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10월 23일
재세례파의 정체성
이렇게 서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집단들을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서로 간의 많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가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이듯이 재세례파들 사이에 이와 유사한 핵심 요소가 발견될 수 있는가? 후브마이어의 <기독교 요리문답>(1526)은 재세례파의 조직신학 책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기원과 지역과 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톨릭도 아니요 프로테스탄트도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교회”개념을 성도의 교통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재세례파의 교회는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세례, 출교, 성찬, 물질 나눔이라는 4가지 표지를 갖는다.
재세례파는 내면(성령) 세례와 외면(물) 세례를 구분한다. 물세례는 신앙으로 회개에 이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에게의 복종, 그리스도와 형제자매를 위한 고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이동을 의미했다. 이렇게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이 “형제와 화해하기를 거부하거나 죄를 멈추는 일을 거부할”경우, 그는 출교를 당한다. 재세례파의 성찬 개념은 츠빙글리의 입장에 가까운 기념설이다. 이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 대해 빚진 사랑의 공적 징표와 증거”로서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서로를 위해 자신들의 살과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 이들은 철저히 성찬의 의미를 수평적으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새 교회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수립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서로의 물질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재세례파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sola scriptura를 공유한다. 후브마이어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권면하고 훈계하며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그의 거룩한 말씀의 빛과 광명에 의해서만 항해하는 법을 안다.”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도 인정한다. 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다. 재세례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영도 중요했다. 어쩌면 재세례파는 “성서만으로”보다는 “성서와 영이 함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과 문자와의 관계에서 이들은 자주 문자를 비약적으로 해석한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얻는 구원의 문제는 상당부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과 같으나 구원의 결과인 “보이는 열매”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로 하여금 후기 중세 전통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인간의 철저한 부패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 행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은 철저한 제자도의 삶을 추구하는 의지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믿었다. 이것은 흔히 성령시대를 예언한 중세 전통과 관련한다(일례로 피오레의 요하킴). 따라서 성서의 예언서 연구와 성령에 대한 강조는 재세례파에게서 두드러진다. 이따금 꿈과 환상을 통한 직접 계시의 거짓 논란과 부작용도 있었지만 재세례파는 성령의 계시적 능력에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위험성과 동시에 또 다른 영성을 보여주었다 사실 성서의 . 권위는 예언서를 예외로 만들 수 없다.
이와 같이 정리될 수 있는 재세례파의 신학적 정체성은 위에서 말한 세 유형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약간은, 때로는 심하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재세례파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형태로 고정되었다. 먼저 스위스 형제단은 그레벨 그룹에서 정치 신학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후브마이어를 거쳐 쉴라이트하임 신앙고백에 이르면서 분명한 흐름을 유지했다. 다음으로 남독-오스트리아 재세례파는 초반 덴크와 후트가 뮌처의 영향 하에서 운동을 이끌었으나 농민전쟁의 실패 이후 모라비아의 후터파가 스위스 형제단과 유사한 재세례파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마지막으로 북독-네덜란드 재세례파 역시 호프만의 강한 영향력에서 출발하여 끔찍한 뮌스터 사건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후 메노 시몬스와 그 후계자들인 메노파에 의해 재세례파의 정체성이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16세기에 루터파, 개혁파, 앵글리칸으로 구분되듯이, 재세례파 사회는 스위스 재세례파, 후터파, 메노파로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①시민권 포기
②절대 평화주의
③세상사의 비참여(desengagement)
-정치와 경제
-자급자족, 교육 참여 하지 않는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쿠아드라투스)
-제 3의 인종
-복음적 급진주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반체제 인사였다.
-새로운 통치론(군주론)을 가르침
-산상설교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론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 나라의 통치와 반대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개혁파는 이중국적자(이중시민권자)이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한계
취리히가 맨 먼저 종교개혁에 가담한 이후 연이어 베른, 바젤, 잔크트 갈렌이 종교개혁으로 돌아섰다. 1528년 1월 베른은 신학논쟁을 열어 진로를 결정하기로 하고 가톨릭 측과 종교개혁 측 사람들을 초청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처와 카피토,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석했고 파렐도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는 토론에서 승리한 종교개혁의 입장이 베른 당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뒤이어 잔크트 갈렌이 개혁 측으로 넘어왔고 이듬해 바젤, 비엘,샤프하우젠이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했다.
