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X. 칭의(Justification): 1부

예림의집 2013. 10. 31. 19:47

Chapter X. 칭의(Justification): 1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롬 5:10). 칭의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던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문제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써왔다. 지난 2000년 교회역사를 볼 때, 복음 전파의 사명도 컸지만, 칭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도 쉽지 않았다. 칭의는 복음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종교개혁의 핵심 사안이었고 지금도 그 논쟁이 잦아들지 않는 만큼, 그 이해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본 장에서는 우선 칭의 용어에 오해를 일소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나는 칭의 용어와 개념을 살필 것이며, 칭의를 정의하고 그 특성을 논하고, 칭의의 근거 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와 아울러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를 다루도록 하겠다.

 

I. 죄와 심판의 현실

왜 칭의라는 것이 있는가? 날마다 거룩을 향해 나가는 성화만으로는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나? 물론 칭의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좀 더 신학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그것은 주님이 심판 주로 재림하시는 심판의 날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사실이 아니라면, 칭의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칭의를 논할 필요가 있고, 칭의 자체가 죄인들에게 반가운 복음이 되는 것은 타락의 결과로 다가 올 심판이 허구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살후 2:1-2).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회중이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행 2:37)” 하였을 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죄 사함(38)”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죄에 대한 심판의 공포가 설교를 들은 청중을 사로잡았을 때, 죄 사함 받고 의인이 되는 메시지만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복음이었다. “이 폐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40)”는 메시지는 “이 폐역한 세대”가 다가 올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데 반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사도들의 설교는 늘 다가올 심판에 대한 긴장이 반영된 설교였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심판이 이미(already) 임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명백한 심판의 사건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하신 후 숨을 거두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가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며(51)”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52).” 사도들은 이제 “이 모든 일에 증인들이 된” 것이다(눅 24:48). 그들은 확신에 찬 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 즉 심판이 없음을 외쳤다(롬 8:1).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으심으로(고후 5:21),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복음이다(롬 5:9).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칭의란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으심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우리는 이미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미래의 심판에 대한 현재적 선언이 칭의이다.

그렇다면 칭의는 그 자체가 선포이지 과정이 아니다. 심판대에 섰을 때 의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칭의인데, 그 칭의가 그 순간 사람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의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성도의 칭의는 그 미래적 칭의가 지금 나에게 약속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될 때, 의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선포되는 것이다. 심판이 과정이 아니라 법정적 선언이기에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 것이다.

 

II. “법정적(forensic)”의 의미

“법정적”이란 말은 원래 법의 집행과 관련하여 나온 말이다. 법이 기준이 되어 정한 방법에 의해 법의 충족 여부를 밝히는 의미이다. 법정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드는 예가 법정의 재판과정이다. 재판에서 판사가 피고에 대해 유죄 또는 무죄를 선고할 때, 피고가 판사의 선고에 의해 내면적으로 죄인이나 무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법정에 제시된 증거에 의해 유죄 또는 무죄가 밝혀졌을 때, 판사는 증거에 근거하여 유죄 또는 무죄를 선고한다. 이때 판사의 선고가 피고 안에 증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 피고가 유죄 또는 무죄의 신분이 된 것을 선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정적의 뜻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칭의가 법정적이라고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칭의가 최후의 심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장차 있을 최후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언될 것이 현재적으로 이미 나에게 선포되는 의미에서 법정적이다. 둘째는, 칭의가 법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고 의를 이루셨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불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한 것이 되어 우리는 율법에 대해 의롭다는 의미가 된다. 셋째로 신분상의 변화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칭의로 인해 죄인이 내면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 의인이 되는 것이기에 법정적이다. 로마 가톨릭이 칭의를 과정으로 즉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본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개혁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강조했던 법정적 칭의는 내면적 의인화가 아니라 죄인이 의인이 되는 신분적 변화를 말했다. 현실적으로 칭의를 내적 변화로 보려는 도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법정적 칭의는 신분상의 변화임을 견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로 외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신분상 변화와 밀접한 것으로서 외적으로 의롭다고 고려하거나, 간주하거나, 부르거나, 인정하거나, 입증하는 자체가 법정적 동작이다. 다섯째로 정죄와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접적 근거를 통한 논리라고 할 수 있는데, 정죄란 죄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역시 법정적 동작이다. 성경에서 칭의는 정죄의 대칭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롬 8:33-34). 그것은 같은 법정적 동작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칭의가 법정적 칭의라고 할 때는 위에서 열거한 의미를 갖는다. 칭의란 법정적이기에 칭의이다. 법정적이지 않은 특징을 칭의에서 찾으려 하거나 칭의에 포함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성화의 개념과 혼동하고 있는 경우일 수 있다. 성경에서 칭의 단어들이 어떻게 법정적 의미를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III. 성경에 나오는 칭의 동사

