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제 10강 11월 05일

예림의집 2013. 11. 6. 17:14

 

제 10강 11월 05일

 

믿음(Faith)

 

*구약적 정황

-아만

-믿는다고 하는 동사가 목적격이 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고 목적격을 붙잡는 의미이다.

-언약의 약속들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에 근거한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붙잡고, 맞기고,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신약

-피스튜어, 피스티스

-복음에 대한 초대에 대한 반응

-언약의 성취인 그리스도와 구속사의 모든 것, 즉 새 언약을 붙잡는 의미를 가진다.

-믿음의 의미가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는 의미가 중요하다.

 

*믿음의 성질

①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의 수동성: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시는 것이다.

-나의 동의, 결단이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전인적인 신탁의 의미를 포함하나 믿음의 근본적인 출발은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심으로 인해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주시는 새로운 능력이다.

②믿음의 행사는 나의 동작이 된다.

-믿음의 능동성:

-수동성과 능동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동작의 주체는 나이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중생 되었다면,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냐는 질문은 옳지 않다(에큐메니컬 신학).

-중생의 의미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온 것임으로 그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수반된다.

-믿음을 행사하는 주채는 나의 전 인격이다(이성, 인격, 감정).

*믿음을 전적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경우.

-구원은 내가 얼마만큼 믿느냐에 해당된다는 의미로 믿음을 생각하는 것.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 덜 믿었다.

*믿음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는 경우

-나는 할

-매 경우, 모든 순간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내가 행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에 대한 가늠이 경건과 영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능동적인 동작에 믿음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 자체가 나의 전인격적인 동작이지만 그 동작은 아무런 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기여가 없다. 아무런 공로가 없다.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십시오. 나는 내려놓겠습니다.

*디아 피스테우스, 에크 피스테우스, 에피 피스테이, 디아 피스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아무런 값, 기여, 공로가 없다.

③믿음의 정도

(마 6:30, 개정)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올리고피스토스

-겨자씨 만한 작은 것. 일상에 있어서 비교할 수 있는 최소치

-작은 믿음: 작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부정의 의미가 들어 있다.

-믿음이 거의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하고 인정할 만큼의 어떤 모양이 거의 없다.

-믿음은 그 대상을 붙잡는 일을 하는 것인데, 믿음이 아닌 것은 믿음이라고 해도 그 믿음이 정작 믿음으로서 일을 하지 못함은 믿음의 대상을 붙잡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작은 의미로 평가 되어진 것이다.

-성경에 믿음의 정도에 대한 표현은 나오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믿음의 요소

①지식의 요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성경에 계시된 지식

-계시를 통해서 지식이 전달된다.

-지식을 갖는 기능을 이성이 한다.

-믿음이라고 하는 일에 이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기관이 관여를 한다.

-어거스틴, 안센, 칼뱅, 개혁신학에서 이성을 굉장히 주의 깁게 다룬다.

-이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없고, 중생된 이성이어야 한다.

-이성을 배제하는 믿음은 지식을 배제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계시를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미 들어난(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탈한 또 다른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을 동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롬 10:13,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4, 개정)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개정)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6, 개정)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롬 10:17, 개정)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개혁주의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성의 기능이 오해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②동의의 요소

-믿습니다라고 할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널리 생각되는 부분.

-내가 그 지식에 동의합니다. 그 지식의 내용을 수용합니다.

-아멘.

첫째,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합니다(성경을 통해서).

둘째, 나는 나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셋째,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넷째, 바로 그 구제주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하고, 구원 받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됨을 동의합니다.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해서 그것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작이다.

③신뢰(연합)의 요소

-내 자신을 맡기는 것

-믿음의 완성

-나에게 제시된 구원에 지식에 대해서 내가 확신을 하고, 꽉 붙잡고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

-WCF는 믿음을 설명을 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추상명사로 되어 있지만, 개념일뿐 아니라 믿음을 설명할 때 to accept, receive, unite, hold onto, rest in의 동사(행동)으로 성명하고 있다. 믿음을 동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붙잡는 방법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이 자체가 아무런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공로나 값으로 처주지 않는다. 믿음 속에 어떠한 공로의 개념이 들어가면 안 된다.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만 한다. 믿음 외에 그리스도를 붙잡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일은 공로로, 행위로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을 만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끌어안을 수 없다. 매달릴 수 없다.

-존 머리: 믿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오직 믿음으로이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엡 5:18, 개정)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충만함을 받으라 -> 충만되라(동작, 동사), 받으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다.

-현재형으로 지속된 행동을 말한다.

-계속해서 충만한 상태로 있으라.

-신약 성도가 사는 길이 항상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성령충만이 어떤 도달해야할 고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평범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충만이라는 또 다른 경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갈 5:16, 개정)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개정)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엄청난 오해를 불러오는 구절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선택의 문제로 가져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의 사고에서 이탈한 주석이다.

-두 가지가 대립이 되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지만 선택의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취해도 되는 중립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고 있지도 않고 있다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 마치 중립 상태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닌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의가 아니면 죄이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성령 안에서 동행하다, 성령과 더불어 같이 걷다.

-현재시제로 계속해서 끝나지 말고 그 동작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성령을 따르지 않을 때이다.

-성경의 논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야함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죄라는 논리이다.

-신학지남(5년 전), 창세기 3:1-7의 인식론적 해석 볼 것.

-선택의 입장이 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 길을 계속 가라하셨다. 그 길을 가다가 멈추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

(살전 5:17, 개정)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하라 동사 자체가 현재 명령임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강조하기 위해 쉬지 말고(부사)를 더 쓴 것이다.

-종교적 기도 형식의 이상의 것. 삶의 본질적 의미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성령과 소통을 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성령 충만하며, 동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말씀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시지이다.

-믿음으로로 압축될 수 있다.

-믿음으로 그 자체가 동작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붇잡는 것을 놓지 않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성령으로 충만한 것=쉬지말고 기도하는 것

(롬 14:23, 개정)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니라: 보편적인 진리

-곧 그리스도 없이 한 것, 성령을 따라 하지 아니한 것, 그리스도를 붙잡는 마음 없이 하지 않는 것.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들, 모든 것,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그 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내가 인격적으로 붙잡지 않고 나를 부인하고 그분에게만 매달리는 나의 인격적인 것이 빠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 그리스도를 놓은 것, 성령을 좇지 않는 것이 죄이다.

-죄라는 특정한 것을 특별히 더 해야 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믿음으로) 하는 행위만 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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