츠빙글리의 꿈은 컸다. 그는 전 스위스의 개혁을 이루고 합스부르크가를 몰락시키는 것이었
다. 이런 개신교 세력 간의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 때문에 그는 1529년 마르부르크로 가서 루
터와 성찬 문제를 조율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간략하고 분명한 요점>(1531)이
다시 한 번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1531년 10월 가톨릭 주
들의 선제공격에 카펠에서 취리히 군대는 패배했고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말았다. 카펠의 패배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은 서로의 경계선을 긋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불링거(1504-1575)였다. 브렘가르텐에서 태어난
그 역시 인문주의 출신으로 교회 수석 목사가 되었을 때 나이는 25세였다. 불링거의 여러 사
역 가운데 가장 탁월한 공로는 성찬 문제로 분열된 개혁파 교회들을 하나로 묶은 일이었다.
1536년 불링거는 바젤의 오이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인 미코니우스가 작성한 제 1 스위스 신
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다른 도시들을 부추겼는바, 취리히, 베른, 뮬루즈, 스트라스부르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 신앙고백은 성찬의 수평적인 해석으로 치우쳤던 츠빙글리의 상징설 내지
기념설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불링거는 제네바의 칼뱅과 오랜 기간 타협한 끝
에 1549년 <취리히 협정>Consensus Tigurinus에 이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불링거는 취리
히뿐만 아니라 스위스 전체와 나아가 나라 밖에까지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바, 그의 뛰
어난 또 하나의 공헌은 1560년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일이다. 이 신앙고백은 독
일의 팔츠(1566),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1566), 헝가리의 데브레첸(1567), 폴란드의 센도미르
(1570)에서 채택되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제네바의 칼뱅의 등장으로 빛이 가린다.
*개혁의 4대 흐름
①루터: 탈속 온건
-
②뮌처: 재속 급진
-불법적 개혁
③츠빙글리/칼뱅[개혁파]: 재속 온건
-근대를 장악하는 주도적 세력
④재세례파: 탈속 급진
-
VII. 장 칼뱅
*COR(Calvini Opera denuo Recognita)시리즈
-기독교강요, 주석, 교회관련 문헌, 교육과 논쟁서, 설교집, 서간집, 잡서.
*역사적 칼뱅 연구와 초기 칼뱅의 중요성
①유년기의 모친 사별:
-칼뱅은 자신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②몽테귀 콜레주의 영향:
-칼뱅은 루터와 같은 영적 위기를 경험했는가?
-신학 입문을 위한 가장 보수적인 학교
-에라스므스, 라블레, 로욜라
-아버지와 성직자와의 싸움으로 인한 아버지와 형의 개죽음
③회심 Conversio subita:
-칼뱅의 회심 내용은 무엇인가?
-시편 주석 서문(1557년): 갑작스럽게 회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칼뱅이 점진적으로 회심했다고 이해한다.
*인문주의 형성과 결실
①제네카의 관용론 주석(1532)-<칼작 I>
-에라스무스의 영향
-세나카를 선택
*신학자(독학) 칼뱅
①프시코파니키아(1534/1542)-<칼작 II>
-영혼불멸에 대한 논문
-헤브라이즘의 계시 이해
②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칼작 II>
③기독교강요(1536, 초판)
-에라스므스의 엔키리디온(그리스도의 삶)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기독교의 요점이 무엇인가?
-교리로 보았다.
-일종의 출사표.