성경에서 칭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동사가 짜다크와 다카이오오이다. 짜다크 동사는 대부분 히필 형태에서 칭의 개념을 가지나(출 23:7, 신 25:1, 욥 27:5, 잠 17:15, 사 5:23, 45:25, 50:8, 53:11), 때로는 피엘 형태(욥 32:2, 33:32, 렙 3:11, 겔 16:51)를 취하기도 한다. 몇 구절을 예로 살펴보면,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 25:1)” 여기에서 “의인을 의롭다 하다”가 법정적 칭의이다. 재판장의 판결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칭의이다. 참고로 같은 문장에서 “정죄하다”도 법정적 개념의 동사이다. 정죄가 악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악인이라고 선언할 뿐이다. 칭의와 정죄가 법정적 개념으로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 여기에서 “악인을 의롭다 하다”가 법정적 칭의이다. “의롭다 하다”가 악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을 의롭다고 여기는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욥 32:2).”“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 함이요”에서 피엘 부정사 형태의 동사에서 법정적 칭의를 볼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게 여긴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의롭게 여긴 것이 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언적인 동작일 뿐이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은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바 대로 갚으시옵소서(왕상 8:22).”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에서 칭의 개념이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에서 정죄의 개념과 대비를 이루며 법정적 의미가 확인된다.

신약에서 상요되는 디카이오오 동사가 사용되는 구체적인 형태와 간조는 다른지라도 법정적 칭의 의미를지니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여기에서 “의롭다 함을 받다”가 미래시제 수동태 형태로 네 말로 인해 네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다는 법정적 개념이다. 구조적으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는 법정적 동사와 대칭을 이룸으로써 법정적 의미가 한층 더 살아난다고 하겠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 7:29)” 이 문장의 본동사는 “의롭다 하다”이다. 직역을 하면, “모든 백성과 세리드이 이 말슴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그드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에서 능동태 “의롭다 하다”가 법정적 칭의 동사이다. 여기에서 목적경이 하나님이라는 점이 부담스런 난제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지 않아서 칭의 동사가 하나님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심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법정적 칭의이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다.”에서 칭의동사가 수동태로 쓰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의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되는 의미이다. 특히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던”이 과거시제인데 반해 믿는 자들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현재시제로 쓰이면서 보다 일반적인 진술로서의 강조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직역을 하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되었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다.” 칭의의 결과로 우리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은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와 대조가 되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원수에서 의인의 신분이 됨이 선언되는 법정적 칭의이다.

칭의 동사는 아니지만 같은 법정적 칭의 개념을 지닌 표현이 있다. 흔히 “의로 간주하다”는 형태의 표현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다시 번역하면, “죄인을 칭의하신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해위가 없어도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한 구절에서 두 가지 형태로 칭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는 치의 동사를 사용하여 “죄인을 치의하시는” 표현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법정적 의미이다. 또 다른 형태의 칭의 동사는 아니지만 “의로 여기다”가 구조상 법정적 칭의 개념이 되는 경우이다. 로마서 4:3, 6, 9, 22,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 등이 같은 구조로 법정적 칭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칭의 동사가 “의롭게 만들다”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없는가? 흔히 제시되는 구절이 고린도전서 6:11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서 세 동사가 과거시제 수동태로 쓰이면서 어떤 동질의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씻김”과 “거룩하게 됨”이 다분히 내면적 변화와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의롭게 됨”도 역시 같은 내면적 변화를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칭의 동사는 신약에서 내면적 상태 개념으로 쓰이지 않는다. 굳이 이 세 동사를 같은 논리의 선상에 놓고 일어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칭의는 언제나 외적 신분을 말할 뿐이다. 로마서 5:19 또한 “의롭게 만들다”를 지지하는 구절로 인용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많은 사람이 “이인이 되다”가 많은 사람이 “죄인 되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과거) 사실처럼, 많은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의인이 될(미래)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의인이 되다”를 내적 상태의 변화로 볼 필요는 없다. 12절 이하에서 대비되는 것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통해 불순종과 순종, 정죄와 칭의, 죽음과 생명이 대비되고 있다. 물론 아담을 통해 죄가 왔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내적 상태(죄성)도 포함한다. 그러나 문맥의 직행은 법정적 차원에서 즉 신분사의 죄인과 의미의 대비이다.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 죄인의 신분이 되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의인이 신분이 되는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의인이 되다”를 상태적 변화로 볼 필요는 없다. 신약에서는 칭의 동사가 “의인이 되다” 또는 “의인을 만들다”의 뜻을 취하지 않는다.

