주지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지역의 원주민을 전멸시키려고 그들을 점령지구에 설치한 절멸(絶滅)수용소에 구금하는 등, KZ는 타국민 특히
슬라브인·유대인의 조직적 근절시설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 실례로서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루블린 근교 마이다네크의 가스실(室), 시체소각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KZ는 처음 수용인원 1,000명 안팎의 소규모 시설로서 수십 개소에 산재해 있었으나, 그 뒤 세계여론이 두려워
작센하우젠을 비롯한 5~6개소의 대수용소로 통합하였고, 1938년 H.W.괴링이 유대인의 절멸을 제의한 이래,
1100만명의 유럽거주 유대인 중 약 600만 명이 학살되었고 그 중 180만명이 어린이였습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의 도시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건립되었습니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히믈러의 명령 아래 나치 친위대(SS)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습니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고, 1945년 1월까지
나치스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수용소를 40개의 캠프로 나누었는데, 피수용자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전염병으로 죽거나 또는 ‘욕실·청결·건강’이라는
등 거짓 푯말이 붙은 독가스실로 연행되어 학살되었으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살된 자의 금니·모발 등은 자원으로서 회수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살은 히믈러가 지휘하는 SS와 게슈타포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1942년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프랑스의 카톨릭과 개신 교회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카톨릭
당국자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카톨릭 람바흐 학교를 다녔고, 수도원 성가대원이었으며, 나치의 기장인 철 십자가는 수도원 원장
하겐(Hagen) 신부의 전령관의 표지에서 따 온 것입니다.
"나는 죽는다...제수이트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교황 끌레망13세-
"매우 위험한 자들!그들은 절대로 제국에서 용납되지 않을것이다" -나폴레옹 1세-
"진리의 우물에 독약을 탄 자들" -토마스 칼라일-
"제수이트들은 영원히 박멸되어야 한다" -교황 끌레망14세-
옥스퍼드 대학 토론회는"로마 카톨릭교회는 서방세계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크게 위협하는 종교"라는 동의를 구하는
가부투표에서 387명중220명이 이에 동의하였다.The Times"1960.1.29.
"제수이트들은 피의 행동에는 명수들이다."
"포교하겠다는 미명 하에 날마다 우리 영토로 상륙한 로마 카톨릭 사제와 성직자들이 학교와 병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남북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안다면 힘을 합쳐 그들의 손아귀에서 권력을 박탈할 것이다. 그들은 교황이나 유럽
전제군주의 대사로서 질서를 해치고 우리 국민의 마음을 헌법과 법률에서 멀어지게 하며, 아일랜드·멕시코·스페인 등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무정부 상태를 도모하고 있다."
-아브라함 링컨-
"마피아와 여러 비밀단체들이나 정보기관이 한 통 속이 되고, 거대 기업들이 바티칸과 손을 잡고, 비밀스러운 목적을
위해서 거액의 돈이 뿌려지고, 정치와 종교와 첩보와 금융과 조직범죄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져서, 마침내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아브라함 링컨-
"내 목숨을 노리는 그토록 많은 음모들이 꾸며졌었기에, 그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특히 거의 대부분이
숙련된 로마 카톨릭의 살해자들, 명확하게 예수회에의해 훈련된 자들의 손에서 꾸며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회는
피를 흘리는 임무에 매우 전문적이어서, 헨리 4세는, 그들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리고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희생되었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내가 벗어나는 것은,
제퍼슨에게 쓴 교황의 편지가 나의 가슴을 찌르는 백만 비수를 갈게하였기에, 기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들의 죄들로 인해, 그가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의 입술에서
나오는 어떤 불평도 듣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내가 내 나라를 위해 쓰러질 때, 그분께서 나의 불평을 듣지 않으시길,
다만, 나는 소망하고 기도드린다."
-아브라함 링컨-
"제수이트...흑암,잔인,배반,전재독재제,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만약 미국이 자유를 박탈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체제를 통하여 올것이다." -죠지 워싱턴 대통령-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카톨릭교 사제들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것이다."
-W.K.클리포드 교수
"나는 제수이트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더욱 가장을 하게 될 것이므로 인쇄업자, 작가, 출판업자,
학교 교사 등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수장도 받아들일 것이다.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면
바로 이 로올라 협회이다." (John Adams, 1816)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조직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유도해 갈 기관을 설립할 것이며, 그 기관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선동하며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히틀러-
'나폴레옹의 세인트 헬레나섬 포로 생활에 대한 기억'(제 2권)이라는 책에서, 프랑스 장군 Montholon은 예수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회는 종교 단체(order-질서)가 아니라 군대 조직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군대의
장군이지, 단순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아니다. 그리고 이 조직의 목적은 권력이다. 가장 전제적으로 행사되는 권력
절대권력, 우주적 권력, 한 사람의 의사에 따라 전세계를 통치하는 권력. 예수회 사상은 최고로 절대적이고 전제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거대하고 가장 엄청난 폐단이다.'