-신민정부이론(국가론)
*절충주의의 수용
-문명과 계시의 재융합
-방텔, 쇼뉘, 바우스마, 코트레
칼뱅의 생애는 도시 이름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 도시들은 상당부분 칼뱅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곳들이 아니었다. 이미 태어난다는 것이 내 의지와 관계없으며 그것은 재능과 더불어 풍토적인 요소를 물려받는 일이다. 피카르디의 누아용. 그것은 모종의 기질을 타고 남을 의미한다. 칼뱅의 파리-오를레앙에서의 학업은 모두 부친의 신분 상승 욕구 및 자식의 미래에 대한 교육적인 포석과 관련된다. 사제로서의 생애를 위한 신학 예비과정, 고위직이 아니고서는 형편없이 가난할 수 있는 성직자의 길에서 경제적으로 득을 볼 수 있는 법학으로의 전환은 이 도시들이 칼뱅에게 주는 의미이다. 물론 칼뱅이 시민법을 공부하기 위해 택한 부르주는 교회법의 오를레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칼뱅이 부친의 죽음에 의해 해방된 감정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곳은 다시 파리다. 그의 두 번째 파리 체류는 인문주의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택한이 도시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회심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고국을 떠나게 했다. 회심—개종이 아니다—은 박해를 야기한다. 모든 종교개혁은 “회개하라”앞에 무심한 지도층과 관련한다. 칼뱅의 도피 과정에 나타난 여러 지역들—푸아티에, 앙굴렘, 네락, 등—은 무슨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네바는 칼뱅에게 영원히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제네바가 칼뱅을 확고히 붙들기 위해선 개혁자의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 체류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두 도시 모두 칼뱅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곳이 아니다. 제네바 첫 번째 체류가 파렐의 강권에 의해서라면, 스트라스부르의 부름인 “요나의 소명”은 부처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칼뱅이 본래 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을 꾸리기 위해 선택했던 스트라스부르는 진정한 목회적인 소명의 장소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제네바의 두 번째 부름은 개혁 세력들의 집요한 요청의 결과다. 이처럼 칼뱅은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된 개혁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아마 그가 처음 자유의 느낌을 받은 것은 부친의 죽음이 가져오는 학문과 직업 선택권과 관련되리라. 더 이상 사제도, 법률가도 그의 미래를 운명으로 묶어놓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목표는 에라스무스, 아니 그보다 뷔데와 같은 인문주의 학자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하지만 그가 결정한 최초의 학문적 성과물은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그의 “돌연한 회심”은 그 실패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이것은 그를 더욱 수동적인 인물로 만들었으리라. 그러나 비록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모친을 따라 가톨릭 영성에 젖었으며, 부친의 계획 속에서 학업을 했으며, 친구와 동료들의 강청에 의해 개혁자의 길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는 또한 매순간 자신의 의지의 선택 앞에 서야 했다. 그것은 신앙을 통한 자유의 새로운 이해로만 가능했다.
성장과 성직자 예비 교육
장 칼뱅Jea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 주교가 있는 도시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은 원래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사공의 아들로서 퐁-레베크 마을에서 살다가 사공의 노를 버리고 사무직의 붓을 들기 위해 누아용으로 이주하여 시청서기가 되었고 곧 주교와 교구성직자의 사업담당자가 됨으로서 시민계급에 끼어들었다(1497). 그의 어머니, 잔 르프랑은 누아용 시의회의원이 될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 중산층의 딸로서 일찍 세상을 떴다. 어린 시절 모친 상실은 칼뱅에게 생각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제라르 코뱅의 아들들은 누아용 대성당의 그늘에서 성장하고 주교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교회경력이 있어 성당신부에게 지불되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수입으로 그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장남 샤를르의 뒤를 이어 칼뱅도 11살 때부터 성직록 혜택을 받았다. 르네상스시기에 가족의 사회적 상승은, 흔히 일종의 장학금 제도의 역할을 하고 미래의 성직자들의 공부를 재정적으로 도왔던 성직록 제도를 거쳐 갔다. 장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523년 성직의 학업을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 파리의 라마르슈 콜레주에서 칼뱅은 “문법교사”이며, 불어사용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육학의 창건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마튀랭 코르디에를 만났으나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고, 곧 금욕주의와 정통신앙으로 알려진 몽테귀 콜레주에 등록하였다. 그는 1528년에 그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이는 문학 석사 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서 4~5년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아마도 루터파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파리에 오던 해(1523)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 장 발리에르는 이단의 혐의를 받고 화형을 당했다. 이듬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는 “밤의 환영의 형식을 한 대화”란 책에서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525년 메스Mets에서는 양털 소모직공이면서 평신도 설교자인 장 르클레르가 죽임을 당했다. 1526년 그레브 드 쟉크 파반느 광장에서의 사형집행은 모Meaux의 복음주의 운동에 아주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몽테귀 콜레주 시절의 칼뱅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 학교는 데보티오모데르나를 따랐으나 지나친 금욕주의와 스콜라주의에의 집착 때문에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학업 생활은 한나절의 공부와 아침 4시에 시작해서 밤 7시나 8시에야 끝나는 종교 일과와 더불어 빡빡했다. 칼뱅은 학교의 창설자였던 장 스탕동크의 꿈을 따라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나 인문주의를 접할 수는 없었다. 선생들은 “고대의 발견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위로하기는커녕 그것을 약화시킨다고 그에게 논증했다” 칼뱅은 롬바르드의 언설집에 근거한 신학 교육과 변증법을 배웠다. 선생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인 안토니오 코로넬 같이 명망 있는 선생이 있었다. 이곳에서 칼뱅은 고대 교부들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베르나르,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알았다. 아마도 그는 존 메어의 복음서 주석을 통해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유명론 학파의 논리학의 중요성을 강하게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사물의 언어 및 개념화와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예비 언어학의 형태였던 논리학 말이다.