 

IV. 네 가지 칭의 겨우

성경에서 칭의를 그 대상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의 경우는 가상의 경우로서 아담의 칭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은 아담의 칭의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칭의 되었다면 어떤 의미에서 칭의가 성립할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것을 명하셨고, 그에 대한 순종이 행위언약의 성취 조건이었다.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충족된다는 뜻이기에 하나님은 그 언약을 성취시키는 조건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만약 아담이 순종을 완수하여 언약을 성취하였다면, 그 때가 언제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의롭게 여기셨을 것이다. 이때 아담을 칭의하셨다는 말은 아담을 의인으로 만드셨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아담은 원래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의인이 되는 것이 칭의의 전부라면, 아담이 창조되는 순간 하나님은 아담을 치의하시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 칭의의 근거는 행위언약에 의해 설벙되었다. 즉 아담이 순종을 다해 행위언약을 성취시킬 때,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근거이다. 은혜언약 하에 있는 우리와는 다른 근거이다. 아담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세웠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담의 가상의 칭의이다. 굳이 가장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은, 물론 우리는 더 이상 행위언약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지나칠 수 있지만, 아담을 칭의하셨다면 그 칭의의 근거는 우리와 같지 않았다는 점과 칭의는 설정된 근거에 종속한다는 시실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칭의하는 경우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 구절이지만, 욥기 32:2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을 책망하는 이유로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라고 적고 있다. 하나님을 의롭게 해야 하는데 짜다크가 피엘 형태로 쓰이면서 일종의 비교격으로 욥이 부각되는 형태이다. 전제되는 것은 짜다크가 하나님께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짜다크가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간주하거나, 의롭지만 더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 근거에 준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법정적 칭의이다. 누가복음 7:29에서도 마찬가지로 앞서 논의하였지만, 백성들과 세리들이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법정적 개념의 디카이오오 동사의 목적어로 하나님이 나오면서 칭의의 대상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의롭다 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존재이심이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낮 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칭의 개념이 죄인의 경우처럼 의인이 아니었던 자가 의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 일 수 있다. 칭의란 이 전의 신분이 어떠했는지와 상관없이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의롭다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칭의하는 경우이다. 디모데전서 3:16에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시며, “육신으로”와 “영으로”는 기독론적 사역을 크게 두 시대로 나누고 있다. “육신으로”는 인성을 입고 하신 사역 즉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영으로”는 성령으로 하신 사역 즉 부활에서부터 구원의 적용까지 사역을 압축하고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가 치의 되신 사건으로 보고 있다. 성부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은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구속사역을 의롭게 여기신 사건이다. 이때 그리스도를 디카이오오 하셨다는 것은 죄인이 의인이 된다거나 더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의롭게 여기신 법정적 칭의 개념이다. 같은 법정적 의미를 로마서 1:3-4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육과 영의 대조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한 근거 구절로 많이 인용되었으나,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독론적 사역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육신으로”는 성육신에서 죽으심까지 인성을 입고 하신 사역을, “영으로”는 부활과 그 이후의 성령을 통해 하신 사역을 나타낸다. 특히 부활을 기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은 부활 시에 처음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자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인되고 천명되었다는 의미로서 역시 법정적 개념이다.

넷째로 죄인의 칭의이다. 사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바로 죄인의 칭의이며, 구원을 낳는 칭의이다. 죄인 칭의의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4:5로서, 종교개혁을 낳은 차이점이기도 하다. 본 장에서 우리가 집중적으로 논할 칭의가 바로 죄인의 칭의가 되겠다.

성경에서 가상의 경우까지 포함하여 칭의의 네 경우를 찾아보았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칭의는 언제나 법정적 칭의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칭의를 통해 상태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을 의롭다고 부르는 거싱 법정적 칭의이다.

 

V. 칭의와 근거

종교개혁 당시부터 칭의를 “법적 허구”라고 비난하던 일이 있었다. 죄인을 두고 마치 법이 다 충족된 것처럼 의롭다고 부르는 것은 허구이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의롭다고 간주한다고 해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4:5은 하나님이 죄인을 칭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잠언 17:15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증오하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로마서 4:5은 잠언 17:15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죄인을 칭의하시는 것이 자신의 공의를 위배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법적 허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나?

근거 없이 칭의한다면 그것은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고 칭의가 근거를 만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그 대상에게 치으이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칭의이다. 그렇다면 죄인에게 무엇이 칭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가? 마틴 루터는 우리가 외부의 의에 의해 칭의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내면적 의나 행위를 통해 얻은 의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근거가 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칭의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남의 의가 나의 것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스도의 의가 남의 의가 아니라 나의 의가 되는 것이 언약신학 구도 안에서 나오는 의의 전가 개념이다. (의의 전가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아래에서 다루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전가가 어떻게 칭의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해서만 다룬다.)