'우리가 카톨릭 교회와 일치되어 한마음으로 함께 하기위해서는, 만일 카톨릭 교회가 어떤 사물을 검다라고
확정한다면, 우리의 육안으로 희게보이는 것도, 그것은 검다라고 단언하는 그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로욜라-
* 참고 서적: 예수회의 비밀역사 (에드몽 파리, 말씀보존학회)
* 참고 사이트: http://www.biblenews.co.kr/
(이 곳의 만화간증에서는 예수회를 탈퇴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의 간증을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의 세 가지 계획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첫 번째: 공갈, 협박, 암살(Jesuit을 통한 공공연한 비밀).
두 번째: 에큐메니컬(거의 모든 개신교회가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연합이 아니라 가톨릭의 세력에 흡수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개신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한 세 번째 계획이 바로 <성령운동>인 것이다. “<성령운동> 이것이 로마로 가는 다리가 되고 우리는(가톨릭) 모든 개신교도들을 환영한다.” -前 예수회(Jesuit) 신부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의 간증 中-
이러한 성령운동이 개신교회에서 시작한 운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가톨릭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섬뜩 놀라게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바티칸이며 이미 그 세력들은 개신교의 각 신학대학과 언론을 장악하고 로마 가톨릭을 <같은 복음>을 가진 한 형제인 것처럼 꾸며 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과 연합>이라는 미명아래 모든 종교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것이 찬란했던 중세시기와 같은 영화를 우리에게 재생시켜 줄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개인과 개신교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종교개혁은 인간적 성공의 요람이 될 수 있다.
-종교개혁을 배워서 우리가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종교개혁이 있다면 무엇일까?
-제 2의 루터, 칼뱅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개인과 개신교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종교개혁은 인간적 성공의 요람이 될 수 있다.
-종교개혁을 배워서 우리가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종교개혁이 있다면 무엇일까?
-제 2의 루터, 칼뱅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①종교개혁의 유산을 간직하기 위해서이다.
-종교개혁의 유산은 무엇일까?
-성공의 요람으로 바라볼 것인가? 종교개혁은 인간적 성공의 요람. 문화, 교육, 법치, 노벨상 등 모든 영역에서 세계의 리더 역할을 했다. 결국은 잘 잘기 위함이다(X). 그건 아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삶이 있는데 그러한 삶에 종교개혁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스라엘 민족 신이 우리 민족 신이 되기를 바라는. 부극강병, 일제, 공산주의 탄압 등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바라는(X)
-유산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지 않는 믿음.
-종교개혁의 구원신학과 그에 따른 은총의 영성을 내 삶에 반영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양식
-소금과 빛
-구원신학과 영성
②반성적 고찰
-결국 서구 나라들이 가는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유혹(X)
-서구의 근대사를 반성적으로 고찰하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는 것은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 이러한 사상이 백인으로 넘어가 서구 문명이 이 길을 걸었다.
-세속화: 이러한 것들이 무너지는 역사의 한 과정. 성직자 중심의 세계가 평신도 중심의 세계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사회(X)
-교회의 세속화 또한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교회 중심의 사회에서 일반 사회로 바뀌는 것. 국가, 대학, 사회, 조직, 통치, 법
-성직자 중심 체제는 세속화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는 체제 자체가 세속화된 체제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근대는 다 세속화 과정이다.
-모든 기독교 중심의 통치이념들이 일반 세속 통치 이념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19C말, 20C초의 정교분리.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세속화이다.
-백인들이 그런 식으로 기독교국가화 했던 것들이 근대의 가정 속에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서 민족 신(하나님)을 모신 상태에서 자행했던 일.
-우리는 왜 미국의 기독교를 고찰 없이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들이 저지른 500년 동안의 저지를 만행들을 보고 반성한다.
-기독교대학의 세속화
-기독교적 세계관
-일반대학 안에서 기독교 정신을 어떻게 구현 시키는가가 쟁점이 된다.
-서구 문명의 잘못된 행태들을 반성적 고찰을 해야 한다.
-아메리카, 남아공, 호주, 유럽 안에서
③우리의 고전을 가지고 헤브라이즘 계시를 가지고 융합시키는 것.
-헬레니즘+헤브라이즘
-동양문명+헤브라이즘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영어로 해석하는 것
-헬리어와 히브리어를 한글/한문으로 해석하는 것
-한국말로 중국문학을 더욱 탁월하게 해석할 때.
-한국의 르네상스+크리스챤 르네상스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 내야 한다.
-플라톤, 아르스토텔레스의 자리에
-그러한 새로운 컨텐츠를 학문뿐만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메시지로 울리게 될 때.
-Korean C. R.
-인식에 있어서도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서양 고전과 동양 고전을 같은 것.
-종교철학, 불교철학, 도교철학, 유교철학.
-서양의 이교철학과 동양의 이교철학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역할을 했다.
-공통성, 차이성,
-인식의 전환
-분석: 톡착화 신학을 끌어 오면서 어떤 면에서 실패했는지, 문제가 있는지, 바르게 할 방법
-내가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폴로식인가? 디오니시우스적인가? 성악적인가? 성선적인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잘 간직하면서 한국적인 개혁신학을 만들어 간다.
-동양의 플라톤적인 것인 무엇인지? 같음과 다름.
-스토아적인 동향철학을 끌어오면서
-어떤식으로 전개할 것인가?
①인식의 전환
②분석
③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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