데보티오모데르나의 <그리스도의 모방>은 칼뱅을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도피하려는 내면적 묵상으로 이끌었다. 이 시기는 육체의 경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가 “불쌍한 죄인들”에게로 향한다고 여겨지던 실증적 모습의 종교 실천의 시기다. 은총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스콜라 교리의 기초 위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의의 창조자가 될 수 있었다. 칼뱅은 매우 일찍 자신의 정체성의 와해를 겪고 혼란을 느꼈으나, 그래도 그것을 그나마 길게 끌어갔고 비교적 확신 내지는 확실성으로 일관했던 신자였다. 이런 경건은, 마치 항상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듯이, 공로에 의해 하나님을 “인자하고 인정이 많은 분”으로 만들려고 애썼던 경건이요, 훗날 그가 고백하는 “교황제의 미신”이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하나님에 대한 섬김에 매우 전념했다.”하지만 그의 자유의지는 결국 선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초기 칼뱅에게서 또 하나의 루터를 본다.
유명론의 낙관론적인 가르침은 칼뱅에게 “양심의 평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가 가르침 받은 것과 그 가르침대로 사는 방식 사이에서 모종의 골절 상태를 느꼈다. 훗날 하나님의 관용을 얻게 된 그는 인간들의 방식으로 이 관용을 매입하고자 했던 몽테귀의 교육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다. 결국, 루터와 칼뱅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정체성을 보는 이 불안에서 서로 만난다 안정 심연 사이의 정체성 비애 . / , /회심 사이에 있는 자아의 수수께끼에서 서로 만난다.
인문주의자 칼뱅
그는 철학 공부를 끝마치고 난 후, 그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 대학으로 가기위해 파리 대학을 떠났다. 칼뱅을 성직자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이제 다시 아버지에 의해 “법률”공부로 돌아섰다. 왜냐하면 “법학을 하는 자에게 법학은 부를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를레앙에서 그는 “프랑스 최고의 법학자”였던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강의를 들었다. 오를레앙 교구의 보좌 신부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루터에 반대했다. 칼뱅은 비록 그가 시민법을 공부하기 위해 부르주로 가서 알치아티의 강의를 듣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를레앙의 법학 선생의 편을 든다. 하지만 변화는 생각보다 크다.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강의에서 알치아티의 강의로 옮긴다는 것은 중세적 법 개념에서부터, 로마법을 역사의 한가운데 두고 문헌학으로 고전을 연구하면서 인문주의 방법론에 대한 위치를 설정해 주는 개념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칼뱅에게 오를레앙의 또 다른 의미는 볼마르와의 만남이다. 당시 칼뱅은 교회에 충실한 선생들에 대한 충성과 인문주의 개혁 사이에서 화해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와 우정을 교환한 인물들인 니콜라 뒤슈맹,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코낭 등은 루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칼뱅이 오를레앙에서 그리스어를 배웠던 멜키오르 볼마르는 명백히 루터 사상의 지지자였다. 그는 칼뱅이 파리에서 접촉한 바 있는 사촌 올리베탕의 생각에 가까웠다. 칼뱅이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볼마르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수년 동안 칼뱅은 새로운 개혁 입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선 침묵했다.