언약신학에서 의의 전가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전가되고 이 전가된 의가 근거가 되어 칭의가 가능해 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구분되는 동작을 보게 된다. 하나는 믿음의 동작이고 다른 하나는 칭의의 동작이다. 믿음은 연합을 이루고 연합의 결과로 전가가 이루어진다. 고로 칭의의 근거인 전가는 칭의 동작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동작의 결과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연합되어진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 전가로 나의 것이 된 의가 근거가 되어 내가 칭의 된다.

그러나 전가에 의해 칭의의 근거가 만들어진다는 것까지는 논리적으로 수락하겠지만, 전가된 의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허구나 가상이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전가가, 루터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의를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여전히 논리적 허구라는 소리를 피하기 어렵다. 전가가 어떤 논리적 설정이 아니라 사실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사실의 것이 되기 위해서 주입 이론으로 빠져서도 안 된다. 전가가 칭의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언약신학이다.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지고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가가 논리의 힘에 의한 가상적 설정이 아니라 사실인 것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합이 사실적 실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적 실제를 우리는 언약적 실제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언약적 실제임은 칼빈의 신학과 WCF이 제시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칼빈의 언약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WCF도 구원서정의 논의에 앞서 그리스도의 중보개념을 밝히면서 어떻게 언약개념 하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서정의 근간이 되어야함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지적한다면,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한 반발로 우리가 칭의되는 근거가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임을 분명히 해 주었다. 칼빈은 우리가 칭의되는 의가 끝까지 남의 의가 아니라, 언약신학 하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말하며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됨을 밝혀 주었다. 언약신학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이루어 준다. 믿음으로 연합하게 되고, 그 연합이 허구나 가상이 아닌 언약적 실제이기에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의 전가가 사실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은 가상으로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언약적 실제)에 근거하여 칭의되는 것이므로 절대 허구나 가상이 아니다.

칭의는 근거를 만들지 않는다. 사실적 근거가 있기에 칭의 할 수 있다. 근거를 만드는 것이 전가이고, 전가는 연합의 결과이고, 연합은 믿음으로 가능해진다.

 

VI. 그리스도의 의의 구속사적 의미

성도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구원론 논의를 지배하는 방법론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의 구원이 완성되었다. 그 말은 치의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성도의 칭의가 있다. 디모데전서 3:16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향해 법정적 칭의 개념의 디카이오오 동사가 쓰이면서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가 의롭다 여겨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칭의되는 사건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가 의롭지 않았는데 부활을 통해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대로, 법정적 칭의 개념이 쓰이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의롭다 여겨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의롭게 여기는 칭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성도의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칭의의 은총을 완수하신 것이다. 로마서 4:25은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칭의를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씀한다. 우리의 칭의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우 가깝게 연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것이 성도의 칭의를 결정짓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구속사적으로 칭의되심 속에 성도의 칭의의 근거와 결과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것도 성도의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칭의에 어떤 구속사적 완성과 의미가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칭의 사건이 되는지는 언약신학의 관점을 통해 그 설명이 가능하다. 즉 첫 번째 언약의 머리였던 아담과 어떤 대칭적 관계에 있는지를 통해 우리의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언약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담이 충족시켜야 했던 하나님의 법이었다. 그 법은, 하나님의 모든 법의 속성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의를 담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법은 긍정적 요구와 부정적 요구를 동시에 갖는다. 긍정적 요구란 법이 명시하는 조항을 말하고, 부정적 요구란 법을 어길 경우에 오는 형벌을 말한다. 긍정적 요구가 충족되면 법이 지켜진 것이고 그 법이 담보하고 있는 의가 세워지는 것이다. 법의 긍정적 요구가 충족되면 부정적 요구는 발동하지 않는다. 아담의 경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가 긍정적 요구이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부정적 요구에 해당된다. 긍정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순종이었고, 부정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아담의 칭의의 근거는 순종이었다. 아담이 순종을 잘 했더라면, 하나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때에 아담의 순종이 당신의 법(긍정적 요구)을 충족하였다고 인정하셨을 것이다. 그 말은 아담의 순종이 법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의를 세운 것으로 인정된다는 뜻이며, 그에 대해 하나님은 아담을 의롭다 여겼을 것이다. 이것이 앞서 우리가 논했던 아담의 가상의 칭의 사건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가상의 칭의 사건을 통해 아담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순종을 근거로 아담을 의롭다 부르시는 것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칭의는 그 대상을 의롭게 만들지 않으며,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할 뿐이다. 그러나 아담은 법의 긍정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법의 부정적 요구(죽음)가 발동하게 되어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되었다(롬 5:12). 아담은 첫 번째 언약의 대표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법을 충족시키는 일에 실패했다. 이로써 아담을 대신한 다른 대표가 필요하게 되었고 새로운 머리(그리스도)를 대표로 하는 언약이 은혜언약이다. 성경은 새로 오시는 언약의 대표가 정확하게 처음 언약(행위언약)의 대표를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아담이 그리스도에 대해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롬 5:14, 참고. 고전 15:45).