칼뱅은 부르주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부친의 임종(1531년 5월 26일)이 그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라르 코뱅은 이미 2년 전에 재정적인 문제로 성당 참사회에 의해 파문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죽었다. 가족은 고인이 교회 장지에 묻힐 수 있도록 성당 책임자들과 비굴한 조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칼뱅은 세속 권세와 영적인 권세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고집스런 처신을 경험해야 했다. 부친이 죽자 칼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고전문학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
론 1533년 여름에 그의 이름이 누아용 교회의 성직록 수혜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학 공부도 독학으로 계속 하고 있었다. 칼뱅은 법학, 특히 교회법 공부를 통해서 신학을 접했다. 아무튼 부친의 죽음은 자유로운 학문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칼뱅의 문학연구의 첫 번째 결실은 1532년 4월에 나타났다. 그것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작품은 “진지한 학생의 썩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 발라, 에라스무스, 뷔데 등이 사용했던 방법을 빌어 그는 그의 독특한 문체나 박식함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개성과 독창성도 나타내 보였다. 썩 좋은 작품은 아니었을지라도 <관용론 주석>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칼뱅은 에라스무스를 뷔데 다음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를 다소간 폄하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교적인 문제들을 주요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칼뱅에게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533년부터다. 그해 만성절 날 새 학년을 시작하는 개학식에서, 칼뱅의 친구인 니콜라 콥은 총장으로서의 강연 대신 팔복에 대한 일종의 설교를 대담하게 선포하였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영감을 받아 그는 종교개혁의 귀중한 몇몇 주제를 그곳에 접근시켰는바 특히 믿음에 의한 칭의를 주장했다. 그것은 참으로 그 당시의 상식을 뛰어 넘은 것이었다. 왕이 없는 틈을 이용해 의회는 이 대학 총장을 기소했다 콥은 외국으로 도망해야 했다 그리고 콥과 같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칼뱅은 그의 친구이자 클레의 주임사제 루이 뒤 티에의 집이 있는 앙굴렘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관용론 주석을 쓴 이 젊은 작가가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콥의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가담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칼뱅이 1533년 만성절의 대학연설문을 작성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주장은, 오랜 동안 확실한 사실로 여겨오다가 그 후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의심에 붙여졌었는데 한때 스트라스부르의 역사가인 장 로트의 연구 덕택으로 새로운 옹호자들을 얻게 된 이 입장은 최근 또다시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회심과 도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 출판된 뒤, 이듬해 파리 대학 총장이 취임할 때까지 칼뱅의 행적은 잠시 모호하다. 아마도 오를레앙-파리-누아용을 오가면서 회심을 경험했으리라.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을 읽고 또 읽었다. 칼뱅이 앙굴렘으로 도망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종교개혁의 대의명분에 가담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1533년 11월 그는 적어도 르페브르 데타플이 실행하고자 노력했던 개혁주의에 가담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칼뱅이 말하는 돌연한 회심subita coversio(시편주석 서문, 1557)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뱅이 르페브르적인 개혁주의에서 솔직한 개혁적 태도로 옮겨간 시기를 1533년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개연성 있는 가설이다. 왜냐하면 1534년 봄, 그는 그가 태어난 도시에 가서 그 때까지 누리고 있었던 교회의 모든 혜택을 다 포기하고 성직자의 신분에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신학 예비과정으로서의 철학, 부친의 의지변화에 따른 법학,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문학을 차례로 공부한 인문주의자 칼뱅은 회심을 경험하고 난 뒤, 교황청의 성직자 신분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연구한다. 그의 첫 번째 신학 작품은 <영혼 수면설 논박>Psychopannychia(1534)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영혼이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영혼들은 깨어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논증해 보이고자 하였다. 그가 이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미사를 반대하는 격문들이 파리와 앙보아즈에 나붙었고, 박해가 예상되자 칼뱅은 1535년 초에 바젤로 황망히 피난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바젤에서다. 그는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1년간의 노력 끝에 그의 주저서가 될 책의 초판을 출판했다(1536년 3월). 라틴어로 된 초판은 “프랑스 왕에게”보내는 변증적인 편지로 시작되고 있으며, 6장—율법(십계명), 신앙(사도신경), 기도(주기도문), 성례(세례와 성찬), 그릇된 성례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으로 된 일종의 신학개요로서 루터의 <소 요리문답>에서 착상을 얻은 구조이다.
<기독교강요>는 출판되자마자, 그 저자를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 선구자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 작품을 손질하고 또 덧붙여 나가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판은 1559년(불어 판은 1560)에 나왔는데 이것은 더 이상 처음의 개요적인 것이 아니었다. 최종판은 4권 80장으로 나뉘어져 신론(창조주시며 세상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관련됨), 성령론(성령과 관련됨,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 안에서 성령의 활동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열매와 관련됨), 그리고 교회론(교회 및 성례와 관련됨), 등의 문제들을 연속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기독교강요>의 편집을 끝마친 후, 칼뱅은 이탈리아의 페라라를 여행한 뒤 조국을 완전히 떠나기 위해 누아용으로 가서 소유하고 있었던 땅들을 처분한 후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전쟁 통에 제네바를 경유해야 했던 그는 . 레만 호의 도시에서 기욤 파렐에게 붙들렸다(1536년 7월). 그는 파렐의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무시무시한 간청”을 듣고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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