그리스도가 아담의 모형을 따라 오신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성취했어야 하는 모든 의미, 즉 행위언약의 긍정적, 부정적 요구 모두에 대해 적용된다. 흔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대속의 죽음만인 줄로 아는 경우가 있다. 아담이 긍정적 요구를 어긴 결과로 부정적 요구(죽음)가 발동하였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줄로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충족했어야 했던 일 가운데 부정적 요구만 충족시킨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의 의를 반만 충족시킨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분만 아니라, 죽으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율법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갈 4:4, 5: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담보하였던 법에 대해 부정적 요구(죽음)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긍정적 요구(순종)도 충족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세우신 방법은 아담처럼 선악과를 먹지 않는 방법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담이 실패한 계명대신 아담에게 주셨던 행위언약을 담보하는 율법을 주셨다. 중요한 것은 법의 형식(조항)이 아니라 법이 담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이다. 즉 아담에게 주셨던 법이 담보하고 있던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세워져야 하며 이제는 그 의가 율법을 담보하는 형식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의 머리의 관점에서 볼 때, 새 언약의 머리가 하신 일은 결국 아담이 성취했어야 했던 일과 동일한 일이다.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하는 일이 새 언약의 머리가 오셔서 하신 일이다.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머리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하에서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긍정적 요구도 다 충족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의를 세우셨다. 만약 아담을 대신하여 오시는 언약의 대표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만 하셨더라면, 원래 하나님의 법이 담보하였던 의는 아직도 충족되지 않은 것이 된다. 율법이 행위언약을 담보하고 있다는 말은 행위언약의 긍정적 요구(순종)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순종을 통해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요구가 구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도 율법을 순조의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롬 3:20). 율법의 요구는 아직도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 할 일이 남아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그리스도는 율법 하에서 순종(행위)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언약의 머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의를 세운 방법은 아담에게나 그리스도에게나 동일하다. 즉 순종만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요구였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모형을 따라 오셨다는 것이, 언약신학의 구도에서 볼 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긍정적, 부정적 충족 모두를 그리스도가 다 대신 완성하셔야 할 역할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일만 하셨다면, 그것은 앞서 살펴본 논리에 의하며, 아직도 우리가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많은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빚이 너무 커서 이 사람은 스스로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이때 어떤 맘씨 좋은 한 부자가 그 사람의 빚을 전부 갚아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람은 금전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인가? 비록 그 사람의 빚이 없어지긴 하였지만, 그는 현재 무일푼이다. 물론 무일푼이 빚을 지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앞으로 그 사람에게 금전적 문제가 더 이상 없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누가 그의 빚을 대신 갚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금전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부자가 빚뿐만 아니라 평생 쓰고도 남을만한 돈을 주었다면, 비로소 그는 금전적 문제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가 대신 빚을 갚아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 사람은 앞으로 스스로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전과 같이 다시 빚을 지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일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복음을 상실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해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칭의의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는지는 아래에서 계속 농의 할 것이다.) 영생은 죄가 탕감되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획득한데 근거한다. 죄가 없는 자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가 필요하다(칭의는 죄 용서와 의인됨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의 죄 값은 갚아 주시고,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우리보고 충족하라고 남겨두신 것이 아니다. 그런 논리는 마치 우리를 애초 아담의 시점으로 돌려놓은 것이 된다. 긍정적 요구를 어긴 것에 대해서 죄 값은 치러주었지만, 우리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법의 요구(부정적)대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법의 원래의 요구(긍정적)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바로 그 의가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통해 완성하신 구속사적 의이다.

그리스도가 이 의를 단번에 완성하셨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서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단번에(히 9:26) 영원한(히 10:12)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의 구속사역은 반복될 필요가 없는 영원히 유효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신학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통해 완성하신 의 또한 우리를 위해 단법에 이루시고 영원한 의가 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것은 바로 이 단번에-영원한 의가 되시는 데 근거한다. 그의 완성된 중보사역만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는 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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